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향, 성북동 비둘기
오늘은 맑음. 나는 모처럼 동네 뒷산을 오르다 내 앞에서 열심히 먹이를 찾아 쪼아 먹는 비둘기 가족을 만났다. 그 평화스런 광경을 보는 순간, 문득 고교 때 국어책에서 읽었던 김광섭님의 ‘성북동 비둘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련한 내 어린 시절 추억과 이 시의 의미를 열정적으로 강의하시던 고영 선생님(상아탑 학원-완전국어 저자)도 함께….
비둘기, 평화를 상징하고 인간과 가장 친밀한 새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 개체 수가 너무 많이 늘어 농가나 도심에서 불청객으로 전락, 경계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비둘기는 크게 야생과 집비둘기로 나뉘는데, 그 중 집비둘기는 약간의 경계심은 있으나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또 그들은 늘 공동체적인 삶을 자랑하듯, 떼를 지어 다닌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
성북동, 나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동네이다. 난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더 나은 꿈을 키우기 위해 한양 서울로 유학을 왔다. 그때 첫 하숙집이 성북동이었다. 이곳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친척 고모님 댁이 있었고, 어린 나를 친지 가까운 곳에 두면 조금은 안심이 될 거라는 아버지의 판단 때문이었다. 나 또한, 의지할 수 있는 사촌 형제들이 있어 좋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객지생활이 약간 익숙해진 나는 하숙생활을 청산하고 ‘성북동 비둘기’ 詩의 배경이 되었던 ‘꿩의 바다’에 방을 하나 구해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나름 외롭고 힘들었지만, 나만의 자유 공간과 독립심을 키울 적절한 기회가 되었다. 그런데 이곳은 신기하게도 자고 일어나면 없었던 집이 하나 둘 생겼다. 알고 보니 무허가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북동 ‘꿩의 바다’는 관에서 출동한 철거반과 주민 간에 빈번하게 격돌하였다. 그 시위의 강도는 어느 때의 경우, 거의 전쟁을 방불케 했다. 난 그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동네 생활에 적응을 잘했었다. 그리고 이때 많은 친구도 사귀게 되었다. 아마 그런 요인은 호기심 많고 겁 없는 사춘기, 절정의 反抗期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새로운 경험들은 그나마 나의 의식을 이만큼 성장시켰던 밑바탕이 되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김광섭님의 ‘성북동 비둘기’ 詩 속 애틋한 감성의 언어들이, 나의 뜨거운 가슴에 열화와 같은 화살로 팍팍 꽂혀왔다.
여기에 '성북동 비둘기'를 올린다.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廣場)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祝福)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採石場) 포성(砲聲)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九孔炭)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平和)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이처럼 과거 성북동 ‘꿩의 바다’는 삶의 마지막 피난처인 막장과 같은 곳이었다. 또 양극화의 표상이었다. 그리고 부와 빈, 삶의 대비가 극명하게 나타난 곳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 성북동은 나름대로 모양새를 갖추었고, 지금은 서울을 대표하는 전망 좋은 숲 속의 낙원으로 자리 잡았다.
각설하고, 이 시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분석해보면 대충 이렇다. 전체적으로 보면 상징적, 주지적, 우의적, 문명 비판적 성격을 띠고 있다. 구성은 1연-삶의 터전을 잃은 비둘기. 2연-문명에 쫓기는 비둘기. 3연-사랑과 평화를 낳지 못하는 쫓기는 비둘기이다. 또 주제를 나눠보면 먼저 자연의 파괴와 인간성 상실의 비판, 파손되어가는 자연에 대한 향수, 현대인의 소외 의식과 생에 대한 달관, 자연에 대한 향수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김광섭님은 자연과 인간이 모두 사랑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소박한 공동체 의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난 오늘 모처럼 동네(상도동) 뒷산을 오르다 '사랑과 평화의 비둘기'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다른 날과 달리 그 비둘기를 통해 내 어린 시절 거룩한 추억과 기억 속의 국어 선생님을 가슴으로 만나 詩 ‘성북동 비둘기’를 새롭게 만났고, 또 그 속에서 詩人의 혜안, 사물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식견도 만났으니, 오늘의 이 모든 현상은 향(向-香-響)의 탄식이다.
한 많은 성북동 비둘기여! 그대에게 진정 바라오.
이제는 내 조국 사랑과 평화를 위해 아름다운 잿빛 날갯짓으로,
이 한반도 창공을 서너 바퀴 휘감아 돌아다오.
오늘의 맑은 순간, 아우라 別童 쓰다.
<부록>
보고 싶은, 성북동 비둘기들에게 告한다~
나의 성북동 비둘기들 성일, 남훈, 기형, 진수, 재규, 성철, 치선, 봉수…. 이들 말고도 수없이 많은데, 솔직히 더는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다. 35년이나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 너희가 지어준 별명 겁 없는 ‘짱고'다. 기억 나냐!? 아직 여전히 건재하다.
나, 니네들과 성북동, 혜화동, 돈암동을 누비고 다닐 때, 다른 생쥐-비둘기들과 패싸움하면 자찬 같지만, 내가 항상 맨 앞에 나서 맞장 까고 그랬지. 너희는 솔직히 그 깡다구 땜에 나 좋아했지. 그건 그렇다 치고, 성북고(지금은 홍익고)의 제비 ‘진수’ 너~ 윤수일 밴드 관두고 미국 들어갔다고 소문이 돌던데, 그곳에서 잘 살고 있느냐? 간혹 TV에서 윤수일 밴드 과거 영상 뜨면 너 면상도 살짝 보여, 대개 반갑고 보고 싶어지더라. 또 경신고의 깜지 ‘성철’이는 사이판에 들어가 호텔사업하고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그의 형님을 통해 들었고, 나의 사촌 균명고(지금은 환일고)의 멋쟁이 ‘치선’은 여수에서 지금 카페 하며 밴드하고 있고, 보성고 나온 재벌 ‘기형’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 잘 관리하고 있냐? 우리 한때, 그 녀석 집에 놀러 갔다가 한마디로 쪽팔렸지. 잘 살아도 적당히 잘 살아야 한데 말이야.ㅎㅎ 또 용문고의 펠레 ‘남훈’이는 축구 그만두고 해군에 말뚝 박아 다더군. 계속 했으면 지금쯤 국가대표 감독은 됐을 텐데 조금 아쉽다. 그리고 그 잘난 성북동 토박이에 성북고의 얼짱인 ‘성일’이는 도대체 뭐하고 사냐? 그 넘은 타고난 조각미남이었는데. 그래도 그 녀석 순진해서 여자 앞에선 벌벌 떨고 했지.ㅎㅎ 아~그리고 겁은 많았는데 큰 덩치 한몫으로 산동네를 대표했던 ‘재규’, 성이 양氏라 내가 늘 ‘양재기, 양재기’하며 많이 놀렸는데 잘 지내고 있니? 또 항상 꼬장꼬장했던 촉새영감 ‘봉수’, 그 넘은 사실 나보다 나이가 세 살이 많아 한참 형뻘이었는데, 어쩌다 친구가 되었지? 그게 미스터리이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구만.
어쨌든 당시 우리의 나와바리인 성락원, 박물관(지금은 간송미술관), 대원각(지금은 길상사), 만화방, 탁구장, 당구장, 독서실, 81번 종점 등이 마냥 그립다. 그 추억을 다 얘기하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아 다음으로 미루고, 이만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다.
나의 성북동 비둘기들이여~ 정말 보고 싶다. 그리고 사랑한다.^^
-아우라 別童-
P. S.
이 글 '나의 향, 성북동 비둘기'는 2008/1/7 내 네이버 블로그에 실렸던 것인데 오늘따라 성북동이 생각나 이곳에 다시 올렸다.
사랑의 미로/묵리촌장의 하모니카 연주
첫댓글 아우라님의 글을 읽고 있으니 저에 고교시절도 그리워 집니다....자주색 교복에 자주색 모자를 쓰고 만원 버스에 시달리던 모습, 점심시간마다 포크댄스 추러 운동장으로 달려 갔던 시간들....ㅎㅎ.....잠시라도 그 때의 점심시간으로 가고 싶어집니다...
여고시절, 이수미 씨가 불렀던가요? 어느 날 여고시절 우연히 만난사람, 변치말자 약속했던 우정의 친구였네... 아름다운 노랫말이 떠오릅니다. 아우라의 남고시절은 그림보담 보컬그룹을 만들어 음악에 푸욱 빠져 지낸 기억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음악하는 친구들이 많죠. 아무튼 이 글이 옛 추억을 상기시킬 수 있어 다행입니다.ㅎㅎ^^
제가 지금 그곳에사는데 수십년전 모습이 상상됩니다.
성북동 귀한 분을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어쩌다 가끔 간송미술관, 운향미술관(김기창 화백 기념관)에 좋은 전시회 보려고 성북동엘 가는데 넘 많이 변했더라고요. 삼선교에 있었던 그 옛날 나폴레옹제과점은 그대로 있었던 것 같고, 삼선교에서 성북동으로 진입하는 길 옆 실개천은 전부 복개공사를 해서 도로로 변해 있더라고요.ㅎㅎ^^
우리 국어 선생님은 성북동 비둘기를 외우라고....그땐 입에 달고 살았었는데, 저도 학창시절이 그립네요. 아우라님이 만들어준 소 동상이 있는 정선~~~~^^*
저 또한, 3의 고향인 정선이 그립습니다. 제 지울수 없는 흔적이 여러 곳에 있기에... 내 마음의 아름다운 고향~ 아리랑의 정선, 파이팅!!!
비둘기에 얽힌 아름다운 사연, 잘 읽었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줘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동네 변천사를 보고있는듯합니다 78년에 성북동에와 지금껏 살고 있답니다
반갑습니다. 성북동은 저의 두 번째 고향이나 다름없는데, 그 물 좋은 곳에서 그토록 오래사셨다니 부럽습니다. 78년부터 사셨으면 터줏대감이나 다름없잖아요. 감축드립니다. 성북동은 동(홍익고), 북(길상사), 서(경신고)로 나눠졌는데 어느 방향에 사실까? 그것이 궁금하군요.ㅎㅎ^^
보는이들의 옛추억을 불러일으키는군요~~전 성북동 가까이에 살고있네요~~^*^
사적인 얘기가 너무 지나쳐 조금 쑥스러웠는데, 좋게 봐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오늘은 북악스카이웨이를 마냥 달리며 서울의 잿빛전경을 바라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