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을 죽여라!>
[1] //용을 죽여라//
“용에게는 수많은 비늘이 있으니,
그 각각에는 ‘너는 할지니’라고 적혀 있다.
‘너는 할지니’라고 말하는 용을 죽여라.
그 용을 죽인 사자는
비로소 아이가 된다.”
[2] 이 문장은 니체의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얼핏 읽어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몇 번 읽어봐도 파악이 어렵다. 니체의 글이라 하면 더 어렵게 느껴진다. 나도 영문학과 신학을 하면서 제대로 이해하게 된 문장이다.
이런 문장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글을 쓴 사람이 비유와 상징으로 자신의 의도를 숨겨놨기 때문이다.
[3] 여기 용(dragon)이 등장한다. 용은 신화 속에 나오는 동물로 동양과 서양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묘사된다. 물론 동양에서 생각하는 용과 서양에서 생각하는 용은 아주 다르다. 동양에서의 용은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신비스러운 동물이다. 중국 사람들 중 용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 이들이 많다. 반면 서양에서의 용은 사람을 잡아먹고 해를 끼치는 악한 존재로 그려진다. 많은 문학과 성경에 나오는 용들 대부분이 그렇게 등장한다.
[4] 성경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붉은 용’(계 12:3)은 그리스도의 적인 ‘사단 마귀’를 의미한다. 그런데 니체는 이 시에서 ‘그 용을 죽이라’고 한다. 이유가 뭘까? 용에게는 비늘이 있는데, 그 비늘에는 ‘너는 할지니’(해야 한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 글이 가리키는 바가 뭘까? “이거 해! 이것도 해! 이거라야만 한다구!” 우리 사회가 가진 기존의 통념, 선입관, 고정관념 등을 말한다. 이것을 깨부숴라는 말이다.
[5] 무조건 그런 것들 따라가다 보면 진정한 나는 죽게 되고 자기만의 독창적인 개성을 살리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괴테는 그런 것들로 가득 찬 용을 죽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용기 없는 자는 할 수가 없다. 아무나 쉽게 죽일 수 있으면 그건 용이 아니다. 때문에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자를 니체는 ‘사자’(lion)라 했다. 사자만이 그걸 행할 수 있단 말이다. 사자 또한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특별한 소수만이 해낼 수 있음을 뜻한다.
[6] 그 일을 수행하는 소수가 ‘아이’가 된다고 한다. 괴테는 왜 ‘아이’라 했을까? 여기서 아이는 ‘어떤 관념과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갖고 있지 않은 이’를 의미한다. 아이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좋으면 웃고 슬프면 운다. 배부르면 좋아하고 배고프면 밥 달라고 조른다. 무엇보다 고정관념도 편견도 없다. 그럴 만큼 인생을 오래 살지 않았고 백지상태(tabula rasa)에 가깝기 때문이다.
[7] 아이 속엔 어른들처럼 오랜 세월 축적된 타인이나 기성세대의 관념이나 선입견이 없다. 순수 그 자체이다.
어른들은 판단의 전문가들이다. 탁치는 대로 사물과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결론 내리기를 좋아한다. 내가 옳으면 무조건 옳다. 내가 틀리다 하면 뭐든 틀린다. 인정사정없다. 타협도 없다. 그저 내 맘대로 생각하고 내 맘대로 결론 내린다. 무섭다.
[8] 이게 사람을 죽이는데도 말이다. 실제로 그 때문에 죽은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저께도 전직 여자 배구선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남들의 잘못된 편견과 고정관념이 한 처녀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의 이 판단엔 문제가 많다. 자기 것이 아닌, 지금껏 내재된 기존의 관념이나 지식, 정보, 그리고 고정관념에 의한 것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9] 그런데 다들 그걸 잘 깨질 못한다. 왜 그럴까? 이유는? 첫째로, 자기 생각과 판단이 잘못 됐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무서운 것이다. 일종의 무지와 교만이다. 남보다 뛰어나진 않더라도 남보다 뒤지는 것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알고 보면 그 지식과 판단의 기준이란 것의 대부분이 타인이나 기존의 관념들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말이다. 무지에서 온 착각이다.
이런 생각부터 깨야 한다.
[10] 내가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 앞설 순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가 가진 것들 중 상당 부분이 남에게서 왔음을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둘째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다 변화를 싫어한다. 지금껏 자신이 알고 있고 믿어온 생각들 바꾸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다. 그러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평생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대로 살아야 편하고 편리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사자처럼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11] 용자만이 아이가 될 수 있다. 아이는 자기 생각에 충실하다. 인생 경험이 많이 없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쌓인 것이 거의 없다. 순수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사물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판단하기가 쉽다. 남들이 말하는 가치관이나 편견으로 오판하지 않는다.
사자와 아이는 서로에게 ‘너무도 먼 당신’ 같아 보이나 ‘정말 가까운 너’이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면서 수정하거나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없다.
[12]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우리 속에 웅크리고 있는 용을 빨리 죽여 버리자. 우리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신만의 독특한 재능과 사명을 살려나가기 위해 사자 같은 용기를 갖고 기존의 관념이나 편견이나 고정관념 다 깨부숴 버리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무지개”(Rainbow)에 나오는 유명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