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석의 탐색
임병식
어느 바닷가 선창에서 해풍을 맞으며 서 있는 석비 몇 기를 보았다. 형체는 낮고 초라했으나, 한때는 누군가의 이름과 시간을 지탱하던 돌들이었을 것이다.
이곳은 지금은 작은 부둣가에 지나지 않지만, 조선 후기 이전에는 관아가 있던 자리라고 했다. 그러니 돌 몇 기쯤 남아 있는 일은 이상할 것도 없다.
가까이 다가서자 비석들은 생각보다 더 조용했다. 글자는 대부분 닳아 사라졌고, 몸체는 바람과 염기에 깎여 있었다. 하나같이 낮아진 키로 바닥 쪽에 몸을 붙이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특히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머리 부분이 무너져 형체를 잃었고, 돌이라기보다 오래된 흔적처럼 보였다.
나는 그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돌은 단단하다고 믿어왔다. 쉽게 변하지 않는 것, 시간을 견디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곳의 돌은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결을 따라 돌을 조금씩 지웠고, 물기는 이름을 먼저 흐리게 했다. 오래 남기려 새긴 것들이 오히려 먼저 사라지고 있었다.
남는 것은 이름이 아니었다. 지워진 자리의 결, 그리고 그 위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감각뿐이었다.
바닷바람은 오늘도 낮아진 비석들 사이를 아무 말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2026)
첫댓글 단단한 돌마저 무너뜨리는 바닷바람의 시간을 작가님의 시선으로 따라가 보았습니다. 마모된 비석 앞에서 침묵의 소리를 들으시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선생님의 따뜻하고도 예리한 통찰이 인상적입니다. 어버이 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보내세요.
사람들은 돌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백년 천년가라고 비석을 세우지만 세워진 비석또한
결코 오래가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이름내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기에 바닷가에 세워서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따뜻한 댓글 고맙습니다.
@청석 임병식 단단한 돌조차 허물어뜨리는 세월 앞에서 겸손함을 배웁니다. '오래 남기려 새긴 것들이 먼저 사라진다'는 역설적인 문장이 송곳처럼 마음을 찌르네요. 고비석을 바라보는 작가님의 깊은 사유의 시선에 감탄하며 머물다 갑니다.
@김은진뛰어댕기는고무신 작품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단단한 돌마저 해풍과 세월 앞에 낮아진다는 문장에서 삶의 겸허함이 느껴집니다.
영원히 남기고자 이름을 새겼으나, 결국 이름이 먼저 지워지고 돌조차 형체를 잃어가는 과정이
마치 우리 인생의 순리와 닮아 있는 듯합니다.
특히 "끝내 남는 것은 어쩌면 기억조차 아닐지 모른다"는 대목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화려한 위엄보다는 바람 속에 남은 '희미한 기척'에 집중하신 시선에서,
따뜻한 통찰이 전해집니다.
비석의 마모를 '삭아가는 것'이 아닌, 세월과 자연에 순응하며 '낮아지는 것' 으로
바라보신 표현이 참으로 아름답고 인상적입니다.
짧은 글이지만 긴 여운을 주는 청석님의 명작입니다.
평소 돌에 관한 관심이 많은데 떠난이들이 영구히 이름을 남기고자 했으나
무상한 세월을 이겨내지는 못한것 같습니다.
후손 같으면 뽑아버리기라도 하면 궁상스러움이 덜할텐데 바라보는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영원한 것은 무엇일까하는 생각을 붙잡고 한바탕 사해를 휘돌아본 시간이었습니다 마음에 새긴 비문도 돌에 새긴 이름도 마침내 먼지처럼 사라지네요 그나마 오래 남는 것은 책에 새긴 기록이지 싶습니다
벼슬아치들은 자기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비를 세웠으나
세월앞에 장사는 없는지 허망한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노라니 영원한 것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