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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10월1일(목)비, 흐림
늦잠자다. 그래도 한 시간 좌선. 남은 밥으로 아침 때우다. 요가로 몸 풀다. 원정이 끓여온 깨죽으로 점심 먹고 대구 가다. 서부 정류장에서 쑤마나시리 만나 저녁을 먹다. 특강-4 <선정은 수행자를 행복하게 만든다.>를 강의하다.
2015년10월2일(금)맑음
아침 먹고 嘉昌가창댐 주변 산 숲속으로 산책을 나가다. 떨어진 밤과 도토리가 가을 숲길 풍경을 꾸민다. 동제미술관에 들러다. 미술관 주인이 홍차를 내와서 잠시 담화를 나누다. 미술관은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으로 지어졌다. 갤러리는 金佶煦김길후 화가의 작품을 주제로 꾸며져 있다. 화가는 백합화와 수행자, 관조와 깨달음에 대한 image이마쥬를 그렸다. 어머니와 성불심(박은정 모친)보살이 관오사로 오다. 주지스님과 점심과 차를 나누다. 두 분 보살님에게 이 절에 다니면서 주지스님으로부터 마음 다스리는 법을 배우라고 하였다.
밤에 日黙일묵(제타바나 선원장)스님, 大爲대위스님 오다. 차 한 잔하며 법을 담론하다.
1. 일묵스님은 sati를 ‘바른 기억’으로 번역하는 게 좋다고 한다.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면 뜻이 모호하고 포괄적이어서 실용적이지 못한 결점이 있다. sati란 어원에 ‘마음’이 들어설 근거가 없다. sati의 어원인 smriti의 ‘기억’, ‘불망不忘, 잊지 않음’이란 뜻을 살려서 기억으로 번역하면 위빠사나의 장점이 잘 드러난다. 무엇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가? 정견(즉 사성제 보는 것)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다. 善法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anapanasati를 ‘들숨날숨 기억하기’, ‘호흡 기억하기’로 번역하면 된다. 선법을 기억하고 잊지 않으니까 자연히 四正勤사정근을 함축한다. 매 순간 선법과 정견(정견 자체가 이미 선법이다)을 잊지 않으면 기억이 확립된다(sati가 확립된다). 기억이 확립되면 선명한 앎이 생겨난다. 이 앎이 바로 sampajana삼빠자나, 正智정지이다. sati를 흔히 ‘알아차림’이라 옮기는 것은 잘못이다. 알아차림은 sampajana이다. sati를 바른 기억으로 번역하면 선법, 정견이 지속적으로 견지되어 바른 정진이 이루어지면서, 선법은 더욱 증장되고, 정견이 확립되어져 어느새 유신견이라든지 사견(계금취견)이 떨어져 나가고 의심이 사라져 불퇴전의 신심이 서고, 관점의 혁명적 전환이 오게 된다. 이렇게 해서 수다원(豫流果)에 들게 된다.
2. sati를 번역하여 흔히 mindfulness라 하는데 이 말은 원래 영어사전에 없었던 것으로 PTS(빠알리 성전협회)에서 빠알리 니까야를 영어로 번역할 때 mindfulness라는 영어단어를 만들어냈다고 한다(미국 스님 비구 보디Bikkhu Bodhi의 견해). mindfulness라는 말은 sati가 함의하는 뜻을 모두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다. 최근 미국의 어느 불자가 ‘사띠 수행이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리는mindful 것이다.’라는 이해를 비판했다. 악한 일도 알아차리면서 하면 괜찮다는 말인가 이런 의문이 생긴다는 것이다. mindfulness자체에는 선법, 불선법에 대한 분별이 없다는 말이 되니 윤리적 상대주의에 떨어지게 된다. 계를 어기는 짓을 하면서도 mindful하면 해도 된다는 말이 된다.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sati를 mindfulness라고 번역하지 말고, ‘바른 기억’으로 번역해야할 당위성이 있다.
*보충: 나중에 생각해보니, sati를 ‘바른 기억’이라 번역하면 원어가 함축하는 범위가 좁아져서 그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한다. 이래저래 생각해보니 각묵스님의 ‘마음챙김’이 제일 무난해 보인다. 더 좋은 번역이 있다면 현상금을 걸겠다는 각묵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3. here & now에서의 깨어있음awareness이나, 알아차림mindfulness는 에카르트 톨레Eckhart Tolle나 힌두성자들도 흔히 하는 말이다. sati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불교와 외도와의 차별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sati를 ‘바른 기억’으로 이해해야 한다.
4. 멸진정은 오온의 일시적 정지 상태이면서 아나함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선정이다. 멸진정에서 나오면 열반을 체험한다. 비상비비상처정은 상이 너무나 미묘해져서 상이라 할 수도 없고 상이 아니라 할 수 도 없는 상태에 머무는 선정을 말한다. 非心非非心비심비비심, 非受非受非비수비비수라고 나와 있다. 굉장한 선정이다. 우다카라마뿟따가 증득한 경지인데, 정견이 없었으므로 해탈에 이를 수 없다. 싯다르타가 비상비비상처정을 버린 이유는 그런 대단한 선정의 경지는 체험 가능하기는 하나, 거기에 안주해서는 해탈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상비비상처정도 오온이 극도로 미묘해진 경지에 집착되어 머무는 상태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苦고의 소멸로 이끌지 못함을 보신 것이다. 오온이 마무리 정교해지고 미묘해지더라도 결국 고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선정도 ‘오온이 미묘하게 변화된 상태’일 뿐이라는 걸 알고 선정에 집착하면 안 된다. 선정에 들어가고(入定) 나오는(出定) 과정을 관찰대상(法)으로 보며 sati해야 한다. 한편 선정은 sati를 강화시켜서 지혜를 발생하는 좋은 조건을 만들어내는 효과가 강하기에 선정을 닦을 것을 권유하신다. 그러니 결국 선정과 통찰지를 함께 닦아가는 samatha-vipassana-yugananda止觀雙運지관쌍운이 불교수행의 정도이다.
5. 데바닷따가 사선정을 얻고 신통이 있었지만 악행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인가? 사선정으로만 지혜가 계발되지 않음을 말해준다. 정견이 없는 선정체험이 위험할 수도 있다. 데바닷따가 닦은 사선정은 정견이 뒷받침 되지 않은 선정이라 '바른 선정'(正定samma-samadhi)이 아닌 '잘못된 선정'(邪定miccha-samadhi)이었다. 정견의 확립이 없이 선정체험주의로 가면 데바닷따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욕欲에 기반한 선정수행에는 이런 위험이 따른다. 그러니 비록 선정을 얻었다하더라도 정견으로써 자기가 체험한 선정의 경지를 반조해야 한다. 거기서 심오한 통찰이 일어난다.
일묵스님과 잠깐 동안의 대화에서도 적잖은 이익이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늦은 밤 일묵스님은 대위스님과 함께 대위스님이 아는 절로 가서 자고 내일 아침 다시 만나기로 했다.
2015년10월3일(토)맑음
오후2시 초기불교 공부모임 시작하다. 15명가량 모이다. 각묵스님 발제하고 질문 응답하다. 삿자까 긴경(MN36)에 대해 논강하다. 참석자들은 열의에 차서 시간 가는 걸 잊었다. 밤9시에 마치다. 카루나경을 독송하면서 회향하다. 범일스님도 참석했는데 진주에 한번 와 달라고 청했으니 답을 하지 않고 가시다. 며칠 후 문자가 오기를 내년 봄 진주 명상모임에 오리라 한다. 매우 신중하고 꼼꼼한 성격이시다.
2015년10월4일(일)맑음
아침 먹고 진주로 오다. 피곤하다. 점심해 먹고 <붓다프로젝트>에서 몇 가지 수정하여 다시 보내다. 저녁에 유등제 보러 진주성으로 산책 나가다. 입장료를 만원 받는다.
2015년10월5일(월)맑음
호연, 정안과 저녁 같이 먹다. 해성과 같이 온 신입생들과 차를 나누며 담화를 나누다. 월요명상하다. 도향거사와 향원보살이 참석하여 분위기가 화기애애하였다.
2015년10월6일(화) 맑음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의 삶을 영화화한 것을 곰플레이어 무료영화에서 보다.
어떤 영감이 떠올라 글을 쓰다.
1. 삶과 죽음은 애인이기도 하고 연적이기도 하다. 둘은 한 집에 살지만 동거할 수는 없다. 서로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사이이지만, 둘이 만나면 미치거나 치명적인 지혜를 깨닫게 된다. 치명적인 지혜라니? 그건 일상이란 아늑한 이불을 덥고 세상에 취해 잠을 잘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 안에 길들여진 일상인을 죽이고 세상 밖으로 달아나게 한다. 잠들지 않은 눈으로 세상을 벗어나려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정체가 드러나기에 세상에게는 치명적이다. 치명적 지혜란 세상에 대한 환멸이며 초월이다.
2. 나는 남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았다. 잘 닦여진 길이 아닌, 스스로 찾아가는 길을 갔다. 처음에는 길이 없는 황량한 광야를 불안스레 헤맸다. 그때마다 내가 걸어왔던 길이 나를 앞으로 밀어주었고, 길이 끝난 곳에서 어김없이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것은 모험과 불안, 확신과 기쁨의 길이었다. 이것이 나의 길이며, 구도자의 길이었다.
3. 글자는 유리구슬이다. 카스탈리엔Castalien에서 현자들은 유리알유희Glasplenspiel를 한다고 헤르만 헤세Herman Hesse가 썼다. 그들이 가지고 놀던 유리알은 아마도 점괘를 뽑는 괘卦이거나 역경의 64괘이었으리라. 아니면 피타고라스가 가지고 놀던 신비의 숫자였을까, 악보에 그려지는 음표였을까, 아니면 대수학의 기호들과 양자역학이었을까? 나의 유리알은 문자이다. 나에게 유리알유희는 글쓰기이다. 일기를 쓰거나, 카페에 글을 올리거나, 한시를 짓거나, 강의 자료를 쓰는 일이 나의 유리알유희이다. 유리알이 서로 부딪히면 미묘하고 청아한 소리를 내면서 마음을 정화시킨다. 정밀한 사유와 선명한 앎에서 평정과 각성이 확립된다.
4. 사르뜨르의 <구토> 첫 부분에 나오는 일기에 대한 문장이 나온다.
날짜 없는 쪽지-최선의 방법은 그날그날 일어난 일들을 적어두는 것이다. 뚜렷하게 관찰하기 위하여 일기를 적을 것.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일이라도, 그 뉘앙스며 사소한 사실들을 놓치지 말 것. 특히 그것들을 분류할 것. 내가 이 테이블, 저 거리, 저 사람들, 나의 담뱃갑을 어떻게 보는가를 써야만 한다. 왜냐하면 변한 것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범위와 성질을 정확하게 결정지을 필요가 있다. 일기를 쓴다면 다음과 같은 위험이 있을 것이다. 즉 모든 일을 과장하는 것, 너무 날카롭게 주의를 기울인 나머지 줄곧 진실을 왜곡하는 일이다.
2015년10월7일(수)맑음
아침엔 기분 좋을 만큼 쌀쌀하다. 이런 것을 颯爽삽상하다고 표현한다.
현상학자 훗설에 의하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볼 때 모든 체험이 통일적으로 구성되는 터전인 내적 시간의식의 끊임없는 흐름만 관찰된다. 이 의식흐름은 ‘지금’이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가로방향의 지향성’과, ‘지금’은 지나가버렸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變樣변양된 채 ‘무의식’속에 원근법적으로 침전되어 여전히 유지되는 ‘세로방향의 지향성’으로 이중의 연속성을 지닌다. 이러한 연속성 때문에 의식흐름은 체험한 것을 현재화하여 지각하는 ‘과거지향’(Retention), 지속되는 시간객체가 산출되는 원천인 근원적 인상인 ‘지금’(Jetzt) 또는 ‘생생한 현재’(lebendige Gegewart)그리고 가까운 미래를 현재 직관적으로 예상하는 ‘미래지향’(Protention)으로 연결되어 통일체를 이룬다.
여기에서 retention(보존, 보유, 지속, 기억)이 sati의 의미를 드러내준다. memory라고 이해하는 것보다 retention으로 이해하는 것이 sati의 憶念억념적 측면을 잘 드러내준다.
호연과 아미화, 정안과 삼다도에서 저녁 먹고, 수요명상하다. 정안이 데려온 참한 보살님(修心行)은 공부를 잘 할 것 같다.
2015년10월8일(목)맑음
아침 산책 나가다. 비봉산을 오르다. 중늙은이들이 운동하러 나왔다. 하나같이 주황색 바람막이 점퍼를 걸치고 햇볕가리개를 앞머리에 꽂고 운동화를 신고 나온다. 차림새도 행동거지도 거지 반 비슷하다. 가만히 보면 운동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도토리 줍느라 정신이 나가있다. 도토리 줍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나무사이, 후미진 곳은 물론, 언덕기슭 구석구석까지도 낙엽을 헤치고 풀을 밟아놔서 맨바닥이 다 드러날 지경이다. 저 정도 차려 입고 다닐 정도면 집에 먹을 것이 많을 텐데도 눈알이 소리가 나도록 바삐 굴리며 아픈 허리를 굽혀서 굳이 도토리를 줍는 심사는 무엇인가? 다람쥐 겨울양식하게 땅에 떨어진 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될까? 그 많던 도토리가 한 알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다 훔쳐간 것이다. 얼마나 먹고 살려고 저러는 걸까? 한국의 중늙은이들 살아가는 게 저렇다. 저런 사람들의 집단무의식이 이끌고 가는 한국의 현재는 갑갑하다. 저들이 하는 꼴을 보고 한심한 생각이 들어 외딴 길로 멀리 돌아서 오다. 비봉산에서 인간을 마주치는 것이 불편하다.
초록보살이 저녁을 낸다 해서 호연거사 차를 타고 사천으로 가다. 엠비씨네에서 3D 영화 마션(Martian)을 감상하다.
2015년10월9일(금)맑음
한글날. 연휴. 할 일 없다. 월요명상에 이야기해줄 소재로 안나 카레리나를 검색하고 사유하다. 오늘 온다고 이메일 보내왔던 외국인 친구들이 하루 종일 기다려도 안 온다. 약속이 어그러졌다. 깊은 밤 명상에 들다.
2015년10월10일(토)맑음
갓밝이 하늘 풍경이 청평하다. 호연정사로 가다. 가을 색이 느껴진다. 팔각정은 거의 다 완성됐고, 또 몇 개의 방갈로를 더 짓기 위해 새로 터를 닦는 중이다. 원정보살의 갓 캐온 더덕무침과 깨 부각을 맛있게 먹다. 유등제 축제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꽃놀이를 보려고 천수교까지 걸어가 전망대에서 보다. 돈 내지 않으면 유등이 밝혀진 광경을 볼 수 없게끔 가림용 포장을 온데다 쳐놓아 사람들이 강을 굽어볼 수 있는 높은 곳으로 모였다. 불꽃놀이 겨우 15분, 찬란한 소멸을 보다. <커피포트>에서 에스프레소 한잔 하다. 강변에 노점상가를 이쪽저쪽 다 둘러보고 돌아오니 세 시간을 걸었구나. 다리 아프다.
첫댓글 sati = 바른 기억 = 憶念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