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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풋볼뉴스(Football News) 원문보기 글쓴이: 블루문
최강희 감독이 한교원을 가리켜 '인간 승리'라고 말할 만큼 그의 축구인생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어려운 순간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왔기에 지금의 행복이 있다.(사진=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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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비즈니스석은 처음 타봤어요. 자리가 좋아서 그런지 오는 내내 푹 잘 수 있었어요. 하지만 (박)일기 형을 포함해서 스태프 형들이 이코노미석에 있으니까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축구대표팀 선수들에게 ‘당연함’으로 인식된 비행기 좌석 등급에 대해 한교원은 ‘미안했다’라고 표현했다. 감독을 비롯해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외국 원정시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한다. 그리고 나머지 대표팀 관계자들은 이코노미석에 앉게 되는데 이런 장면을 처음 접한 한교원은 자신보다 더 고생하고 나이도 많은 형들이 불편한 자리를 이용한 데 대해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지난 9월 생애 첫 A매치 대표팀에 발탁된 한교원은 A매치 4번째 출전 만에 데뷔골을 터트린 주인공이다. 14일 요르단 암만에서 열린 요르단과의 평가전에서 전반 33분 선제 헤딩슛으로 결승골을 넣어 한국의 1-0승리를 이끌었던 것. 차두리가 오른쪽에서 정확하게 올려준 크로스를 점프로 헤딩슛을 했고, 그게 골로 연결됐다. 오른쪽 날개로 선발 출전했던 한교원은 특유의 저돌적인 스피드로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누비며 슈틸리케 감독으로부터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중동 원정 경기를 마치고 귀국한 한교원을 만났다. ‘미소천사’란 별명만큼 순박해 보이는 표정이 인상적인 이 청년은 인터뷰 중간 중간 ‘뜬금포’ 웃음 폭탄을 날리며 기자를 ‘힐링’의 세계로 인도했다.
#1. 중동 원정 경기 전 장염으로 고생
축구 인생 최초로 태극마크를 달고 중동 원정 경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새로운 경험이었을 텐데 어떠했나.
“하루 하루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또 재미있는 일도 있었고 보고 배울 점도 많았다. 요르단과 이란전은 선수들이 느끼는 무게감이 틀린 듯 했다. 아무래도 이란전에 더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A매치를 원정 경기로 치른 것 자체가 나한테는 기회였고 도전이었다.”
요르단전에서 A매치 데뷔골을 터트렸다.
“A매치에 선발 출전한 것도 처음이었다. 경기 전날 감독님께서 선발 명단을 발표하실 때 내 이름이 불리는 걸 듣고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차)두리 형이랑 K리그 대표라는 사명감을 갖고 잘해보자는 결의도 다졌다. 그러다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그것도 두리 형의 어시스트를 받고…. 서로 진짜 좋아라 했다. 두리 형이 ‘K리그를 우리가 살렸다’면서 기념 사진 찍자고 해 사진도 찍었고(웃음). 어렸을 때부터 상상 속에서만 있던 장면이었다. 헤딩슛이든, 중거리슛이든 골문 앞에서 골을 넣고 세리머니하는 모습. 그게 현실로 벌어지니까 어안이 벙벙해지더라. 현실감 제로였다.”
원정 경기를 떠나면서 선발로 출전할 거란 예상은 했었나.
“설마 그런 기회가 주어질까 싶었다. 출전 시간이 몇 분이 주어지든 갖고 있는 시간동안 열심히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선발 통보를 받으니 긴장이 되더라. 내 인생에서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 여기고 죽기 살기로 뛰었다.”
출국 전부터 장염으로 고생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진짜 힘들었다. 중동 원정 경기 대표팀 명단이 발표됐을 때 장염이 걸려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프다는 얘긴 하기 싫었다.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데, 그걸 아프다는 이유로 놓칠 수 없었다. 물론 걱정도 많았다. 원정까지 가서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돌아오면 어쩌나,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해 감독님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면 어쩌나 하는 복잡한 마음들이 교차했다. 원정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도 화장실에 들락거리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제대로 식사를 못해 체중이 3kg이나 빠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훈련에 나섰다. 아무한테도 장염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행여 출전할 수 없게 될까봐. 아마 K리그 제주전에서 후반에 교체 투입돼 뛰고 대표팀에 합류했기 때문에 감독님께선 의심조차 못했을 것이다.”
9월 베네수엘라와의 A매치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후반 이청용을 대신해 들어간 깜짝 출전이었는데 인저리 타임을 포함해 5분 남짓한 시간동안 매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아시안게임이 겹치는 바람에 ‘운 좋게’ 대표팀에 뽑혔고, 또 ‘운 좋게’ 데뷔전까지 치렀다. 상상만 하던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니까 가슴이 두근두근하더라. 밖에선 5분이 짧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한테는 충분히 행복했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 마음에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2012년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 훈련에 소집되었으나 최종 명단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동메달의 쾌거를 이루는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마음이 쓰리진 않았나.
“내가 올림픽대표팀에 뽑혔을 때는 대학생 선수들을 포함해 30명이 대표팀에 포함됐다. 선수들 숫자가 많다보니 뽑힐 확률이 낮을 거라고 생각했고, 마음을 비운 상태로 연습에 임했기 때문에 최종 명단이 발표됐을 때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누구보다 내 자신을 알고 있었다.”
동메달 획득으로 인해 올림픽대표팀 선수들은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다.
“그 덕분에 내가 상무에 입단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 것 아닌가(웃음). 내 또래 선수들이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으니까.”
아, 그런 계산도 가능하겠다(웃음).
“나로선 정말 다행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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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축구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한교원의 이력을 살펴보면 화려함보다는 어려움, 고단함, 역경 등의 단어들이 나열된다. 먼저 조선이공대 출신의 선수로는 유일한 프로 진출 선수 아닌가.
“2년제 대학 출신의 선수가 프로 가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프로 가서 경기에 출전할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아니, 내가 축구로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조선이공대의 축구부 창단 멤버로 대학에 진학했다. 그 과정에 남다른 사연이 있다고 들었다.
“충주상고에서 대학 진학을 알아보다가 조선대에서 날 데려가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감독님도 허락하셨고.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때 미리 조선대 축구부에 들어가 선배들이랑 같이 생활하며 훈련을 받았다. 대학 진학을 위해 원서를 써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는데 대학 측에서 내겐 원서 쓰라는 얘길 하지 않는 거다. 나처럼 예비 대학 선수들은 모두 원서를 써서 접수까지 시켰는데 유독 나한테만 아무 얘기가 없었다. 나중에 학교 측에선 이미 축구부 정원이 다 찼으니 다른 학교를 알아보라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전했다. 그리고 굳이 대학에 들어오려면 일반 입시생처럼 수능 시험을 치르고 오라고 덧붙였다. 결국 체대 시험을 치렀다. 당연히 떨어졌다. 정말 황당했다. 고등학교에선 조선대에 입학하는 줄 알고 미리 대학에 보냈고 조선대 축구부에서 3개월가량 훈련까지 했는데 입학이 안 된다고 하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나. 그때 축구를 그만두려고 했다.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조선대 내에 있는 조선이공대에서 축구부가 창단된다는 소식을 접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응시를 했고, 레저스포츠학과에 합격 후 조선이공대 축구부 선수로 뛰었다. 그때는 학교 다니다 조선대, 호남대 등 4년제에 편입할 계획이었다.”
조선대 내에 조선이공대가 있었다면 조선대 축구부 선수들과 자주 만났을 텐데, 기분이 묘했을 것 같다.
“진짜 힘들었다. 같은 팀이 아닌 서로 다른 팀이고, 난 2년제이고, 그들은 4년제 대학 선수들이었다. 조선대 축구부 선수들과 마주치는 게 정말 싫었다. 모든 게 귀찮고 짜증이 났다. 더욱이 난 야간반이었다. 비참함의 끝을 달린 셈이다. 어머니께 전화로 축구 그만두고 싶다는 얘길 자주 했었다.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조금만 더 참아라’하며 달래셨다. 대학에서 축구선수로 발전한다는 느낌보다는 뒤로 후퇴한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어떻게 해서 프로에 데뷔하게 된 건가.
“조선이공대 축구부가 창단팀이다보니 선배가 존재하지 않았다. 선배의 구타가 없는 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선배에게 기대지 못하고 모든 걸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경기력으로 나타났다. 팀의 해결사가 나 혼자였다. 내가 골을 넣어야 우리 팀이 승리했다. 1학년 때는 경기 나갈 때마다 패배만 안고 돌아왔다. 그렇게 패하는 숫자가 쌓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승리를 하게 됐고, 2학년 이후엔 패보다 승이 더 많았다. 2학년 한 시즌동안 18득점을 올리며 강팀들을 맞아 주눅 들지 않고 경기를 펼쳤다. 당시 전남 지역의 대학팀들이 호남대, 조선대, 광주대 등이었고, 상대 수비수들은 대부분 3,4학년들이었다. 우린 1,2학년이 전부였고. 쟁쟁한 수비수들을 상대하면서 골을 성공시킨 기분은 정말 짜릿했다. 무엇보다 우리 팀은 볼을 소유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 상대팀 공격 진영에서 볼이 오가다 역습을 통해 골을 성공시키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달’(치고 달리기)이란 별명이 생긴 것 같다. 실력있는 수비수들을 상대로 골을 넣기 시작하면서 기량도 함께 성장했다.”
그래서 2011 신인드래프트를 통해 인천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던 건가.
“내가 골을 많이 넣긴 했지만, 프로행은 언감생심이었다. 내게 관심을 보이는 에이전트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다 나의 가능성을 인정해주신 사장님(오앤디 김양희 대표)을 만났고, 사장님은 내게 ‘프로에 입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솔직히 믿지 않았다. 누가 나를 데려갈까 싶었다. 더욱이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500여명 정도 되는데, 쟁쟁한 선수들을 뚫고 내가 프로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드래프트 당일 휴대폰으로 문자중계를 확인했다. 1, 2순위가 지나 3순위가 되니까 지명을 포기하는 구단들이 속출했다.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해서 마음을 접고 PC방으로 향했다. 아무 생각 없이 게임에만 몰두했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오니까 어머니가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셨다. 5순위로 인천에서 날 지명했다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명단을 확인하기 전까진 믿을 수 없었다.”
당시 허정무 감독 밑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인상적인 부분이 무엇이었나.
“다행히 감독님께서 나에 대한 평가를 좋게 하신 것 같았다. 출전 기회를 계속 만들어 주셨다. 감독님은 훈련 때마다 내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하셨다. 많이 움직이고, 공간을 만들고, 돌파에 신경 쓰고, 네가 잘할 수 있는 장점을 살리라는 메시지였다. 인천은 ‘처음’과 ‘배움’이란 단어로 가슴에 남아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인천에서 전북으로 이적 후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지만, 한교원은 월드컵 이후 멋지게 부활했다.(사진=연합뉴스) |
#3. “동국이 형에게 크로스 올리지 못한다고 팬들 비난이 대단했다”
그러다 올시즌 전북 현대로 이적하면서 인천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길 수밖에 없었다. 이적 과정이 매우 힘들었다고 하더라.
“3년치 먹을 욕을 한꺼번에 왕창 먹었다. 나도 인천이란 팀을 정말 좋아했다. 선수단 분위기도 좋았고, 형들도 잘해주셨고, 정도 많이 들었고. 그래서 떠나기 힘들었다. 누구보다 감독님(김봉길)께 많이 혼났다. 서운함의 표현이라고 받아들였다. 마음 고생은 했지만 새로 옮긴 전북 현대의 훈련 환경이 좋아서 이전의 아픔은 금세 치유가 됐다. (김)남일이 형을 비롯해 인천 출신 선수들이 많아 적응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출전 기회를 얻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브라질 전지훈련 때 이를 악물고 훈련에 임했다.”
그 덕분인지 시즌 초 일본 요코하마와 이어진 부산 개막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2월 26일 요코하마 마리노스(일본)와의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와 3월 8일 부산과의 경기에서 돋보이는 플레이로 최강희 감독의 마음을 사로 잡지 않았나. 또한 요코하마전 이후 상대팀 히구치 야스히로 감독이 “7번(한교원)이 가장 까다로웠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요코하마전을 앞두고 버스에서 감독님 뒷좌석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감독님이 코치님과 대화 나누시는 걸 듣게 되었다. 선발 명단을 정하는 상황이었고, 그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더라. 순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생애 첫 ACL 경기라 그 느낌이 어떨지 궁금했다. 경기에서 공격 포인트는 올리지 못했지만, 종횡무진 열심히 뛰어다녔다. 경기 후반 70분이 지나서 갑자기 쥐가 나는 바람에 교체되긴 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K리그 부산 개막전 때는 전북에서 첫 골을 성공시켰다. 그 골이 터지는 순간, ‘아, 이 팀에서 이제 자리를 잡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뿐이었다. 이후엔 내리막길을 내달렸으니까. 내 인생은 어느 순간에도 쉽게 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 듯 했다.”
왜 내리막길을 달리게 된 건가. 최강희 감독도 많은 기회를 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인천은 돌파를 요구했고, 전북은 크로스를 원했는데, 그 차이를 빨리 극복하지 못했다. (이)동국이 형에게 올리는 크로스가 정확하지 않아 팬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다. 돌파를 참고 어시스트 역할에 충실하려다보니 내가 잘할 수 있는 플레이가 실종돼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 인천에서 전북을 상대할 때는 수비 위주로 경기를 풀어갔지만, 전북에서 다른 팀을 상대할 때는 말 그대로 닥치고 공격이더라. 그런데 뛸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워낙 수비 벽이 두껍다 보니 그걸 치고 들어갈 여력이 안됐다. 내가 전북 선수라서가 아니라 수비 위주로 나오는 팀들을 상대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우승까지 거머쥔 전북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요르단전에서 K리그 대표로 뛰었던 차두리와 한교원. 차두리가 자신의 SNS에 남긴 메시지가 인상적이다. '우리 교원이 쏴라 있네. K리그 화이팅!'(사진=차두리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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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반 반짝 활약을 보이다 4~5월 사이에는 팬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어느 팬은 당시의 한교원을 가리켜 ‘구단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 지분을 독식한 대주주’라고도 표현했다.
“월드컵 휴식기가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군대 갈 마음도 먹었다. 몸과 마음이 시끄러울 때는 차라리 군에 입대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내가 뛰었던 경기 비디오를 찾아보며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직접 확인했다. 영상을 보고 또 보면서 내 마음은 자연스레 ‘비움’ ‘내려놓음’으로 향했다. 그 후론 조금씩 경기력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팀 성적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사실 전북으로 이적 후 두려움이 컸다. 이런 강팀에서, 잘하는 선수들이 정말 많은 명문팀에서 과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잘해야 한다는, 잘하겠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부담이 컸다. 그 부담을 내려 놓은 다음부턴 내가 원하는 플레이가 나오기 시작했다.”
월드컵 이후부터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란 프로그램 제목이 생각날 정도로 시즌 초반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올시즌 소속팀에서 10골 3도움의 기록을 올렸다. 그 기세를 몰아 대표팀에도 발탁이 됐고.
“대표팀은 프로팀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나타냈다. 포지션별로 제일 잘하는 선수들이 모였는데, 그들 사이에서 내가 뭘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 패스하다 실수하는 것은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잘하는 장점만 보여주려 했다. 그게 9월 베네수엘라전에서 경기 종료 직전 5분 동안 뛴 모습이었다. 공에 대한 강한 집착과 저돌적인 플레이와 순발력 등 내가 잘하는 플레이가 나타났다고 본다.”
#4. “태극마크는 내 인생의 꼭지점이었다!”
요르단전에서의 데뷔골로 인해 이청용과의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는 시각도 있다. 솔직히 후배 입장에선 이런 기사들이 나올 때마다 불편할 수밖에 없을 듯 한데.
“불편하고 부끄럽다. 지금은 경쟁이라기보다 배우는 단계이다. 정확한 크로스와 중앙 돌파 능력이 뛰어난 (이)청용이 형을 이기고 내가 선발로 나갈 수 있다는 확신도 없다. 단, 경쟁 자체는 내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 하지만 청용이 형의 화려한 커리어에 기가 죽진 않는다. 누구하고의 비교보다는 내 것을 제대로 채워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0-1로 패한 이란전은 1골을 이란이 먼저 득점한 후 그들의 주특기인 ‘침대축구’로 진행됐다. 이란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심정이 어떠했나.
“이란 선수들의 플레이가 얄미웠다. 말로만 듣던 ‘침대축구’를 직접 보니까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웃음). 침대 축구도 축구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런 축구는 선수도 팬들도 발전하지 못하는 축구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 경기를 보러 온 팬들에 대한 매너가 아닌 것 같다.”
이번 중동 원정 경기에서의 활약을 통해 아시안컵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나.
“만약 내가 호주를 갈 수 있게 된다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것 같다. 이번 중동 원정 경기를 통해 아시안컵에 대한 간절함이 더욱 커졌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잘 살려서 대표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선수가 되고 싶다.”
어렸을 때의 꿈이 대표팀 선수였나? 만약 그렇다면 이제 꿈을 이룬 셈이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2002년 월드컵을 보며 축구를 했다. 당연히 내 인생의 꼭지점은 대표팀 선수였다. 김남일, 차두리, 송종국 선수들을 보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김남일, 송종국 선배의 브로마이드를 내 방에 붙여놓았을 정도이니까.”
그런 선수와 지금은 한 팀에서 뛰고 있다.
“남일이 형은 인천과 전북에서, 두리 형은 대표팀에서, 종국이 형은 방송을 통해 만나고 있다. 처음에는 방 안에 붙여 놓았던 브로마이드 속의 선수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더라. 무척 신기했다. 그런데 선수들보다 더 신기했던 분이 허정무 감독님이다. 인천에 입단 후 인사드리려고 감독님 방을 찾았다가 TV로만 봐오던 분이 눈앞에 계시니까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마치 연예인 보는 기분이었다(웃음).”
축구선수로 어디 까지 가고 싶은가. 물론 해외 진출을 원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이 얘길 먼저 하고 싶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부모님이 고생 많이 하셨다. 충주상고 진학할 때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다. 그때 같이 축구했던 친구들이 하나 둘씩 충주를 떠났다. 서울, 브라질 등으로 축구유학을 떠난 것이다. 당연히 나도 가고 싶었다. 그들보다 더 잘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축구 유학은 불가능한 희망사항이었다. 그로 인해 고등학교 1학년 때 약 2개월가량 축구를 하지 않았다. 방황의 시간들이었다. 그때는 가족들을 위해 내가 축구를 그만두는 게 맞았다. 어쩌면 충주상고 감독님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방황하는 나를 강하게 잡아주셨으니까. 그런 가운데 대학 진학을 4년제가 아닌 2년제, 그것도 창단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니 내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겠나. 지금은 우여곡절 끝에 프로 선수가 됐고, 대표팀에도 뽑혔고, 4년 전의 내 모습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많은 변화 속에서 살고 있다. 돌이켜 보면 내가 가고 싶은 길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더라. 말 그대로 한 길만 보고 열심히 달리다보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열리는 것 같다.”
프로 4년 차인 한교원은 아직도 ‘뚜벅이’ 신세이다. 외제차들이 즐비한 봉동 클럽하우스에서 그는 승용차 없이 시즌을 보냈다. 차가 필요할 때는 선수들에게 신세를 졌고,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콜택시를 이용해 볼 일을 보러 다녔단다. 한교원 말로는 전북에서 신인 선수를 제외하고 자가용이 없는 선수는 자신이 유일하다고 한다.
한교원이 K리그에 입성했을 때만 해도 그의 축구는 ‘우당탕탕’으로 대변됐다. 거칠고 저돌적인 공격 형태는 돋보이지만, 섬세함이 부족한 데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거듭될수록 공의 터치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고, 패스 타이밍에 공간을 파고드는 스피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프로 4년차임에도 그의 축구를 ‘무공해’ ‘청정지역’이라고 표현하는 기사들이 나올 만큼 한교원의 진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이제 겨우 출발선에서 첫 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되는 선수가 한교원이다.(사진=이영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