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증보 장흥위씨 요람」을 게재해 드리겠습니다.
增補 長興 魏氏 要覽(魏 正 哲 著)
Ⅰ. 위씨의 연원
1 위씨(魏氏) 姓의 연혁
세상에 살고 있거나 망자도 성씨가 있다. 인류의 기원을 놓고도 아프리카 기원설과 다른 지역 기원설로 다투고 있다. 앞으로도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위씨라는 성씨는 어디서 유래했을까.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 역대 장흥 위씨 족보와 역사기록부터 확인해보고자 한다.
1) 연원에 대한 족보기록
한국 위씨는 1759년 기묘(己卯) 초보를 발행한 이후 1999년 기묘대동보를 내기까지 7차례 발행했다. 이들 족보에서 위씨 성의 유래와 한국 위씨의 시조인 휘 경(鏡)에 대한 면주 등의 기록을 보기로 한다.
(1) 기묘보(1759년)의 기록
기묘초보 1권 시조공 관련해서 면주와 함께 별기(別記)를 기록해뒀다.
① 시조공(始祖公) 면주(面註)
『大唐人來仕新羅官至大阿湌諡封懷州君懷州盖長興舊號也』
『追考舊牒有記公自唐東來居關西弘農村爲大光公主陪臣官大阿湌封懷州君當以是說爲正』
<해설>
대당의 선비로 신라에 와서 관은 대아찬이요, 시호는 회주군인데 회주는 장흥의 구호이다.
구족보에는 당나라 관서홍농촌에서 살았으며, 대광공주의 배신으로 동래하여 관은 대아찬이며 회주군에 봉해진 것이 바른 설이다.
② 별기(別記)
『舊譜始祖阿湌公下以諱菖珠大覺公系爲子行而竊稽阿湌羅代官啣大覺麗朝官名年代濶促不能無疑故謹遵古人存疑之例以阿湌公爲始祖越一板更以大覺公爲始而其下依舊牒連系之』
<해설>
구보에 시조 아찬공 아래 휘 창주 대각관공을 아들로 삼았다. 아찬은 신라 때의 관효요 대각은 고려 때의 관호인데 연대와 대수가 너무 원활(遠濶)하거나 촉박해서 의심할 바가 없지 아니함으로 전일 족보를 간행할 때 아찬공으로 시조를 삼고 한 장을 넘겨서 다시 대각공을 기일세조로 하여 옛 사람들의 존의(存疑)한 뜻을 따랐음으로 이번에도 또한 그대로 쫓는다.
(2) 存齋公撰 壬子譜(1972년)
존재공도 위성은 주(周)나라 희성(姬姓)으로부터 나오니 문왕(文王)의 아들 필공고(畢公高)의 후손이요, 진(晋)나라에서 벼슬하고 위(魏)나라에 녹을 먹었기로 위성(魏姓)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임자보1권)
1)임자보1권 原文 : 謹按伯父存齋公家牒序曰魏氏出自姬姓文王子畢公高之後仕於晉食菜於魏爲
(3) 기묘보(1999년)의 기록
① 시조공(始祖公)의 면주(面註)
『大唐關西弘農人으로 新羅 善德女王 7년 戊戌 638년 즉, 唐貞觀 12년에 出來本國하여 官이 阿湌에 이르고, 麗朝 忠宣王 때 懷州君에 封하시니 懷州는 지금의 長興이다. 新羅 善德女王이 道藝之士를 請함에 房魏洪睦奇殷吉奉 八學士가 出國 때 各己 一聯句하니 收錄于 遺詩篇하다. 1925년에 烟霞洞 忠烈公 玄室에 設壇하여 始祖公 諱鏡과 判事公 諱种 두분을 배향하여 奉祀하였으나 其後 1975년(乙卯)에 長興邑 平化里 茶田嶝에 霞山祠宇를 신축하여 主壁으로 모시고 四顯祖 즉, 大覺官 侍中公 諱 菖珠, 忠烈公 諱 繼廷, 判事公 諱种, 通善郞公 諱悳龍을 配享하여 매년 陽 5월 첫째 일요일에 奉享하다』
② 金種嘉撰 己卯 大同譜序 (지장록 54쪽)
위씨(魏氏)는 중국(中國) 주문왕(周文王)의 아들 필공고(畢公高)의 후예(後裔)로서 진(晉)에 임관(任官)하여 위지(魏地)에 거주(居住)함으로써 위씨(魏氏)라는 성(姓)을 받은 것이라 전하여 지고 있다.
기묘대동보(1999)는 위씨의 선조는 중국(中國)에서 살았으며 희성(姬姓)에서 나왔고, 필공고(畢公高)에서 비롯하였으니 주(周)나라 문왕(文王)이상은 모두 희성으로부터 나왔음으로 대개 성현(聖賢)의 후예(後裔)이다.
이상의 족보기록으로는 성씨의 유래가 명확치 않고 의문점도 많다. 따라서 이를 보다 심층적으로 알기 위해 역사사실을 찾아보고자 한다.
우리 문중의 종합역사서인 요람이 원본을 다시 전면 개편하여 처음으로 밴드에 선보이네요. 이를 위해 노고가 많으신 저자이신 원산소장님과 밴드에 게재해 주시는 호산위원님께 고개를 숙입니다. 정독해서 문중의 역사를 배우는 자세로 임하겠습니다.
원산소장님과 호신위원님 늘수고가 많고 고마워유,
근디 난 이제사 뿌리공부를 할려니 상당히 복잡한것 같고 머리가 아프구만요.아마도 역사 공부쪽에는 취미가 없었으니 관심을 덜가졌던것 같으네요.
이럴줄 알았다면 진즉에 역사공부에 관심을 가지고 뿌리공부를 열심히 해놓을걸 그랬나봐유.
뿌리공부에 큰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밴드 회원 여러분
역사 공부가 좀 머리 아프지만 가장 잘 정리되었다고 평가받는 위씨요람의 연재글을 정독하여 우리 위씨를 확실하게 아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기대가됩니다.열심히정독하여확실한.뿌리공부하겟습니다.감사합니다
■장흥위씨요람(長興魏氏要覽)
이번 게재되는 (增補)長興魏氏要覽 이전 (舊)요람에 대한 내용입니다.
2005년 장흥위씨 대종회가 발행하고 圓山께서 편저한 560페이지에 달하는 그야말로 장흥위씨 根幹을 기록한 저서이다. 대종회장(汎谷 위찬호), 도문회장(위계천), 성균관장(최근덕), 씨족문화연구소장(松潭 위자형)께서 발간사와 격려사 및 축간사를 맡았다. 序는 圓山께서 작성했다. 10部로 나뉘는데 1부(신지제지), 2부(위씨의 유래), 3부(유적순례), 4부(족보공부), 5부(세거지 유래), 6부(모선의 주역), 7부(재단법인 장흥위씨 장학회), 8부(대동보 색인표), 9부(도문중 및 대종회 임원록), 10부(성씨 한문 및 영문표기)로 구분했다.
1部에서는 천관산과 위씨, 산명, 지제지의 유래, 천관산과 동천, 종봉을 비롯한 36개의 봉우리, 천석, 수정암을 비롯한 17개 암실, 지제지발, 방촌팔경을 비롯한 5개의 관산의 유적, 천관산의 전설이다.
2部에서는 8학사에 대한 위씨의 연원, 시승세계, 16세분파, 21세분파, 고려시대의 충렬공, 원감국사, 판사공을 자세히 기록했다. 조선시대는 성균관 생원공을 시작으로 만암공까지 35선현을, 일제시대는 독립투사인 덕암공과 해인공을 조명하고 있다.
3部에서는 하산사, 장천재, 죽천사, 석천사, 다산사, 사월재, 계양재, 이필재, 경모재, 저존각, 운곡재, 운산재, 화운재, 홍문재, 영귀정과 봉독재, 경호정, 관산재를 현장성을 중시하여 기록했다. 또한 조상의 문화유산 에서는 사당, 무형의 민속, 조상들의 유품을 담았고 제표에서도 세계도를 비롯한 여러 사료를 함축했다.
4部에서는 족보의 기원과 유래, 보첩의 종류, 보첩의 상식, 족보 보는 법, 장흥위씨 족보의 역사에서는 역대 남북족보의 발행연도, 연도별 보첩의 서문과 특징, 남북대동보를 실었다.
5部에서는 시조공의 동래와 구거지(입국기록, 동래장소, 세거지, 장원봉 정착, 평화촌 개막), 분파와 이거에서는 자온의 능주파, 자량의 관산 및 행원파, 자공의 사월 및 관북파이다. 이주 1세대로 자공의 용산이거, 자공의 함흥정착, 용의 율촌정착 등 평화촌 200년의 성쇠를 담았다. 장흥위씨 세거지에서는 존재공의 세거지 기록, 장흥군 마을 유래지, 2000년도 전화번호, 능주파는 청양현감천우파, 유사공천보파로, 관산파는 곡성현감공파, 양곡공파, 훈도공파, 오덕파로, 행원파는 8개파인 괴봉공, 직장공, 첨정공, 참판공, 영장공, 수사공, 부장공파와 인행파로 세분화했다. 종사랑파는 덕수,정행, 흥인으로, 성균생원공파는 경천파, 사월파, 관북파는 극명파를 시초로 18개파로 나누었다.
6部는 모선의 주역편인데 족보를 세운 영의재공을 필두로 하여 존재공, 관암공, 만안공, 다암공, 농포공, 성재공부자, 회은공, 계은공, 의재공, 성재공, 백당공, 천관공, 춘사공, 송당공, 계사공, 덕운공, 범곡공까지 총 19선현을 기록했다. 특이하게 타성인 이인숙 여사도 기록으로 남았다. 7部~10部는 재단법인 위씨장학회의 설립과정, 일지, 운영규정, 헌성자 및 장학금배가운동의 필요성을 담았다. 대동보 색인표에서는 대동보서, 유물 유적사진 편, 파별 권별 게재편, 편제록, 유물편, 유시편, 열성조 사문 및 소장편, 사우기, 제문, 축문편, 행장 및 가장편, 묘갈명편, 세덕유비편 등이다. 하산 도문중과 대종회 및 장학재단 임원명단, 위씨성자 한문표기, 성씨표기에 대한 의견, 성위자를 되찾은 사례, 영문표기 통일안을 다루었다.
장흥위씨요람(長興魏氏要覽)의 특징을 살펴 보자.
우선, 위문 1,300여년을 集大成한 종합 역사서이다. 천관산을 중심한 본관 장흥, 21세를 기준한 분파별로 전국에 흩어진 세거지, 하산사를 비롯한 재각과 각종 유물, 족보, 시조공부터 근, 현대의 인물까지 수많은 선현들의 足跡을 글과 사진으로 남겼다. 위씨문중 역사에 이렇게 집대성한 종합서가 어디에 있는가? 아마 존재공께서 부활하신다 해도 칭찬이 자자하리라.
다음으로, 現場性을 기초한 寶庫이다.
松潭께서는 발행비용으로 당시 오백만원 이상을 사비로 충당했다. 圓山께서는 광주에서 장흥까지 60회를 넘게 왕복하면서 재각과 유물 및 천관산을 찾았다. 또한 전국 에 흩어진 세거지를 수차례에 걸쳐 수십일을 탐방했다. 위문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현장방문만이 최선책이었기 때문이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시간과 금전을 아낌없이 투자했고 사명감이 충만했다. 위문의 젊은이들은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고 배웠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신요람(新要覽)으로 거듭나야 한다. 요람이 발간된 지도 벌써 십여년이 흘렀다. 새로운 역사 기록도 많이 나왔고 여러 젊은이들이 위문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또한 등재되어야 할 모선의 주역도 많이 계시다. 한번 발간한 책자의 여유분도 전혀 없다. 이번 기회에 씨족문화연구소에서 나서서 신요람(新要覽)으로 거듭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