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종묘 제사
채옹의 독단하(獨斷下)에 의하면 전조후침 구조에서 朝에 해당하는 앞부분은 묘에 해당하고, 뒷 부분의 침은 역시 침이라고 하였다. 묘에는 즉 당(堂)에는 세 발 솥을 열을 지어서 늘어놓고 희생제물을 바치면서 제사 의례를 행하는 곳이다. 뒤편의 寢에는 조상의 의관, 지팡이 등 유품을 보관하고, 진열하는 곳이다.
종묘의 앞부분인 조당(朝堂)에는 昭穆(소목--종묘 안에 위패를 모실 때 조상의 위패를 순서에 의해서 배열하여 모시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중앙에는 太租를 모시고, 2, 4, 6代 등 짝수의 조상을 좌측에 모시고 이를 昭라고 하며, 3, 5, 7代 등 홀수의 조상을 우측에 모시고 이를 穆이라고 불렀다.)의 순서에 따라서 위패를 모셨다.
그 위패 앞에서 각종 제사 의례를 베풀었다.
침은 조당의 뒤편에 두고 조상이 평소에 쓰던 유품을 두어서 후손이 조상의 평소의 생활을 기억하고, 추억하게 하였다.
채옹의 저서는 동한 시대에 쓰여진 것이다. 그 내용은 주로 동한 시대에 베풀었던 것들이다. 그 전에도 이렇게 제사를 모셨는지는 모른다.
a) 商代(사천의 촉나라)의 제사
1980년대에 사천성 광한시 삼성퇴에서 다량의 청동 예기와 제기를 출토하였다.
** 여러 장의 사진을 같이 얹어 둘 것
출토된 유물은 조상의 영에 대한 제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리라 한다. 이 유물을 통하여 제사가 집행된 의례를 추측해 본다.
b) 시제(尸祭)
시제라는 제사에 대해서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옛 문헌에 시제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예기에 “제사에는 시동이 있고, 이가 종묘의 주제자이다.”라는 글로 보아서 시(尸)는 종묘 제사와 관련이 있다.
1984년에 강소성 단도사 대평 북산정에서 춘추 말기 때 오나라 어느 왕으로 생각되는 무덤을 발굴하였다. 이 무덤에서 시(尸)의 수수께끼를 풀 약간의 단서가 출토되었다.
(유물등 여러 가지 발굴 자료는 생략하고-----)
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尸는 立身像을 말한다고 한다. 사람이 조상의 영혼으로 분장하는 것을 시동이라고 하였다. 시동은 직계 후손이거나 제자가 맡아서 제사를 주재하였다. 문헌자료로서는 반고가 쓴 백호통(白虎通)에서 "옛날 사람들이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동일 종족의 자손을 선발하여 ‘시동’으로 분장 시켰다. 조상의 영혼은 형체가 없고, 소리가 없읍므로 이 시동이 대신하여 후세 자손이 올리는 음식 공양을 받았다.” 이 기록으로 시동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시제의 의례 과정을 주례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었다.
“예절대로 제사를 끝 마치면 종과 북이 울린다. 제주도 일어서고, 축사는제가 끝났음을 알린다. 여러 신이 얼큰하게 취하였고, 시동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간다. 쇠북을 치면서 돌아가는 시동을 배웅한다. 혼백은 이제는 돌아 가셨네 한다.”
의례에는 그 외에도 시동을 맞이하여 제사를 치루는 제사의례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c) 시제의 의의
중국의 고대 사회에서 조상신에 대한 제사의 의례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시제이다. 시제는 근본이 종족의 혈연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다. 왜냐면 시동은 직계 후손에서 정하고, 직계 후손이 없으면 동성에서 정하도록 하였다. ‘시제’ 형식을 취하는 종묘 제사에서는 지하의 혼백을 접촉하는 사실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즉 덧널 무덤(폐쇄무덤)을 만들고, 시제를 지낸 상주시대에는 영혼불사를 믿었지만 사람이 죽고 난 후에 부활한다는 사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육체적 요소인 귀백을 아주 깊이 묻고 후장을 하였지만 묘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不封不樹의 관행을 가졌다.
종묘에서 지내는 시제의 진행 과정을 통해서 종족의 단결을 강화하고, 유지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새로운 사회 형태가 형성되었다. 바뀐 사회에 부합하는 새로운 제사 의례가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진한시대가 되면 종묘 제사는 쇠퇴한다.
조상신을 모시는 제사는 종묘에서 시행하였고, 무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진한 시대가 되면 조상신에 대한 제사 방식이 큰 변화를 겪는다. 종묘와 무덤의 축조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그 중에도 최대의 변화는 분묘 제사가 형성되고, 널리 퍼져나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