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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장 행복한 공부 원문보기 글쓴이: 메아리
보물 제1200호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오래된 절집을 찾아다니다가 보면 나름대로 역사를 간직하고, 그곳의 자연과 어우러져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곳이 있다. 그 아름다움이란 절이 웅장하고, 국보나 보물이 많아서이기보다는,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정경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는 수많은 절집들이 있다. 그 중에서는 불국사, 통도사, 해인사, 법주사, 월정사 등 그 규모만으로도 대찰다운 면모를 갖춘 절집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에 소개하는 절집들은 나름대로 전국의 절집을 찾아다니면서, 그 절집 중에서도 올 여름 더위를 피해 가족들만이 오붓하게 찾아가볼 만한 10곳을 소개한다.
1) 밀양 표충사
표충사는 밀양시에서 동쪽으로 20km 떨어진 재약산(천황산)의 남서쪽 기슭에 있다. 1천년 역사를 가진 표충사는 원효가 창건하여 죽림사라고 이름했다. 그 뒤 신라 흥덕왕 4년(829년)에 황면선사가 재건하여 영정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다시 폐사가 되었는데 1839년 헌종 5년에 관자리에 사당 3칸을 신축하여 무안면 표충사에 있던 청허, 사명, 기허대사의 진영 (眞影)과 위패를 옮겨와 절 이름을 표충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표충사에는 국보 제75호인 표충사 청동함은향완과 보물 제467호인 3층 석탑 그리고 사명대사 유물 200여점의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다. 또한 절 주변에는 층층폭포, 금강폭포, 얼음골이 있고 산마루에는 사자평 초원이 있다.
표충사는 의병의 근거지로써도 유명하지만 절집을 들어가면 ㄷ자로 배치가 된 절집 안이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주변에는 사명대사 사적지를 비롯해 표충비각, 영남루, 아랑각 등 수 많은 볼거리가 있어, 아이들에게 산 교육장으로 활용을 할 수 있다.
2) 청양 장곡사
장곡사는 청양 칠갑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절집으로 신라 문성왕 12년(AD 850년) 보조선사 체징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하여 지며 이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장곡사에는 국보 58호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와 국보 300호 장곡사 미륵불괘불탱화, 보물 162호, 181호인 상하대웅전, 보물 174호 장곡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부석조대좌, 보물 337호 금동약사여래좌상, 유형문화재 151호 설선당 등 전국적으로도 수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또한 장곡사는 다른 가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상하대웅전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약사여래기도 도량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대웅전이 두 곳이나 되는 이유는 약사여래를 주불로 모신 대웅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몰려들어, 할 수 없이 대웅전을 더 축조를 했다고 전한다. 장곡사는 칠갑산의 아름다운 정경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등이 주변에 있어 한 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절집이다.
3) 모악산 대원사
전라북도 전주, 김제, 완주에 걸쳐있는 모악산은 어머니의 품이라는 산이다. 모악산에는 아직도 산을 오르는 찻길이 없어, 전국에서 유일하게 자연생태계가 보존이 되어있는 곳 중 하나이다. 이곳 모악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는 대원사는 신라 때의 고찰로 1,400년이 지난 곳이다.
대원사는 진묵선사께서 오래도록 수행을 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선사께서 이곳에서 ‘곡차’라는 말을 처음으로 썼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현재는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로 더욱 유명해진 절집이기도 하다.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대고 30여분 천천히 걸어 오르면 도착을 하는 대원사는, 올라가는 동안 깨끗한 계곡 물이 흐르고 있어, 한 여름 더위를 피하는 데는 더할 나위가 없는 절집이다.
봄철, 절집에 오르면 수령 300년이 지났다는 산 벚꽃이 날리는 모습도 장관이지만, 사철 어느 때 찾아가도 운치가 있는 절집이다. 심검당 마루에는 화전축제 그림그리기 대회에서 입상을 한 학생들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으며, 고기와에 그린 그림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4) 인제 백담사
백담사는 내설악에 있는 대표적인 절로 가야동 계곡과 구곡담을 흘러온 맑은 물이 합쳐지는 백담계곡 위에 있어 내설악을 오르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세웠는데, 처음은 한계사라 불렸으나 그 후, 대청봉에서 절까지 물이 고이는 소(沼)가 백 개소가 있다고 하여 백담사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백담사는 십여 차례 소실되었다가 6. 25동란 이후인 1957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는 등 역사적 곡절이 많은 절이다.
문화재로는 자장율사의 유물소동일좌와 인조 때 설정대사에게 하양한 칠층소형옥탑 등이 있으며, 암자로는 영시암, 오세암, 봉정암이 있다. 그 밖에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머리를 깎고 수도를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만해의 대표작인 『님의 침묵』이 백담사에서 써졌기에 더욱 유명하다.
하지만 백담사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도 아니고 만해도 아니다. 백담사에는 무문관이라는 선원이 있다. 백담사 무문관은 큰절에서 계곡을 왼편에 끼고 위쪽으로 150여 미터를 올라가면 옛날 원통전이 있던 자리에 있다. 1998년 개설된 무문관은 3채의 목조건물이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무문관은 동안거나 하안거 때, 수행을 하기 위한 스님들이 안거에 들면 밖에서 문을 잠가버린다. 한 평 남짓한 쪽방에서는 안거 동안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신다. 물론 이 동안에는 묵언(?言)을 하신다고 하니 그 고행이야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하루에 한번 사시에 30cm 남짓한 공양구를 통해 밥과 국, 나물 등이 들어온다. 이것이 100일 동안 유일하게 바깥세상과 소통을 할 수 있는 통로다. 수행 중 몸에 이상이 생기면 쪽지로 상태를 적어 내보내면 거기에 맞게 약을 지어 들이거나 생식 등으로 처방을 한다고 한다.
백담사를 오르는 길은 주차장에서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들어가는 길에 소에 모인 맑은 물과, 계곡을 흐르는 소리에 젖다가 보면 어느새 백담사가 보인다. 가족들과 함께 산행을 하는 기분으로 찾아가면 좋은 절집이다.
5) 부안 내소사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서 북쪽으로 1.2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창건 되었다고 전한다. 혜구 두타 스님이 이곳에 절을 세워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고 하였는데, 그 중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내소사는 소소래사이다. 보유한 문화재로는 국가 지정문화재 4점과 지방 유형문화재 2점이 있다. 또한 잘 보존된 봉래루 화장실 등 옛 건축물과 근래에 신축한 무설당, 진화사, 범종각, 보종각, 선원, 회승당 등의 건축물이 도량에 조화롭게 잘 자리 잡고 있다.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조선시대 때 건립된 것으로 전면에 꽃살무늬를 조각한 문짝을 달았는데 이들은 모두 정교한 공예품들이며, 단청이 없어 더욱 자연스러운 고찰 분위기를 자아낸다. 경내에는 이 외에도 고려 동종, 법화 경절본 사본, 영산회 괘불탱화 등의 국가지정 문화재와 설선당과 요사, 삼층석탑 등의 지방유형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내소사를 들어가는 길의 양편에 늘어선 전나무 숲도 일품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당산나무 할아버지로 이름 붙인 고목 한 그루가 경내에 버티고 있다. 봄철이 되면 절집 경내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절집을 찾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사철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하는 내소사는 고풍스런 멋이 있어 더욱 좋다.
6) 금강산 화암사
화암사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11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623년(인조 1년)에 소실되어 1625년에 복원이 되었으며, 그 후에도 몇 차례의 소실과 중창을 거듭하였다. 1912년에 화암사라고 이름을 고친 후 1915년에 다시 소실된 것을 복원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시 소실이 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절 남쪽에 있는 수바위와 북쪽에 코끼리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바위의 맥이 서로 상충하는 자리에 절터가 있어 수바위가 뿜어내는 열기를 이겨내지 못하여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다고 전한다. 이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절은 창건당시 위치에서 남쪽으로 100m쯤 떨어진 장소에 있단다. 지금의 화암사는 고종원년에 또 화재로 소실되어, 그해 9월에 수봉으로 이전하여 건립하고, 한때 수암사라 이름 하기도 하였다. 현재 화암사 경내에는 삼성각, 미타암, 대웅전, 명부전, 설법당, 요사채, 종각, 금강누각, 일주문 등이 있으며, 일주문 앞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춘담대법사탑을 비롯하여 화곡, 영담, 원봉, 청암스님 등의 부도 15기가 모셔져 있다.
화암사는 금강산 끝자락인 신선봉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화암사를 찾아 들어가다가 보면 왼편에 있는 수바위와 계곡이 눈길을 끈다. 계곡은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한 여름인데도 곁에 가면 찬 기운이 감돈다. 수바위에는 스님들이 공양을 할 수 있도록 계속 쌀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어, 가족들이 함께 들려 보물찾기라도 해봄직한 절집이다.
7) 공주 갑사
갑사는 노송과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계룡산의 서북쪽 기슭인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위치하고 있다. 공주에서 약 19km 정도 떨어져 있고, 동학사에서는 도보로 3시간 정도면 갈수 있는 거리에 있다. 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이 있듯이 갑사의 가을 단풍은 더없이 아름답다. 갑사는 삼국시대 초기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갑사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계룡산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五嶽) 중 서악에 해당하고, 고려시대엔 묘향산이 상악(上嶽), 지리산 중악(下嶽)과 더불어 삼악 중 중악으로 일컬어진다. 갑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적하고 400년이 지난 후,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고자 큰 서원을 세우고 사리보탑에 있던 부처님의 사리를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사천왕들로 하여금 마흔여덟 방향에 봉안케 하였다. 이때 북쪽을 관장하던 다문천왕(비사문천왕)이 동방 남섬부주 가운데서도 명산인 계룡산의 자연 석벽에 봉안한 것이 지금의 천진보탑이라고 한다. 그 후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 최초의 사찰인 선산 도리사(挑李寺)를 창건하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 땅인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찾아가 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이에 탑 아래 배대에서 예를 올리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갑사는 계룡갑사, 갑사, 갑사사, 계룡사 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통일신라 화엄종 십대사찰의 하나였던 명찰이다.
갑사라는 명칭은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서 가장 으뜸간다.」고 해서 갑등의 이름으로 갑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름대로 하면 첫째가는 절집인 셈이다. 조선 세종 6년(1423)에 일어난 사원통폐합에서도 제외될 만큼 명찰로 꼽힌다. 세조 때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아 『월인석보』를 판각하기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시 전소 되었으며, 선조37년(1604) 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재건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절 주위에는 용문폭포, 수정봉, 천진보탑, 군자대 등 수려한 경승이 줄지어 있으며 특히 남쪽 계곡은 이른바 9곡을 이루어 절경을 이룬다.
8) 지리산 대원사
대원사는 지리산의 천왕봉 동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천년이 지난 사찰이다. 신라 제 24대 진흥왕 9년(548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평원사라고 했다. 그 뒤 천여 년 동안 폐쇄되었던 것을 조선조 숙종 11년에 운권선사가 문도들을 데려와 평원사의 옛 절에 사찰을 건립, 대원암이라 개창하고 선불간경도량을 개설하여 영남의 강당이 되었다. 조선조 고종 27년에는 혜흔선사의 암자가 무너져 크게 증건하였다. 서쪽에는 조사영당을 보수하였고, 동쪽에는 방장실과 강당을 건립하여 대원사라 개칭하고, 큰스님을 초청하여 설교를 하니 전국의 수행승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1914년 1월 12일 밤에 다시 불로 절이 모두 타버린 것을 여러 스님들이 다시 중창하여 1917년 전(殿), 누(樓), 당(當), 각(閣), 요사채 등 12동 184칸의 건물을 지었다. 그 이후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 등으로 폐허가 되어 방치되다가, 1955년 9월에 비구니 법일(法一)화상이 주지로 임명되어 1986년까지 대웅전, 사리전, 천광전, 원통보전, 봉상루, 범종각, 명부전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집 부근에는 옛적 선비들이 수학했다는 거연정(居然亭), 군자정(君子亭)이 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참 아담하고 가지런한 가람이다. 이 지리산 자락 깊은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절집이 1,500년이라는 세월을 숨어 지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수행승들이 이 절집을 찾았으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거쳤겠는가? 지리산이라는 지명도 알고 보면 이곳에 머물면 사람이 지혜로워진다고 하여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거기다가 대원(大源)이니 계곡에 물이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듯, 뜻을 세운 일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듯하다.
9) 팔공산 송림사
팔공산 송림사는 신라 진흥왕 때 진나라 사신이 명관대사와 함께 불서 2,700권과 불사리를 가지고 왔는데, 이것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절로, 이때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이 모두 편안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기원보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1092년(선종 9) 대각국사 의천이 중수하고, 1235년 몽골의 3차 침입 때 전탑만 남고 폐허가 되었다. 그 뒤 다시 중창을 하였으나 1597년(선조 30)에 왜병들의 방화로 다시 소실된 것을, 1858년(철종 9) 영추가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명부전·요사채·산령각·삼성각 등이 있다.
보물 제189호인 5층전탑은 해체 복원 시 복장 안에서 많은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목불과 파손된 석불, 동불, 채색된 거북 모양의 석궤 안에 넣은 높이 14.2㎝ 크기의 금동전각형사리기가 발견되었다. 또한 높이 7.8㎝, 입지름 18.0㎝의 청자상감원형합과 지름 3.0㎝, 두께 7.5㎝의 금동원륜 2개와 구슬 281개, 은환 15개, 향목 7편, 열매 1개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크진 않지만 아담하고 정겨운 곳. 절집 중앙에 버티고 선 오층석탑의 멋과 명부전 벽화의 지옥도가 있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만 같다.
10) 천안 광덕사
주말에는 어디를 가도 길은 꽉꽉 막혀 있다. 고속도로는 물론이고 국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번잡을 피해서 평일을 이용해 옛 고찰을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고 찾아간 곳이 바로 신라의 고찰이라는 광덕사다. 광덕사는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광덕산에 있는 절로, 1370여년전인 652년(신라 진덕여왕 6)에 자장이 그때 중국으로부터 가져오신 부처님 사리 치아, 가사, 화엄경 등을 봉안 창건하셨고, 그 뒤 진산(珍山)이 중건하였다. 이때 전각을 세우면서 금과 은으로 사경한 화엄경과 법화경, 부모은중경 등을 함께 봉안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충청도와 경기도 지방에서 가장 큰 절의 하나였다. 1457년(조선 세조 10)에 세조가 온양온천에 거둥할 때 광덕사와 개천사에 와서 위전을 바치고 부역을 면제하는 교지를 주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사찰 소유의 토지가 광덕면 전체에 이르렀으며, 그 규모는 종루가 8채, 금당이 9채, 범각은 2층이고 법전은 3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장경각이 80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산내 암자가 89 곳에 달하여 한 때 천여 명에 달하는 수행승들이 머물렀다고 할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절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우측에는 천연기념물 제398호인 호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 광덕사의 이름을 높였다. 이 호두나무는 수고 20m, 둘레 4.1m, 수령 400년이나 된 거대한 나무로 우리나라에서의 호두나무는 경기도 이남지방에 분포되며 땅이 깊고 따뜻한 지역에서 잘 자라므로 천안시 광덕면이 호도나무 생장의 최적지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 경내의 보화루 앞에 서있는 5~6그루의 고목들은 수령이 400년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그 중 둘레가 약 4m인 고목은 처음 들여온 시조나무의 2대쯤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국내 최고령의 호두나무로 알려져 있다. 한 여름 광덕사를 찾아 호두나무의 유래를 가족들과 함께 들어보고, 호도로 만든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
성불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