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포가 포경의 전성기였을 때 고래도시 울산은 포경산업의 전진기지로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돈이 넘쳐났다. 심지어 동네 개들도 천
원짜리를 물고 다닐 만큼 경제적 풍요로움으로 인심이 넉넉했다. 한창 때 2만 명의 주민이 거주할 때 장생포 초등학교는 2000명의 재학생들로
운동장이 북적이고 넘쳐났다.
장생포 출신 동창들은 시내 중학교에 입학도 했지만 용연의 처용암 넘어가는 석유화학 공단 초입의 대현중학교로 엄청 밀려들었다.
부곡에서 장생포까지 원거리라 그 당시 스쿨버스가 등하교 교정 앞에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동창들은 까까머리 교복차림새로 서로 먼저 타려고
부리나케 버스에 올라탔다. 어린 중학생 때 필자는 밤이면 석유화학 공단의 불빛이 추억처럼 별처럼 빛나는 장면을 보며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글씨를 일기장에 휘갈겨 쓰곤 했다.
1986년 포경금지로 장생포가 쇠락할 즈음 주민들은 시내로 대거 이주했고, 아파트 붐이 유행일 때 고층 아파트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70~80년대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고래문화마을이 울산항만공사 뒤편에 조성돼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포경금지로 쇠락했던 장생포가 다시
살아난 것도 고래의 기치를 내걸었기 때문이니 역설적이지 않은가. 지자체와 학자들과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 장생포가 고래문화특구로 자리 잡기까지
많은 사연이 있었다.
이제 울산하면 고래도시로 알려질 만큼 고래박물관, 고래생태체험관, 고래바다여행선, 고래문화마을 등 나름대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모두 ‘경제가 어렵다. 청년실업률이 최고치다’고 답답한 뉴스를 쏟아내는 이때 평범한 장생포 주부가 대박을 터뜨린 사건을
인터뷰했던바 취재 뒷이야기를 옮겨본다.
장생포에 고래문화특구 개발붐이 조성되기 전 최 향감 ‘원조 고래 빵’ 사장은 평범한 주부였다. 그런 그녀가 고래박물관과 생태체험관의
입구 매표소 매점에 입찰을 통해 들어가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그곳에서 고래인형과 잡화 등을 팔면서 최 사장은 ‘고래 빵’ 아이디어를
떠올렸지만 평범한 주부가 새로운 제품을 출시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온갖 군데를 수소문해서 2008년 울산과학대 교수를 통해 고래 빵에 대한 레시피를 전수받았다. 그리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더해 특허를 냈고, 고래 빵을 만드는 기계까지 독자적으로 주문해 만들었다. 그녀는 울산 장생포 고래박물관 입구 매점에서 7년간 고래
빵을 만들어 팔았다.
최 사장이 개발한 원조 고래빵은 고래문화특구 붐을 타고 차츰 매스컴을 타기 시작해서 이제 전국에서 찾아오고 택배로 주문이 들어올
만큼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매점에서 고래빵을 사려면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상품이 되었다. 최 사장은 내친 김에 지역의 정서를 십분
활용해 처용빵에 이어 옹기빵까지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고래박물관 매표소 매점은 3년마다 입찰을 거친다. 입찰에서 밀린 최 사장은 가까운 곳에 상가를 얻으려 했지만 빈 가게가 없어 일 년
동안 월세를 주며 인근에 겨우 가게를 다시 얻었다. 그래도 입소문을 타고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최 사장은 “이제 원조 고래빵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타공인의 지역 특산품이 되었다고 자부한다”고 강조하며 “오늘은 고래빵을 후원하며 나눠주러 가는 날”이라며 차량을 타고
부리나케 목적지로 달려갔다. 안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면 된다. 해보자’ 두 주먹을 불끈 쥐면 뭐라도 될 것이다.
기사입력: 2016/12/27 [17:59] 최종편집: ⓒ 광역매일
http://www.kyilbo.com/sub_read.html?uid=189924§ion=sc30§ion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