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이후 서방의 대러 제재 조치에 따라 러시아에 진출한 미국과 유럽, 일본의 주요 자동차 업체들은 현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이어 하나 둘 자산을 매각하고 러시아를 떠났다. 러시아의 자동차 산업은 무려 60~70%나 무너졌다는 평가가 나올 만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 가량 지난 지금, 러시아 자동차 산업이 다시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선, 신종 코로나(COVID 19) 팬데믹(대유행)에 이은 전쟁 발발로 붕괴했던 자동차 수요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폭발하는 자동차 수요
러시아의 자동차 산업 분석 기관인 '아프토스타트'(АВТОСТАТ, 영어식으로 AUTOSTAT) 8월 16일자에 따르면 러시아의 자동차(승용차·SUV) 판매는 지난 7월 유럽에서 상위 5위권으로 다시 진입했다. 이 기관은 유럽 자동차 제조업체 협회의 자료를 인용, 지난 7월 한 달간 러시아의 자동차 판매는 9만5,654대로, 전년 대비 168.8%(100% 증가를 두배로 보면, 2.7배/편집자)나 늘어났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자동차 운반 트레일러
가장 많이 판 유럽국가는 역시 독일로, 전년 대비 18.1%가 늘어난 24만3,277대를 기록했다. 그 뒤를 영국(143,921대, 28.3%), 프랑스 (128,947대, 19.9%) 이탈리아 (119,207대 8.8%)가 이었다. 5위에서 밀려난 스페인은 6위.
폭발적인 판매 증가 추세는 8월에도 식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현지 매체 rbc에 따르면 8월 첫째주(7월 31일~8월 6일) 러시아의 신차 판매는 2만8,295대로, 우크라이나전 개전 이후 최고점을 찍었다. 전주(7월 24~30일) 대비, 10% 증가한 수치다.
물론, 아직은 과거와 비교하면 미흡한 수준이다. 러시아의 자동차 시장 규모는 연 150만~200만대로,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의 약 2%를 점해왔다.
러시아의 자동차 물결/사진출처:픽사베이
러시아 자동차 시장의 폭발적 성장은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산 차량들에 의해 가능했다. 현대·기아차 등 서방 자동차 기업들의 공장 가동 중단과 철수로, 러시아는 지난해 내내 공급 부족에 시달렸다. 현지의 자동차 생산량이 2021년 140만대에서 지난해 45만대로 급감했기 때문이다. 소련 붕괴 이후, 30여만의 최저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 자동차 기업들이 러시아 진출을 확대하면서 시장 상황은 급속히 달라졌다. 체리, 지리, 하발, 창안 등 중국 6개 브랜드가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한 유럽,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현지 생산량도 크게 늘리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서방 자동차 회사들이 소유했거나 가동했던 러시아 내 공장 6곳이 이미 중국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거나, 앞으로 생산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러시아 시장 장악한 중국 브랜드, 현대·기아차 악전고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과 (역외 영토에 있는) 칼리닌그라드 아프토토르 공장에서 자동차 생산을 중단한 현대·기아차는 러시아 시장 점유율이 계속 뚝뚝 떨어지고 있다.
분석기관 아프토스타트 8월 4일자에 따르면 7월 한 달간 러시아 토종 브랜드 '라다'가 2만7,376대(점유율 29%)를 팔아 1위를 고수했고, 그 뒤를 체리(10,735대), 지리(8,785대), 하발(8,548대), 창안(5,248대), OMODA(4,558대), EXEED(3,660대) 등 6개의 중국 브랜드가 이었다. 지난 6월 판매량도 거의 마찬가지 순이었다. 중국 자동차의 러시아 시장 점유율은 이제 50%에 육박한다.
가장 인기 있는 외국 자동차 모델은 중국 체리 SUV인 'Tiggo 7 PRO Max'로 7월 한달간 4,815대가 팔렸다. 그 다음은 체리 소형 SUV인 'Tiggo 4 PRO'였다.
중국 자동차 브랜드 지리 KX11/현지 브랜드 홈피
중국 체리의 'Tiggo 7 PRO Max'/사진출처:홈피
한때 러시아 시장에서 외국 자동차 점유율 1.2위를 다툰 기아는 3,198대로 8위, 현대는 2,663대로 9위에 머물렀다. 10위는 토요타(2,329대)였다. 문제는 현대·기아차의 판매율이 자꾸 떨어진다는 점. 현지 전문가들은 판매 상위 10개 브랜드 중 '한국 브랜드'만 지난 달(7월) 20% 안팎의 하락세를 보였다고 지적한다.
중국의 대러 자동차 수출은 최고 기록을 세웠다. KOTRA에 따르면 중국은 2023년 상반기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대 자동차 수출국으로 등장했다. 1~6월 중국 자동차 수출 규모는 전년 동기 대비 76% 증가한 214만대로, 러시아 시장에만 34만 1,000대를 공급했다. 전년 대비 6배나 늘어난 수치다. 이로써 중국 자동차 수출 시장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해 상반기 3.7%에서 올해 상반기 11.4%로 높아졌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의 자동차 시장은 현지 브랜드와 중국 브랜드 중심으로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다. 아프토스타트 집계에 따르면 올해 1~7월 러시아의 자동차 전체 판매량은 전년 동기보다 28.2% 증가한 49만7,230대를 기록했으나, 상위 10개 브랜드 중 7개 브랜드(토종 브랜드 라다와 중국산 6개)는 판매 증가세를 보인 반면, 기아, 현대, 토요타는 판매가 42%~57% 감소했다.
이같은 현상에 대햔 러시아의 반응은 결코 나쁘지 않다. 현지 자동차 부문 컨설턴트 블라디미르 베스팔로프는 "중국 자동차의 비중이 커지는 것이 러시아에도 이득"이라며 "서방 기업들이 철수한 뒤 놀고 있는 공장을 가동하고, 고용을 유지하거나 늘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올해 하반기에도 공격적으로 러시아 시장을 공략할 것으로 전해졌다. 아프토스타트의 조사에 따르면 올해 남은 5개월 동안 20개 중국 자동차 브랜드가 무려 46개 새 모델(전기차 13개 포함)을 러시아 시장에 출시될 예정이다.
러시아에 등록된 중국 자동차도 이미 100만대를 넘어섰다. 아프토스타나는 25일 러시아에 등록된 중국산 자동차는 7월 현재 108만 대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전체 등록 대수의 2.4%를 차지한다. 중국 브랜드 중 1위는 체리(28%), 2위는 지리, 3위는 Lifan이다. 여기에 하발과 Great Wal를 합친 5대 브랜드가 등록된 중국 자동차 전체의 85%에 이른다.
◇중고차 시장서 사랑받는 현대·기아차
다행히 현대·기아차와 일본의 도요타 혼다 등은 러시아 중고차 시장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에 따르면 6, 7월 두달간 러시아의 외국 중고차 수입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81.1% 증가했다. 5월부터 시작된 수입 열품은 6월, 7월로 이어졌고, 수입 중고차 비중이 자동차 전체 공급량의 2%로 늘어났다. 작년만 해도 0.7%에 불과했다.
수입 중고차 인기 브랜드는 현대·기아차와 토요타, 혼다, 닛산이다. 자동차 모델로는 현대 싼타페 중고차가 가장 많이 수입됐다. 가격은 평균 275만 루블(약 3천850만원).
현대차의 신형 산타페(위)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홈피
현지에서는 러시아 시장을 떠난 서방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러시아로 돌아올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일찌감치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한 프랑스 르노·닛산을 비롯해 미국의 포드, 일본의 마쓰다 등이 현지 파트너에게 자산을 양도할 때, 주식을 되살 수 있는 옵션을 걸어놨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 복귀가 너무 늦어지고, 자동차 시장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서방 자동차 회사들이 러시아로 돌아오는 게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콘설턴트 베스팔로프는 "그들이 떠난 사이에 러시아 자동차 시장의 구조와 규칙, 규제가 크게 바뀔 가능성이 있다"며 "러시아 소비자들이 서방 자동차 브랜드에 대한 애착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그들이 러시아에서 이전처럼 일을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