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7일 대구 재향 경우회(회장 장 병욱) 동 산악회장 (윤 형규)는 회원
46명과 함께 함양에 있는 선비문화마을로 6.2km를 걸으며 정자 문화를 탐방
했다.
아침 9시에 대구를 출발 논공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 거창 휴게소에서 15분
휴게하고 목적지인 경남 함양 서하면 소재 위치한 거연정에서 약 100m쯤 떨
어진 주차장에 오전 11시경 도착했다.
가는 중 신필선 부회장이 박카스. 감자 등을 준비해 회원들이 잘 먹었다.
손 점태 사무국장 장 병욱 대구 재향경우회장 인사에 이어 백 수봉 산대장의
오늘 선비문화로 탐방에 대한 유인물 배부 후 설명이 있고 손 점태 사무국장의
회계 결산보고에 이어 처음 참석회원의 인사로 회의가 끝났습니다.
함양 선비문화탐방로 중 오늘 우리가 탐방할 장소는 화림동계곡인 거연정에서
안이면 방향 농월정 까지 약 6.2km입니다.
남 덕유산 봉황봉에서 함양군 서상면 은제골 방향으로 내려오면 해발 1.350m에
참샘을 만나는데 이곳이 서상면 안의면을 거쳐 진주까지 3.467km를 내 달린다.
지역민들은 이강을 "경호강"이라 부른다.
우리 일행은 남강 상류인 서하면에 위치한 정자문화를 탐방하기 위해 맨 먼저
거연정을 찾았다.
거연정은 기암괴석이 강중앙에 솟아 이를 잘 이용 사각정자를 짓고 정자마루 중앙에
방을 만들고 방위에는 다락을 만들어 놓아 옛 선비들이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귀가 하지 않고 취침도 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거연정(居然亭)은 옛날 중국의 문호 주자의 시 `정사잡영` 에 나오는 12수 중 한 구절
인 居然我泉石(거연 아천석) 이란 글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며 그 뜻은 `물과 돌이
어울린 자연에서 편안하게 사는 사람`
다시 말해 자연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다. 자연속에 머물으다 라는 뜻일 게다.
거연정은 조선인조때 동지중추부사 전시서가 억새로 엮은 누정(주정정자)으로
처음지었다고 한다.
거연정 바로 옆에는 전시서의 전공 유덕비(근엄한 거북등 위에 새긴 비문) 은 숲
거늘에 묻혀 어둑 컴컴하여 글씨를 읽어 볼 수 없었고 유덕비 앞에는 서원인 `회람재`
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거연을 바라보며
화림동 계곡 찾아
거연을 바라보니
강 중앙에 솟은 암반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기암 괴석 허리에 두르고
비단포 휘감듯 하얀 포말 품으며
세월을 쌓아가는 화림동 계곡
물은 돌을 만나 즐겁고
돌은 물을 만나 즐거운 가배
꽃과 수풀이 한자리에 모여
찾아주는 강바람 산바람에
푸른 모자 눌러 쓰고
붉은 긴 다리 흔들며
상하이 춤을 즐기는 등 굽은 소나무
정자에 걸린 검은 목판 한글씨는
옛 선비 글 읽는 소리 들리 듯
그 소리 강물따라 세월따라 흘러간다.
차도는 서상면으로 흘러가면 육십령 고개가 나온다.
옛날 산적들에게 피해를 입지않기 위해 60명이 모이면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육십령
고개라고 하여 옛선비들이 한양 과거 보로 가려면 반듯시 이 육십령 고개를 넘어야 했다.
이 고개를 넘어면 전남 장수에 도착한다.
거연정에서 농월정 까지를 화림동 계곡이라 하여 4~5m높이의 대리석에
花林洞 磎谷(화림동 계곡)이라고 붉은 글씨로 새겨놓았는데 溪(계)자가 아니고
磎(계)자로 써놓았다.
즉 잔돌이 있는 내와 바위나 큰 돌이 있는 내를 구분한 것 같다.
거연정에서 바라보이는 사방팔방 바위를 휘감고 도는 물줄기며 소마다 품는 흰 포말은
한폭의 수채화 이다.
이어서 봉천교에서 30m쯤 떨어진 군자정에 갔다
군자정은 조선시대 동방5현의 한사람인 일두 정여창이 처가인 이곳 봉전 마을에
오면 자주 이곳을 찾았다 하여 지은 정자이며 이 정자에서 강 건너에는 영귀대가 있고
영귀대 위에 영귀정이 서 있다.
세 정자를 관람하고 봉전교를 건너 동호정 방햐으로 강을 따라 내려오는데 강가에
고목인 소나무가 셋 사람이 앉아도 손이 닿지 않을 만큼 큰 소나무가 위엄 있게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고 주위에는 두 사람 이상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소나무가 2포기 더 있어
오랜 세월을 지켜준 고마움에 감사했다.
테크 계단과 전도가 끝날 무렵 최근에 지은 다산정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60평 차도를 따라 대황마을 과 다곡교로 가는 세갈래 길에서 우리는 다곡교 방향으로
좌로 발길을 돌렸다.
통영 대전간 고속도로 다리 밑으로 조금 걷다 보면 동호정 가는 징검다리가 있는데 장마로
다리가 잠겨 신발 벗기 싫어 강을 건너지 않고 그대로 농월정 방향으로 내려 오면서 동호정
건너편에서 기념 사진을 남긴다.
동호는 장만리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업고 의주를 피난 했던 사람의 아호이며 고향
마를 앞에 정자를 지은 것이 동호정 이고 동호정 앞 냇바다닥에 너럭 바위는 해를 덮을
만큼 크다고 해서 차일암이라고 한다.
선조임금은 장 만리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영생불망자(永生不忘者)교지를 하사했다.
동호정 옆 동호식당 들머리에 정려각이 숨은 듯 서 있다.
이제 호성마을로 접어 든다.
계단식 논과 밭에는 농작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사과밭.감밭에는과일이 주렁주렁 달리고 밭에는 참깨 들깨 고구마 잎이 푸르게 자라고
눈에는 우렁이 (논고동)으로 농약 대신 사용하고 있으며 함부로 우렁이를 잡지 못하게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마을 입구에는 노인정 겸 마을 회관 입 간판이 붙여 있고 강가에는 마을 정자가 고저녁
하게 앉아 있고 정자 아래에는 자연 바위가 평상처럼 펼져저 있다.
조금 대 냐려오니 경모정(景慕亭)이 있고 이어서 람천정(濫川亭)이 강을 바라보고 이었다.
경모정은 고려 개국의 공신으로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배 현경의 후손 배 삼매가
영조때 산청에서 이곳 호성마을로 이사와 후학을 가르치며 쉬던 곳으로 후손들이 이를 추모
하기 위해 1978년에 건립한 정자로 수려한 계곡의 정취와 풍류 사상이 깃든 정자이다.
서하교를 지나면 안의면이다.
황석산 전투에서 전사한 영혼을 모신 함암사를 엄숙하게 둘러보고 정중히 예를 올리고 난
뒤 다시 농월정을 향해 1.2km의 육십령 차도를 걷기 시작했다.
선두는 앞에 갔으나 후미는 아직 오지 않았다.
드디어 오후 2시 20분경 농월정 아래 위치한 신 농월 식당에 도착했다.
도착 하자마자 야시비 인지 소나기 인지 갑자기 비가 내린다.
오는 순서로 닭 백숙 한 그릇씩으로 오찬을 미리 준비한 밥 반주와 함께 즐긴다.
후미 일행은 난데없이 빗줄기에 옷이 흠뻑 젖은 회원도 있었다.
비는 약 20분 정도 오더니 언제 왔느냐 하며 다시 날이 맑아 진다.
출발 시간은 오후 4시 반이므로약 1시간 이상 시간이 있어 농월정을 탐방하기로 하고 이 의부.
박 종덕 이현우회원 등 4명이 함께 간다.
농월정이란 달을 회롱하는 뜻으로 경치가 퍽 아름다워 달도 지기 싫어 했을 것이다.
농월정 2층에 오르니 많은 선비들이 오가며 지은 싯귀가 때 묻은 검은 목판에 흰 글씨로 걸어
놓았으나 일일이 읽어 볼 시간적 여유가 없어 몇 개만 휴대폰에 담아 내려 왔다.
거연정에서 출발 군자정 영귀정을 지나면 쉬어가게 이름 없는 정자가 있고 조금 더 내려오면 최근에
지은 다산정(쉼터로 안성마춤인정자) 다시 육십령 차도로 걸어 통영 ~ 대전 간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다곡교를 건너가 조금더 가면 동호정이고 대시 건너와 호성마을 앞 쉼터인 마을 정 지나면 경모정
이 마지막 농월정이 우릴 가디리고 있었다.
화림동 계곡은 남강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정자 문화가 잘 발달된 곳으로 같은 경상도
이지만 안동은 서원문화가 발달하고 함양은 정자문화가 발달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지금까지 약 914개가 남아 있고 그중 경상도에 513개가 남아 있으며 안동지역에
50여개가 남아있다.
경상도에는 서원문화가 발달 된 지역으로 아이들이 보리고개를 이겨가면서도 글 열심히 배운다 하여
문둥이 (글을 배우는 아이)이라 불렀다. 반면 전라도에는 정자문화로 가사문학이 발달하여 창을 즐기며
풍류를 옯었다.
화림동 계곡 선비문화 탐방을 모두 마치고 오후 4시 반에 대구로 출발 했다.
이글은 이상길 회원님이 7월 재향경우회 함양선비마을 문화탐방 기고문을 옮긴 글임.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 했습니다.
카페지기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더운 날씨에 건강에 유의하시고 행복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