모양이 잘 정돈된 기보 하나를 감상하고.
필자는 그럴싸한 궤변에 쉽게 설복당한다. 논리적으로 허술한 모양을 쉽게 찾지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흘러 듣다 보면 언제나 상대방의 의도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논리 정연하다면 당연히 그럴 것이고, 그럴싸한 궤변에도 쉽게 그렇다. 궤변은 습한 장마 속에서 물방울을 손에 쥐게 해줄 듯 한 묘한 힘이 있다. 마치 안개 속이 물 속인 마냥 착각하게 만드는 그럴싸한 모순을 선사한다. 예전부터 그런 모순을 한 번 그럴 듯 하게 적어보고 싶었다. 며 칠 전 생각한 여름 달무리 같은 바둑에 대한 궤변을 지금 몇 자 적어보겠다.
궤변 하나 °
‘ 북쪽에는 백두산이 있고, 남쪽에는 한라산이 있다. ’ 우선 이 당연한 한 문장으로 궤변을 시작해보자. 북한의 북쪽 끝 백두산이 있고, 남한의 남쪽 제주도에 한라산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틀렸다. 무엇이 틀린가? 첫 문장에 적혀 있는 북쪽과 남쪽이라는 개념이 틀렸다. 그 개념으로 위치를 설명하기에는 모호 한 점이 한 둘 아니다. 러시아 거주민 이아무개씨가 본 백두산은 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저 멀리 바다를 건너 호주에 있는 김아무개씨에겐 한라산이 아주 먼 북쪽에 존재한다. 동서남북은 기준을 정함에 따라 그 위치가 매 순간 바뀐다. 절대적인 개념이 아닌 상대적인 개념이다. 지구본을 거꾸로 뒤집어 보자. 한반도가 거꾸로 서있다. 이것이 어색하다면 익숙치 않은 시각을 접했기에 생겨난 ‘고정관념’ 의 보호반응 이라고 해도 되겠다. 고정관념을 약간만 비틀면 새로운 시각이 보인다. 언제나 그렇듯 극과 극은 밀접하게 마주 닿아 있다. 누구는 극과 극이 같다고 하더라.
‘ 한라산은 남쪽에도 북쪽에도 있다. ‘
궤변 둘 °
‘ 다시 합창 합시다 ‘ 이 문장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무슨 소리를 하느냐. 필자에게 따질지도 모르겠다. 잠시 궤변이라고 생각하고 짐짓 모른 척하고 필자의 이야기를 들어 주실수 있는지. 다시 한번 저 문장을 보자. 저 문장은 ‘기러기’ 와 같고 ‘마그마’ 와 같다. 해미가 걷히고 살이 조금씩 눈 속에 비칠까. 다시 한번 저 문장을 보자.
거꾸로 읽어 보자. 반대로 라고 해야 할 지, 거꾸로 라고 말해야 할 지.
‘ 다시합 창합 시다. ’ ‘ 다시 합창 합시다. ’
거꾸로 읽으면 그 문장이 같다. 왜 이렇게 간단한 것을 쉽게 발견하지 못할까. 일반적인 글의 방향에 대한 고정관념 이라 하겠다. 글의 방향성을 사회적 규정이라고 한다면 80년대의 신문. 우상귀에서 좌하귀로 글을 읽어 내려가던 그 신문이 그 반론이 되겠다. 어쨌든 새롭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읽었을 때, 저런 새로운 시각이 발생한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간편한 방법은 사물을 반대로 뒤집어 보는 것이다. 거꾸로 라고 해야 하나. 반대로라고 해야 하나?
궤변 셋 °
아. 드디어 바둑 이야기로 왔다. 서론이 길었다. 이 기보는 10회 LG배 16강 黑 고바야시 고이치 九段 白 구리 七段이 둔 대국이다. 대국자가 어느 위치에서 착점 했는지 모르겠지만 우상귀 흑 돌이 놓여 있음을 추측으로 고바야시 고이치 사범이 바둑판을 기준으로 남쪽에 앉아 있다고 추측 해 볼 수 있다. 10여수가 진행된 상태인데, 고바야시 사범의 흑 1이 아주 무서운 맥이다. 백의 맛을 적절히 추궁하고 흑 세력을 만드는 멋진 수이다. 흑1은 쉽게 찾을 수 있는 수가 아니다. 프로의 감각이라면 어떨지.
그런데 이 기보 어디서 보지 않았는가? 글이 구체적이면 교훈적으로 된다는데 지금 필자 글이 그 꼴이 될지도 모르겠다. 글을 시작하면서 보여드린 기보와 같은 기보이다. 단지 10여수를 진행한 실전도가 눈앞에 있다. 단지 위 아래를 바꾸어 놓은 뒤집은 거꾸로 바둑판이다. 다시 말하면 고바야시 사범 기준의 바둑판이다. 이 대국 두면서 고바야시 사범은 자신의 기보를 인쇄하여 거꾸로 보고 자주 장고를 했다고 한다.
혹시 흑1이 기보를 뒤집어 ? 글 처음에 나오는 구리 사범의 시각에서 - 보면 생각할 수 있는 그 한 점이 아닐까?
같은 돌이 놓여진 바둑판인데, 대국 몇 시간동안 눈에 익숙해졌다고, 네 바둑판이 존재하고 내 바둑판이 존재한다. 그 바둑판은 - 하물며 돌의 약간의 흐트러짐 까지도 - 같은데 ‘모두 합창 합시다.’ 와 같이 기묘하게 앞뒤가 다르다. 네 상변이 내 하변이고, 네 하변이 내 상변이니. 필자의 눈이든 누군가의 눈이든 모두 상대적인 개념에 잡혀 있는 것이다. 바둑판은 하나인데, 시각이 두개란 점이 당연한 듯 기이하다.
바둑판을 뒤집고 네 시각에서 보면 여러 장면이 보인다. 이미 고정관념이 깨진 새로운 바둑판이기 때문이다. 바둑의 대세점을 찾는 것도 바둑판을 뒤집으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네 시각에서 두고 싶은 수가 보이고 네 의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바둑판에는 절대적인 상변과 하변, 우변과 좌변이 없다. 모두 상대적인 동서남북이다. 기준에서의 내 바둑판이고 네 바둑판이다. 익숙할 뿐 ‘다시 합창 합시다.’ 같은 원리다.
만약, 다른 프로 사범님께 물었을 때, 뒤집은 기보를 보여주지 않고 흑1을 당연한 수로 집어낸다면 필자는 할 말없다. 궤변에 소질이 없으니 속 시원하게 하나 더 밝혀둔다. 필자도 바둑이 안 풀린다고 느낄 때, 이렇게 상대방의 시점에서 바둑을 바라 본 적은 없다. 다만 어제 내가 둔 바둑이 상대방이 거꾸로 복기할 때, 그것을 보면서 ‘ 이게 내가 둔 바둑이었나.’ 라고 몇 년 전 일처럼 멍하게 쳐다봤을 때, 내 바둑판과 네 바둑판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한번 거꾸로 바둑판을 보는 것은 어떨지. |
첫댓글 어려워서 이해가 잘 안되지만 좋은 글입니다. <- 궤변 넷.. ;;
미학님..아무래도 본문을 안읽은거 아니에욧? (췟...나도뭐..-_-;;;
시야를 넓이라는 말이신가여..흠..;;
외운 기보도 뒤집으면 복기 못할 것 같은데요.. 자신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