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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35)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
1925년 성 베드로 대성전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소년 유대철 베드로의 순교’, 랜턴 슬라이드, 1925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시복식에 주스타니안의 ‘79위 복자화’ 걸려
100년 전, 1925년 7월 5일 오전 10시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는 비오 11세 교황 주례로 기해(1839년)·병오(1846년)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이 거행됐다. 일본의 속국 ‘조선’이 아니라 ‘진짜 한국’을 보편 교회에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날 시복식에서 신유(1801년)·병인(1866년)박해 순교자들이 빠진 이유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기해박해 순교자 73위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병오박해 순교자 9위의 ‘순교자 행록’(Acta Martyrum)만을 1847년 교황청 예부성성(오늘날 시성부)에 보냈기 때문이다. 이들 82위 순교자 기록은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가 라틴어로 정리했다.
10년 후인 1857년 82위 순교자에 대한 시복 건의 개시가 선언됐고, 조선대목구는 1882년부터 시복 재판을 시작해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을 정리, 번역해 1906년 교황청 예부성성에 제출했다. 예부성성은 가경자 82위 가운데 감옥에서 열병으로 죽은 것으로 판정받은 정 아가타, 한 안나, 김 바르바라를 제외한 79위의 순교 사실을 확정했다.
순교자로서 기적 심사 관면을 받은 ‘갑사의 주교 라우렌시오 앵베르와 동료 순교자들’은 앞서 말했듯이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된다. 이날 시복식에는 한국 교회 대표로 경성대목구장 뮈텔 주교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 예수성심신학교 교장 기낭 신부와 한기근(바오로) 신부, 장면(요한) 선생이 참여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장면의 동생 장발(루도비코)도 시복식에 합류했다.
시복식이 거행된 성 베드로 대성전 사도좌 제대 위에는 ‘앵베르 주교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의 복자화가 걸려 있었다. ‘영광’이란 제목의 이 복자화와 함께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는 ‘소년 순교자 유대철 베드로’<사진 1>, ‘김효임 골룸바와 동료 순교자 9위의 순교’<사진 2>,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를 묘사한 ‘세 프랑스 사제’ 복자화가 걸려 있었다. 모두 이탈리아 화가 주스타니안(Giustanian)의 작품이다.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79위 복자화’ 역시 그의 작품이다.
주스타니안의 79위 복자화는 한국 교회 순교자 성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시복식에 참여한 우석 장발 화백은 주스타니안의 복자화를 본 후 크게 감명해 평생 성화 작품에 매진하게 된다. 그는 귀국해 주교좌 종현(명동)대성당의 제대 벽화 ‘열네 사도’를 제작했고,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복자화’도 그렸다.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김효임 골룸바와 동료 순교자 9위의 순교’, 랜턴 슬라이드, 1925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베버 총아빠스, 한국 교회 순교 역사에 매료
한국 교회는 79위 시복을 기념해 1925년 7월 12일 주교좌 종현대성당에서 복자 유해 거동과 친구 행사를 거행했다. 경성부대목구장 드브레 주교와 원산대목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가 이 행사를 집전했다. 또 그해 9월 19일부터 21일까지 3일 동안 종현대성당에서 매일 ‘조선 치명자 79위’ 미사, 복자 유해 친구, 강론, 성체 강복 순으로 시복 경축 행사가 거행됐다.
한국 교회는 또 1926년 8월, 79위 복자들 중 가장 많이 순교한 9월 20일을 ‘한국 치명 복자 79위 첨례’로 정하고 현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7년 4월에는 주교좌 종현대성당 좌측 회랑에 대리석으로 제작한 ‘복자 제대’를 새로 설치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때마침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이 있던 해인 1925년 5월 14일 방한해 10월 2일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그는 79위 복자 탄생이 안겨준 한국 교회의 영광과 기쁨을 이 땅에서 직접 체험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한국의 유산을 파괴하고 있는 동안 한국인들은 본받을 수 있는 새로운 인물, 이 세상의 어떤 권력도 없애 버릴 수 있는 모범을 순교자들에게 발견하게 된 것”을 직접 지켜봤다.(「분도통사」 436쪽)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 역사에 매료돼 있었다. 그는 1911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순교지를 순례하기도 했다. 그는 기해와 병오박해를 이렇게 서술했다.
“다섯 번째 박해에서 모방 신부와 그의 협력자 샤스탕 신부 그리고 앵베르 주교가 순교했다. 그들의 머리도 용산 앞 한강변의 누런 모래밭에 나뒹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는 세 분 목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강 건너편 산에다 모셨다. 그때부터 그 산을 삼성산, 즉 ‘세 성인의 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외교인들이었다.
1839년 신앙의 열정으로 피 흘린 사람이 어디 이 세 분뿐이겠는가? 1801~1802년의 영웅들이 부활한 듯했고, 로마 카타콤바 시절의 순교자들이 다시 돌아온 듯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앞다투어 고문을 당하고 망나니의 칼날을 받았다. 양갓집 규수인 전 아가타와 박 루치아는 다리가 꺾여 뼈에서 골수가 흘렀다. 포악한 망나니들은 유 베드로와 이 아나스타시아 같은 아이들에게까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괴롭혔다. 놀랍도록 숭고한 고난이 유례없는 악을 이겨냈다. 조선 교회는 수난을 통해 강해졌다.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36) 여학교 (상)
한국 교회, 교육 통해 일제 강점기 국권 회복·민족 의식 고취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에게 바느질과 수예를 배우고 있는 여학생들, 1925, 대구,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교회, 종교 교육과 함께 근대 교육 시행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주요 당면 과제는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이었다. 교육은 우리 민족 국권 회복 운동의 근원이었고, 한국에 진출한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누구보다 이 문제를 깊이 인식했다.
한국 교회는 ‘경천애인’(敬天愛人) ‘애주애인’(愛主愛人) 같은 복음 내용을 교육 이념으로 내세워 종교 교육과 함께 근대 교육을 시행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교육 이념과 목표는 서양 학문의 수용으로 참된 개화를 이루어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당시 한국 교회가 발행하던 ‘경향신문’은 1907년 12월 27일 자 논설을 통해 교육을 통한 개화만이 열강 침략에 맞서 이길 수 있고, 자주 독립 국가를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개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경향신문은 또 국권 회복을 위해 애국과 자주 정신·민족 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교육을 강조했다.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6월 24일 자 논설에서 경향신문은 자주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외세 의존 경향을 끊어버릴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스스로 힘과 정신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한국 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1910년 당시 교회는 124개 학교를 설립 운영했다. “1910년에 근접할수록 천주교회에서 설립한 여러 사립학교에서는 항일 구국 사상의 영향으로 교과 과정에 항일적 요소를 강하게 반영하여, 독립 의식·민족 의식·항일 의식이 담긴 민간인 편찬의 교과서를 교육 교재로 사용하였다. 더 나아가 국권 회복을 달성하기 위한 군사 훈련으로 운동회가 자주 개최되곤 하였다. 이때에는 태극기를 달고 애국가를 부르거나 대한 만세를 외쳤으며, 운동회가 끝난 후에는 연설회를 개최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상례였다. 당시 천주교 학교에서도 체육에 대해 강조하였는데, 이는 일본 사립학교와 마찬가지로 피압박 민족의 울분과 사회적 불만을 분출하고 민족 자강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719쪽, 김성희, ‘한국 천주교회의 교육 활동-1882~1910년을 중심으로’)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수예를 하는 여학생들, 1925, 대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원,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첫 여학교 설립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처음으로 근대식 여성 교육을 시행한 곳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다. 1888년 7월 22일 한국에 진출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1899년 8월 개항지 인천에 여학교를 설립했다. 30여 명의 여학생에게 한글·한문·산술·지리·수예와 가톨릭 기도문·교리를 가르쳤다. 이후 서울 종현·약현성당, 인천 제물포성당, 평양 관후리 성당, 평남 진남포성당, 황해도 매화동성당, 제주성당 등에서 여학생 교육을 맡았다. 이처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회의 여성 교육을 도맡아 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사진 1>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은 주로 가정 안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한 과목들, 곧 바느질·청소·세탁·육아법·자수 등을 가르쳤다. 이들의 교육 목표는 현모양처로 타인에게 모범이 되는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 여성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1911년 2월 말 처음 방한한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지난 세기말까지 중국이 한국에 구사한 봉건적 방식과도 다르고 과거 한때 일본이 취한 한반도 정책과도 다르게, 일본은 지금 한국을 병합하고 피정복 민족을 동화시켜 그들의 조력으로 동양의 지도적 강국이 되려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 북반부에서 일본이 펼치는 구애의 달콤함보다는 병합으로 한국인들이 입은 상처가 더 크고 아프지만, 일본은 모든 난관 특히 재정난을 극복하고 목적을 이룰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53~54쪽)
그래서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인들의 인재 양성 교육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봤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학생들과 학교·수업 장면을 촬영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3월 8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종현본당 여학교를 방문했다.<사진 2>
“수녀원장은 우리를 아이들 방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열심히 일을 배우고 있었다. 한국 아이들에게 이런 일은 전혀 낯설지 않다. 여성에게는 빨래 같은 가사 노동이 끝도 없이 주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12살 소녀 34명이 긴 탁자 주위에 꿇어앉거나 쪼그리고 앉거나 의자 위에 책상다리하고 앉아 있다. 소녀들은 저마다 수예보를 하나씩 들고 재빠르고 능숙하게 바늘을 다루며 수를 놓았다. 이렇게 만든 수예품은 미국 부인들이 즐겨 산다고 했다. (⋯) 아이들에게는 수줍음이 사라진 지 오래다. 가혹한 노예적 운명이 새겨진 표정들만 남아 있다. 외교인의 나라가 으레 그렇듯이, 한국 여성들도 수백 년 동안 종의 멍에를 지고 살았다. 어머니는 딸이 태어날 때부터 그런 운명을 대물림한다. 생은, 인간 존엄성이 무시되는 고통으로 점철된다. 쉽게 물러날 고통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숭고함만이 비로소 그 어두운 그늘에 빛을 던져 줄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29~130쪽)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가명학교 여학생들, 1911. 3. 8, 서울 약현,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약현본당 운영 ‘가명학교’ 방문
베버 총아빠스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운영하는 보육원과 여학교에 이어 약현본당이 운영하는 가명학교를 방문했다.<사진 3>
“성당에서 조금 내려오면 평탄 작업을 한 부지 위에 여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한국인 수녀 둘이 운영한다. 교실은 작고 초라했다. 질박한 걸상들을 보니 그런 느낌이 더했다. 하지만 부지를 확장하고 시설을 개선할 경비를 어디서 끌어온단 말인가? 수녀들의 헌신적 사랑과 기를 쓰고 공부와 수작업에 매달리는 착한 아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 이곳에는 사랑이 있다. 수녀들은 그 비좁은 교실에서 제 나라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는다. 그 작은 초가는 두 선생 수녀가 사는 수녀원이었다. 그들도 한때는 가족과 함께 자개장으로 치장한 부잣집에서 살았으나, 지금은 값진 금은 장신구일랑 자매들에게 넘기고 빈민들을 돕기 위해 스스로 청빈을 택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32~134쪽)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복자 김대건 신부 성해’, 유리건판, 1925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오틸리엔 수도원에 김대건 신부 성해 안치
1839년 대박해의 끔찍한 후폭풍은 지방에서 소규모 박해들을 양산했다. 그 와중에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 안드레아 신부가 검거되었고 1846년 참수되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21~122쪽)
베버 총아빠스는 용산 신학교 언덕에서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새남터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내 시선은 순교자의 피로 물든 그 장소를 찾고 있었다. 편협한 장사꾼 기질과 국가적 타산으로 수천 년 동안 폐쇄되어 있는 이 ‘죽은 백성’에게, 이리도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는 삶과 영웅적인 힘이 충만하다는 것을 위대한 순교자들은 피로써 증거했다. 이런 힘이, 아니 이런 힘만이 죽어 가는 민족을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 힘의 원천이 그리스도교다. 자신의 피와 생명을 기꺼이 바치는 영웅이 그리도 많았는데, 이 백성이 ‘죽은 백성’일 리 없다. 다만 생기 넘치는 발전 도상에서 어두운 감옥에 갇히고, 폭군의 압제에 시달리고, 양반들에게 착취당했을 따름이다. 감금과 고립과 죽음과 고문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이 백성은 그리스도교의 자유로운 하늘 아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기쁨에 충만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23~124쪽)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대성당 중앙 제대에는 김대건 성인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사진 3> 성인의 갈비뼈 일부가 성해함에 안치돼 ‘STERNUM B. ANDR. KIM’ ‘Primi SACER. COREANI MARTYRIS’(복자 김 안드레아, 한국인 첫 사제 순교자)가 자수(刺繡)돼 있는 성해보에 싸여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갔다. 이는 1925년 시복을 앞두고 뮈텔 주교가 경성·대구·원산대목구에 분배한 김대건 신부의 성해다. 아마도 1925년 10월 독일로 떠날 때 베버 총아빠스가 들고가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37) 여학교 (하)
개신교의 교육사업 물량 공세 속 교리교육·문맹 퇴치에 헌신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갓등이성당 학교 어린이들, 1911, 갓등이,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가톨릭 교육은 원초적으로 ‘거룩함’ 지향
가톨릭교회는 모든 이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아울러 모든 이가 의식주와 보건·노동·문화·적절한 정보·가정을 이룰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인간적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교회 기본 가르침이다.
가톨릭교회는 이처럼 언제나 인간 발전을 지향한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 헌장」은 “사물의 안배는 인간 질서에 종속되어야 하며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질서는 진리에 바탕을 두며, 정의 위에 세워지고, 사랑에서 힘을 얻는다”고 가르친다.(8항) 가톨릭교회가 모든 이의 발전을 지향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존엄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자녀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교육하며 그 신앙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부모는 자녀에게 첫째가는 가장 중요한 교육자다. 부모는 자녀에게 도덕적이고, 영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
가톨릭 교육은 원초적으로 ‘거룩함’을 지향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확고한 신념과 품행으로써 교회 건설에 이바지한다. 교회는 신자들의 거룩함으로 성장하고 확장되고 발전하여, 마침내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045)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이가 거룩해질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주교나 사제나 수도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덕은 일상생활과 거리를 두고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살아가고 각자 어느 곳에 있든 날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고유한 증언을 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부름 받고 있습니다.
봉헌 생활자입니까? 자신이 봉헌한 대로 기쁘게 살아가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혼인한 사람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자기 배우자를 사랑하고 배려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직장인입니까?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서 형제자매들에게 봉사함으로써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어머니나 아버지입니까? 할머니나 할아버지입니까? 아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권위자입니까? 자신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공동선을 위하여 일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4)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갓등이성당 학교 소녀들, 1911, 갓등이,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미국 개신교 교육 사업 물량 공세에 두려움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교육 사업에 아낌없이 물량 공세를 쏟아붓는 것에 두려움을 표했다.<사진 1>
선교 사업의 성취와 더불어 1882년부터 가톨릭 선교사들은 피 흘려 일군 이 땅에서 선교지를 확보하기 위해 미국 개신교의 공격적 전교 활동과 치열하게 맞서야 했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자 미국에는 절호의 판로가 열렸고, 교육을 통해 전교 활동을 후원했다. 미국 대기업들이 개신교, 특히 장로교 선교사들을 꾸준히 지원했다. (⋯) 미국 개신교는 한국에 엄청난 물량을 쏟아붓는다. 부인과 자녀 둘을 부양하는 장로교 선교사 한 사람 급여가, 한국의 프랑스 선교사 46명의 급여를 합친 것보다 많다. 게다가 그들은 자선·종교·문화 사업에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운용한다. 곳곳에 고급 병원과 명문 학교와 화려한 교회를 짓고, 재원을 풍족히 확보하여 가난한 신자들에게 분배해 주기도 한다. (⋯) 형편이 이리도 다르니,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지 몇 년도 채 되지 않은 미국 개신교가 가톨릭 선교 활동의 성과를 이미 추월했다는 것이 놀랍지도 않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34~136쪽)
하지만 베버 총아빠스는 격랑의 위기 속 가톨릭 신자들의 굳센 신앙심과 선교사들의 끝없는 희생에서 희망을 보았다. “집집마다 신자들의 기도 소리가 새어 나왔다. 새벽 5시, 자명종이 울릴 때도 열심한 신자들의 기도 소리는 끊일 줄 몰랐다. 사제는 셋인데 제대가 하나뿐이라 이른 시간에 미사를 드려야 했지만, 좁은 경당은 벌써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미사 내내 싱그러운 목소리로 소리 내어 기도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41쪽)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4월 1일 경기도 첫 본당인 갓등이성당을 방문했다. 유서 깊은 갓등이 교우촌에는 본당이 운영하는 학교가 있었다.<사진 2>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이곳에서 한국말 표현들을 배웠다. “‘먹다’라는 동사에서 수많은 표현이 파생된다. 밥을 먹는 것은 물론이요, 한국인들은 물도 먹고, 담배도 먹는다. 귀머거리는 귀먹고, 상중에는 슬픔도 먹는데 이것은 슬프다는 뜻이다. 냉혈한은 악한 맘을 먹고, 노한 사람은 분한 맘을 먹는다. 험담꾼이 남의 체면을 먹으면 성을 먹는 것이고, 나이 든다는 것은 살을 먹는 것이다. 이런 예문이 끊이지 않는다. 표현과 관용구가 부족한 경우는 없다. 한국말은 참으로 풍요로운 언어다. 어휘와 말뜻과 관용구가 엄청 풍부하여 능통해지기가 정말 어렵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40~241쪽)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황해도 매화동성당 봉삼학교 여학생들 소풍, 1911, 매화동,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황해도 최초의 사학인 매화동본당 봉삼학교
베버 총아빠스는 또 1911년 5월 27일 황해도 매화동본당 봉삼학교를 방문했다.<사진 3> 봉삼학교는 매화동본당 주임 우도 신부가 교리교육과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세운 황해도 최초의 사학으로 남학교와 여학교가 있었다.
“매우 특색 있는 학교가 있다. 또한, 양잠 분야에 능력 있고 검증된 한국인 교사를 채용하여 수업 일부를 맡겼다. 그는 일종의 성인학교로 상급반 여학생들에게 양잠과 비단 제조와 상품화에 관해 칠판에 써 가며 가르치고 학생들은 공책에 베껴 썼다. 쓰기와 읽기 공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론 수업에 더하여 실습도 행해졌다. 인접한 큰 방뿐 아니라, 교실에도 벽을 따라 널빤지를 대고 누에의 부란 상자를 설치했다. (⋯) 우도 신부가 누에치기에 기여한 업적은 지대하다. 그는 마을 살림의 기틀을 더욱 다질 요량으로 성당 뜨락을 장식한 미루나무의 꺾꽂이 재배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벌써 5만 그루의 묘목을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미루나무는 제지 공장뿐 아니라 각종 상자를 만드는 데도 쓰인다. (⋯) 한국인 수녀 둘이 여학교를 맡고 있다. 수업이 여성의 수공예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져 두루 환영하는 분위기다. 학생들의 활기에 다들 큰 감명을 받았다. 그들의 명랑한 표정이 밝은색 옷과 어우러져 온 학교가 주일의 정취를 폴폴 풍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64~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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