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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숲이 무성해야 새들이 깃든다
- 2024년 <산림문학> 여름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그 많은 숲이 땅에서 뿌리 뽑히고 /학살당하고 /끝장 니서 /돌돌 말렸으니 // 그 많은 숲이 희생당한 것은 / 해마다 독자들에게 산림 벌채의 위험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수억 장의 신문을 만들 펄프 생산을 위해서라네.
J. 프레베르 <절망이 벤치 위에 앉아 있다>
Ⅰ.
W. C. 브라이언트의 ‘작은 숲은 신의 첫 성당이었다’와 R. W. 에머슨 ‘숲의 입구에 다다른 세상 사람은 크고 작고 현명하고 우매한 갖가지 세상사를 잊게 된다. 가슴으로 가득 찬 등짐은 없어진다.’는 어록을 서두에 배치하면서, 이번 계간평의 제목을 ‘임심조서林深鳥棲, 숲이 무성해야 새들이 깃든다’로 정했다. 여름호 수필작품은 ‘숲’을 제재로 쓴 글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계간평 분석 대상 작품 역시 전부 숲을 제재로 한 수필이다. 산림문학의 취지가 완벽하게 구현된 작품은 늘 있어왔지만, 지난 호는 숲을 주제로 한 테마수필이라도 된 것인 양 글에서 숲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다행한 일이고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세상사 바쁜 일반 국민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숲은 신의 위대한 환희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숲은 신 자신이 뿌린 생명의 씨앗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박경용 시인은 <숲에 바닷소리가>에서 ‘숲에 잔잔한 파도가 이는 건 바다로 나들이 갔던 바람 한 떼가 숲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숲속에서 파도소리를 듣고, 바다 한 가운데서 산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같이 정서적 환기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문학을 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숲은 수풀의 준말로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곳'을 뜻하나, 일반적으로는 '수풀'보다 '숲'이 훨씬 널리 쓰이고, 수풀은 풀이 무성한 곳에 쓰이는 단어로 자리잡았다. 한자어로는 산림이라 하며 특히 빽빽한 숲은 밀림이라 한다. 산림을 사랑하는 문인들이 한국산림문학회를 조직하고, <산림문학>이란 문예지를 발간하니, 산림의 시대가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포레스트forest', '우드wood' 또는 그로브grove라는 ‘숲’을 뜻하는 영어도 많이 쓰인다. 산 혹은 평지에서 나무가 대량으로 자랄 수 있는 일정 조건을 만족하면 형성되며, 빽빽하게 우거질 경우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곳이 될 수 있다. 더군다나 야생동물들이 대거 서식하고 지형 또한 험해질 일이 많기에 밤에는 아주 위험한 지역이 된다. 고대부터 많은 문화권에서 위험하고 신비로운 곳으로 여겨졌으며, 고목 숭배 사상과 더불어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의 근간이 되었다. 요즘은 숲세권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생명이 발원하고 약동하는 공간이며, 신비로운 에너지로 가득한 곳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번에 다룰 작품은 다섯 편이다. 분석틀은 ANT이론이고, 대상작가는 김은희, 박용구, 윤순원, 이수오, 황점숙이다..
Ⅱ.
생명에 대한 애정이 배제된 수필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21세기 수필가는 생태적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수필은 생명체에 대한 순수한 애정의 편린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소중한 경험의 산물이요, 문인는 그 경험의 문학적 전파자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배려의 자세라는 것을 다섯 분의 산림수필은 말해준다. 아래 분석당하는 수필들은 그 제목만으로도 산림 지향성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주제의 내면화가 잘 되어 있어 산림문학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공간적 배경이 되는 대부분이 자연이고 녹지다. 이런 작가들의 자연친화적인 삶과 생태합리성적 인식은 산림문학인의 사회적 소명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문학적 안목이라는 것은 대상을 그 속성 자체로 재인식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작업이어야 한다. 그 연결고리에는 언제나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삶이 존재한다. 마틴 루터킹은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라고 한 바 있다. 다섯 분의 수필 한 축에는 녹색 존재에 대한 가치가 물결치고 있다. 이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것은 숲의 존재를 껴안으면서 그 포용의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글솜씨에 있다고 하겠다.
여름 새벽의 숲속 식구들은 바쁘다. 서둘러 온 나보다 더 부지런하다. 숲 바람은 밑으로 떨어진 수피 찌꺼기를 살살 쓸어내고 있다. 나무들은 새벽부터 내 눈을 즐겁게 한다. 숲이 부는 휘파람에 위부터 층층이 이파리가 책장 낱장처럼 한 장씩 넘어가고 있다. 잎맥의 상형문자들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해독이 가능한 글자들이다. 여름 아침에 숲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윤동주, 백석, 김수영, 기형도 시인들의 손이 낱장에 붙어서 움직인다. 느리게 낱말들을 눈으로, 가슴과 코로 깊게 들이마신다. 솜사탕 같은 보드라운 꽃잎과 향긋한 숲 향기가 피부에 닿으면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힘이 솔솔 피어난다.
서둘러서 햇살이 다가오면 내 숨쉬기도 빨라진다. 수은주가 뒤처지지 않고 쭉쭉 올라가기 때문이다. 빠른 호흡을 하는 내게 산신령께서 더러는 한 박자씩 쉬라고 흰 도포 자락을 날리며 토닥인다. 그리고 부채로 내 몸뚱이 열기를 식혀 준다. 다시 달콤한 시간이 흐르고 편안한 숨이 길게 이어진다.
김은희 <숨 쉬는 그곳> 중에서
숲은 산림의 중추요, 생명의 표지다. 무릇 생명을 가지고 생명을 예찬하는 자 누구든지 숲을 좋아할 것이다. 숲속의 나무들은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한다. 한 그루의 나무는 우연히 땅 위에 서있는 것이 아니다. 온 그루에 모인 정이 필연적으로 터져서 유기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뷔르노 라투르의 <행위소-연결망이론>에 따르면 생명체고 비생명체고 전부 하나의 행위소다. ‘숲이 부는 휘파람에 위부터 층층이 이파리가 책장 낱장처럼 한 장씩 넘어가고 있다. 잎맥의 상형문자들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해독이 가능한 글자들이다. 여름 아침에 숲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윤동주, 백석, 김수영, 기형도 시인들의 손이 낱장에 붙어서 움직인다.’는 대목은 이 수필의 압권이다. 동물도 식물도 사물도 환경도 기술도 문자도 전부 다른 행위소에 영향을 미친다. 이를 ANT이론에서는 구조접속이라고 한다. 복잡계의 세상 속 모든 것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역동적 관계 속에 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작용, 즉 구조접속을 통해 하나의 사건이나 만남은 하나의 하이브리드 의미체가 된다. 이 수필은 라투르의 행위소-연결망이론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숲을 사랑하는 김은희 작가와 비인간인 숲의 네트워크가 구축하는 생태계의 존재와 확장을 눈여겨 보는 것이 이 수필을 감상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우리가 이승을 떠나는 날 언젠가 내가 심었던 기념식수 아래 수목장을 한다면 그 또한 매우 뜻있는 일이 될 것이다. 어느 해인가 수강생들에게 내 나무 갖기 수종을 정해보라고 했다. 은행나무, 배롱나무, 생강나무, 뽕나무, 수양버드나무, 느티나무, 굴피나무, 엄나무, 자두나무, 석류, 대추나무, 팽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나왔다. 이들이 자기나무를 정한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그 나무와 얽힌 그들의 이야기가 서려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와 함께 놀았던 나무도 있고, 어렸을 적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에서 쉬고 계시던 할아버지 막걸리 심부름을 했던 이야기도 있었다. 어떤 이는 어렸을 적에 자기 집 마당 안에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그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할 때 서운한 마음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렇듯이 자기나무와 이어진 사연은 시가 되고 추억이 된다. 나이가 들면 이러한 추억은 깊은 향수가 되어 마음을 따사롭게 만들어 준다. 자기나무를 갖는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박용구 <숲과 문화 평생교육> 중에서
작가는 정년 이후 산을 좋아하고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숲과 문화’에 대한 이야길 나누며 지내고 있다. 시작할 즈음에는 중국이나 일본 등 가까운 외국에 있는 산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명 산을 다니기도 했으나 요즈음엔 가까운 주변 산으로 다니며 나무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이 수필의 내용 중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 자기 나무 갖기다. 어느 해부터 작가는 수강생들에게 자기 나무 갖기 운동을 펼치면서 자기 나무를 정한 이유를 물어본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이승을 떠나는 날 언젠가 자신이 심었던 기념식수 아래 수목장을 한다면, 그 또한 매우 뜻있는 일이 될 것이 한다. 나무가 사람이라는 인간 행위소에게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무는 하나의 객체로서 물체였지만 사람이라는 행위소를 만나게 됨으로써 한 나무는 인간 행위소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간과 비인간의 만남, 역동적인 상호관계를 살펴보는 것이나 사람과 나무의 만남이 다를 수 없다. 한 나무가 한 사람의 나무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사람이 한 그루의 나무를 자기 나무로 하는 순간 사람들에게 생명의 따뜻함을 품게 만드는 것을 ‘목표의 변혁’이라고 하는데, 이런 행위소-연결망이론으로 박용구의 나무와 사람의 만남, 그 역동적 상호관계를 파악하면, 나무라는 행위소가 사람에게 미친 영향, 즉 ‘목표의 변혁’을 분석할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수필감상의 새로운 관점을 확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숲에 들어설 때마다 고향의 품에 안긴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태어날 때 물려받은 원초적인 본능 때문이다. 우리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수백만 년 전에 동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숲에서 살다 보니 인간의 유전정보 속에는 숲으로의 회귀본능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숲은 생명을 낳고 키우며 생명의지를 북돋우는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숲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건강하고 행복하다. 얼마 전부터 ‘숲세권’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가까운 사이에서는, ‘이사를 하게 되면 좌 전철, 우 마트, 전 학교, 후 공원을 고려하라.’는 충고를 잊지 않는다. 즉 집 근처에는 전철역과 마트, 학교와 공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순원 <청산에 살으리랐다> 중에서
눈부시게 푸른 오월 어느 날, 작가는 초록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원주 백운산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새소리와 물소리가 점점 가까워옴을 느낀다. 이윽고 개울이 보이는 둔덕에 오른 순간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잣나무와 낙엽송이 하늘을 찌르고 머루와 다래덩굴이 터널을 이룬 가운데, 여울은 만난 물이 큰 소리를 내며 힘차게 흘러내렸다.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쉬지 않고 흐른다는 시간이 물의 형상으로 나타나더니 그때 「청산별곡」의 시구詩句를 떠올린다. 예나 지금이나 자연을 향한 마음이 같았던 것으로 판단한 작가는 죽음을 각오하고 시골로 내려간 베토벤이 숲길을 걷다가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죽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숲은 생체에너지를 북돋아 꺼져가는 생명의지를 되살리고, 아름다운 영감이 떠오르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설파한다. 이 수필은 ‘사람 인人’변에 ‘나무 목木’으로 되어 있는 ‘쉴 휴休’자 풀이를 통해 숲이 인간에게 주는 휴양의 기능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한 주제의식의 구체화가 압권이다. 윤순원 수필 속 자연, 숲, 나무, 물 등 모든 것을 비인간이라고 하는데, 이런 모든 비인간적인 속성을 가진 것들이 독립적 개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행위소를 만나면, 다시 말해 구조결속을 하면, 사람의 행동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자연을 깨닫고 자연이 갖는 ‘공존의 원리’를 터득하기에 안성맞춤인 것은 ‘자연의 숲’이다. 숲이란 무엇인가. 좁은 의미에서 숲은 수풀의 준말로 나무가 무성하게 들어찬 곳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숲은 나무뿐만이 아니고 만물이 모여 있는 공존의 무대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진정 인간이 숲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공존의 원리’이다. 이것을 실천하는 덕목을 기르는 것이 인류의 미래를 밝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공유하여 공감하면 공존하게 된다. 튼튼한 공존의 바탕 위에서 참된 공생과 상생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이다.
이수오 <자연 숲에서 인류 미래를 보다> 중에서
현대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팽배에 따라 삶의 방식이 더욱 음험해지고 비인간화로 진행되고 있어 현대인들은 무기력과 좌절감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 산림문학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물음은 당대의 모순 해결을 위한 문제제기이기도 하지만 공존을 위해 우리가 풀어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작가의 숲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은 ‘공존의 원리’를 터득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수필은 소중한 경험의 산물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숲은 나무뿐만이 아니고 만물이 모여 있는 공존의 무대’라는 것을 이 수필은 잘 말해준다. 작가는 공존과 생생의 정신을 주제지향성으로 내세우고, 숲의 가치를 드높임으로써 숲사랑, 생명존중 녹색환경보호 정서녹화를 모토로 걸고 있는 산림문학회 소속 수필가의 소명을 다하고 있다고 하겠다. 문학적 안목이라는 것은 대상을 그 대상의 속성 자체로 재인식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그 연결고리의 한 축에는 언제나 인간과 자연이 존재한다. 이 수필에는 숲의 존재에 대한 가치가 물결치고 있다. 그래서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것은 사회의식이라기보다 자연의 향내라 할 수 있다. 숲에 대한 애정이 배제된 수필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수필은 생명체에 대한 순수한 애정의 편린이다. 이 수필은 숲이 참된 나를 찾을 수 있는 길임을 알려준다. 수필가의 정신적 건강함이 산림문학의 새로운 활로로 이어지길 바란다.
숲속인데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 없으랴. 제법 깊숙이 들어가서 뒤돌아보니 건너편 산자락에 절정을 이룬 아름다운 단풍 숲이 보인다. 느티나무 숲, ‘한유시경’이다. 한가로이 숲을 거닐다 보면 시인의 경지에 이른다는 곳이다. 곱게 물든 단풍도 먼발치에서 잠시 쉬며 감상했다. 이곳 사유원이 10만 평이라니 지나온 길을 다시 가게 되는 것이 다반사다. 잠시 길을 잃는다고 해도 아쉬울 것이 없는 자연 숲이다.
누렇게 익은 모과가 향기를 풍긴다. 300년 된 모과나무 108그루가 식재된 곳, ‘풍설기천년’이다. 각자 걸음으로 사유원을 돌던 회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이곳에 모였다. 사유원의 중심인가보다. 가을을 듬뿍 담을 수 있는 모과나무 앞에서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다. 사유원의 발상이 모과나무로부터 시작되었단다. 설립자가 귀한 모과나무와 인연이 맺어졌고 아끼던 모과나무를 식재하고 그곳에 수목원을 만들게 되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모과가 수목원에 향기를 나눈다.
황점숙 <사유의 숲에 들기> 중에서
이 수필은 작가가 박물관 회원들과 함께 10만 평이나 되는 자연 숲 ‘사유원’을 둘러 보고 쓴 글이다. 이들은 비싼 입장료를 내고 여러 곳을 거쳐 누렇게 익은 모과가 향기를 풍기는 300년 된 모과나무 108그루가 식재된 곳, ‘풍설기천년’에 약속이라도 한 듯 이곳에 모였다. 사유원의 발상이 모과나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설립자가 귀한 모과나무와 인연이 맺어졌고 아끼던 모과나무를 식재하고 그곳에 수목원을 만들게 되었다는 설명이 행위소연결망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황금빛으로 물든 모과가 수목원에 향기를 나누는 황점숙의 수필을 읽고 있으면, ‘예술미는 자연미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 헤겔의 주장이 떠오른다. 그는 예술을 정신적인 소산으로 여겼으며, 예술의 목표가 단순히 자연을 모방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앞에서 느끼는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예술을 정신화의 과정으로 보고, 완전한 재현과 모방은 영혼과 생명력이 없는 것이라 치부하였다. 즉 예술을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에 근본적인 변형을 거쳐 진리를 감성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라 여겼다. 사유원이 개원하기까지 15년의 준비 기간을 거쳤단다. 풀과 나무가 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자연의 시간을 기다렸다니 초입의 평범해 보이던 모습이 자연스러움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수목원 설립자의 자연관은 헤겔의 예술정신과 다른다고 하겠다.
Ⅲ.
삼사, 즉 사람, 사연, 사물을 잘 이해하려면 어떤 만남인가를 아는 게 중요하다. 행위소 자체가 핵심이 아니고, 한 행위소가 어떤 행위소와 만나 어떤 네트워크를 가지느냐가 이 수필을 해석하는 데 가장 포인트가 된다. 어떤 존재가 어떤 존재와 어떻게 만나는지는 수필창작에서도 수필의 감상에서도 중요하다. 행위소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행위소의 존재보다 행위소의 관계에 중점을 둔다. 행위소는 독립된 행위소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로 존재한다. 기차만 있으면 의미가 없다. 철도라는 행위소를 만나 기차는 역동성을 갖게 된다. 역동적인 힘은 네트워크로 얻는다. 모든 존재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다. 행위소와 행위소가 만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구조 과정이 translation이다. 김진택은 “translation은 부드럽고 평화로룬 소통이 아니라 사고와 일탈을 근원적으로 동반하는 강력한 충돌이자 접속이며 존재들의 생성과 확장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했다. 이 표현은 숲속의 나무와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작가의 행위소들간 의견 충돌, 갈등, 치열한 접속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자연은 “숲은 공존의 원리를 터득하게 한다.”는 이 산림수필들의 문학성을 견인하는 핵심 행위소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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