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영화를 철저하게 알로이시스 수녀의 입장에서 풀어나가고자 한다. 그녀는 진리의 판단자이고 도덕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내게 알로이시스/메릴 스트립은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로 다가왔다. 이 영화는 감히 메릴 스트립을 위한 영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영화 속 그녀의 언어는 단단하고 종교적이며 감동적이다.
확실성 세계에서의 ‘다우트’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는 이 영화는 1964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2002년 보스턴지역 로마 가톨릭교회의 섹스 스캔들에서 모티브를 따서 2004년 연극으로 올려진 것을 다시 영화화한 것이다. 영화 제목인 ‘다우트’는 확실성이 아니라 애매성, 옳고 그른 것의 회색지대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났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려 한다. 연극무대는 이것을 쉽게 포착할 수 있지만, 영화는 애매성에 대해 관객들이 반기지 않기에 또 다른 궁지에 빠질 수 있다. 이 영화는 또한 성경이라는 것이 신과의 관계라기보다는 인간관계 속의 여러 가지 규칙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존 패트릭 셰인리 감독은 실제 자신의 역사교사였던 제임스 수녀에게 이 영화를 바치기도 했다. 영화 속 공간적 배경은 브롱스 보로에 있는 세인트 니콜라스 가톨릭 스쿨이다.
한마디로, 알로이시스 수녀는 절제적이고, 단호하고, 유머 있고, 지혜롭고, 실용적이고, 강하고, 신중하고, 현실적이고, 직관적이고, 냉철하고, 인간적이고, 확신에 차고, 엄격하고, 척보면 다 안다.
반면에, 플린 신부는 자유롭고, 선동적이고, 의뭉스럽고, 과장되고, 친절하고, 부드럽고, 비절제적이고, 즉흥적이고, 활기차고,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도미니칸 수녀인 알로이시스는 규율과 이성을 중요시 여긴다. 그녀가 미사시간에 떠들며 딴 짓을 하거나 졸고 있는 아이들을 가차 없이 때리는 장면을 통해 신앙과 더불어 규칙을 강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녀가 플린 신부와 비교되며 부정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부분이 되기도 한다. 제임스 신부는 그녀로 인해 학교가 감옥처럼 되는 것이 싫다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가톨릭 스쿨의 특성상 필요한 대목이다. 부모들이 가톨릭 스쿨을 선택하는 이유가 엄격한 규율에 있으며 교장인 알로이시스 수녀는 그것을 지켜나갈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알로이시스 수녀는 자신의 경륜으로 학생은 물론이고 신출내기 제임스 수녀의 정신적 지주(mentor)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제임스 수녀의 선에서 감당되지 않는 학생은 자신에게 넘기라고 지시하며 8학년 악동들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구체적인 비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알로이시스는 수녀로서 남자를 미워하거나 혐오하는 삭막한 마녀가 아니다. 그녀는 결혼도 한 적이 있다. 남편이 2차대전 때 전사한 이후 수녀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영화는 알로이시스 수녀의 부정적인 면을 과장되게 그리지 않는다. 보통 그려지기 쉬운 수녀의 결벽증과 신경질적인 면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녀의 행동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따르는 것으로 보이게끔 하고 있다. 또한 알로이시스 수녀는 진실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진지함과 인생의 경륜, 예리한 통찰력과 교장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책임감이 제임스 수녀와 도널드의 엄마, 그리고 플린 신부까지 스스로 진실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한다. 진실은 옳고 그름을 따진다고 해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리라.
알로이시스 수녀의 거짓말들, 예컨대 눈이 멀어가고 거동이 불편한 노수녀 베로니카의 건강을 의심하는 플린 신부의 눈빛에 당당하게 맞서 “우리 수녀들은 긴 치마 때문에 잘 넘어지지요.”라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이것은 그녀의 인간적인 면과 더불어 단순히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 그녀의 탄력적인 성향의 한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녀는 권위적이지 않다. 교장실 전구를 직접 갈아 끼우기도 하고 아이에게서 빼앗은 라디오로 뉴스를 듣기도 한다. 노래를 듣느냐는 도널드 엄마의 물음에 뉴스를 즐겨 듣는다는 부분에서 그녀가 대단히 실용적이고 현실지향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알로이시스 수녀에 비해 플린 신부는 도덕적 상대주의를 지향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변화의 시대에 맞는 진보를 주장하는 반면 도덕적 불확실성, 남성 지배적인 가톨릭교회의 공식 채널들을 통해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반진보적인 낡은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 속 인물들이 알로이시스 수녀보다는 플린 신부에게 더 호의적이게 보여 지는 것은 그가 지상으로 내려온 신부, 즉 우리 곁의 신부라는 외향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후원으로 신앙을 전파하는 그의 외향적인 측면은 오래된 종교적 위계질서와 권위를 보존하려는 내향적인 측면과 모순 된다. 플린 신부는 알로이시스 수녀가 자신에게 맞서는 것이 교회의 권위와 위계질서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보를 주장하는 그가 보수를 옹호하는 이중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플린 신부가 흑인학생인 도널드를 복사(altar boy)로 임명한 것은 적절하다. 플린 신부의 다우트는 그의 설교를 통해 현현된다. 우리는 확신과 의심의 이원론 속에 살고 있고, 그 상실감으로 단합할 수 있으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공동체를 위해 다우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알로이시스 수녀와 플린 신부의 이러한 문화적인 맥락과 개인적인 동기 안에서 두 사람 간의 진실게임 프레임이 열린다. 제임스 수녀의 다우트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순진무구한 영혼을 가진 제임스 수녀의 레이더에 플린 신부가 걸려든 것이다. 이것을 알로이시스 수녀가 재빨리 캐치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정황적인 증거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임스 수녀의 다우트였기 때문이다. 캐묻기를 좋아하는 알로이시스 수녀는 죄 이상의 것을 다룬다.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수업시간에 도널드를 제사관으로 부른 것이 적절치 못한 것으로 여겨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털어놓는다. 물론 처음부터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제임스 수녀는 다우트 자체를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믿음만이 순수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먼저 도널드가 잘 적응하고 있는가를 넌지시 묻는다. 그러자 제임스 수녀의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있던 의심이 되살아나 플린 신부가 도널드에게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제임스 수녀가 플린 신부에 대한 의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녀는 아무런 것도 해결할 수 없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제임스 수녀의 이 한마디에서 그때까지의 모든 정황을 꿰뚫어 본다. 그리고 제임스 수녀는 자신도 의심스러웠지만 확신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을 알로이시스 수녀가 확신을 하며 캐묻게 되자 자신이 알고 있는 정황들을 낱낱이 들려주게 된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그 순간 제임스 수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통해서 더 많은 정황을 캐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있는 진보적인 플린 신부가 몰래 도널드의 속옷셔츠를 로커 안에 집어넣는 장면을 다른 누군가가 아닌 제임스 수녀의 눈을 통해 보여 지게 함으로써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도널드에 대한 성적 흥미로까지 발전한 플린 신부의 행적을 제임스 수녀의 잠정적인 의심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알로이시스 수녀 자신에게는 다우트가 없다. 그녀는 처음부터 확신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근거는 플린 신부가 지난 5년 동안 교구를 3번이나 옮겼다는 것과 의심을 죄악이라 여기는 제임스 수녀에 의해 파악된 사실들, 즉 플린 신부에게 다녀온 이후 도널드의 이상한 행동과 그에게서 맡아지던 술 냄새, 플린 신부가 로커에 몰래 넣어두고 간 도널드의 속옷셔츠, 그리고 알로이시스 수녀 자신이 창문을 통해 내려다본 상황인 플린 신부가 또 다른 학생인 윌리엄 런던의 손목을 잡아끌며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도 알로이시스 수녀는 용의주도하다. 그녀는 플린 신부에게 직접 사제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기 위해 그와 제임스 수녀까지 포함한 3자 대면의 기회를 마련한다. 크리스마스 행사준비 때문에 모인 듯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플린 신부의 성향을 파악하던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에게 일주일 전, 사제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플린 신부가 불쾌한 심경을 드러내며 지금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냐고 묻자 그녀는 단호하게 “노우”라고 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내가 당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 것이다.”라고 한다. 또한 수녀가 신부의 행위를 조사할 권리가 있는가를 묻자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무언가를 위반했는가의 여부를 묻는다고 한다.
기이한 순간은 플린 신부가 학생들에게 손톱 얘기를 하는 장면이다. 그는 손톱을 짧게 잘라야한다는 알로이시스 수녀의 규칙에 대해 깨끗하기만 하다면 자신처럼 손톱을 길러도 좋다는 논리로 반박한다. 그러면서 학생들의 눈앞에 자신의 긴 손톱을 보여주는데, 그 손톱에는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다. 이것은 필시 플린 신부의 젠더의 모호성을 암시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결정적인 증거를 위해 도널드 엄마를 만난다. 청소 일을 가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20여분밖에 남지 않은 그녀를 배려해서 직장부근까지 함께 걸어간다. 도널드 엄마는 플린 신부가 도널드에게 부적절한 행위를 한 것 같다는 말을 듣고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도널드에게는 그를 따뜻하게 보살펴줄 남자어른이 필요하다고까지 한다. 그녀는 오직 도널드가 6월까지 아무 일 없이 그냥 넘겨 졸업만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도널드에게는 아버지라는 존재의 결핍과 자신의 성정체성이 더해져 플린 신부의 친절함이 증폭되어 다가온 것이다.
도널드의 성정체성까지 알게 된 알로이시스 수녀는 도널드를 보호하면서 플린 신부를 몰아내야하는 곤궁에 처한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다른 교구의 수녀에게 전화를 해서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말에 화가 난 플린 신부는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플린 신부가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어떤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며 윽박지르자 그녀는 “나는 나만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라고 맞선다. 그녀의 확신은 자신의 믿음, 즉 신앙이라는 것이다. 플린 신부가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당신도 죄를 지었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예스”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신과 내가 다른 점은 당신이 뉘우칠 줄 모른다는 것이다”라는 일침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자신이 수녀원에서 쫓겨나는 상황이 오더라도 꼭 밝혀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다. 그녀는 바티칸 교단의 규칙을 뛰어넘어야하는 어마어마한 사건 앞에서도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는다. 알로이시스 수녀의, 그리고 그녀를 연기한 메릴 스트립의 카리스마가 압권인 장면이다.
플린 신부가 5년 동안 3번이나 교구를 옮겼다는 것은 같은 잘못을 반복해서 저질러왔다는 것이 되기도 한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왜 그가 성직을 그만두지 않았는가를 의심해보게 된다. 의심이 증폭된다. 즉 플린 신부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가능한 세계로 선택한 길이 될 수가 있다는 것에 다다르게 된다. 플린 신부는 그녀에게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고백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때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신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듯한 시선인 부감법으로, 신성한 천장에서 흔들리며 촬영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알로이시스 수녀의 탐문은 비윤리적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다른 교구 수녀에게 전화를 했다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신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나올 필요가 있었다고 제임스 수녀에게 고백한다. 영화는 플린 신부의 차일드 어뷰즈에 관한 확실성은 언급하지 않는다.
결국 이 영화는 도덕적 상대주의에 관한 이야기이다. 알로이시스 수녀의 마지막 울음을 통해 이것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의 고뇌에 찬 늙은 수녀가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추운 겨울날 홀로 벤치에 앉아있는 것을 통해 그녀의 다우트를 보여주는 것이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울음을 토하며 하는 마지막 대사는 “I have doubts, I have such doubts!”이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를 내몲으로써 그가 더 큰 죄를 범할 수 있는 위치로 가게 했다는 것에서 자신의 확신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다. 플린 신부가 자신의 통제영역을 벗어났다는 것에 더 큰 회의를 하게 된 것이다. 신부들의 관행 속에서는 수녀가 아무리 발버둥쳐도/의심을 해도/회의를 품어도 끝낼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모든 악 중에서 최악은 종교적인 경멸이다. 제임스 수녀는 순수함을 상실했고, 알로이시스 수녀는 자신의 확신을 상실했으며, 우리는 종교 조직에 대한 존경을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