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 동안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따뜻한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와중에 장범준의 여수 밤바다의 노랫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편안한 음색에 저절로 마음이 풀어지면서, 문득 여수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탁 트인 바다의 풍경을 보면서 낭만 있는 거리의 풍경을 거닐면 이 답답한 마음도 사르르 풀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여수로 향했다.
▲ 여수시의 마스코트 여니, 수니.
나에게 여수는 저 멀리 남해에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여수 밤바다란 노래가 유행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충무공 이순신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여행을 계획하며 여수의 명소를 둘러본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지역보다 확연하게 이순신 장군과 연관된 관광지와 상품들이 많았다. 왜군과의 해전에서 승리를 이끈 장군이며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러워하는 인물과 여수의 인연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여수와 이순신
이런 궁금증이 계속되던 차에, 어느샌가 여수에 도착했다. 여수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역시 이순신 광장이었다. 여수를 대표하는 유명한 맛집들이 모여있어 낮밤 상관없이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 광장에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더불어 거북선이 함께 전시되어 있으며 장군의 업적을 설명하는 패널이 있어 역사의 이해를 돕는다.
▲ 광장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관련 설명들.
또한 조선시대 400여 년간 조선 수군의 중심기지였던 진남관(보물 304)이 광장 뒤편에 자리 잡고 있어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서울의 광화문 광장과 경복궁처럼, 이순신 광장과 거북선, 진남관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막연히 위인전이나 영화를 통해 막연하게 이순신 장군에 대해 알고 있었던 이들이라면 이곳에서 다시금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들였던 노력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광장을 거니는 동안 역사를 되새김질하며, 그 중요성을 새삼 느꼈다.
▲ 이순신 광장의 중심인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밤이 되어도 그 위엄을 잃지 않는다.
충무공 이순신은 1576년에 무과에 급좌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으로 처음 관직에 오르게 된다.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한 후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과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했다. 그 후 일련의 사건으로 백의종군을 하며 무관으로서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온 그가 여수에 온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의 그의 나이 47세였다. 전라도 지역에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전라좌도의 수군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라좌수영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은 이순신 장군은 좌수영(左水營, 여수)을 기반으로 왜침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한다.
▲ 장군의 동상과 더불어 광장을 빛내는 거북선의 모습.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으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전라도의 수군은 문제가 많은 편이었다. 관리의 부패로 인해 군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으며 함선이나 병기(兵器) 또한 관리가 되지 않아 녹슬고 썩어있었다고 한다. 그의 지휘 아래 적폐는 청산되고 정상적인 수군으로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방치되어 있던 무기들이 새로 정비되었고 동시에 전투에 활용할 수 있도록 거북선이 개조되었다. 또한 다양한 신무기를 개발하며 전투력을 높이는 일이 진행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부임 후 일 년 만에 조선의 수군은 언제 전투에 나가도 문제없을 정도로 완벽한 변신을 꾀했다. 이런 노력으로 한산도 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 진남관은 현재 보수 공사 중이다. 이 공사는 2022년 5월까지 진행된다.
여수에는 이순신 광장과 진남관뿐만 아니라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록한 좌수영 대첩비(보물 571) 및 타루비(보물 1288), 그리고 이충무공 사당인 충민사(사적 381), 흥국사 홍교(보물 563)와 대웅전(보물 396) 등이 있다. 여수를 둘러보면 볼수록 곳곳에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들이 즐비했다. 물론, 여수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의 무대가 되었던 남해의 섬들에서 장군의 흔적을 엿볼 수 있지만 여수가 특별히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 같았다. 여수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여수 = 이순신 장군의 공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수의 역사가 녹아있는 곳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임진왜란의 역사를 훑어보기 위해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발길이 옮겨갔다. 여수 10경으로 꼽히는 항일암도 그렇게 해서 가게 된 곳 중 하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적과 싸웠던 승려들의 본거지이며 우리나라 4대 관음기도 도량인 이곳은 바다에서 떠오르는 아름다운 일출을 보러 오는 이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매년 12월 31일이 되면 새해에 대한 소망을 기원하는 행사인 항일암 일출제가 열린다.
▲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서는 험난한 길을 필수로 걸어야 하는 항일암.
산의 형상이 거북이가 경전을 등에 지고 용궁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쇠 금(金) 큰 바다거북 오(鰲)'를 써서 금오산이라 부르는 산의 기암괴석 절벽에 위치한 항일암은 풍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지만 가는 길은 순탄치 않다. 주차장에서 내려 항일암까지, 급한 경사로를 가진 돌계단을 끝없이 오르는 일이 힘들기 때문이다.
▲ 수려한 풍경만큼이나 절의 모습도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 하지만 절을 돌아다니려면 절벽 사이를 비집고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새삼, 조상들의 노력에 감탄하게 된다.
▲ 원효 스님의 좌선대는 아찔한 절벽 위에 있다. 서서 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는데, 어떻게 좌선을 하셨나 궁금해질 지경이다.
과연 이런 곳에서 불공을 드렸을까 싶은 마음이 들 때에 드디어 항일암을 만날 수 있다. 이제 끝이겠거니 싶은 마음은 다시 이어지는 좁은 바위틈과 돌길로 절망에 젖는다. 하지만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불심 가득한 절의 모습에 어느샌가 이곳에 절을 만든 조상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험난한 역경을 딛게 되면서 드러나게 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올리는 일은 그 어느 것보다 성스럽기 때문이다.
▲ 호남 지방 의병 및 승병 항쟁의 중심 역할을 했던 흥국사
고려 시대에 지어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등 나라의 위험이 다가올 때 의승군의 주둔지와 승병 훈련소로서 호남 지방 의병 및 승병 항쟁의 중심 역할을 했던 흥국사도 역사를 알기 위해서라면 꼭 들러야 하는 곳으로 꼽힌다. '나라가 흥(興) 하면 절도 흥하고 이 절이 흥하면 나라도 흥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는데, 이는 나라가 안정되고 기운차게 일어나 매우 번성하길 기원하며 호국을 우선으로 하는 사찰이 되겠다는 염원이 담긴 것이라 한다. 그 염원대로 나라를 지킨 것뿐만 아니라 전쟁 후에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국가사업에 참여하는 등, 나라의 안위와 연결되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 보물 396호로 지정된 흥국사 대웅전. 수수한 목조 건물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절 앞에 있는 흥국사 홍교. 보물 제 563호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승병을 훈련하던 자리가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홍교와 대웅전과 더불어 대웅전 후불탱화(보물 578), 수월관음도(보물 1332), 십육나한도 (보물 1333호), 괘불(掛佛), 경전(經典), 경서판각본(經書板刻本) 등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 꽃무릇이 필 시기가 아니었지만, 절 곳곳에는 사진이 있어 그 아름다움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 흥국사에 왔다면, 108돌탑공원을 꼭 들러보시길.
또한 이곳은 꽃무릇 (상사화) 군락지로 유명한데, 전장에 나설 때마다 승병 및 의병들이 소원을 빌며 돌탑을 쌓았던 주변으로 피어나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이 군락지에는 유래가 있는데, 바로 임진왜란과 관련되어 있다. 전국에서 모여든 의병과 승병들은 기약도 없이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했고, 이들의 영혼이 고도를 떠돌다가 이곳에 돌아와 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숭고함이 느껴진다. '피어나지 못한 사랑과 한없는 그리움'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무릇이 만발하는 때는 중추절 (음력 8월 15일)이라고 한다.
바다 위의 크고 작은 섬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여수에서 애국심을 느낄 수 있는 인물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왜 이제야 여기에 왔나 싶을 정도로 여수에는 우리에게 다시금 나라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곳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덕분에 역사를 배우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