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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1 전북지방철우회 운영회 개최
전북지방철우회 운영회가 22명의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북지방철도회관에서 단합과 친목을 다지고 현안사항 토의를 진행했다.
김병철 철우회장은 운영회에서 참석못한 회원님들의 동정을 이야기했으며, 47년전 1977년11월11일 익산역화약열차 폭팔사고 발생 당시 희생된 철도영령들에 대한 묵염이 있었다.
김병철회장님의 열정어린 노고에 힘입어 사단법인 익산철우회는 매월 10일 운영회가 열리고 있으나, 금월달은 10일이 일요일이라 11일 철우회운영회가 열렸다.
회의 시작전 철우회원들의 기분을 돋구기 위해 이존구선배님께서는 악보도 보지않고 노래 두곡을 열창 했지요.
이존구선배님은 지금도 노인복지관 노래교실 동아리 활동을 하고 계시며 1935년으로 한국나이로 90세이시다.
철도선후배님들의 삶의 뒤를 돌아보니 "인생은 일장춘몽이라 하룻밤 꿈같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흐르는 세월따라 잊혀진 그얼굴들이 왜 이렇게 다시 떠오르나!
청춘은 감쪽같이 지나가 옛시절이 그리워라."
어느 시인의 말처럼 추억이란 잊어버리려 해도 잊을 수 없어 평생토록 꺼내 보고 또, 꺼내 보는 마음속의 일기장이며, 추억은 지나간 그리움의 시간들이기에 추억을 더듬어 어김없이 이달에도 추억을 세기며 반가운 시간을 갖었습니다.
운영회를 마치고 이리공고 후문에 있는 황태 코다리에서 오리주물럭으로 점심식사를 하였으며 다들 맛있게 먹으면서 선후배간 담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옛직장 철도 선후배들 만나 추억 나누고 식사하면 되지요.
깊게 생각 마시고 매달 10일 운영회날 나오셔서 추억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리 그리하다가 한세상 흘러가는것이 인생입디다.
인생무상 화무십일홍 그려려니 살면 되지요.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되찾을 수 없는게 세월이니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순간순간을 후회 없이 잘 살아야 하지요.
한평생의 추억이 깃든 두갈래 철길에서 세월이 흘러갔지요.
세월도 가고 인생도 가고 덧없는 인생사 추억이 그립소이다.
세월의 노를 저으며 현업을 은퇴하고 철도를 퇴직한 선후배님들은 철도를 천직으로 삼아 여기까지 오신 것을 감사히 생각하시고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빌며,
세월의 여로에서 한평생 철도에서 청춘을 불살랐던 선배님과 후배님께서는 철도를 따뜻한 어머님의 고향으로 간직하시고, 건강100세 시대에 더욱 더 건강관리 잘하여 즐겁고 행복한 나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오늘은 익산역폭발사고 47주기이다.
47년전 1977년11월11일 21시15분 익산역폭발사고로 숨진 동료직원들을 추모하여 묵념을 올리다.
☞철도직원희생자명단 16명
공인배 조진구 엄상호 한인석
방순규 한유상 김형옥 임성춘
최평식 박재술 임사견 최복수
강태호 이경세 김영덕 임복동
익산역폭발사고 47주기 1977.11.11의 회상
1977.11.11 21:15 익산시 일원은 이리역 폭발사고로 인해 생지옥을 연상할 정도로 아수라장이 되었었다.
폭발당시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에 처가에 들러 별채 방에서 아내와 이야기하며 누워 있는데 심한 폭팔음이 울리고 있었지요.
내가 느끼기에는 어디 군부대에서 폭발물이 터졌나보다 생각했으나, 오늘 출근시간이 저녁 10:30이므로 서둘어 시내뻐스로 익산역뻐쓰터니널에 도착하니 시가지는 온통 유리조각으로 뒤덮여 전쟁터를 방불하고 있었지요.
나와 같이 철도에 부임한 입사동기생 엄상호친구는 기관차에 올라 폭발물의 위력도 모르고 조사석 의자에 앉아 불이난 곳을 바라보다가 폭풍으로 사망, 유복자를 남겨두고 이때 한 많은 세상을 떠가갔지요. 엄상호친구의 아버지는 화병으로 누워게시다 돌아가시고............폭발의 순간 최재산입사동기생은 대전에서 출발하여 익산역에 도착한 동차역차 도착 점검중 폭발음이 울리는 순간 맨발로 뛰어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요. 이날 저녁은 몹시도 싸늘한 날씨였으나 추위도 잊은채 조동화는 엄상호친구의 주검을 여러명의 승무원과 같이 시신이 있는 장소 기관차사무소 목욕탕으로 옮겼지요.
구비 구비 인생구비 47년전 익산역 폭발사고를 회상하며 추억 해 보았읍니다.
☛폭팔사고 원인
호송원 신무일씨는 수사과정에서 “인천을 출발해 이리까지 오는데도 무려 36시간이나 걸렸고, 이리역에 도착해서도 화차배정을 받지 못해 20시간 동안 역구내에 대기하고 있어 화가 나서 술을 마셨다”고 진술했다.
사고가 일어나기 이틀 전인 11월 9일 오후 9시 43분, 한국화약주식회사(현 한화)가 만든 다이너마이트 914상자(22t)와 초산암모늄 200상자(5t), 초산암모늄 폭약 100상자(2t), 뇌관 36상자(1t) 등을 실은 화물차가 인천역을 출발하여 광주로 향하였다.
인천을 출발한 화물열차는 11/10 23:31분 이리역에 도착 20시간을 익산역 구내에서 대기하다가 폭팔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사고를 낸 신무일은 얼마나 지루했겠는가.
한국화약주식회사의 호송원 신무일 씨는 화약류 등의 위험물은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통과시켜야 하는 원칙을 무시하고 수송을 늦추고 있는 이리역 측에 항의를 제기했으나 묵살되자 이리역 앞 식당에서 음주를 한 후 화약열차에 들어갔다. 그러나 화물열차 속이 어둡자 논산역에서 구입했다는 양초에 불을 붙여 화약상자에 세워 놓은 뒤 침낭 속에 몸을 묻고 잠에 빠져 들었는데 미쳐 끄지 않은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어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이리역폭발사고추모탑 47주기 추모행사 열리다.
한국철도공사 전북본부(본부장 윤재훈)주관으로 2024/11/11 익산역에 위치한 이리역 폭발사고 추모탑에서 유족회 회원들과 전북본부 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묵염
-유족가족 및 철도직원 소개
-추모사
-헌화 및 참배
-오찬
이리역 폭발사고 47주기 추모행사를 시행했다.
이번 행사는 이리역 폭발사고 유족회장을 포함한 회원과 전북본부장, 처장, 익산역장 등 철도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리역 폭발사고 희생자에 대한 헌화와 참배로 희생자의 넋을 기렸다.
윤재훈 전북본부장은 추모사에서 “아픈 역사로 남아있는 이리역 폭발사고로 희생되신 분들과 유가족분들의 슬픔을 잊지 않겠다”며 애도의 마음을 전하고 “사고현장을 수습하기 위해 현장으로 뛰어갔던 분들과 순직하신 철도 선배님들의 숭고한 뜻을 이어 받아 더 안전한 철도를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철도 전북본부는 추모 47주기를 맞아 익산역 구내에 있는 추모탑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고 국화꽃을 비치했으며, 유족회원들과 전북본부 직원들이 오찬 등을 함께하며 유가족을 위로했다.
☞이리역 폭발사고의 원인과 경과, 그리고 교훈.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 올림픽 출전권을 다투는 한국과 이란 축구대표팀간의 경기를 보고 있던 대다수 국민들은 TV 화면을 흘러가는 자막에 순간,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시간, 1970년대를 풍미한 22살의 인기절정 가수 하춘하 씨는 이주일 씨와 함께 공연 중이던 무너진 이리역 부근 삼남극장의 담벽을 타넘고 있었다. 그들은 그 순간, 전쟁이 난 줄 알았다. 폭발음 이후, 이리역 근방에는 피투성이의 환자들이 즐비했고, 거리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불과 몇 분 전만 하더라도 500여명의 관객 앞에서 오프닝으로 히트곡을 10여분 부르고 다음 공연을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 분장실로 들어간 하씨였다. 11월의 쌀쌀한 날씨에 하씨는 난로를 쬐고 있었고, 전속 사회자였던 이주일씨는 무대에 나가기 위해 거울을 보며 나비넥타이를 만지고 있었다. 그는 “뭔가 보여주겠습니다!”라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그려보였다. 그 순간,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극장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초대형 폭발음은 15초 간격으로 세 번이나 이어졌고, 현장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폭발음이 들리더니 순간적으로 전기가 나가고, 벽이 무너지고 유리파편이 튀는 등 역 주변의 집은 완파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세워 놓은 차들도 뭉그려지긴 마찬가지였다. 집이 무너진 사람들은 흙더미속에 갇혀 구조대원들의 도움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리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 이내의 가옥 등 건물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반경 1킬로미터 내의 가옥은 반파, 반경 4킬로미터 이내의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가나갔다. 반경 8 킬로미터 이내에는 유리창까지 파손되었다. 판자집이 밀집해 있던 모현동의 경우에는 60가구의 부락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정도였다.
(화약열차가 서 있던 4번선 일대는 지름 30여 미터에 5층 건물 높이로 패어 흡사 분화구인양 사고발생 12시간이 지난 후에도 열기와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종잇장처럼 찌그러진 열차와 휘어진 철로가 무참하게 나뒹굴었다. 이리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 이내의 가옥 등 건물은 완파되었고, 반경 1킬로미터 이내의 가옥은 반파, 반경 4킬로미터 이내의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갔으며 반경 8킬로미터 이내의 유리창까지 파손됐다. 특히, 서민 주거 밀집지역인 창인동의 경우 거의 쑥대밭이 되었다. 판자집이 밀집해 있던 모현동의 경우도 60가구의 부락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정도였다. 모든 피해는 당시 폭발 위력과 후폭풍에 의한 것이었다.) (참고: 『위험관리 100호 특집 大韓民國災難47年』)
그 당시 이리역 주변의 모현동은 마살매 부락이라고 불렸는데, 모현동과 창인동 지역에는 소매치기도 많았고, 노동자와 영세민이 많이 사는 동네였으며 윤락가도 있었다. 전부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리역 건물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천정과 벽이 무너져 내렸으며 객화차 사무소와 보선사무소는 기둥과 뼈대만 남고, 역사 구내에 있던 객화차차량 117량이 파괴되거나 탈선해 넘어졌고, 선로는 휘어지고 모두 1천6백50미터가 파손됐다. 모든 피해는 당시 폭발 위력과 후폭풍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폭발력이 얼마나 셌던지 현장에서 700미터 떨어진 곳에까지 화차 상판이 날아올 정도였다.
사고 후 최종 집계된 자료를 살펴보면, 사망이 59명, 사상자가 1,400명, 재산피해액이 61억원, 이재민이 7,500여명, 건물피해가 9,539동에서 발생했다. 이재민 수는 1천6백74세대 7천8백73명에 달했다. 사망자 중에는 주민들 외에도 근무 중이던 철도 공무원들이 16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피해규모는 우리나라 폭발사고 중 가장 큰 규모였다. 한국전쟁 말고 폭발사고로는 당시까지 10명이상의 사망자를 낸 사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망자만 59명이었으니 엄청난 사고였음에 틀림없다. 이후로는 각종 폭발이나 화재, 붕괴 등 각종 안전사고로 수십 명에서 100명 이상에까지 이르는 사망자를 내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사상 최대의 참사였다.
당시 이리시는 인구 13만의 조용한 도시였다. 이 소도시는 폭발음과 함께 한순간 암흑과 공포,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폭발의 진원지는 인천에 있던 한국화약에서 민수용 화약 24.810톤을 싣고 광주로 가기 위해 하행선에 대기 중이던 대전기관차사무소 소속 제1052 화물 열차가 이리역 구내 입환(入換) 4번선 철로에서 폭발하면서 벌어진 것이었다. 이 열차는 영등포역에서 하룻밤을 대기한 뒤 10일 아침 9시 26분 다시 영등포를 출발, 이리역에 도착했다. 이리역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31분이었으며, 목적지인 광주로 출발할 예정으로 사고 지점인 4번 입환 대기선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열차에는 다이너마이트 1천139상자, 초산 암모니아 200개, 초육폭약 100상자(2톤), 도화선 50개(1톤) 등 도합 30.28톤이 적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초대형 사고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어처구니없게도 역구내에 정차 중이던 화약열차가 호송원의 부주의로 인한 것이었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그날 이리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당시 수사를 맡았던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화약공업주식회사(현재의 한화)의 호송원 신무일(당시 36)씨가 술을 마시고 화차 속에서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잠든 사이 불이 마분지를 타고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대폭발로 이어졌다고 한다. 호송원 신무일씨는 수사과정에서 “인천을 출발해 이리까지 오는데도 무려 36시간이나 걸렸고, 이리역에 도착해서도 화차배정을 받지 못해 하루 동안 역구내에 대기하고 있어 화가 나서 술을 마셨다”고 진술했다. 호송원 신무일 씨는 화약류의 직송원칙을 무시한 채 수송을 지연시키고 있는 이리역 측에 항의를 했으나 묵살되고 말았다고 진술했다. 화차 배정을 받지 못해 하루를 더 기다려야 했고, 화가 나 술을 마신 채 촛불을 켜고 잠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속내를 헤아리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사고가 일어나기 위한 조건들이 서서히 형성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신씨가 잠든 사이 양초로 인해 불이 붙은 침낭과 화약상자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15초 간격으로 세 차례의 굉음과 함께 천지를 진동시켰다. 술을 마신 신씨는 화재가 나자 진화에 실패하고 도주했다가 붙잡혔다. 그는 당시 검은색 점퍼 차림이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
변방 새(塞), 늙은이 옹(翁), ‘새옹’이라함은 ‘변방에 사는 노인’이라는 뜻이고, 어조사 지(之),말 마(馬), ‘지마’란 ‘~의 말“이란 뜻이다. 따라서 ’새옹지마‘란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이란 뜻으로 ”인간의 일은 흉한 일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좋은 일이 나쁜 일도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옛날 한(漢)민족은 중국 북방의 이민족을 오랑캐 호(胡)라 하여 크게 두려워했다. 북방 변방에 점을 잘 치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그 노인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 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노인에게 저마다 위로의 말을 했다. 그런데 노인은 태연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아오?”
과연 몇달이 지나자 잃었던 말이 오랑캐 땅의 준마(駿馬) 한 마리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웃 사람들이 찾아와 축하의 인사를 하니, 노인은 “이게 화(禍)가 될지 누가 아오?”
라고 말하면서 조금도 좋아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의 아들은 말타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데리고 온 그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발목뼈를 부러뜨렸다. 절름발이가 된 아들을 가엽게 생각한 동네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하자, 노인은 “아니오. 괜찮소이다. 이런 일이 복(福)이 될지 누가 아오?”
하고 태연히 대답했다.
일년 후,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마을의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나가 십중팔구는 전사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불구라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 무사했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일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많아 앞 일을 내다보기가 어렵다.
누구나 한 세상 희비(喜悲)가 교차되면서 인생을 살아나간다.
또 다른 희비교차(喜悲交叉)의 이야기가 있다.
옛날 송나라에서 적선(積善)을 많이 한 집에 검은 소가 흰송아지를 거듭하여 낳는 길상사(吉祥事)가 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와 아들이 차례로 장님이 되는 불행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뒤에 초나라가 쳐들어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큰 환란을 당했지만, 이 아버지와 아들은 장님이었기 때문에 생명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나자 눈이 도로 밝아졌다고 한다.
“화(禍)와 복(福)은 새끼 꼬인다”는 말이 있다. 길한 것과 흉한 것은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인간사인 것이다.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복권에 당첨된 사람 중 7할 가까이가 당첨 전보다 더욱 불행해졌다고 한다. 땀흘려 번돈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일확천금(一攫千金)한 돈이기 때문이다. 횡재(橫財:뜻밖의 재물)한 돈이 횡재(橫災:뜻밖의 재난)를 불러온 것이다.
초승달이 만월이 되고, 만월이 그믐달이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다. 보름달 높히 떳다고 뽐내지 말고 그믐달 되었다고 서러워할 필요가 없다.
달도 차면 기울고, 그믐달도 날이 가면 보름달이 되는 법이다. 인간만사는 새옹지마이다. 그러니 조그만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긴 안목으로 인생을 여유롭게 살아가라고 새옹지마가 암시하고 있다.
인생은 두 번은 살지 못한다..
누가 그럽디다
인생을 나이별로
구분을 해보면..
10대 때는,
부모님이 가는 곳은 무조건 좋아라
따라 나섰던 나이..
인생은 신기했습니다
20대 때는,
친구들과 함께라면 무엇을 하던
어디를 가던 그냥 좋았던 나이..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흠모하는
연보랏빛 마음 인생은 무지개였습니다
30대 때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행선지를 묻지 않았던 나이..
인생은 데이트였습니다
40대 때는,
어디 한번 가려면 애들 챙겨야 하고
이것저것 준비로 걸리적거리는 게 많지만
꼭 한번 가보고 말겠다고 다짐했던 나이..
인생은 해외여행을 꿈꾸는 것 같습니다
50대 때는,
종착역이 얼마나 남았나
놓고 내리는 물건 없나 이것저것
살피는 나이..
인생은 가차여행 같습니다
60대 때는,
어딜 가도 유서깊은 역사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나이..
인생은 고적답사 여행 같습니다
70대 때는,
나이, 학벌, 재력, 외모 등
아무것도 상관없이
어릴적 동무를 만나면 무조건
반가운 나이..
인생은 수학여행입니다.
80대 때는,
이때는 누굴 찿아 나서기 보다는
언제쯤 누가 찿아올까?
기다려지는 나이..
인생은 추억 여행입니다.
드문나이 90대 때는,
지금 누굴 기다리십니까? 아니면
어딜 가시려 합니까?
아무도 오지 않고 갈 데도 없는 나이..
인생은 시간 여행입니다
인생이란,
가는 승차권은 있어도
오는 승차권이 없으니 한장만
손에 쥐고 떠나는
단 한번 뿐인 여행입니다.
인생은 되돌아오는 길이 없습니다.
인생은 다시 라는 말이 없습니다.
소풍(逍風)이라는 단어(單語)가 아주 정겹게 느껴지는 하루 어느 시인(詩人)의 시(詩)귀처럼 나 소풍 끝내고 돌아가리라! 우리 인생 삶이 별겁니까? 돈 좋아하다가, 사랑 좋아 하다가, 인생 끝 장면(場面)은 그렇게 끝이 난다니까요!!..
<詩庭 박태훈의 해학이 있는 아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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