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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15
하나님의 나라 / 박정식 목사
오늘 말씀을 나누기 전에 책 한 권의 주제를 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데일겔러웨이라는 유명한 리더쉽에 관해서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목사님이 쓴 책 가운데 '길을 아는 지도자' 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지난주에 제가 드렸던 말씀을 좀 부각시키는 좋은 말씀이 몇 가지 나와있기 때문에 제가 한번 읽어드리고 우리 삶에 이런 도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폐허를 축복으로 만들라' 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폐허를 축복으로 만들라. 우리가 당하는 모든 환난과 시련과 절망들을 정말 축복으로 만들기 위한 몇 가지 전제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첫 번째가 '당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 들이라.'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수용하라.'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삶의 많은 요소들을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특히 날씨 바꿀 수 있습니까? "왜 비가 오는 거야? 기분 나쁘게..." 그래봤자 입만 아픕니다. 차가 밀리는 것. 그것은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받아들이고 어떻게 오늘을 살 것인가를 점검하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또 한가지 두 번째는 '비난하는 게임을 중지하라.'
정말 나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그 사람들에 대해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비난하고 저주를 퍼붓는 이런 것들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큰 문제만 만들어 내기 때문이고 더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왜 나는 여기서 태어났는가?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당신이 누군지에 대한 놀라운 발견을 하라.'
비록 나는 연약하고 지금 참 실패했고, 좌절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대하시는가? 그리스도안에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항상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보통사람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가치를 부여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당신의 동역자로 세우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네 번째는 '자기 연민을 단호하게 거절하라.'
스스로 불쌍해서 어떡하나? 불행한 내 인생. 그래봤자 패배자만 더 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자기 연민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운명에 직면하라는 것입니다. 운명과 맞서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당신의 정서적인 치료에 대해서 치료약을 사용하라.'
가장 중요한 치료약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많이 얘기하시기 전에 기도의 현장에 서십시오. 말씀을 듣는 현장에 서십시오. 정말 주님을 향한 감격적인 찬양을 시도하십시오. 회복될 때까지.
▶여섯 번째는 '적극적인 태도를 선택하여 길러라.'
그러므로 정말 내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어떻게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다짐하고 결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단지 사랑하라. 조금만 더.'
원망과 불평으로 우리가 살다보면 상처 주고 상처받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덟 번째는 '실패는 뒤로 하고 앞을 향해 전진하라.'
우리는 나아가야만 합니다. 뒤를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실수는 실패가 아닙니다. 실수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너무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아가야만 합니다.
▶새로운 꿈을 꾸라고 아홉 번째는 이야기합니다.
다시 한번 새로운 꿈을 향해서 도전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마지막 열번 째는 '당신의 흉터들을 별들로 만들라.'
인생의 모든 흉터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위대한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해 비전을 갖고 믿음으로 나가는 신앙의 모습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새로운 전환점이 날마다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어떤 일이 내게 닥쳐올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모든 일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당하지만, 똑같은 고난을 당하지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습니다. 고난을 당합니다. 그렇지만 다 성숙하지마는 않습니다. 다 이 고통들을 기회로 선용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는 위기와 고통 때문에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을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원망하고 그 가슴속에 악감정을 담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더 붙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의 용사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 사랑하고 더 격려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고통과 문제는 똑같이 인생 속에 다가오지만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어떻게 선용하는 가가 우리 인생의 결과를 전혀 다르게 만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을 통해서 많이 무너졌습니다. 많이 주저앉았습니다. 그들이 원망과 불평으로 점철된 삶을 살 때 그들의 삶에는 더 나은 미래가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음 세대는 달랐습니다. 그 다음 세대는 똑같은 광야를 걸었지만 하나님을 충분히 의지합니다. 하나님께 충분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합니다.
그때 그들의 미래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미래로 다가왔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 읽겠습니다.
(수 5:1)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충분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4장에서 요단강을 건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서 그들은 요단강 앞에 섰습니다. 말씀을 신뢰하면서 벼랑 끝에 선 것입니다. 그들은 현실만을 보지 않습니다. 문제만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철저하게 순복합니다. 그럴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그들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환경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바꾸실 때까지 그들은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충분한 고난과 충분한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민족으로 성장해 왔던 것입니다.
결국 요단강을 건넌 다음에 그들은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합니다.
여러분, 순종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저를 좀 도와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순종이 결여된 삶은 하나님을 절대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습니까?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당신이 순종하면 당신이 순종하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증거들을 우리는 수없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이라는 좋은 책이 있지 않습니까?
로렌스 형제가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수없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는 수없이 느끼고 있다. 그것은 내가 순종하는 현장에서다.'
어떠십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적이 나타나면 하나님을 내가 경험할텐데...'
'뭔가 하나님이 내게 역사 하셔서 갑자기 폭발적인 축복을 누리면 내가 하나님을 경험할텐데...'
'하나님이 나를 정말 건강케 하시면 내가 하나님을 경험할텐데...'
다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당신이 순종하는 현장에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그들의 가슴속에 하나님을 풍성히 담습니다. 그들의 가슴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부흥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은혜의 공동체와 우리 모두가 부흥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슴이 부흥되기를 원합니다. 그 부흥은 숫자만 많아지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챨스핀이 말한 대로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당신의 가슴속에 하나님으로 충만한 가슴을 소유할 때 그 공동체는 이미 부흥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각 사람의 가슴속에 하나님으로 충만히 경험되지 않고 하나님으로 충만한 가슴이 아니라면 그 공동체는 부흥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숫자만 많아졌을 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충만한 부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슴은 하나님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동행하시는구나. 하나님이 역사하셨구나.' 그 하나님 때문에 정말 두려운 것이 없는, 그 하나님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 없는 이런 성숙한 현장에 그들이 서있다는 것입니다.
2절 말씀 보겠습니다. 읽겠습니다.
(수 5: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하나님을 가슴에 충만히 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좀 무모해 보이지만 이런 하나님의 명령이 아무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사람들, 하나님이 기꺼이 인정할 만한 사람들에게 이런 명령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에 하나님이 충만히 임재해 계시고 그들이 그 하나님을 경험했을 때 하나님은 충분히 하나님 앞에 신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묘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17장을 보면 할례의 제정에 대한 스토리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99세 되던 해에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좀 책망하는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십 수년동안 하나님의 일관적인 약속을 주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독자를 줄 것이다. 그리고 그 독자는 너를 통해서 위대한 민족을 만들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모든 땅을 줄 것이다.'
그런 약속을 수없이 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육체를 의지합니다. 환경을 의지합니다. 자기 몸이 점점 늙고 자기 아내가 더 이상 생리적인 기능을 가질 수 없을 때 그는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이름을 붙여놓고 그냥 기쁘게 살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 안에서만 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셔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그리고 그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99세가 된 그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그리고 모든 그의 가문의 남자들은 할례를 행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종교적인 하나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남성의 생식기 끝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거기다 표를 하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에게 그런 표를 하도록 명령하셨을까요?
할례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첫째는 너는 죽었다. 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죽었다. 라는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이 할례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인몰' 이라고 합니다. 끊어낸다는 말이지만 이 끊어내는 것은 사실은 살점을 조금 잘라낼 때 쓰는 단어가 아니라 생명을 끊는데 쓰는 단어입니다. 살점을 그만큼 끊어내면서 생명을 끊는 단어를 쓰는 것은 그 속에 뭔가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죽었어. 너의 죽은 흔적이 바로 할례의 표식이다.'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너는 이제 혈통에 의해서 번식하는 그런 백성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번식하는 백성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냥 낳고 낳고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존재하는 민족이 바로 너와 너의 후손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참 중요한 것은 이것은 구속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사야 5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가 의인의 땅에서 끊어짐은...'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난받는 종의 노래 아닙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마치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는 어린양처럼 그렇게 버림당하고 죽임 당하실 것을 예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으시는 사건을 예표하면서 저가 끊어짐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그 끊어짐은 인몰이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잘못 읽으면 저가 할례를 받으면...하고 해석할 수 있지만 성경은 할례를 더 강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끊어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끊어지십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받쳐주십니다. 그분이 생명이 끊어지고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고 그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구속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대신 그분이 끊어진다. 너는 살갗을 조금 자를 뿐이지만 대신 누군가가 와서 생명을 받칠 것이다. 너는 그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그리고 너의 모든 후손도 그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는 중요한 상징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라는 아브라함의 족보를 보면 우리는 당연히 인간적인 족보로 생각하지만 거기에는 위대한 구원의 계보가 담겨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출발합니다. 아브라함의 할례부터 출발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식기 끝을 조금 자르지만 그의 후손가운데 오실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끊어뜨림으로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근거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할례는 십자가의 예표가 됩니다.
▶또 마지막 네 번째는 이 할례를 통해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구나. 나는 하나님의 자녀구나.' 하는 자의식을 갖도록 그렇게 사인을 그에게 준 것입니다.
그런데 8절 말씀 볼까요?
(수 5:8)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 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그들은 철저하게 순종합니다. 오직 주님을 신뢰함으로 이 명령 앞에 순복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성들이 길갈이라는 곳에서 할례를 받습니다. 날카로운 돌을 깨서 그 날카로운 면으로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고 아주 여러 날 동안을 신음하고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바로 적진 앞에서 그들은 이 위기를 스스로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드러누워 있는 것입니다.
7절 말씀 볼까요?
(수 5: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지금 광야에서 태어난 모든 사내들은 할례를 받지 못한 이유가 광야는 계속 옮겨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라고 명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할례를 받으면 걷지를 못하니까 그들은 광야에서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적진 앞에서 할례를 받도록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입니다. 할례 받으면 걷지도 못하고 운신도 못합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광야나 철저하게 보호막이 처진 장소가 아닌 바로 적진 앞에서, 여리고 성 코앞에서 그들에게 할례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남성들은 여러 날 동안 적진 앞에서 즐비하게 누워 있었습니다.
신음소리까지 내가면서 말입니다.
대적들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기회가 되겠습니까?
이 기회를 그들이 엿보고 있다면 이것은 이스라엘 모든 남성을 모두 도륙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적진 앞에서 할례를 행하고 지금 누워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많이 달라졌습니다.
출애굽 했던 1세대들은 사사건건 하나님께 대해서 원망했습니다.
사사건건 하나님께 대해서 반항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 하셨고 그 많은 이적을 베푸셨고 그 많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능하면 거부하려고 가능하면 과거로 돌아가려고 시도를 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2세대는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광야 40년을 통해서 그들은 충분히 하나님을 신뢰할 만큼 그 믿음이 견고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고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기와 절망 속에서 찬란한 미래를 향하여 가슴을 열고 직면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충분한 고난과 연단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벼랑 끝에서는 것입니다. 마치 죽은 듯이 '나 죽었소.'하는 듯이 대적들 앞에서 그들은 드러누워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그들은 죽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이것입니다.
여러분,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지금 하나님께 순종하는가? 이 질문을 가지셔야만 합니다.
내 인생 속에서 내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죽고 사는 것 이전에 내가 그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무릎꿇고,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는가? 이것이 우리 인생의 질문이 되어야만 합니다.
나의 능력 나의 의지 다 포기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하게 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길갈에서 펼쳐진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의 현장이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현장감을 드러내 보이십시오.
때로는 화려할 때 그 믿음의 현장감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내가 승승장구 할 때, 내가 형통할 때 그때 당신의 믿음의 현장감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당신의 성공을 추앙하고 칭송할 때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믿음의 현장감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 믿음의 현장감이 당신이 바닥을 길 때, 절망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 드러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남들이 바라봐도 '저 사람, 이제 믿음생활 못하겠구나. 저 사람, 하나님 원망할꺼야. 저, 사람 힘들어.' 그럴 때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이 나를 낮추셔서 내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믿음의 현장감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내재적인 믿음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삶을 통해서 현장감으로 드러나야만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제 2세대는 그 믿음의 현장감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길갈에서.죽고 사는 문제가 문제가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큰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믿음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었습니까?
9절 말씀 읽습니다.
(수 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애굽의 모든 수치를 너희에게서 다 굴러가게 했다. 다 던져버렸다. 너희에게 씌워지는 그 멍에들, 노예의 멍에, 죄의 멍에를 내가 다 없애 버렸다. 너희는 이제 내 백성이다. 너희는 정말 나의 동역자들이다.' 그렇게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자존감을 한껏 회복시켜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바로 직전 1세대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문제만 터지면 돌아가자. 그것이 밤낮 그들의 노랫소리였습니다.
그러나 2세대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상황이 문제가 아닙니다. 대적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40년 광야를 통해서 그들은 단련되었고 그들은 성숙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들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들의 눈물을 씻겨 주시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선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현장이 우리 삶 속에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아마 주님이 당신을 보셨을 때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울지 마라. 너는 내 자녀다. 실패도 했지만, 절망도 했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내 자녀야. 너를 통해 내 영광을 드러낼 꺼야." 하는 그런 위대한
우리 크리스챤의 프라이드가 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에게 그런 현장을 주신다고 저는 믿고 있습
니다.
10절 말씀 읽겠습니다.
(수 5:10)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수 5:11)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출애굽사건이후에 처음 유월절을 그들이 지킵니다.
여러분, 출애굽할 때 유월절을 지킵니다. 유월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모든 애굽의 장자들을 하나님께서 치셨습니다. 장자들이 모두 죽어 넘어지는데 이스라엘 백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사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양을 잡아서 문설주와 인방에 그 피를 바르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는데 문설주와 인방에 피로 인해 죽음에서 건지움 받았습니다.
혈통이 아니라 그 문설주와 인방에 발려진 그 피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표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누군가 오시는데 그분이 어린양처럼 철저하게 죽어주심으로, 자신의 무죄하신 피를 흘려주심으로 그 피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열망이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예수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유월절날 체포되시고 죽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 유월절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 지킵니다.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어떤 종교심이나 우리의 의지가 아닌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이 구원과 축복의 오늘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현장이 바로 유월절 축제였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가나안 땅의 열매를 거둡니다. 볶은 곡식을 먹습니다. 광야에서 왜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는가 하면 광야에서는 열매를 거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습니다.
양들은 끌고 다니면 되지만 농사는 한곳에 붙박이 해야만 지을 수 있지 않습니까? 농사를 못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는 그들이 자기들이 심지 않고, 자기들이 가꾸지 않은 열매들을 거두게 됩니다. 이미 남들이 다 심어준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노력하지 않은 구원입니다. 내가 뭔가 공로 세우지 아니한 구원입니다. 이것은 오직 은혜입니다.
가나안 땅을 누리는 것은, 그 땅의 풍성한 소산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아무런 대가없이, 아무런 공로 없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의 구원과 그의 놀라운 축복들이 은혜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은혜를 지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정말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셨구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이 땅을 하나님이 주시는구나. 정말 은혜로다. 그들의 가슴에 이 은혜를 깊이 담는 현장감이 지금 하나하나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나타난 한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읽습니다.
(수 5: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
누군가 나타납니다. 누군가 칼을 뽑아들고 그 앞길을 막고 있습니다.
"너는 아군이냐? 적군이냐?" 그때 나타난 대답이 무엇입니까?
14절 보십시오. 읽습니다.
(수 5: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의 군대장관, 성경은 마치 하나님이 파송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에서부터 승리케 하신 그런 천사처럼 묘사하지만 실제로 이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다양하게 묘사하십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을 정복케 하시는 그 놀라운 역동성 있는 현장에서 당신을 소개하실 때 당신을 군대장관 바꾸어 말하면 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싸우시는 전사로서의 하나님. 그래서 가나안 땅을 대적으로부터 다 빼앗아서 당신의 백서에게 주시는 싸우시는 전사로서의 하나님의 이미지가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에게 그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현장들은 얼마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조상들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이 매일 역사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만나를 먹으면서도 반석에서 샘을 솟게 하는 주의 능력을 경험하면서도 매일 구름기둥을 경험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2세대는 달랐습니다. 순종하고 하나님께 철저하게 신뢰하는 것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고 경험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5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수 5:15)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수아에게 무엇을 명령하십니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어디서 많이 보았던 단어 아닙니까? 어디에서 이 단어가 나옵니까?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처음 대면했을 때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때 그때 들리어진 하나님의 음성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거기에서 신을 벗어야만 합니까?
그곳은 거룩한 땅입니다.
왜 거룩합니까?
그 땅 자체가 거룩합니까?
불타는 가시떨기나무가 거룩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기 와 계셨기 때문입니다. 흔히 이것을 하나님의 임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와 계시기 때문에 그 땅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 와 계십니까? 가나안 땅에 와 계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경험했던 시내산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이미 가나안 땅에 와 계셨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향하여 나아갈 때 이미 그분이 와 계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앞서와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40년전부터 그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등집니다.
그럴 때 매일 마다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현장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땅과 그 영광을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을 불러 세운 그 하나님은 인생광야에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 마지막 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영원까지도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와 함께 있던 하나님이 위기가 온다고 떠나신 것이 아니고 환난이 온다고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동일하게 동행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볼 때 모든 일이 잘되면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야, 하나님이 함께 한다. 하나님이 도우셨다.' 그러나 내 생각대로 안되면 하나님이 나를 등졌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생광야, 인생골짜기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동행하셨습니다. 한번도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나 과부처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세상 끝날 까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성공에 하나님이 계신 것도 아니고 당신의 실패가 하나님이 안 계신 것도 아닙니다.
성공, 실패 어떤 것이든 정말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지금껏 함께 했다.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다. 함께 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나가자. 함께 이 구원의 역사를 정복해 나가자. 함께 하나님의 비전을 이 땅에 완성해 나가자.
하나님의 간곡한 바램이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처음 오셔서 제일 먼저 외친 복음이 뭔 줄 아십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 말은 예수 믿으면 지금 천당 간다는 얘기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난 다음에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그 나라,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완성해 나가는 그 나라, 언젠가 주님이 오시면 완성할 그 나라, 이제와 아직 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또 한면으로는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당신의 삶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현장으로 삼아가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을 통해서, 당신의 가정 속에서, 당신의 직장과 사업 속에서 하나님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삶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당신의 삶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현장감, 그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 보이고 지금 살아가고 계십니까?
당시의 이웃에게 그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고 있습니까?
직장에서 그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고 있습니까?
당신이 가는 그 모든 곳에서 정말 하나님이 여기까지 함께 하셨다는 그 거룩한 고백과 감격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은 이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같은 배경을 가진 두 가지 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작가 김정현이 쓴 '어머니' 라는 책입니다.
또 하나는 요새 새로 나온 신간인데 19세 대학생이 쓴 것입니다. 최관석이라는 어린 친구가 쓴 '둥지' 라는 책이 있는데 둘 다 IMF를 통해서 깨져버린 가정, 해체된 가정을 배경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정현의 '어머니' 는 픽션입니다. 상상을 동원한 하나의 소설이고, '둥지' 라는 책은 실지상황입니다.
'어머니' 라는 책을 보면 IMF를 통해서 한 가장이 부도를 맞습니다. 부도 때문에 이 사람은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이 소식을 듣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잠시 정신이 나갑니다. 그래서 가출을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남겨진 것이 외동딸 하나였습니다. 이 딸아이가 충격 끝에 방황하다가 자기 친구 따라서 단란주점으로 갑니다. 결국 거기서는 늑대 같은 남성들에게 성을 유린당하는 그런 처참한 모습이 되어버립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이 딸을 찾아다니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만 식물인간이 되어버립니다. 물론 후반부에 보면 그런 가정이 다시 만납니다. 포장마차 하던 엄마와 딸이 만나고, 나중에 식물인간이 된 아빠를 만나서 가정이 회복된다는 말이지만 회복을 말하기에는 이미 많이 깨져버린 가정이었습니다. 영혼과 삶이 유린당한 가정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최관석이 쓴 '둥지'라는 글은 실화인데 똑같은 분위기입니다. 아버지가 부도를 맞고 역시 도망가버렸습니다. 채무자들이 집에까지 쳐들어 왔습니다. 밤낮으로 시달리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그 집의 맏딸이 수능고사를 보는데도 채무자들이 쫓아왔습니다. 새벽 두시까지 그 딸을 흔들면서 아빠 있는 곳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협박을 합니다. 안 그러면 너 시험도 못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딸이 시험을 보는 고사장까지 따라옵니다. 그 딸이 시험을 제대로 보겠습니까? 정말 혹독하게 이 집안을 괴롭히는데 나중에 이 부인이 이제 파출부하고 보험외판원을 하는데 월급타면 다 빼앗아가 버리고 교통사고 당해서 몇 푼의 보상금까지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정말 기구한 인생입니다. 5년 동안 그렇게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상황이 매일 마다 연출되었다고 합니다.
최관석 이 친구의 고백을 보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죽기를 결심하자 다시 살고 싶어 졌어요. 그리 우리 가족의 고통을 글로 남기고 싶었지요.'
그래서 매일 마다 일기를 썼다는 것입니다. 한번 우리 가족의 고통을 남들이 좀 알아야 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냥 죽어버리면 모르니까 남들이 자기들을 배신자라 실패자라 그럴까봐 글을 썼는데 보니까 정말 처참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살아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정말 큰 고통을 당하면 희망이 아닌 오기로 살 위험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오기로 살고 싶지 않고 희망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삶이란 어차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시소게임 아니겠습니까? 언젠가는 올라갈 것입니다. 끝이 안 보이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살면 언젠가는 좋은 일이 올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게임이니까.'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어차피 게임할 때보면 그 게임이 한번에 레벨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계속 깨지고 자꾸 하다보면 레벨이 높아집니다. 그것처럼 인생도 이렇게 싸우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높아지게 될 때가 오겠지.' 이것이 이 아이의 지론입니다.
5년만에 어떻게 달라지는지 아십니까?
그렇게 빚쟁이에 시달렸던 그의 누나, 수능 당일까지 시달리던 누나는 연세대 4학년으로 법학과를 다닙니다. 올해 사법고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작 중학교 때부터 그렇게 혹사당하고 힘들었던 이 친구는 지금 외대를 합격했습니다.
여러분, 똑같은 환경을 가지고 다루고 있습니다. 김정현의 '어머니' 는 그런 환경을 통해서 무너져 버린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최관석이 쓴 '둥지' 는 인간 승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냥 가상의 이야기이고 하나는 실화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둘 중에 하나의 책을 권한다면 어떤 것을 권하겠습니까?
'어머니'입니까? '둥지'입니까?
저는 작가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결과를 중요시도 하지만 과정을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제 아이들에게 '어머니'라는 책은 권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버지' 라는 책은 직접사서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라는 책은 선물로 주지 않았습니다. 안 봤으면 좋겠습니다. 대신에 '둥지'라는 책은 그놈들 앞에 펴놓고 왔다갔다합니다.
보라고 하면 또 뭔가 아빠가 할 말이 있는가 싶어하니까 그냥 가까이 두는 것입니다.
인생은 그런 과정을 다 겪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실패자로서 인생을 끝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생 승리자로서 인생을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을 통해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다음 세대가 섭니다.
충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순종이 그들에게 더 큰 문제였습니다. 매일 마다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매일 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그 삶의 현장에 세워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이제 주님과 더불어서 우리 삶의 현장에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해 나갈 것입니다. 그 반응은 우리의 삶에서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회복과 하나님의 승리케 하심이 날마다 선포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