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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말씀/ 베드로전서 3:8-4:11 요절/ 베드로전서 4:1 | 2024. 12. 29 | |
베드로전서 신년 1강 |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는 자는 죄를 그쳤으니”
사건과 아픔이 많았던 갑진년 한 해가 저물고 2025년 을사년 새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신분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는 것을 배우고 자긍심이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시련의 연속이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럽고 암담합니다. 고난의 파도 속에 던져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고난의 의미를 알고 새롭게 영적 무장함으로서 새해를 힘차게 출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8-17은 불신자들이 많은 세상에서 신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신자들 간에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 힘써야 합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영향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신자들 간에 서로 사랑함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견고히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사도 베드로는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국가와의 관계, 직장상사와의 관계, 부부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모습을 보이라고 권면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방문화 속에서 살면서 불신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줍니다. 불신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세상 속에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형제 사랑에 힘써야 합니다. 형제 사랑은 마음을 같이 하는 것, 동정하는 것, 불쌍히 여기는 것,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 간에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를 만들 때 세상에서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힘을 얻지 못하면 밖에서도 힘을 내기가 어려운 것처럼, 교회에서 신자들끼리 서로 사랑함으로 밧테리가 충전되어야 세상 속에서 빛을 발 할 수 있고, 세상을 정화시키는 소금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이렇게 부당한 대접을 받을 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아주고 싶고 복수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38-44)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도 베드로도 나에게 악을 행하고 욕하는 자에게 복수하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주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복을 이어받게 하려고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저주 받은 세상을 구원하고 축복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의 근원의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부르신 것은 나를 복의 근원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복의 근원이요 복의 샘터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은 나만 복을 받고 나만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을 누릴 뿐 아니라 그 복을 세상으로 흘러보내서 복이 대대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비방하고 욕하고 해를 끼치는 사람들도 저주하지 않고 복을 빌어주는 비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시편 34편을 인용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의 세상 속에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는 생명을 미워하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 가운데서도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소망하며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막말이나 악한 말을 그치고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법을 지키고 죄악에서 떠나는 것으로 그치는 자들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선을 만들어 가고 선을 확장하는 사람들입니다. 화평을 구하고 화평을 만들고 화평을 확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불신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어떻게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한 복판에서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세상을 다스리시고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주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믿는 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면밀하게 보고 계시고,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동시에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적하고 계십니다.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시고 공의롭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악과 타협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는 삶,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우리를 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에서는 열심 으로 선을 행하는 자들이 손해를 당하고 무시당하고 상처를 입을 때가 많습니다. 열심으로 선을 행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고 세상에서 버려진 것처럼 여겨질 때 열심이 식어지고 닉심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자가 복 있는 자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면 그는 복 있는 자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비난이 따르고 형벌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로마서 2장 9절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고난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린이들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손녀 슬아는 호기라는 영상을 즐겨보는 데 앉아서 보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누워서 봅니다. 자녀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할 때가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 사람 만나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요 죽음으로만 이 땅에서의 고난이 끝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고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으니 대책 없이 죽을 수도 없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을 피할 수 없다면 의미 있는 고난을 받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의미 있는 고난은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요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입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는 복 있는 자입니다. 고난이 고난으로만 끝난다면 복 있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 후에 영광이 있고 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고난은 참으로 의미 있고 아름답고 값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을 두려워하고 고난에 대해서 근심합니다. 그들은 어찌하든지 고난을 피하고 안락하고 편하게 살고자 합니다. 그런 인본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 때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고 죄악의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세상 사람들이 빠지는 두려움과 근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두려움과 근심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고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당장에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을지라도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삶, 복음전파와 함께 원수까지 사랑하는 비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그리스도로 나의 삶이 가득 채워질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고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양심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옳고 그름을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도록 새겨주신 도덕적인 의식입니다. 양심은 우리의 행동에 판결을 내립니다. 우리가 복음을 변증할 때 온유와 두려움도 필요하지만 선한 양심도 필요합니다. 양심이 더럽혀져 비방을 받는다면 그것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변증할 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질 때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은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들은 현재 부끄러움을 당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종말적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지려면 날마다 회개하고 죄사함의 은혜를 입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18-22절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 보여줍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 고난의 절정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누구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성령으로 태어나심으로 죄가 없으셨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들이 받는 시험을 다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왜 대속의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죄로 더럽혀졌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께 갈 수 없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지고가심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께 가는 새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죽임을 당하셨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에 그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지옥에 있는 자들에게 심판을 확정하셨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렸지만 그들은 회개치 않고 쾌락에 빠져 있었습니다.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겨우 여덟 명이었습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또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노아의 가족들에게는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물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는 세례를 상징합니다.
세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세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세례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는 표일뿐 아니라 선한 양심의 빛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믿음의 결단이며,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과 연합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으로서 교회와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들과 악의 세력들을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르신 것처럼 우리 신자들도 고난을 통과하면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현재의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감당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1-11절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세로 고난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4:1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은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야 합니다. ‘같은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에 대해 어떤 자세와 정신을 가지셨나 생각하며 영적 무장을 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내 의지로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전생애는 고난을 빼고는 설명되지 않을 만큼 고난이 많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고난을 피하지 않고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감당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피하지 않고 그 앞에 있는 부활의 즐거움을 바라봄으로 끝까지 그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영적 무장할 때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에게 닥친 고난을 견딜 수 있고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들은 죄를 그치게 됩니다. 고난에 처해질 때 죄 지을 틈이 없고 죄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충만할 때 죄를 이기게 되고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볼 때 여러 가지 시험이 있었고 아픈 일들도 많았습니다. 봄학기 양들이 몰려오고 봄수양회에서 소감을 쓰고 발표할 때 우리 가운데 기쁨과 희망이 넘쳤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연예에 빠지고 거짓으로 자기 죄를 합리화할 때 모임을 이루기 어려웠고 하나님의 역사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많은 기도와 영적 훈련을 통해 돌이키고자 했지만 끝내 회개치 않음으로 가지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모임을 새롭게 하여 주시고 신실한 목자들을 통해 복음전파와 제자양성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유럽국제수양회에 여러 목자들과 학생들을 참여케 하심으로 세계선교 장막터를 넓혀주시고 선교비전과 믿음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마가복음과 야고보서와 베드로전서 말씀을 주시고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주시고 캠퍼스 개척역사에 계속 도전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서로 교제를 나누게 하시고 부모님들과 자녀들을 돌아보게 하시고 직장과 일터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많은 사고와 질병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과 필요한 것들을 때마다 채워주셨습니다. 많은 시련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고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고 말씀과 사랑으로 섬겨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정치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의대생들이 복학할 수 있을지 또 휴학하게 될지 정부와 의료계간에 갈등이 있습니다. 대학 새내기가 되는 자녀가 대학생활을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고3이 되는 학생이 수능의 산을 넘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가 학교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을지, 졸업하고 자립할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취업준비하고 있는 자녀에게 쨍하고 해뜰 날이 올 것인지, 나이가 꽉 찬 청년들이 결혼할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닐 겁니다.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고난에 대한 자세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자세를 가지고 죽을 각오로 고난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고난이 나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강하게 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빚어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옛생활로 돌아가지 말아야 하며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무장을 하고 고난을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이유는 다시는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은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옛생활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까? 음란, 정욕, 술과 방탕,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며 세상사람들과 다름없이 행하는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남은 인생을 세상 정욕대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죄를 버리고 의롭게 살면 세상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고 비방합니다. 옛날에는 자기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음란한 데 다녔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더니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으니까 이상하게 여깁니다. 일요일에 함께 모여서 등산도 하고 운동도 하고 게임도 했는데 교회에 간다고 하니 ‘세상 살다보니 별 일이야’ 하며 비방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비방한다고 해서 다시 그들과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장차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십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불신자들은 신자들을 비방하고 핍박한 죄들을 다 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심판을 받으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 때문에 형벌을 받지 않고 칭찬과 함께 상을 받을 겁니다.
7-11절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수직적 관계에서의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하며,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올 해를 돌아볼 때 기도에 게으를 때가 많았습니다. 새 해에는 우리가 새벽기도와 금요기도와 가정에서의 기도에 마음을 드리고 시간을 드려야 겠습니다. 수평적으로는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요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사랑할 때 미움과 다툼이 그치게 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해야 합니다. 뜨거운 사랑은 대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대접할 때 원망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대접해야 합니다. 요구하는 마음이 있을 때 원망하게 되고 피해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양들을 대접하고 선교사들과 동역자들을 대접할 때 기쁨과 행복이 밀려오게 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해야 합니다. 은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해야 합니다. 이는 언어의 은사, 봉사의 은사를 하나님을 섬기듯이 사람들을 돕고 세우는 데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2025년 춘천교회의 요절은 베드로전서 5장 3절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기도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고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 둘째,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자. 셋째, 복음전파와 열두 제자 양성과 세계선교에 열심을 내자.
2024년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돌아보고 감사해야 겠습니다. 또한 우리의 허물과 죄에 대해 회개함으로 마음을 새롭게 해야 겠습니다. 무엇보다 2025년 신년 말씀을 받고 새해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