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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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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많은 것은 마음속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일, 즉 사랑의 노동의 소산이다. 어떤 강제아래서 부득이 하는 일도 놀라운 결실로 맺어지는 경우는 있다. 고대 왕조에서 건설한 웅장한 건축이나 사원은 그러한 사례가 된다. 또 마지못해 하는 일도 하다 보면 재미도 나고 그리하여 사랑의 노동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의 노동에서 비로소 솜씨와 정성이 마음껏 발휘되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서 참으로 훌륭한 번역이 드문 것은 대개의 경우 필요에 몰려 수행된 아르바이트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작품에 감동하여 꼭 우리말로 옮겨 놓고 싶다는 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번역에 착수하는 일은 드물다. 필요에 몰린 졸속주의가 언어예술이 희박한 번역 작품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또 넉넉치 못한 보수나 빈약한 어학력이 번역 작품의 열악성에 크게 기여한다. 요령부득의 단정하지 못한 번역 문장은 역자의 문장력에 관계되는 것이 사실이나 그보다는 외국어 실력이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졸렬하고 열악한 문장이 나올 수 없다. 적어도 번역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이라면 그 원산지에서 특색 있고 뛰어난 문체로 되어 있다. 좋은 점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그것이 치졸하고 열악한 우리 말로 되어 나올 리가 없다. 외국어 실력은 착실하나 문장력이 빈약하다는 속설도 실상과는 거리가 먼 헛소리다. 번역자의 문장력은 외국어 실력과 전혀 동일한 수준인 것이다. (원문이 워낙 난해하고 그에 따라서 번역도 난해하다는 것과 단순히 열악하고 요령부득의 번역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요즘의 번역 수준이 대체로 전보다 올라가 있다면 그것은 외국어 실력의 전반적인 향상과 관계되는 것이다.
열악하고 언어예술성이 희박한번역서는 문학 감수성에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그러한 피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외국어에 통달하여 원전을 접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 소홀치 않은 노력을 필요로 하며 장구한 시간이 소요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어가 제1외국어로 외어 있으며 소년기의 막대한 정력과 많은 시간을 영어 교습에 바치고 있다. 그것이 대체로 쓸모없이 되는 데 우리 교육의 실패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만 고교 3학년 정도의 실력만 제대로 갖추고 있으면 영어 번역을 통해서 웬만한 서양 쪽 고전을 모두 접할 수 있다. 이것은 추상적 이론적 차원의 얘기가 아니라 필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얘기하는 것이다.
가령 영국에 콘스탄트 가네트 부인이라는 러시아 문학의 번역가가 있었다. 톨스토이, 도스토 예프스키, 투르게네프, 체홉 등의 거의 모든 작품을 번역하여 그것이 '에브리먼 라이브러리 '나 '모던 라이브러리' 같은 영미의 문학총서에 수록되어 영어사용국민 사이에서 널리 읽혀 많은 러시아문학 애호자를 낳게 하였다. 요즘 와서는 그녀의 번역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오고 있다. 엄밀성에서 미흡한 점이 있고 또 유머러스하고 경쾌한 문장도 지나치게 심각하게 번역하는 등 적지 않은 오역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번역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오독이나 오해는 원전을 읽은 독자라도 으레껏 범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번역을 통해서 몇 세대의 영미독자들이 19세기 러시아 소설과 친숙해지고 새 세계에 접근할 수 있게 수행된 것이다.
필자는 대학 초년생일 때 가네트 부인이 번역한 '카리마조프의 형제들'을 읽고 러시아소설에 매료되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체홉과 투르게네프의 거의 모든 작품을 가네트 번역본으로 읽었다. '연기'라는 슬라브주의자와 서구주의자의 대립을 다룬 투르게네프의 구석진 작품까지 찾아 읽었다. 그런데 가네트 번역본은 고3 정도의 영어실력만 있으면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영어 독서력을 기르는데 있어서도 가네트 번역본은 안성맞춤이다. 우리 대학의 외국문학 교실에서는 너무 어려운 원전을 읽히는 폐습이 있다. 독서 경험은 물론 문학 경험도 많지 않은 학생들에게 가령 멜빌의 '모비딕'을 대뜸 과하는 것은 일종의 교육 폭력이다.
저학년 학생에게 다 읽고 리포트를 써오라고 하니까 부랴부랴 번역본으로 대충 훑어보고 이것저것 해설문을 짜깁기하여 거짓말 투성이의 '기말논문'을 날조하게 되는 것이다. 이래 가지고는 문학 읽기가 아니라 강제노동이 되어 버린다. 독해력도 늘지 않고 문학 감수성의 연마도 되지 않는다. 어려운 책을 정독하는 것은 지적 훈련으로나 정신 기율로나 반드시 실천해야 할 필수적인 요식이다. 그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속독하는 습관을 들여놓지 않으면 독서 세계의 거북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소설 영어 번역본은 원전보다 쉬워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톨스토이처럼 재미있고 유익한 거장의 작품을 영어 번역본으로 다독하는 것은 영어 독해력 향상을 위해서도 이상적인 방식이다. 초보자의 경우엔 너무 길지 않은 작품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위대한 작가와 접한다는 최상의 문학 경험을 곁들이니 일거양득이다. 또 재미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에 책을 덮어 버리기 아까울 것이다. (톨스토이의 모든 작품이 우선 재미있다. 교훈적인 인도주의 작가라는 풍문 때문에 고리타분한 설교거니 지레짐작하고 멀리하는 것은 개탄할 일이다. 재미와 가르침이 절묘하게 어울린 사례다. 따라서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천재는 다시 나올 수 있지만 톨스토이 같은 천재는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나 비평가들이 많다.) 앞에서 얘기는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조언 추종자의 공명과 동의도 받아낸 것이니 그 확실성은 보증할 수 있다.
독서 습관이 우리 쪽보다 일반화되어 있는 영어권의 번역문학이 수준이 높은 것도 참작해야 할 것이다. 가령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영역본은 원전보다 나으면 낫지 못 하지 않다는 정평을 얻었었다. 또 우리 사이의 아르바이트 번역과는 처음부터 다른 경우가 많다. 학생들이 많이들 읽는 E. 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비판받고 있기 때문에 알 만한사람은 알고 있는 아이자이어 벌린은 서양 지성사의 대가이다. 영국에 귀화한 라트비아 출신의 이 유태인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영역하였고 지금은 그것이 펭귄총서에 수록되어 있다. 자신의 제1언어로 된 문학작품을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나라의 말로 번역했으니 이상적인 번역자라 할 수 있다. 또 우리말로도 번역된 '전체주의'란 책을 쓴 영국 정치학자 레오너드 샤필로는 투르게네프의 '봄철의 급류'(헤밍웨이의 '봄철의 급류'의 원형 이다)를 번역하였고 이 역시 펭귄총서에 수록되어 있다. 모두 원작의 서정미와 향기를 간직 한 명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처녀작 '가난한사람들'이 나오기 전에 나온 도스토예프스키의 처녀 출판이 발자크의 '위제니 그랑데' 번역이었다는 것은 알려진 일이지만 이들 모두의 경우 번역은 전문영역과 연관된 진지한 지적 노력이었다. 따라서 믿을 만한번역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제1외국어 연마와 문학경험을 동시에 성취할 수 있는 알맞은 수준의 번역서 찾아 읽기도 문학을 공부하는 젊은이들에겐 적극 권장되어 좋을 것이다. 서양 쪽 명작소설을 읽고 재미가 없다고 느끼는 것은 문체가 주는 언어예술성이 사라진 번역본에서 줄거리 위주의 재미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비단 문학작품의 경우만이 아니다. 니이체, 프로이트를 위시한 철인이나 사상가들이 모두 뛰어난 문장가요 스타일리스트란 사실은 문체가 단순한 수사가 아니며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현실인식과 깊게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정독·반복적 독서·난폭독서
즐기면서 배우는 몰입적 독서를 실천하다 보면 부지중에 자기 나름의 독서법이 개발되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사상의학에서는 체질에 따라서 처방이 달라진다고 말하는데 독서 기술도 취향과 성향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획일적으로 유효적절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뛰어난 독서 대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거론하는 조언과 충고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진리란 것이 대체로 가깝고 비근한 것이기 마련이지만 다독과 정독을 빼놓는 사람은 없다 싶이 하다.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두루 널리 읽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동일한 책의 반복적 독서이다. 백 번을 읽으면 책의 문리가 절로 트인다는 것은 옛 선비들이 숭상하고 실천했던 독서법이다. 눈빛으로 말미암아 책장에 구멍이 뚫렸다던가 책 표지가 너덜너덜하게 되었다던가 하는 것이 독서인에 대한 과장 섞인 칭송의 삽화였다. 책의 생산과 보급이 비할 바 없이 영세하였던 시대의 얘기이긴 하지만 반복적 독서의 유효성은 경험과 실험에 의해서 곧 증명될 것이다. 재독과 삼독을 통해서 첫 번째 때 간과했던 부분이 부각되며 그 의미가 새로워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낯선 경험이 아닐 터이다. 반복적 독서 때마다 새로운 국면을 제시할 수 있는 잠재가능성을 풍요하게 내장하고 있는 책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전일 것이다.
반복적 독서는 책이 귀했던 옛사람들만의 독서법이 아니다. '행복론'의 저자로 알려진 프랑스의 알랭은 철학 교사였다는 직업적 필요성과도 관련되겠지만 '파르므의 승원' '적과 흑' '골짜기의 백합'을 50회나 거푸 읽었다. 대장편인 '전쟁과 평화'를 열번 이상 읽었고 플로벨의 '브바르와 뻬큐셰'를 스무 번 읽었다 한다. 좋아하는 산문가로 디드로, 좋아하는 시인으로 셰익스피어, 아이스킬로스, 괴테를 들고 있는 마르크스는 해마다 아이스킬로스를 희랍어 원전으로 다시 읽고는 했다는 것이 그의 사위인 폴 라파르크의 '마르크스의 회상'에 나온다. 톨스토이는 75세의 노령에 셰익스피어를 문학적으로 부정하다 싶이하는 신랄한 평문을 썼는데 평소의 지론을 재확인하기 위해 다시 전집을 통독했다고 말하고 있다. 50년 동안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러시아말 , 영어, 또 독일어로 읽었고 잘된 번역이라는 쉴레겔의 독일어 역본으로 여러번 읽었지만 혹시나 하고 다시 통독했다는 것이다. 직업적 특성과 관련된 특수사례이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책읽기의 길잡이가 되는 삽화라 할 수 있 다.
해석학에서 쓰는 말에 '해석학적 순환'이란 것이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비교함으로써 이해한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부분으로 이루 어진 체계적인 단위 속으로 형성되어 들어간다. 가령 하나의 문장은 하나의 단위이다. 우리는 개개 단어를 문장 전체와 연관시켜 봄으로써 이해한다. 한편 전체로서의 그 문장의 의미는 개개 단어들의 의미에 의존한다. 전체와 부분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 의해 전체는 부분에게, 또 부분은 전체에게 의미를 주게 마련이란 것이다. 따라서 이해란 순환적이다. 부분의 경우 해석학적 순환의 진실성은 더욱 현저해진다. '오이디푸스왕'처럼 완벽한 구성을 갖춘 작품에서 불필요한 부분이나 세목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 사소한 세목이 불가결의 요소라는 것을 전체를 알고 날 때 새삼 확인되는 것이다. 이해의 순환성을 이해할 때 반복적인 독서의 중요성은 다시 부각되는 것이다.
반복적 독서에 값하는 책은 정독에 값하는 책이기 때문에 정독과 반복적 독서는 결국엔 같은 것이 된다. 정독에 관해서도 시읽기는 좋은 모형이 되어 준다. '잘 빚은 항아리'라고 어떤 비평가가 명명한 바 있는 명편의 시에서 글자 한자의 더함과 빠짐, 낱말 하나하나의 위치 변경이나 대체는 커다란 차이를 빚어낸다. 시편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한편의 시를 음미한다는 것은 낱말의 시행과 그 시행의 연결이 대체할 수 없는 필연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그 필연성에 경탄하는 일이기도 하다. 집중과 압축과 비약과 대조와 비유 등 시의 모든 장치는 꼼꼼히 읽기를 요구한다. 시는 성질상 정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정독을 습관화하는데 있어서도 반복적 독서를 위해서도 모형이 되어 주는 것이다. 앞서 누누이 주목해 본 시읽기의 중요성은 다시 보강 사안을 획득하는 셈이다.
정독에 일단 습관화되면 허술한 속독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정독에 값하는 책에 대한 선택적 안목의 획득은 많은 책의 독서 경험을 요구한다. 속독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봇물 터져 쏟아지는 책들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속독이 반드시 정독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속독은 고도의 정신집중을 요구하며 따라서 자연히 정독의 성격을 띄게 마련이다. 다만 내용상으로 꼼꼼한 사고를 요구하는 데도 기계적인 고속에 의존할 경우 책읽기는 단순히 활자를 따라가는 눈 운동으로 그칠 공산이 커지는 것이다. 외국어 학습의 경우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잘 모르는 국지적 세목에 지나치게 구애받아 뒷걸음질쳐 다시 읽어 내려오는 일을 되풀이하면 속독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정독은 속독에 의한 반복적 독서가 훨씬 효과적이다. 미진한 구석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다시 책 첫머리부터 시작하거나 해당되는 장(章) 첫머리부터 시작하는 반복적 독서는 독서법 으로서는 권장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허술한 속독으로 잃는 것이 없다 싶이한 책도 허다하다. 이러한 책은 정독의 값하는 책을 판단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 라디게는 십대 말에 읽을 만한 소설을 써내어 조숙한 천재라는 세평이 자자했던 프랑스의 작가인데 그는 소설 지망생에게 가끔 졸렬한 작품을 읽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 적이 있다. 조숙한 재사들에게 특유한 악동(惡童)의 반어적인 어조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졸렬한 작품에 염증을 내면서 바로 그 정반대 되는 것을 구상하고 글쓰기를 실천하면 좋은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이른바 악서(惡書)라는 것은 이와 같이 반면교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므로 독자가 주체적이고 선택적인 안목을 기르고 취득하는 일이다. 그러나 의미에서 허술한 속독이나 난폭 독서도 필요하며 그 나름의 유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난폭 독서와 정독과 반복적 독서의 습관화 및 동시적 실천은 궁극적으로 독자적 독서기술의 체득으로 귀결될 것이며 독자를 독자적 판단력을 갖춘 주체적 독자로 형성시켜 줄 것이다. 다소 역설적으로 말하면 주체적 독자로 태어나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문학 독서의 경우 특정작가나 시인에 대한 선호도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이럴 때는 선호에 따라 그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는 것이 좋다. 가능하다면 작품 전체를 읽어보는 것도 좋다. 외국의 대작가의 경우엔 어렵겠지만 상대적으로 작품량이 적은 국내작가의 경우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작가의 변모나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도 흥미 있는 일이다. 한 시인, 작가가 어떻게 변하며 그러는 한편 또 얼마나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드러나서 인간 연구로도 진진하다. 또 앞서도 주목한 부분의 이해 없이 전체를 이해할 수 없으며 전체를 이해하지 않고서 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도 될 것이다.
이렇게 선호하는 시인 작가에 대한 집중적 탐구적 독서는 그러나 편향된 독서의 권장은 아니다. 편식이 건강에 좋지 않듯이 독서에서의 편식도 정신건강에 좋은 것은 아니다. 편향적 독서는 비교와 대조의 한 항목을 지워버림으로써 건전하고 온전한 판단력 형성에 장애가 되기 십상이다.
취향이나 입맛이란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문학이나 예술의 경우에도 사정은 같다. 끝에 가서 독자를 놀라게 하는 의외 결말 흐름의 모파상 단편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 읽었으면 단편소설이란 장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는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얼마쯤 작위적인 의외 결말보다 삶의 실감이 더 진하게 배어있는 체홉 단편이 윗길이란 것은 양자의 대조적인 읽기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재능이 잘 드러나는 재담의 보물창고처럼 보이는 그의 사교계 희극은 구성을 아랑곳하지 않은 듯이 보이면서도 사람살이의 기본적인 우스움과 슬픔이 드러나는 체홉의 희곡과 비교할 때 피상적이고 경박한 것임이 드러난다. 편향된 독서는 비교에 의한 판단을 불가능하게 하여 일찌감치 폐쇄된 자아를 형성하게 될 위험성이 많다.
한동안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광의의 지적 급진주의가 풍미하였다. 학생들의 써클 모임이 경쟁적으로 급진주의의 각종 이론을 흡수 수용하며 그 열기는 정규 학업에 쏟아야 할 정력을 완전히 제압하는 듯한 양상마저 띄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과격하면 과격할수록 도덕적 정당성과 지적인 정통성을 구현하고 있다는 구호적이고 획일적인 단순 사고가 위세를 떨쳤다. 이러한 상황이 조성된 것은 설득보다도 물리적 강제에 의존한 정치형태, 위기의 계속적인 호소를 통한 사회통제, 산업화에 따른 공장 노동자의 증가, 경제성장이 빚어낸 빈부차의 격화와 이에 따른 박탈감의 만연 등 제반 사회 정세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었다. 일반적 불신풍조는 기성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적대적 부정적 시각을 전파하였다. 불행한 상황에 대한 하나의 반응으로 대두한 지적 급진주의에 대해서 일방적인 매도를 가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것은 일정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급진주의는 일체의 지적 관용성을 원리적으로 배척함으로써 편향된 시각으로 일관하고 움직이는 세계에 대해 눈을 감음으로써 현실감각의 결여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추세의 부작용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편향된 독서가 유행하여 편식 현상이 두드러졌다. 서양 고전과 이른바 정전(正典)에 대한 이데올로기 폭로의 이론이 유행하여 고전이나 정전 자체를 송두리째 무시하는 풍조마저 생기게 되었다. 문과 학생이나 문학도 사이에서도 특정 지적 계보의 이론서는 탐독하나 정작 문학작품 자체는 도외시하게 되었다. 문학 작품도 특정 유형의 것만을 문학으로 간주하는 기풍이 농후하였다.
이러한 편향성은 반드시 급진주의에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인문주의 전통을 딛고 섰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문학숭상과 애호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전에 본 독일영화의 한 장면은 극히 인상적이었다. 로자 룩셈부르그의 생애를 아주 충실하게 다룬 이 영화는 일차대전 휴전 후 '붉은 로자'가 군경에게 피살된 후 시체가 운하 속으로 던져지는 것으로 끝나는 충직한 연대기적 영화이다. 혁명운동으로 투옥된 로자에게 그녀를 존경하는 여자 간수가 꼭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한다. 로자가 추천한 책은 혁명적 사상 서적이 아니라 '안나 카레니나'였다. 공산청년동맹을 방문하고 들렸던 레닌은 책에 열중해 있는 청년의 어깨를 치며 '푸시킨을 읽고 있나?' 하고 물었다. 청년은 반동 시인 푸시킨이 아니라 혁명 시인 마야코프스키를 읽고 있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레닌은 "마야코프스키보다 푸스킨이 훨씬 위대한 시인이라네"라고 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소아적 질환을 앓고 있는 아류들일수록 선명 경쟁을 일삼으며 과격성을 지배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극히 낯익은 역사와 현실 속의 사례이다. 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예술표현의 자유를 허용해서 가령 푸르스트 소설을 번역 출판하고 문교위원 루나찰스키가 거기 서문을 부치기도 했던 소련은 그후 스탈린주의의 완전 통제체제로 돌입한다. 그때 이미 소련 사회주의의 문화적 정치적 실패는 예고된 것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편향된 교조만 있을 뿐 지적 자유가 없는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현실을 향해 열려 있는 개인들이 성장할 리 없다. 처음 강연 원고였다가 1922년에 발표한 '괴테와 톨스토이'에서 토마스 만은 '마르크스가 흴덜린을 읽을 때에야 비로소 사회주의는 참으로 그 국민적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적고 있는데 참으로 예언자적 통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흴덜린을 읽기는커녕 그 존재조차 허용치 않았던 사회의 구경이 어떤 것인지는 이제 분명해졌다.
편향된 교조가 사회를 마비시키게 되듯 편향된 독서는 개인의 밋밋한 성장과 잠재성의 개화에 장애가 된다. 그것은 일조의 자승자박이다. 이 세계최상의 정신과 친숙해진다는 교양을 위해서건 인간 형성을 위해서건 경험에 대한 개방성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문학독서가 주는 즐거움과 이점은 상상 속의 경험을 확대시켜 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공명적 이해심이 많은 품성을 도모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동서의 인문주의적 전통이 이 점에 관해서 사실상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정보사회라고 하는 오늘날 우리는 실제적 필요와 지식정보의 획득을 위해서 독서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일정한 목적의식이나 문제의식을 안고 달려드는 독서일수록 사실은 능률적인 것이다. 르네상스적인 만능의 인물이었던 괴테는 그림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는 그림의 대상이 되는 집이나 새를 더 잘 관찰하기 위해서 그리는 것이라고 의아해 하는 주위 사람에게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그림은 그리겠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집이나 꽃을 관찰하면 분명하고 세밀하게 그 대상이 떠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정한 주제의 식이나 문제의식을 가지고 독서를 할 때 보다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독서행위가 성립될 것이다.
오늘날 기술정보사회의 시민이 취득해야 할 상식과 정보는 무량하게 많다. 간단히 읽기, 쓰기와 셈하기 능력만 갖추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문맹(文盲)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다. 오늘날 사정은 이미 동일하지 않다. 자동차 운전이나 컴퓨터 조작이 바야흐로 새 시대의 '문맹' 탈피조건으로 부상하고 있다. 현대인 앞에는 그만큼 구비해야 할 기본적 조건과 자질이 수없이 기다리고 있다.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신경과 시간을 바쳐야 할 세목도 증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시인이 얘기한대로 인간정신이 마련해 낸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세계는 언어로 된 책의 마법세계이다. 그 세계 속에서 현명한 주민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할 것이다. '초읽기'야 말로 지혜로운 책읽기의 왕도일지도 모른다. 평생을 시간 낭비 없이 보낸 괴테, 우리 사이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하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 괴테는 자기 손자를 위한 기념 수첩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시를 적어 놓았다 한다.
한 시간은 일 분(分) 60개 있다.
하루에는 천 분이 넘게 있다.
아이야 기억해 두려므나
사람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