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최근에 칼에 관한 책을 저술하여 출간한 분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께서 쓰신 일종의 컬럼 입니다. 물론 그 분의 사견입니다.
그 분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다는 말은 아니고 일본 검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검도을 수련하는 한국인으로서, 한 번쯤 읽어 볼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올립니다.
사심없이 올린 글이니, 오해없이 편안하게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많은 훌룡한 인품을 지닌 일본인 선생님들도 계시다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칼과 무사도(武士道)
孤竹, 2004년 1월 1일
1. 일본도 한자루에 얽힌 이야기
일본에서는 과거부터 도검이 많이 제작되기도 했지만 워낙 보전에도 정성을 쏟은 덕분에 100년 넘은 도검도 흔한 편입니다. 아래 사진의 도검도 100년이 조금 넘은 일본도인데 일본 후쿠오카(福岡) 인근의 쿠시다(櫛田) 신사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입니다. 이 칼은 1800년대 말 일본의 우익단체인 겐요샤(玄洋社)의 일원이었던 토우 카츠아키(藤勝顯)가 사용하던 것입니다. 칼의 전체 길이는 약 120cm에 달하며, 봉납(捧納)이 이루어진 때로 부터 이미 백여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녹슨 곳 하나 없고 여전히 예리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칼집과 칼자루는 시라사야로 되어있는데 이는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칼의 소장자였던 토우 카츠아키(藤勝顯)가 이 칼에 얽힌 사건을 기념하고 칼날을 잘 보존하기 위하여 원래의 장식을 시라사야로 대체한 것입니다. 이 시라사야 칼집의 표면에는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찔렀다(一瞬電光刺老狐)”라는 글이 적혀있습니다.
토우 카츠아키(藤勝顯)라는 자는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왕후(明聖王后)를 시해한 48명의 일본 낭인(浪人) 중의 한명입니다. 그는 명성왕후를 두번째로 베어 마지막 숨을 끊었노라고 스스로 자랑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들 낭인은 숨이 끊어진 명성왕후를 돌아가면서 능욕하기까지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토우 카츠아키(藤勝顯)가 속하였던 현양사는 히라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 등이 1879년에 설립한 고요샤(向陽社)의 후신이며 존황순충(尊王殉忠)과 대륙 진출을 목표로 설립된 우익단체입니다. 이들 현양사나 또다른 우익 단체인 흑룡회에 참여한 낭인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불량배나 폭도가 아닙니다. 이들은 명치 유신 이후 대부분의 특권을 상실한 사무라이들이었으며 특히 중앙 권력에서 소외된 비웅번(非雄蕃) 지역의 사무라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야망을 실현하고자 대륙 침략의 첨병 역활을 한 것입니다.
시정의 무뢰배(無賴輩)도 아니고 일정 수준의 학식과 교양을 지녔다는 한 나라의 사족(士族) 출신들이 다른 나라의 국모(國母)를 시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능욕(凌辱)하고 불에 태우기 까지 하였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근세 아시아의 대부분을 병화로 몰아 넣고 잔혹한 전쟁 범죄를 주도했던 일본인들은 대부분이 학식과 교양을 갖춘 사무라이 계급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검과 검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 일본 경찰은 2003년 12월 19일 ‘국적정벌대(國賊征伐隊)’ 혹은 ‘건국의용군(建國義勇軍)’ 등을 자처하며 조총련계 신용조합 건물에 총격을 가하고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외무성 심의관의 자택에 폭발물을 설치한 범인들을 체포하였습니다. 체포된 범인은 <일본도를 사랑하는 모임>의 회장 무라카미 이치로(村上一郞·54)와 그 단체의 회원들이었는데 이들은 직접 일본도 잡지를 발행할 정도의 일본도 애호가들이었고 사찰의 주지, 치과의사, 회사원 등 중산층 이상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듯 일본에서는 역사적으로 일본도로 상징되는 사무라이 정신과 극우적인 폭력성간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었으며 이들의 폭력성은 일본인들을 포함하여 수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아픔을 주었습니다.
일제의 통치를 겪은 우리나라에서도 광복 초기에 검도계를 이끈 사람들중에는 일제의 고등경찰 출신들이 많았고 박정희(朴正熙), 김종필(金鍾泌)등 5.16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들중 상당수는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에 매료된 사람들이었고 검과 검도를 통하여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을 체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일본도와 검도는 한국인에게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에 대한 동경과 관심을 유도하는 중요한 매개체(媒介體)가 되고 있습니다. 검(劍)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는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에 대해 막연한 환상과 동경심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으며, 칼과 검술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점차 일본 문화와 사무라이 정신에 대한 관심으로 전이(轉移)되곤 합니다. 저는 올바른 한국의 도검(刀劍) 문화, 검술(劍術)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무라이 정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사무라이의 기원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에서 수용한 외래문화를 자체적으로 소화하기 시작한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8년)가 끝나갈 무렵이면 일본에서는 율령제(律令制)가 무너지고 지방에 파견된 행정관인 코쿠시(國司)들과 지방의 유력 농민들 간에 토지를 둘러싼 무력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황무지 개척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지방의 유력 농민들은 코쿠시(國司)의 수탈에 대항하기 위하여 스스로 무장을 갖추고 지방의 유력 호족을 중심으로 단결하게 됩니다. 이들 신흥 무장 세력은 일단 무력을 갖추자 무장하지 않은 농민들을 무시무시한 폭력으로 지배하고 필요한 경우 무차별적인 살육을 감행하게 됩니다. 사무라이의 숫자가 증가하고 각 무사단 간에 토지를 둘러싼 무력 충돌이 발생하자 이들은 세(勢)를 보다 결집시킬 필요성에서 유력 귀족을 중심으로 큰 규모의 무사단(武士團)을 이루게 됩니다.
중앙의 귀족들은 이들 지방 무장세력의 힘을 이용할 목적으로 교토(京都)에 상경 시켜서 자신들의 호위를 맡게 하였는데 이 때 이들이 맡은 임무의 성격에서 사무라이(侍) 혹은 부시(武士)라는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1156년 호켄(保元)의 난 이후 일련의 전쟁 속에서 사무라이는 점차 실질적인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카마쿠라(鎌倉)에 막부를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사무라이 계급에 의한 통치 시대가 열립니다. 이후 1868년 보신(保辰)전쟁으로 에도(江戶) 막부가 완전히 몰락하기까지의 676년간 일본은 사무라이 계급이 지배하였으며 사무라이의 정신은 일본 문화의 곳곳에 깊숙히 자리잡게 됩니다.
전쟁이 사라지고 더 이상 무예가 필요없게 되버린 에도시대의 사무라이들은 전사(戰士)라기 보다는 막부(幕府)나 번(藩)의 행정관료에 가까웠고 유교의 영향을 받아 문무를 겸비하고 검약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미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들은 큰칼을 차고 다니며 죄지은 평민을 그자리에서 참(斬)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는 전사(戰士) 지배계층이었습니다.
명치 유신으로 사무라이의 특권이 모두 사라지고 공공 장소에서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이 금지되자 이들은 대륙 진출과 대동아 전쟁이라는 새로운 기회 속에서 자신들의 무사적인 기질을 발휘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인 자신들은 물론 인근 국가의 국민들에게 크나큰 아품을 남겼습니다.
3. 사무라이 정신
무장한 폭도들간의 단순한 의리 정도로 출발한 사무라이 정신은 신도(神道), 불교(佛敎), 유교(儒敎)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세련된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그 외양에 관계 없이 사무라이 정신의 본질은 항상 변함이 없었으며 그 본질이란 곧 "은원(恩怨)은 반드시 갚는다는 복합적인 의미의 의리(義理)와 자신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결연한 태도"에 있습니다.
주군(主君)을 위하여 전투를 수행하고 그 대가로 은급(恩給)을 받아 생활하는 사무라이에게 있어서 은급(恩給)을 하사하는 주군(主君)에 대한 의리(義理)는 곧 사회적 존립 근거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과 자신의 주군에 대한 모욕에 대해서 반드시 복수하는 것 또한 또다른 형태의 의리로서 중요시 됩니다. 이러한 의리 의식은 현재까지도 일본인 고유의 정신적인 특성으로 살아있습니다.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생활하는 자세는 사무라이 정신의 또다른 핵심입니다. 헤로도투스가 지적하였듯이 전투에 임한 전사(戰士)는 항상 상대방을 죽이고 싶지만 자기는 죽기 싫다는 생각 때문에 고통받게 됩니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여야만 무사로서의 자기 가치를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에 자기 몸조차 사르는 광폭(狂暴)함을 미덕으로 삼고, 불교의 윤회(輪廻) 사상과 선(禪)의 힘을 빌려 스스로 죽음에 초연해지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할복(切腹―せっぷく、はらきり은 죽음을 기꺼히 받아들이는 사무라이의 정신을 극명히 드러내 보여주는 행위로서 언제나 칭송 받았습니다.
이상의 두가지 내용을 본질로 하는 일본 사무라이 정신을 가장 분명하게 확인시켜주는 것은, 일본인들 스스로가 사무라이 정신의 표상이라고 여기는 다음의 두가지 사건입니다. 그 하나는 47 인의 낭인(浪人) 사건인데 이는 우리나라의 춘향전 만큼이나 대중적인 인기가 높아서 판본도 다양하고 1740년대부터 주신구라(忠信藏) 라는 이름의 인기있는 가부키(歌舞伎) 주제가 되었으며 현재도 계속 영화화되고 있습니다.(주신구라(忠信藏), 최관 역, 민음사, 2001년) 1701년 하리마 아코오(赤穗)의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淺野長矩)는 조정 대신 기라 요시나카(吉良義央)에게 모욕을 당하고 칼을 빼어들었다가 쇼군의 명령으로 할복자살을 합니다. 이로 인해 영지를 잃고 은거생활을 하던 나가노리의 가신 47인은 2년 뒤 기라 요시나카의 집을 습격하여 요시나카와 그의 가솔들을 참살한 뒤 쇼군의 명으로 집단 할복 자살을 합니다. 또 다른 사건인 나가사키(長崎) 사건은 무사들간의 사소한 시비가 발단이 되어 상호간에 폭력 사태가 발생하고 결국 12인의 사무라이가 상대의 저택을 습격하여 주인과 저택안의 남녀노소 모두를 참살한 후 12명 모두 집단 할복자살을 한 사건입니다.
<가부키(歌舞伎) 주신구라(忠信藏)>
<서진 룸사롱 사건의 범인들>
1986년도 8월 16일 서울목포파(진석이파) 조직폭력배 10명이 강남구 역삼동 서진 룸사롱에서 술을 마시던 상대 조직원 4명을 일본도와 생선회칼로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이 두 사건은 우리나라의 시각에서 볼 때 1986년의 서진 룸사롱 사건과 비슷한 조직 폭력배간의 잔혹한 보복극에 불과하며 게다가 여자와 어린아이 까지 참살한 것은 도저히 우리의 윤리의식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잔학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7인의 낭인과 나가사키의 12인의 무사는 주군에 대한 충성과 원수에 대한 보복에 충실했고 스스로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는 이유로 일본인들 사이에서 지금까지도 일본 사무라이 정신의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무라이 정신은 에도시대까지만 해도 무력을 독점한 사족 계층만의 정신적인 규범이었습니다 하지만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사무라이 계급이 사라지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가 탄생하자 천황은 전국민에게 사무라이 정신을 강요하였습니다. 1882년에 명치 천황은 <군인칙유(軍人勅諭)>에서 "의(義)는 산악(山岳)보다 무거우며, 죽음은 깃털보다 가벼운 것임을 명심하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막부시대에 번주와 장군에게 향하던 맹목적인 의리를 천황에게 향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2차대전을 거치면서 일본 천황은 국민 무사도의 이름 아래 숱한 자국의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 넣었습니다.
일본의 패전 이후에도 사무라이 정신은 일본 재건의 밑거름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일본인들은 사무라이 정신을 자신들의 중요한 정신적인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패전(敗戰)후 순치(順治)된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은 맡은 바 임무에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한다는 산업사회의 직업 윤리화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일본은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그들이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 다시 천황이나 국가로 전환된다면 광적인 군국주의(軍國主義)는 일본에서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일본의 인기 작가였던 미시마 유키오는 사무라이 정신에 일본 정신의 원형이 있다고 보고, 1970년 11월 25일 동지 4명과 함께 도쿄 시내 육상자위대 총감부에 난입, 총감을 인질로 삼고 1,000여명의 자위대원들에게 평화헌법을 뒤엎고 천황제를 실시하자고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자위대원들이 냉소와 경멸의 반응을 보이자 미시마는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배를 갈랐고 그 추종자가 그의 목을 쳤다.
4. 사무라이 정신과 잔혹성
사무라이 정신이란 이미 언급하였듯이 형이상학적인 가치 규범에 따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원(恩怨)이라는 단순한 상호 관계에 따라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결과 절대적인 윤리 규범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은원(恩怨) 관계(關係) 속에서 각자의 의리(義理)를 다한다는 상대적인 행동 원칙만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에게 은급을 하사하는 주군과의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행위라면 그 것이 아무리 사악하고 잔인한 행위라고 하더라도 사무라이 정신의 가치 체계 속에서는 당연히 수행되어야 할 의무로 인식될 뿐 하등의 도덕적 갈등도 유발하지 않습니다.
근대적인 국민(國民) 무사도(武士道) 정신에 세뇌된 일본군이 우리나라와 중국을 침략하였을 때 이들은 아무런 도덕적인 갈등을 느끼지 않고 타인의 생명을 빼앗았고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잔혹한 만행을 저지르면서도 만면 가득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마치 스포츠라도 하듯이 일본도로 머리 베기 시합을 했고(소위 100인 베기 시합을 자행했던 중위 두 사람은 종전 후 전범재판에 의해 총살형되었습니다)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강간 살해를 일삼았으며 심지어는 어린 아기들 조차도 바닥에 내동댕이쳐 죽였습니다.
혹자는 일본군의 이런 잔학행위가 극단적인 폭력이 반복되는 전장(戰場)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돌발적인 사건에 불과하며, 사무라이 정신과 학살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잔학행위는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발생하였으며 이를 억제할만한 내부적인 견제 장치는 전무(全無)했습니다. 또한 현재 전해지는 학살 장면 사진의 대부분은 우연히 찍힌 것이 아니라 일본군들이 고국에 보내어 자랑으로 삼기 위하여 연출(演出)된 사진입니다. 예를 들어 위에서 목을 베는 사진의 경우 당시의 사진 기술로는 이러한 순간 포착이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밧줄로 묶어 고정한 몸뚱이 위에 이미 베어진 머리를 얹어놓고 찍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사진 속의 일본군들은 이런 잔인한 사진을 본국(本國)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보냈을 때 그들의 가족과 친지들이 자신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공들여 이런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고국에 있는 그들의 친지들도 전장(戰場)의 일본군에 비해 잔혹함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위의 그림은 1923년 9월 1일 발생한 일본의 관동(關東)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장면을 그린 동도대진재과안록(東都大震災過眼錄)입니다. 관동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인들은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고 위험 분자로 간주되었던 조선인을 6,000여명이나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차마 바닥에 질펀하게 번진 이들 조선인의 피를 붉게 그리지 못하였으나, 우리는 이 엉성한 그림 속에서도 손발이 잘리우고 목을 베인 우리 선조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도 일본 사무라이의 잔혹성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임진왜란 때 풍신수길(豊臣秀吉)은 조선인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보낼 것을 명하였으며 이렇게 모아진 코는 자신들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커다란 코무덤[鼻塚]에 묻었습니다. 당시에 직접 전투에 참가한 바 있는 오카와치 히데모토(大河內秀元)는 조선물어(朝鮮物語)라는 책에서 “조선 사람의 코 18만5,738개, 명나라 사람의 코 2만9,014개, 합계 21만4,752개의 코가 매장되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교토의 미미즈카(耳塚)>
원래는 코무덤[鼻塚]이었으나 나중에 너무 잔인하다고 하여 이름을 이총(耳塚)으로 고쳤다.
<오카야마현 비젠시에 코무덤(千人鼻塚)>
물론 고대 동양에는 전과(戰果)를 확인하기 위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베는 전통이 있었고 일본군은 본국으로의 수송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코를 벤 것이기 때문에, 시신(屍身)의 코를 베었다는 사실 만으로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비하여 훨씬 잔혹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측 기록을 보면 삼남(三南) 지방에 코가 베인채 돌아다니는 백성들이 숱하였다고 적혀있습니다. 일본군은 군인 뿐 아니라 민간인의 코까지 베었으며 심지어는 산사람의 코까지 베어 전리품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한편,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보면 임란 당시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한 후 "백성을 죽이지 않는다"는 방을 붙여가면서 사람들을 모아 성안에 사람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간혹 왜군을 죽이려다 잡힌 조선인은 종루 앞이나 남대문 밖에서 불태워 죽여서 해골이 무더기로 쌓였으나 대부분의 백성은 왜군 치하에서 나름대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왜군이 한양에서 물러나게되자 이들은 도성안의 백성을 모두 찔러죽일 것을 모의하고 "백성들을 결박하여 남문 밖에 열을 지어 세워 놓고 윗쪽에서부터 처형하여 내려오는데. 우리 백성들은 칼을 맞고 모두 죽을 때까지 한 사람도 탈주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군은 자신들에게 협력했던 조선인들까지도 이처럼 잔혹하게 살육한 것입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에는 왜구의 잔혹한 행위들이 허다하게 나타납니다.
영암(靈岩) 사람 최씨(崔氏)가 겁간하려는 왜군에게 저항하며 나무를 잡고 버티자 그녀를 죽이고 여섯살 난 어린 아들도 죽었다. 경산(京山) 진사(進士) 배중선(裵中善)의 딸은 왜적이 겁탈하려 하자 젖먹이 아들을 강가에 두고 혼자 강으로 뛰어들었다. 왜적이 활로 위협하되 응하지 아니하니 곧 활로 쏴서 죽였다. 완산부(完山府) 사람 임씨(林氏) 가 겁탈하려는 왜적에게 저항하자 왜적이 곧 한 팔을 베고 다시 한 다리를 베되 그래도 항거하자 끝내 죽였다.
우리나라의 예를 돌아보면, 조선 초기의 여진(女眞)정벌이나 대마도(對馬島) 정벌을 위해 장수가 출정할 때 국왕은 항시 무고한 자들을 죽이지 말 것을 수차례 당부하고 있으며 특히 부녀자와 어린아이는 절대로 처형하거나 고문을 행하지 말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세 시대에 조차도 상당한 수준의 인본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온 우리 민족의 윤리의식으로는 일본인의 잔혹성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유럽의 중세 기사들도 원래는 잔인하고 무식한 폭력집단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형이상학적인 도덕 규범을 받아들이면서 유럽 기사들의 폭력성은 어느 정도 순치(順治)되었고 종교적인 성격의 전쟁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전쟁에 있어서도 극단적인 잔혹성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신도(神道)는 자연과 조상 숭배 신앙에 가까웠고 나중에 들어온 불교(佛敎)와 유교(儒敎)는 권력자들에 의해 필요한 부분만 선택적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에 사무라이의 폭력성을 순치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일본인의 잔학성은 그 잔학성을 견제해줄 절대적인 가치 규범이 없거나 혹은 그러한 가치규범이 있더라도 은원(恩怨) 관계 속에서의 의리(義理)만을 강조하는 사무라이 정신이 보다 상위적인 가치 규범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타인의 생명에 대한 경시는 이러한 잔학성을 보다 극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무라이 정신에 충실한 일본인들은 한국과 중국, 심지어는 자국민들에게까지도 잔혹한 칼날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한민족과 무사도 정신
한민족(韓民族)에게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과 동일한 무사도(武士道) 정신이 있다는 주장은 일제시대부터 있었습니다. 삼일운동(三一運動) 당시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일제 말기에 친일파로 변절하였으며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주장에 동조하여 한일문화동근론(韓日文化同根論)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1937년 매일신보에 실린 <조선문화 당면의 과제>라는 글에서 "일본과 조선은 원래 같은 문화 원천이 두 개의 지류(支流)로서, 일본의 근본적으로 깊고 깊은 강이 만세(萬歲)에 흘러서 여일(如一)할 때 조선은 불행하게도 절단되는 운명에 놓여 그 의식도 흐려졌던 것인데, 시운(時運)을 만나서 이제야 분류(分流)가 재회하여 같은 원류(原流)를 가진 파도에서 춤추게 약속받은 것이다. "라고 하였고 학도병(學徒兵) 출병을 독려하는 1943년 매일신보의 <가라! 청년학도여>라는 글에서는 한국의 무사도(武士道)를 일본의 무사도(武士道)에 견주어 세계 무사도의 쌍벽이라 하면서 신라 무사의 무용성(武勇性)을 발휘하여 성전(聖戰)에 나가라고 독려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도 일본의 무사도 정신에 대한 향수와 동경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며 그중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일본 육사(陸士) 출신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은 일본 육사에서 사무라이 정신을 훈육 받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다이도오 지 유우장(大道弄友山)의 <무도초심집(武道初心集)>과 요시다 쇼잉(吉田松陰)의 무교전서강독(武敎全書講讀)>, <사규칠칙(士規七則)>, 야마시가 소유끼(山鹿素行)의 <사도(士道)>와 <무교소학(武敎小學)>등을 즐겨 읽으며 일본 사무라이 정신을 체득했습니다. 그런 그가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자 일본의 교육칙어(敎育勅語)를 흉내내어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하고 김유신(金庾信)과 신라 화랑(花郞)을 한국적인 무사도(武士道) 정신의 표본으로 제시하면서 화랑을 일종의 무사단으로 규정해 버리고 역사속의 여러 장수들의 유적을 성역화시켰습니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검도부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 박정희)>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충성혈서를 써서 일제를 감동시키고 만주군관학
교에 입학했다. 과연 누구에 대한 충성이었던가.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우리 민족의 무사도 정신의 복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몇몇 무술 단체에서는 무사도(武士道)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무라이 정신을 자신들의 정신적인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무라이의 기원이 한반도에 있고 싸울아비라는 말에서 사무라이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묘한 내선일체론적인 주장조차 근거 없이 주장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격투기 선수는 버젓이 야마토 다마시(大和魂)라는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링 위로 올라가고 어느 검도 쇼핑몰에서는 야마토 다마시(大和魂)라고 새겨진 면수건을 사은품으로 제공하기도 했으며 검술인들 중에는 아예 사무라이(侍), 사무라이혼(侍魂) 등의 이름을 필명으로 버젓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럼 과연 우리나라에도 무사도 정신이 존재하였으며 이 무사도 정신이라는 것이 우리 민족 고유의 대표적인 정신적 유산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역사적 실체성이 있는 것일까요?
물론 조선시대와 고려시대에도 유교적 덕목인 충(忠)이 사회 규범으로 강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사무라이의 충(忠)이 주군의 허물을 덮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절대적인 가치인데 반하여 조선의 충(忠)은 하늘의 뜻을 따르는 군왕에게는 복종하되 군왕이 부도덕할 경우 폐위를 도모하는 상대적인 가치였으며, 천명(天命)과 위민(爲民)이라는 보다 상위의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하위적인 가치에 불과하였습니다. 또한 사무라이가 자신의 죽음을 긍정하고 타인의 생명조차 가벼이 여기는 죽음의 미학을 찬양하였다면 조선인은 부모가 주신 자신의 터럭 하나까지도 소중히 아끼는 자기애(自己愛)를 효(孝)의 기본으로 알았고 이러한 자기애(自己愛)를 확대함으로써 타인의 생명 까지도 존중하는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그 때문에 일본에서라면 일개 사무라이 조차도 임의로 처형할 수 있는 죄인을 조선의 국왕과 조정 중신들은 머리를 싸매고 의론(議論)을 거듭한 후에야 처벌을 하고 어린 아이에게는 형문(刑問)을 가할 수 없어서 수사에 애를 먹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고려와 조선의 정신이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과 전혀 상반되는 성질의 것이다 보니, 전통적인 무사도의 존재를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전통적인 무사도 정신의 원형(原形)을 가까운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에서 찾지 못하고 천여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삼국시대에서 찾게 됩니다. 하지만 지난 천년간의 한민족의 역사적인 체험과 문화를 깡그리 부정하고 사서(史書)에 몇줄 남은 천년전의 기록에서 자신들의 정신적인 정체성(正體性)을 찾는 것은 결국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를 제것인양 받아들이기 위해 역사 속에서 빌미를 찾고자 하는 허구적이고 자기 기만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물론 삼국이 존립을 다투었던 삼국 시대에는 각 나라가 무비(武備)와 상무(尙武) 정신의 배양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전사들은 자신이 속한 국가의 존립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삼국시대의 문화가 무사들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만으로 가득찼던 것도 아니고 칼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도 아니었습니다. 삼국시대의 남자들은 누구나 책임 있는 성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전쟁에 나가 자신의 소임을 행하였을 뿐 일본의 무사들처럼 전쟁을 업(業)으로 삼거나 혹은 하나의 계급화하여 무력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전사 계급적인 성격을 띄지 않았습니다. 전쟁에 임하여 물러나지 말고[臨戰無退] 적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殺生有擇] 화랑오계(花郞五戒)는 고대의 전사가 가져야 할 규범으로는 오히려 평화적이고 인간적일 면모를 보여줄 뿐입니다.
이상과 같이 최남선(崔南善) 등이 주장하는 한민족(韓民族)의 무사도(武士道) 정신이라는 것은 결국 역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결코 일본의 사무라이들처럼 생명을 경시하고, 형이상학적 가치가 결여된 무조건적인 충성을 주군에게 바치는 전통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생명을 존중하고 문화를 사랑하는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선호하였으며 이러한 전통은 21세기의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여야 할 가치와도 부합됩니다.
6. 결어
지난 천년간 우리 한민족은 지나친 문약(文弱)에 빠져 끊임 없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고 급기야는 일제에 의하여 국권(國權)을 강탈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불행한 과거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하여 일제시대부터 이미 한민족의 무사도(武士道) 정신을 주장하는 조선인 학자들이 존재하였고 박정희(朴正熙) 이후의 군사정권은 의도적으로 문민(文民) 문화를 폄하(貶下)하고 무인(武人) 정신, 무사도(武士道) 정신을 국민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 시대에조차도 여전히 군사 문화에 대해 향수를 느끼고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을 직간접적으로 동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과 이를 적당히 포장하여 우리 것인양 만들어낸 무사도 정신은 형이상학적 가치가 결여된 의리 의식과 생명에 대한 경시, 힘에 대한 숭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우리 한민족은 지난 천년간 문민적(文民的)이고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인 사회를 지향하여왔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국왕 조차도 사대부(士大夫)의 보편적 도덕 규범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고 왕과 신하 모두가 평생을 학문에 매진하는 선비의 나라였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무력(武力)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법과 도덕에 의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도구적인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조선이 지향한 이상적인 사회는 무능한 군왕(君王), 탐관오리(貪官汚吏), 특권에 따른 의무를 다하지 못한 지배계층들 때문에 결국 온전히 구현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지향한 인본주의(人本主義)적이고 문치주의(文治主義)적인 사회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추구되어야 할 이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굳이 일본이 사무라이 문화를 동경하고 이를 흉내내거나 심지어는 무사도(武士道)라는 이름으로 이를 우리 고유의 정신적 가치라고 강변한다면 이는 곧 우리 민족의 과거 천여년의 역사를 스스로 부정하고 그 기형적인 일본의 문화로 우리 민족의 영혼을 오염시키는 반민족적인 행위인 것이며 사무라이 정신의 최대 피해자였던 우리 선조(先祖)들을 스스로 욕되게 하는 행동입니다.
우리 현대의 한국인들, 특히 검과 검도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기형적인 일본 문화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는 한편, 선조들의 실수를 교훈삼아 평화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문화와 이를 지키는데 반드시 필요한 상무정신(尙武精神)을 균형있게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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