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5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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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 많은 제자 토마스에게 발현하십니다. 그러시고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승복합니다. 자신을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스승님의 애정에 감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의심 많은 토마스의 모습이 없는지 묵상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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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대답했다 (요한 20,19-31)
"Put your finger here and see my hands, and bring your hand and put it into my side, and do not be unbelieving, but believe."
Thomas answered and said to him,
"My Lord and my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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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 신자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며 살았고,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용감히 전한다.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의 모습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은 세상을 이길 수 있다(제2독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빌어 주신다. 그리고 의심하고 있던 토마스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시어 믿게 하신다(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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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다녀가셨던 날 저녁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다고 한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시어 직접 당신을 만져 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토마스는 그제야 예수님의 몸을 보고 만질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어느 유태인이 학살당하기 전 지하 감옥 벽에 이런 글을 써 놓았습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을 믿습니다. 주위에 사랑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지만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비록 침묵 속에 계실지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믿음은 비록 지금 구름이 가려 보이지 않지만, 구름 너머에 태양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비록 들리지 않지만 침묵하며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 마음을 모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주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거기에는 두려움이나 불안이 없습니다. 그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는 고백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믿음은 죽음의 강을 건너게 하는 다리입니다. |
말씀의 초대
초대 교회는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 사도들에게 바쳤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었던 것이다. 부활의 연장으로 재림을 받아들였던 것이다(제1독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야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다.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라야 세상을 이긴 사람이다(제2독서). 토마스의 변화는 예수님에 대한 감동 때문이다. 의심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자신을 위해 한 번 더 발현하신 스승님의 애정에 감복했기 때문이다. 부활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다. 부활은 깨달음이며 은총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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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없었습니다. 그는 밖에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무서워 숨어 있었지만 그는 개인적인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자신감에 찬 토마스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합니다. 못 믿겠다고 선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토마스는 스승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다시 살아나실 거라면 왜 죽어야 하셨는가? ‘죽음의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부활하셨다는 동료들의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지나친 발언이었습니다. 그런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타나십니다. 순전히 토마스를 위한 발현입니다. 그러시고는 말씀하십니다.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 말씀에 토마스는 엎드립니다. 눈으로 확인했기에 엎드린 것은 아닙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자기를 위해 ‘한 번 더’ 나타나신 스승님의 애정에 감복했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이론은, 사람을 설득할 수는 있어도 승복시키지는 못합니다. 사랑과 애정만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승복하게 합니다. 이후 토마스는 주님의 사도가 되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는 결코 의심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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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일은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아무 탓 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요셉이 자기를 웅덩이에 처넣고 미디안 상인에 팔아 버린 형제들을 이집트 궁궐에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는 눈물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도 용기를 내어 우리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이웃을 용서합시다. 하느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볼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강선남-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모르는 제자들은 두려움과 실의에 빠져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습니다(20,19). 요한은 그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하며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세력들이 언제 어느 때고 자신들도 잡아갈 수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따라왔던 스승의 맥없는 죽음에 대한 절망감과 그분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에 더하여 자신들의 미래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자괴감과 울분이 만들어 낸 두려움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로와 평화를 얻기에 동료들의 체온으로는 부족합니다. 마음이 하나로 모이기에는 너무 지쳐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고 닫혀 있는 이들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닫혀 있는 그들의 집과 마음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스승이 돌아오시리라는 기대는 손톱만큼도 하지 못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 쪽에서가 아니라 온전히 예수님 당신의 뜻에 의해 그 집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잃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고통을 통해 얻으신 평화이며, 죽음을 통해 이루어 낸 평화입니다. 당신의 희생으로부터 온 평화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로마 4,25)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하실 때, 거기에는 당신이 고통을 통해 성취한 화해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자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합니다(요한 20,20). 당신 죽음의 승리 표시인 상흔을 보여주자 비로소 제자들의 두려움은 기쁨으로 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16,20) 그들은 이제 열린 눈으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다시 평화를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시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다시 살게 하신 것처럼, 당신 제자들에게 그와 같은 권한과 사명을 부여하시어 사람들한테 파견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와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22절) 우리를 살게 하시는 주님의 숨결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예수님께서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심으로써 제자들은 회의와 갈등과 두려움을 떨쳐냅니다. 이제 닫아건 문을 활짝 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할 힘을 얻고, 스승이 걸어가신 것처럼 벗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버릴 준비를 합니다. 이들 제자들의 파견은 죄의 용서로 이어집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을 것이다.”(요한 20,23) ‘죄의 용서’는 삶을 정화시키고 새로운 출발을 가져오며, ‘나’를 해방시킵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토마스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24절).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하자, 토마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5절) 하고 말합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을 여러 가지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 루카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타난 제자들의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루카 24,11) 아레오파고에서 한 바오로의 연설에서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청중의 비판의 초점이 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사도 17,32)
요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 토마스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곧 다른 제자들의 이야기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토마스에게는 자신의 경험에 의한 증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일주일 뒤에 다시 모여 있을 때 토마스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뒤 처음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와 같은 일이 이번에도 일어납니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예수님은 그 곳으로 들어오셔서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요한 20,26). 그리고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예수님은 토마스가 원하는 경험에 의한 증거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시면서도, 의심을 버리고 믿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은 만지거나 손을 넣어보는 일을 포기하게 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토마스의 반응은 다음과 같은 믿음의 고백으로 표현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그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최고의 호칭인 ‘하느님 그리고 주님’을 사용하여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주님, 경험에 의한 증거를 필요로 하는 저희 모두에게 오늘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간구합니다.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 믿음으로 문을 열고 나가 당신께서 주신 평화를 전하고 싶습니다.
새벽을 열며
얼마 전 신부님들이 제 방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이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청소 좀 하고 살아라. 이게 뭐니?”
하긴 제가 봐도 조금 지저분하기는 합니다. 책상 위에는 저도 모르게 먼지가 소복하게 쌓였고, 책장이 없다보니 한쪽 벽 구석에 대충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면서 누가 깨끗하다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저분하다고 뭐라고 하시는 그 신부님들이 저보다도 더 많이 어지럽혀놓고 또한 정리도 안하시고 그냥 가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래도 네 방에 오면 그냥 편해. 아무데다 뭘 버려도 티가 나지 않아서 그런가?”
워낙 지저분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방의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려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으니 조금 부끄럽기는 하더군요. 그래서 큰 맘 먹고 방 정리를 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정리를 해도 일주일을 채 못 넘기고 또 지저분해지겠지만 저는 청소도구를 잡고서 방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방이 이렇게 지저분하고 정신없어 보이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 거야.’ 라는 생각 때문에 구석에 쌓아두고 있는 많은 잡동사니들. 그래서 방은 점점 더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도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정말로 깨끗한 마음,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나의 마음일까요? 혹시 지저분한 제 방처럼, 세상의 온갖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있어서 너무나도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죽음 이후 이렇게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다락방 문을 닫아걸고는 두려워 떨고 있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이 그렇게 정신없고 지저분한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깨끗하게 잘 정리된 마음을 원하시지요. 그래서 나타나시자마자 첫 마디가 이렇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방을 깨끗이 정리하기 위해서는 내 방에 있을 필요가 없는 것들을 치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의 마음 안에 필요 없는 것들이 치워져야만 했습니다. 즉, 두려움과 의심. 이것들이 있는 한 제자들은 더욱 더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과 의심을 없앨 수 있는 평화를 가장 먼저 주셨던 것이지요.
바로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들고서 우리들 마음의 청소를 위해서 오십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선택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평화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께 대한 증거를 세상에 펼쳤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어떤가요? 주님께서 내게 필요한 것을 들고서 옆에 서 계신데 그것은 전혀 잡으려고 하지 않고, 내 마음을 더욱 더 어수선하게 만들 엉뚱한 것만을 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의 몫을 이미 다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의 선택만 남아있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통해서 누구보다도 행복한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방 청소를 깨끗이 해봅시다.
-빠다킹신부-
토마의 불신앙
-김훈일 신부-
토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토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토마가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후에 그는 신앙공동체인 사도들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의 불신앙을 더욱 키운 것입니다. 둘째로, 토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체험과 경험을 중요시하는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네가 믿는 방식과 내가 믿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중에 당신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내가 한 일들을 보아서라도 나를 믿으라고 했으나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올바로 알지 못했습니다.?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부활을 믿는 것은 그것을 목격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생각해서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불신앙에 빠질 때가 가끔 있습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면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나의 재능이나 세상의 힘과 권력에 그리고 무속에 의지하려 합니다. 또 너무 강렬한 체험만을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기적이 나타났다거나 하는 곳만을 찾아다닙니다. 우리는 불신앙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늘 신앙공동체에 머물러야 합니다. 신앙공동체는 각자의 체험을 나눔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풍부하게 합니다. 기적을 찾기보다 성경의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을 때 마귀의 유혹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역시 안식일 다음날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주간 첫날이며, 새로운 창조의 날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서시며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신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사명을 주시어 파견하신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 즉 구원자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다. 그분이 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 쉬시며 "성령을 받아라!"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에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셔서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창조물이 되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신다. 이는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성령이시다. 성령으로 새로이 창조된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죄를 사하는 권한을 받는다. 우리가 행하고 있는 고해성사가 여기에서 온 것이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자리에 토마가 없었다. 토마라는 뜻은 본래,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다. 완전한 것만 좋아하는지 토마 사도는 쉽게 믿으려하지 않는다. 보아야 믿겠다고 하다가 결국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고백한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된 신앙인들의 고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오늘의 요한복음에서도 "보고 믿는다"라는 형태가 나온다. 그들은 믿음의 제1세대로서 우리에게 확실히 증언하기 위하여 보아야 했고, 증언을 하여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앙은 단지 믿으면서도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선물은 부활이 예수님께 새 생명과 권능을 충만케 해주어 새로운 현존형태와 활동방법을 부여하였다. 이 같이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동일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모습의 당신 자신을 보여주심은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또한 그들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라고 본다.
제1독서: 사도 4,32-35: 한 마음 한 뜻
부활을 체험한 초기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신도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32절) 자기의 재산을 모두 공동으로 사용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34절)고 전하고 있다. 완전한 나눔이 그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 믿음은 주님의 부활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또 성장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모든 형제들과 친교를 이루게 되고, 또한 자신 안에서 새로운 생명과 같은 힘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빈곤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고자 하는 자유로운 마음가짐이다.
제2독서: 1요한 5,1-6: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이제 제2독서에서는 1독서의 주제를 다른 형태로 다루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할 의무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근본적인 요구로 제시하고 있다. 즉 믿음을 통해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이루어지는 '친교'에는 우리와 우리 형제들 사이의 관계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1절). 이것은 의미가 깊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같은 것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2독서를 맺는 구절은 우리를 부활의 충만한 분위기로 이끌어주고 있다.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를 흘리신"(6절) 그리스도께 대한 이야기는 로마 군인의 창으로 열려진(요한 19,34)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는 부활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으신 그리스도의 결실로서의 세례성사(물)와 성체성사(피)를 통해 구원을 이루어주는 물과 피에 대해 암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 우리는 부활팔부 축일을 지내고 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과 '결실'로서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 되어 친교를 그분 안에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믿음이라는 선물이 진정한 사랑의 나눔으로 드러나야 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당신의 신부인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성령 안에서 믿음을 고백하며, 구체적인 삶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묵상길잡이: 현대인들은 실험으로 증명되는 과학적인 것만 믿으려 한다. 그러나 부활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사건은 아니다. 내 눈으로 봐도 믿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서로 공동으로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
1. 토마스 사도는 아주 특별한 사람인가?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증언하는 사도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을 본다. 토마스 사도는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하는 사도들의 말을 믿기보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며 자신의 눈과 손으로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고자 한다. 토마스 사도는 체질적으로 의심이 많고 매사를 철저히 확인하지 않고는 잘 믿지 못하는 분인가? 아니면 평소에 예수께 대한 신뢰나 믿음이 부족한 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들자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11,16)하고 말 할 정도로 예수께 대한 강한 열정과 믿음이 있었다. 며칠 전에 죽고 묻혔던 스승이 다시 살아 나셨다고 하면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보면 토마스 사도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인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복제 인간의 양산(量産)을 서두르며, 우주탐험을 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연과학적인 사고에 깊이 물들어 있는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 부활, 천당, 지옥, 천사, 악마 같은 종교적 진리에 대해서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2. 부활은 이미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 장면을 찍어 둔 비디오 테입이 있다면, 사도들에게처럼 나에게도 발현해 준다면 나도 믿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눈앞에서 죽었던 부모나 가족이 나타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그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당황하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충격을 이기지 못해 병이 날지도 모른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는 상식적으로 또 아무리 눈으로 봐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말하자면 부활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부활은 “하느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에도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를 동산지기인줄로 알았고(요한20,13-14),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본 제자들도 예수를 유령으로 착각했다.(루가24,38)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루가24,16)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예수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부활 사건은 신앙의 차원이지 감각의 차원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의 참뜻을 깊이 새겨야 한다.
3. 부활 신앙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열어준다
오늘 사도행전의 제1독서에는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체험한 원시교회 공동체의 삶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사도4,32-33) 부활을 믿게된 원시교회 신자들은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가진 것을 공동으로 나누는 자발적인 공산주의(공동생활)를 실현하였던 것이다. 이는 세상 것에 대한 애착을 넘어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활한 예수님의 계속되는 발현을 체험하면서,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갖게된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재물이나 부귀영화, 쾌락이나 권력 따위는 참으로 하찮은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사도 바오로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3,8) 고 고백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에겐 이 세상의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돈, 쾌락, 권력을 위해 못할 짓이 있겠는가? 보험금 때문에 처자도 부모도 죽이고, 부모 유산 때문에 형제간에 칼부림하고, 실직 당한 남편과 자식들을 헌신짝 버리듯 팽개치고 자기 편하게 살겠다고 훌훌 떠나고, 부정과 비리를 밥먹듯 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이다. 왜 이 모양인가? 우리가 세상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이기적인 욕심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 아닌가? 참 신앙인은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그 영원한 생명에 우리가 초대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몸소 사신 그 사랑의 삶을 살 때 우리도 그분이 들어가신 참 생명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부활은 매일의 삶 속에서 싹트고 자라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이야기와 토마스 사도가 신앙 고백한 이야기였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집에 모여 있습니다. 때는 안식일 다음 날 저녁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이면 오늘의 주일입니다. 제자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때 가르치신 것과 하신 일을 함께 회상하고,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날 함께 하신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성찬을 거행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성찬 중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첫 번의 발현에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 후 같은 장소와 시간에 토마스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여드레 후는 일주일 후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의 발현도 같은 주일 성찬집회 때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에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초기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 고백 양식 중 가장 단순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보았고, 그분의 삶을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주셨고, 그 성령은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는 곳에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죄의 용서가 제자들의 임의에 맡겨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부정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는 유다인들의 화법에서 온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창세기(2,7)에 보면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진흙으로 만든 사람의 모상에다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숨을 받아 새롭게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절망하고, 도망갔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면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용서와 사랑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 예수님이 실천하신 것이고, 이제는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그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사는 제자들이 실천하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요한 제1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하느님 안에 자기 삶의 기원이 있다고 믿는 하느님의 자녀는 같은 하느님의 자녀인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유럽 중세 초기에 유럽으로 흘러 들어와 정착한 야만인들을 대상으로 발생한 신앙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이주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날 로마제국 국경 밖에 살면서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던 민족들이 제국의 군사력이 쇠퇴하자 제국영토 안으로 몰려들어와 유럽 땅에 정착한 것입니다. 중학교 서양사 교과서가 야만인들의 침입이라고 부르는 사건입니다. 그들은 이주 후 로마제국의 문명과 더불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 책임질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추장이 시키는 대로 따르며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면서, 교회는 먼저 각자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각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일에 대해 보상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 시기에 발생한 개인 고백을 수반한 고해성사 제도였습니다. 죄를 성찰하고 고백하여 자기 죄를 인정하고, 신부로부터 보속을 받아 행해서 자기 책임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까지 교회 안에 실천되고 있는 개인 고백 고해성사의 유래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문맹이고, 자기 잘못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던 시기에 도입된 관행입니다. 오늘 현대인은 자기가 잘못 한 것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은 기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고백을 동반하는 고해성사를 강요하면, 하느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과거에 필요해서 만들어진 고해성사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복음보다 높이 평가하며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초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해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다가 목숨까지 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사는 사람은 죄의 용서를 선포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은폐하면, 예수님의 숨결 따라 새롭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또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고해소에 앉은 신부에게 유보된 특권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 안에 살라계신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복음 위에 군림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배워 실천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에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원 후 100년 경 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그 시대 교회의 실태를 반영합니다. 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당시의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 믿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 잘 되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숨결로 사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오로지 섬기는 사람만 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살아 계셔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르 10,43),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숨결로 살아 실천되는 교회 공동체라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은 인류 역사가 모르던 일이 아닙니다. 용서와 사랑은 인류와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용서가 없고 사랑이 없었던 인류역사는 없었습니다. 그 용서와 사랑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예수님입니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현재 우리의 실천이지만, 장차 하느님 안에 겨자나무와 같은 큰 결과를 기대하는 신앙인들입니다.
-황순찬-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언젠가 여름이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해변 쪽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물에 빠졌어!”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속에 뛰어드는 순간 나는 내가 그 아이의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꼭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바닷속은 완전히 검은빛으로 앞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더듬거리며 바닷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물속에서는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멈춘 것 같기도 하였다. 얼마 동안을 그랬을까? 갑자기 한쪽 발끝에 물컹거리는 것이 있었다. 아이였다. 아이를 물 밖으로 끌고 나와 인공호흡을 하고 깨진 유리조각을 찾아 발끝을 찔러 보고 별짓을 다했다. 그 순간에도 나는 내가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구급차가 오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의료진은 이미 아이가 물속에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쓸쓸함·허망함·안타까움은 아이가 빠진 그 바닷속처럼 검은빛이었다. 나는 내가 그 아이를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하느님과 겨루기 시작했다. 그 바닷가로 달려가게 한 하느님은 믿지만, 그 바닷가에서 아이를 살리지 못하게 한 하느님은 거부하고 있었다. 한동안 꿈속에서 그 검은 바다를 보았다. 그곳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 나올 수 없는 불가항력의 공간이었다. 내 삶에 그런 불가항력의 공간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또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성경의 토마스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부활한 예수님을 대면하기 전, 의심에 차 있던 토마스와 나는 흡사 닮은 꼴이다. 그래서인지 토마스의 회심을 보면서 더 크게 마음이 움직였다. 토마스처럼 나도 주님께 청한다. ‘내 안의 어두움, 내가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수용하고 당신 앞에 담백하게 설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십시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以 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김영수 신부-
보아야만 믿겠다는 토마스의 말처럼 사람은 백번 듣는 것보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인정하고 믿게 됩니다. 하느님을 뵈옵는다는 것은 성서에 나타나 있는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욥기 19, 27)
인생의 의문과 고통 속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뵙고자 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맞대고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고, 삶 속에 드리워진 어둠과 혼돈을 벗어나 참으로 자유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 얻고자 하는 것은 참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뵙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창조물을 통해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알아 뵙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업적을 보아야 합니다. 보는 것이 믿음을 갖도록 이끌어준다 하더라도, 믿음 그 자체가 보는 것을 통해 깨닫는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을 뵙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께로 마음을 향해야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보고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는 것이고, 바로 그런 하느님을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의 눈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육안(肉眼)이고, 그것보다 발전된 것이 뇌안(腦眼)이며, 그것보다 깊은 것은 심안(心眼)이고, 가장 심오한 것은 영안(靈眼)입니다.
우리가 지닌 네 개의 눈 중에서 어떤 눈으로 사물과 현실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볼 수 있는 내용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육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욕망의 수단으로 바라볼 것이고, 뇌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생각하고 따지는데 필요한 내용을 생각하게 될 것이며. 심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바라보는 현실의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참된 진리를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진리를 보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눈은 모든 사물 안에 담긴 본질인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 뵙기를 청하는 이들에게 “와서 보아라”(요한 1, 39)고 하신 것은 보아야만 믿는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며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그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신앙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 현존하셨던 그 분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토마스와 똑 같은 의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신앙은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짊어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수 많은 사랑의 기적들을 통해서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토마스가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은 그의 불신을 드러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인간의 일반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 자체로는 토마스를 탓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일입니다.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보고서도 믿지 않는 것보다 다행스런 일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몇 가지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그 중 하나는 ‘무엇이든지 마음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잘 볼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지 못해서 항상 그보다 덜 중요한 것만을 찾아내기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고 그 앞에 덜 중요한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뵙는 일은 감정이나 이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있으며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랑하는 일, 사랑을 위하여 견디어 내는 십자가만이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양승국 신부-
이제 막 흙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 같은 '초보 수사님'들, 저와는 달리 피부가 '탱탱한' 형제들, 오직 희망으로 가득 찬 수련자 형제들과 한적한 바닷가로 연피정을 다녀왔습니다.
바닷가 날씨는 때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도 잔잔하던 바다, 그래서 호수 같은 바다였는데, 순식간에 세찬 바람과 함께 높은 파도가 몰려옵니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인자한 노인 같던 바다는 어느새 화가 잔뜩 난 난폭한 젊은이로 바뀌고 맙니다.
그런 성난 바다, 갯바위 위에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뺨에 와 닿은 바람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몸에 느껴지는 바람의 강도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먹장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신속히 구름이 걷히면서 하늘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특별한 감정이 밀물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내 인생에 드리웠던 먹구름들도 언젠가 활짝 걷힐 날이 있을 거야, 하느님 은총으로 내 신앙여정에도 저리 고운 옥색하늘이 반드시 열릴 거야' 하는 충만한 희망이 솟구쳐 올라오더군요. 잠시 동안이었지만 너무나 은혜로운 체험이었습니다. 피정의 결실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도자로 살면서도 삶이 왜 이다지도 허황된가, 왜 이다지도 인생이 허전한가, 생각해봤더니 문제 원인은 한 가지더군요. 하느님 체험의 결핍. 그분과 1대1의 긴밀하고도 인격적 만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보니 그리도 삶이 '팍팍'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그분은 내 인생의 둘도 없는 동반자이기에, 내 앞길을 환히 밝혀주는 등대이기에,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죽고 못 사는' 연인이기에, 그분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행복에 겨운 날이 되길 다시 한번 꿈꿔봅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 신앙이 이토록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희망하길 바랍니다. 언젠가 반드시 어두웠던 하늘이 걷히고 활짝 갠 날이 다가오리라 확신합니다.
신앙 부족으로 방황을 거듭하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한명이며 오랜 기간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토마스 사도 역시 예수님 부활 사건을 의혹에 찬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예수님 발현을 직접 목격한 다른 사도들 증언에도 그는 끝까지 의심합니다.
"나는 그분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스 사도는 우리 내면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의 하소연은 우리들의 부족한 신앙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그는 짧은 과정을 통해 불신과 방황의 신앙여정을 끝맺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을 향해 던진 이 한마디 말은 간단한 말처럼 보이지만 오랜 방황 끝에 이뤄진 장엄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 발현을 직접 목격한 그는 이제 예수님을 마치 극진히 사랑하는 연인처럼 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에게 있어서 한 인격체, 주인이자 연인, 삶의 의미요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지난 판공성사 때, 고해소 앞에 줄지어 선 수많은 형제자매님들 얼굴에서 다시 한번 따뜻한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갈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많은 신자 분들의 내적 방황도 손에 잡힐 듯 다가와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제대로 된 하느님을 체험을 한번 해보고 싶지만, 그게 정말 여의치 않습니다. 마음은 하느님에 대한 굶주림으로, 하느님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갈증을 채울 길 없어 아쉬워하십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의 정체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신앙생활은 대체로 순식간에 위기를 체험하더군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체험하는 나날, 그래서 그분과 은혜로운 인격적 만남이 이뤄지도록 노력하는 나날 되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해 지속적으로 '저의 주님'이라고 외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친밀한 인격적 사랑을 나누고 있는 신앙인들 얼굴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롭기만 합니다. 거듭되는 시련에서도 그들 모습은 의연합니다. 극심한 고통에서도 담담합니다. 참된 영적 예배, 제대로 된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그들의 순수한 봉사활동은 빛을 발합니다. 주님과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과 승리를 믿습니다” -허성신부-
안식일 다음날 저녁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시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그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토마에게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자 토마는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는데 문이 잠겨 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신 다음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고 말씀하시니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는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평화란? 인간은 평화를 진심으로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애타게 바라는 평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며, 또한 이 평화를 얻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 언제나 하느님의 의향과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모름지기 진정한 평화의 탐구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1.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 성서의 역사는 그 서막부터 기드온이 「평화의 야훼께」 제단을 바치는 것을 보여준다(판관 6, 24). 하늘의 지배권을 행사하시는 하느님(욥 25, 2)께서는 「평화를 창조」(이사 45, 7)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그분에게 매달려 평화라는 선물을 내려주실 것을 기대한다. 『당신의 종을 평안하게 돌보시는 주께서는 크게 드러나셔지이다』(시편 35, 27). 유배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은 이렇게 선언하신다. 『나 야훼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바라』(예레 29, 11). 『보라! 나는 너에게 평화를 강물처럼, 이교 백성들의 영화를 넘쳐 흐르는 개울처럼 들이 밀겠노라』(이사 66, 12). 『의인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나니…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죽은 것 같아도… 그들은 평화속에 있도다』(지혜 3, 1~3). 2. 그리스도의 평화 예언자들과 현자들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화된다. 온갖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죄악이 모든 사람에게 소멸되지 않는한, 그리고 마지막 날이 되어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 한, 평화는 오직 미래의 선으로서만 남게 된다. 루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평화를 가져다 주는 왕을 묘사한다. 그 왕이 탄생할 때 천사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음을 선포한다(루가 2, 14).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최후의 승리를 따르는 부활의 평화다(루가 24, 26). 『나는 당신들에게 평화를 두고 간다. 내가 평화를 당신들에게 주는 것이다』(요한 14, 27). 신앙이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서 계시를 통해서 알려주신 모든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될 사람들에게 내려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은총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의 내용들을 조목조목 다 믿는다는 신앙고백 후에 비로소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신앙은 지식이 아니다. 그렇기에 신학자들 중에도 냉담자가 있는가 하면 사도신경 하나도 제대로 못외우는 이들중에도 순교자가 있다. 신앙은 머리의 대상이 아니라 가슴이 대상이기 때문이다. 힘들고 희망조차 보이지 않을 때라도 『하느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드러난 당신의 사랑과 승리를 나는 믿습니다. 오늘도 저에게 십자가를 지워주시겠지만 그 십자가를 지고 갈 힘도 함께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부활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이다.
평생의 과제, 하느님 체험
-양승국 신부-
수도자로 살아가면서 늘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수도자라면 당연히 신분에 걸맞게 언제나 하느님을 눈 앞에 뵙는 듯이 살아가야 하는데,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조심조심 살아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성체 앞에 앉아서 곰곰이 그 원인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너무도 당연하더군요. '하느님 체험'의 부족이었습니다. 소홀했던 영적 생활의 결과였습니다. 사는 데 바빴던 나머지 하느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너무 많이 줄여버린 결과였습니다.
가끔씩 만나는 신자들이 자신들이 경험했던 하느님 체험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할 때마다 저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하다는 진리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수도자에 대한 '특별우대'가 없습니다. 성직자라고 해서 얻게 되는 프리미엄도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육적 삶만 고집한다면, 영성생활에 우선권을 두지 않는다면 누구나 하느님 현존을 의심하는 비신자나 냉담자로 전락하게 됨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역시 3년여 세월을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사람이었지만 정면으로 예수님 부활을 거부합니다.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분의 생생한 가르침을 귀담아 들어왔던 제자였지만 그분의 현존을 의심합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토마스는 예수님 발현 현장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난 후에 뛸 듯이 기뻤습니다. 거의 제 정신들이 아니었습니다. 뒤늦게 만난 토마스를 향해 제자들은 감격에 찬 어조로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토마스는 그들이 헛것을 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이것들이 다들 짜고 날 놀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어이! 자네들, 지금 날 놀려먹으려고 작정들 했지? 그게 말이 되나?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죽어도 난 못 믿겠네! 그게 사실이라면 내 손에 장이라도 지지겠네!"
토마스는 예수님 부활을 극구 부인합니다. 목숨 걸고 예수님 부활을 불신하는 토마스 사도 앞에 보란 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토마스의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죽어도 못 믿겠다'는 의혹은 어쩌면 바로 오늘 우리의 의혹입니다. 토마스의 불신은 바로 오늘 우리의 부족한 신앙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 신앙인들에게 있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현존 체험은 거저 주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을 위한 속성 과정은 따로 없습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을 위한 족집게 과외 역시 없습니다. 오직 간절한 기도,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 수용, 하느님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순간을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심만이 하느님 현존 체험의 열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 생활의 무미건조함 여부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인생 여정에 함께하시고 우리 인간 역사에 활기차게 역사하시는 분임을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개인의 행복과 불행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심을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우리 눈을 밝혀주시길 기원합니다. 누가 우리를 이 죽음의 계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구원의 주님이신지를 알게 하는 혜안을 청합니다. 누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부활의 주님이신지를 알게 하는 지혜를 청합니다.
"주님, 오늘 하루 인간적 눈을 감고 영적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괴롭다, 괴롭다' 하며 보낸 지난 세월은 지옥 같은 고통의 세월이 아니라 주님께서 늘 뒤에서 지켜주셨던 은총의 세월이었음을 인정할 줄 아는 영적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루하루 모든 순간들은 그저 허송세월하면서 흘려보내야 할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금쪽 같이 소중한 순간, 부활의 기쁨을 힘차게 노래해야 하는 구원의 순간임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가장 가까이 지내기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받는 이웃들은 나를 성장케 하고 죽음을 넘어 부활의 기쁨으로 인도하는 가장 감사해야 할 존재임을 알게 하여주십시오."
토마스는 '미꾸라지'인가?
-박상대 신부-
요한복음은 예수부활 사건과 부활예수 발현사화를 복음의 마지막 부분인 20장과 21장에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21장이 초대교회 안에서 제고되는 베드로의 역할을 교회론적이고 사목적인 측면에서 강조하기 위하여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학자들의 통설을 따르면, 오늘 복음(20,19-31)이 요한복음의 종결부분이다.
20장은 다섯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단락(1-10절): 빈무덤 사화를 통한 예수부활사건. ②단락(11-18절):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예수의 발현. ③단락(19-23절): 부활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첫 번째 발현. ④단락(24-29절): 부활예수의 첫 발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제자 토마스의 불신앙과 이에 대한 두 번째 발현을 통한 부활확인. ⑤단락(30-31절): 맺음말.
오늘 복음은 ③,④,⑤단락을 한데 묶어 놓았다. 각 단락이 보도하는 내용의 형식을 분석하여 본다면 ①,②,③.④단락은 직접화법을 사용한 상황보도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⑤단락은 단순설명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승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①과 ②단락이 같은 전승에 속하고, ③과 ④단락은 앞선 부분(빈무덤 사화, 부활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만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독자적 전승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에 요한복음의 저자가 의도하는 복음저술의 결론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著者)는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30절)이 복음서 저술의 목적임을 밝히면서, 이 목적을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이 신앙에로 전환되는 사건에 연결시키고 있다. 복음서 저자는 결국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 앞에 토로(吐露)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라는 신앙고백이 예수를 직접 보지 않고도 복음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는 모든 참 행복자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사도의 생각과 말은 2000년 세계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되풀이되었다. 토마스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기 전에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자기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믿겠다고 생떼를 쓰고 있다. 이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이 가지는 불신(不信)의 한 유형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신성? 성서가 보도하는 기적들? 동정녀의 잉태? 죽음후의 영생? 육신의 부활? 등등에 대하여 믿음보다는 의심을 가진 신자가 적지 않다는 말이다.
개개의 신자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을 믿고 그렇지 않은 부분들에 대하여는 말하기를 꺼려하고 심지어는 거절하고 불신한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는 달랐다. 그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믿음의 조목(條目)이 문제시된 것이 아니라 믿음 전체가 거꾸로 선 것이다. 즉, 예수 전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예수가 살아 있느냐, 죽고 없느냐?" 에 토마스 자신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말이다.
우리 눈에 토마스는 우선 제자들 가운데 한 마리의 '미꾸라지'로 보인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제자단에 미꾸라지는 더 많다. 다른 제자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 확인함' 없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졌는가?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말씀이다. 예수부활에 관한 신약성서의 증언들은 한결같이 부활에 대한 의심을 믿음의 동기로 제시하고 있다. 불신과 포기와 절망에 빠진 제자들이 부활을 믿게 되는 것은 거의 모든 경우, 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만남 없이는 3년 동안이나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들까지도 믿는데 어려움을 가진다. 토마스 사도의 생각이 옳았다. 과연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의 부활에 달려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모두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 바울로 사도의 신앙고백이지 않는가?(1고린 15,17)
오늘 복음이 전해주듯이 부활한 자는 불신자의 의심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토마스 사도는 '자신의 눈으로 예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자기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자기의 손을 예수의 옆구리에 넣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토마스는 부활예수를 자신의 손으로 확인하기 전에 '만남' 그 자체로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고백한다. 사실(事實)을 보는 것이 믿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직접 보았지만 모두 그분을 믿지는 않았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마치 수학공식이나 과학적 공리같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확실한 증거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공식이나 공리 따위에는 인간의 자유가 차지할 공간은 없다.
우리의 믿음은 오히려 보지 않고서도 믿는 자유와 신뢰와 희망으로 살았던 신앙의 증인들 위에 서있다. 그 증인들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마태 28,20)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이다. 한때 불신의 '미꾸라지'였던 토마스나 다른 사도들이 공동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듯이, 우리도 믿음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인류를 위해 바쳐진 몸으로 계신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게 될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과 성사(聖事)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신다...........◆
자비로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사람이 육체적으로 아프면 병원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병원이란 말만 들어도 왠지 가슴이 시리고, 분주한 분위기 속에서 고통과 근심어린 얼굴이 여기 저기 보이는 곳이 바로 병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적, 육적 상처(19, 25)를 가지고 있어 도움이 절실한 환자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낼 때는 잘 모르다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예수님을 목격하면서 받은 충격, 이제는 그 사람들로부터 살아 계신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니 너무나 혼란스러운 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심정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주님은 제자들과의 첫 만남에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인사를 수차례 건네시면서 제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계십니다.
병원이란 환경은 고통과 근심, 절망 등이 교차하는 곳이기에 제자들에게 건네신 주님의 평화의 인사는 영적인 치료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이 점점 약해져가는 이 현실에 주님의 자비로움이 담긴 평화의 인사를 우리도 서로 나눔으로써 교회가 진실로 가야할 길(제1독서)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사람이 고통, 특히 죽음 앞에서 희망을 잃은 무기력한 존재임을 병원에서 많이 느낍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병고에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려야 하나?' '우리 가정에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 '주님은 정말 계시는가? 계신다면 왜?' 라는 물음들, 이 물음은 그들에게 있어 우리가 고백하는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시는 분이 아닐 뿐 더러 부활과는 상관없는 분으로 느껴짐은 당연하리라 여깁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봉사자들의 작은 도움이지만 한 걸음씩 믿음의 희망(제2독서)으로 변화되어 가는 환자들을 보면 오늘 복음에서 변해지지 않을 듯한 토마스의 신앙(25절)에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자비로운 주님을 묵상하게 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지 않음을 느끼는 이웃이 많음은 그들에게 내가 주님의 자비로움을 보여 주지 못함은 아닌 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의 자비 주일이기도 합니다.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토마스의 약함마저도 당신 품에 안아 주시면서 평화의 인사를 먼저 건네시는 주님의 모습은 언제나 우리가 노력해야 할 신앙 자세라 여깁니다.
토마의 노래
-류해욱신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큰소리 쳤건만 막상 그분이 붙잡히는 모습 보고 줄행랑을 놓았던 자신이 미워 견딜 수 없었지.
어머니 마리아를 뵈올 면목도 없어 혼자 조용히 베다니아를 다녀왔다네. 마르타, 마리아 자매와 슬픔을 함께 나누었지.
돌아오니 동료들이 믿을 수 없는 말을 하였지. 주님을 뵈었다니, 정녕 믿을 수 없었다네. 은근히 바보가 되기를 바라며 강경하게 말했지.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못 박히실 때 튀던 핏방울, 창에 찔리실 때 흐르던 물과 피 그분의 죽음을 두 눈으로 본 나는 믿을 수가 없었지.
그분이 홀연 방 한 가운데 오셨네. “그대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 음성 들으며 나는 꿈을 꾸는 듯 했지.
“토마, 그대의 손으로 내 손을 만져 보시오. 그대의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시오.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시오.”
나는 부끄러움으로 그분 앞에 부복하여 고백했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질책이 아닌 다정한 음성으로 그분이 말씀하셨네. “그대는 나를 보고야 믿는가? 복되어라,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
이 달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요한 20, 19-29로 기도하면서 우리도 토마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기로 해요.
배경이 되는 장소는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이층 다락방입니다. 성전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잡히실 때 줄행랑을 친 이후에 이층 다락방에 함께 모여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 참으로 약한 존재이지요. 베드로를 위시하여 제자들이 공포에 떨면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촉각을 곧추세우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이때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시지요. 문이 잠겨 있었지만 아무 거침없이 그 방에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인사하십니다. “그대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여러분들도 거기 제자들과 함께 있다고 상상하시면서 예수께서 들려주시는 ‘평화’라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는 모습을 상상 안에서 그려 보면서 당신이 바로 못 박히시고 창으로 찔렸던 예수시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그 자상하심을 느껴보십시오. 주님을 다시 뵌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여러분도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이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도록 청하십시오.
그런데 토마는 처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지요. 나중에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다는 말을 듣고는 믿을 수 없다고 강경하게 말하는 토마의 얼굴 표정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에게 어떤 느낌이 오는지를 솔직하게 바라보십시오.
어쩌면 토마의 모습이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눈으로 확인하거나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결코 믿을 수 없다는 현대의 우리들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토마의 모습을 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느껴보십시오. 우리는 성서의 다른 대목을 통해 토마가 용기와 열정을 지닌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까운 친구였던 라자로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 “자, 그에게로 갑시다”라고 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이 머뭇거렸지만 토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이와 같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지녔던 토마가 처음에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은 이유를 잠시 헤아려 보십시오. 그는 막상 정말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처형을 당하시자 슬픔으로 미어지는 가슴을 추수를 수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큰소리쳤지만 그도 다른 제자들처럼 줄행랑을 놓았지요. 다른 제자들에게 면목도 없고 하여 슬픔을 혼자 감내하리라고 생각하며 혼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더 이상 두렵고 외로워 혼자 있을 수 없었기에 제자들에게 돌아왔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제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대가 말한 대로 해보시오. 그리고 믿으시오.” 주님을 뵌 토마는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그 감동 안에 머물면서 토마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느껴지는 느낌들을 바라보십시오.
토마가 회의론자였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적어도 정직한 사람이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란 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지니게 된 믿음을 예외로 한다면, 아마도 그런 믿음은 거짓 포장된 믿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는 회의하면서 받아들이고 믿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믿음을 지니게 되고 그 믿음이 깊어가는 것이지요. 어쩌면 정직하게 의심하는 과정을 거쳐 참으로 믿게 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거치지 않은 맹목적인 믿음은 위험할 수 있음을 생각하며 토마가 지녔던 정직함을 지닐 수 있도록 청하십시오.
또한 우리가 토마에게 감탄하게 되는 것은 자기가 눈으로 보고 믿게 된 다음에 철저하게 투신하는 자세입니다. 그는 주님을 뵙자 그분께 다가가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실로 온 몸과 마음으로 주님, 당신은 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저의 모든 것이라는 전적인 신뢰로 드린 투신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느껴지는 감동 안에 오래 머물러 보십시오. 여러분들도 토마처럼 그렇게 투신하고자 하는 원의가 생겨나면 그 원의를 고백하십시오.
우리도 예수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숱한 의심과 회의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어떤 은총을 체험할 때 우리도 그분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 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런 은총을 주시도록 청하면서 기도를 마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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