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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한국독립운동의 숨겨진 대부, 범재 김규흥
차돌네 추천 0 조회 124 14.10.13 22:3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독립운동의 숨겨진 대부, 범재 김규흥

[출처] 역사복원신문 2011-12-24∼2012-03-01 김상구 컬럼리스트

 

1. 머리글

▲ 범재 김구흥이 종숙 김유성에게 보낸 편지

담배곽에 음각되어 있으며 1914년 경에 작성되었다.


孚軒三叔大人道玩 (孚軒三叔大人께 드립니다.)

天壤求脣齒 (천양구순치) 이 세상 천지간에 입술과 이빨 같은 밀접함을 요구하는 이치 있기에

風箱煉肺肝 (풍상련폐간) 오랜 세월 모진 고생 마음속(肺와 肝)에 짓이겨져 있나이다.

孤?衝浪渡 (고사충란도) (그리하여) 뗏목위에 외롭게 의지하여 파도에 부딪히며 이곳(중국)에 건너와

雄劍映星看 (웅검영성간) 지금 고관대작이 되어 차고 있는 큰 칼에 장군별이 반짝반짝 비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不勝恥歸趙 (불승치귀조)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것은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타국 趙나라(중국)에서의 벼슬이기 때문입니다.

有生終報韓 (유생종보한) (그러나) 이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한국(조국)위해 신명을 다 바칠 것입니다.

中原足豪傑 (중원족호걸) 중국땅 넓은 곳엔 호걸도 많사오니

相與濟艱難 (상여제간난) 서로가 힘을 모아 힘들고 어려운 이 세태를 구제하겠습니다.

姪復敬題 (조카 “復”이 우러러 아뢰었습니다.)


이 오언시는 범재 김규흥이 중국에 망명하고 있을 때 범재의 스승이자 3종숙되는 孚軒 金有性(진사로서 덕망 있는 학자였음)의 회갑(1914?)기념으로 선물한 답배갑의 뚜껑 위에 친필로 쓴 것을 음각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의 사상과 현실 그리고 향후 하고자하는 행동지침 등이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헤아려진다.


입술과 이빨 사이 같은 밀접한 동지를 찾기 위해 종이장사 인삼장사로 변장하여 중국의 이곳저곳을 넘나들며 그곳의 명사, 혁명지사들을 찾아 그들과 교유하면서 여러 가지 상황정보를 획득하였고, 그 결과 현재의 나라를 구하는 최선의 조치는 중국의 혁명지사들과 제휴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후 상해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소요될 고종의 비자금을 찾기 위한 조칙을 얻어 중국으로 출발하기 전 일본군사령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고 그 후 가택연금을 받게 되었다. 연금 중 일제는 그 비자금을 획득하기 위해 회유 혹은 협박으로 김규흥을 괴롭혔다. 하지만 범재 김규흥은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고생 끝에 그들의 감시망을 피하여 중국으로의 망명이 어렵게 성사되었다.


망명 이후 중국의 혁명동맹회 동지들과 협력하여 신해혁명의 성공에 큰 역할을 하고 난 뒤 혁명정부(광동)의 도독부 총참의 겸 육군소장직을 수행하였으나, 이 벼슬이 조국에서 세운 공훈이 아니고 남의 나라 중국에서 얻어진 것이기에 심히 부끄럽고 한이 되어 안타깝기 그지없었으리라.


그러기에 이 생명 다 할 때 까지 조국을 위해 애국 애족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곳 혁명정부의 요인들에게 한국에서 망명해온 독립지사들을 소개하여 서로가 친숙해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유도했을 뿐 아니라 서로가 상부상조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조국 광복의 대업을 이루는데 보탬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하겠다는 의지가 이 시 전편을 통하여 피력되고 있다고 보여 진다.


범재 김규흥은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제1차 신해혁명에 참가했으며, 삼일운동, 임시정부 수립,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의 숨은 기획자였고, 의열투쟁의 배후 지원자였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한중합작금융기관인 북경흥화실업을 통한 자금 모집 그리고 둔전제에 의한 독립운동기지 건설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분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철저히 외면했다.


중국 혁명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으나 중국 정변의 변화에 의해 그의 업적은 묻혀버렸고 조국에서는 평가받을 기회조차 박탈 당해버렸다. 1936년 8월 16일, 그의 장례식에는 중국 혁명 동지뿐 아니라 조국의 동료조차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물론 언론에도 단 한 줄 보도되지 않았다. 옥천이 배출한 위대한 독립지사 이자 혁명투사였던 범재 김규흥이 꿈꾸고 행동했던 모습들을 미력하나마 증거 하고자 한다.


[참고] 이 글은 1911년 12월, (사)옥천향토사연구회에서 옥천을 빛낸 20명의 역사, 문화, 언론 관계 인물을 선정하여 <옥천의 역사문화인물>이란 책자에 수록된 글입니다.


2. 세거지 옥천(世居地 沃川)과 문향헌(聞香軒)

범재 김규흥은 청풍 김씨(淸風金氏) 이십삼세손(二十三世孫)으로 휘(諱)는 규흥(奎興)이고 자(字)는 기현(起賢)이며 호(號)는 범재(凡齋)이다. 1872년 충북 옥천읍 문정리 6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이던 명성(命性)이며 모친은 영일정씨(迎日鄭氏) 해수(海壽)의 따님이다. 공(公)은 3남매 중의 장남이었으며 서기 1760년도에 건조된 유서 깊은 한옥에서 성장했다.

 

▲ 문향헌의 현재 모습

현액은 사라지고 대신 춘추민속관이란 현판이 대신하고 있다.


집의 이름은 문향헌(文香軒)이다. 범재공의 5대조(五代祖)인 정언 김치신이 그의 아호를 따 건립한 것인데 원래 와가 85칸 반과 초가 12칸으로 된 대옥(大屋)이었으나 현재 일부가 보존되어 춘추민속관이란 이름으로 전통 한옥체험업(전통혼례,한옥학교,민박,한옥마실음악회등)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청풍김씨 가승에는 다음과 같이 문향헌의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경진(1760)년 범재의 5대조이신 正言 김치신공이 옥천 시골에다 자택을 영건하니 그 측실의 거처가 府使공(정언공의 선친)의 묘소에서 활터 몇 개에 지나지 아니 하여 그 뜻인즉 실로 묘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게 하여 정성으로 우러러 보고자 함이었으며, 이때에 공장(工匠, 기슬자)인들을 서울에서 선수(善手, 경험이 풍부한 훌륭한 목수)들만 골라 데려와서 건축하였는데, 그 집터의 배후에는 읍내로 임한 시냇물이 흐르고 쳐다보면 송목이며 추목 등이 울창함을 의지하고 있어 아주 그윽한 정취가 있었다. 또 뜰이며 밭둑에 매화를 심고 연못에는 련(蓮)을 심어 그 마을이름을 매두편(梅杜扁)이라 이르며 또 그 집을 문향헌(文香軒)이라 하여 현액을 걸어놓고 즐기며 무엇 하나 거리낌 없이 지냈다.》


정언 공부터 범재의 아들인 근득 김진원까지 칠대가 세거했던 문향헌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투쟁한 범재 김규흥으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 된 이후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는 현판마저 춘추민속관으로 바뀐 상태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집주인의 배려로 인해 250년 된 고옥의 형태를 아직은 유지하고 있는 점이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문향헌 복원과 유지?보수를 위해 좀 더 많은 배려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며 범재 김규흥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김규흥의 六代祖가 무주부사로 재직 시 임소에서 순직하게 되었다 한다. 이에 그의 유지를 받들어 沃川 峙南 泉谷里에 선산을 갖게 되고 그 때부터 연고지가 옥천이 되었으며 세도정치의 폐해를 피하고자 그 후로는 상경을 하지 않았다.


특히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아 大科에는 나가지 않았으나 학문에는 게을리 하지 않아 生進科에는 늘 응시하였다. 한편 治財에는 소홀함이 없어 한 동안 거부의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흥선 대원군과의 악연으로 인해 경복궁 중건 시 무리한 과세로 가세가 몰락지경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상당한 재산이 남아있었으나 범재 김규흥대에 이르러 파산지경 까지 간 것이다.


김규흥은 조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향리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그 재주가 범상치 않아 약관의 젊은 나이에 이미 경사(經史)까지 통달하기에 이르므로, 어느 하루 “나는 너에게 줄 것을 다 주었지만 네 그릇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 미치지 못할 것을 가득 채워서 쓸모 있는 큰 그릇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하는 스승의 뜻에 따라 상경하였다. 거처를 재동에 마련하고 당대의 명사와 교유하였고 특히 충정공 민영환과 대단히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김규흥이 15세 되던 1886년에 집안의 기둥이었던 조부가 별세하고 평소 병약하던 부친마저 1891년, 40세를 일기로 작고하자 김규흥은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김규흥은 평생을 통하여 장남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집안은 그의 모친 정부인과 동생에게 맡기고, 가세가 기운 상태였지만 경성에 계속 머물면서 동지들을 사귀는데 더욱 힘썼다.


3. 망명 이전의 애국계몽시대

3-1) 죽향초등학교의 전신 창명학교를 설립하다.

▲ 죽향초등학교 전경


그는 당시 선진화되고 있는 일본을 방문하여 정치ㆍ경제ㆍ문화ㆍ군사 등 여러 방면의 문물을 살피기도 했다. 특히 국민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고향인 옥천에 사재를 출연하여 진명(창명)학교를 설립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 증거를 몇 가지 제시하겠다.


첫째, 옥천지 역대인물편 34쪽을 보면 “일본에서 귀국하여 우리나라를 선진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교육에 힘써야 된다고 강조한 끝에 전 재산을 투자하여 옥천읍에 창명학교를 세웠다. 수년을 경영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상해에 망명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둘째, 안타깝게도 6.25사변 때 이 학교의 연혁 및 기타 자료들이 폭격에 의해 소실되었으므로 그 기록된 바가 현존되지 않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예부터 구전되어 오는 바가 있었고 또 그 유족들이 선대에서 들어온 말에 의하여 현 죽향 초등학교의 터는 범재공의 집안에서 목화밭으로 경영하던 것을 아낌없이 기증한 것이라고 하며 또 그것이 확실한 것으로 믿고 있다. 이러한 연유들이 있음인 지 해방 후 개교기념일에 학교당국(교장 전병석)으로부터 은수저 한 벌을 받은 것을 범재공의 손자인 김한영(80) 김치영(78) 형제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셋째, “창명학교는 죽향 초등학교의 전신-한말옥천 사립학교 설립운동”이라는 제목하의 2005년 10월 7일 자 옥천신문에 의하면 “1909년 10월 1일 사립 창명학교가 정식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는데 공립 옥천 보통학교(죽향 초등학교의 전신)이다.”라고 옥천 향토 연구사 전순표 이사가 기고한 바 있다.


그 외 이 글에 등장하는 진명학교는 1905년 8월, 옥천 읍내에 민형식과 송준헌의 주도로 황인수(전 군수)와 김명수(전 관찰사) 등 전직 관료와 선비 유지들이 후원금을 내고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거론된 민형식은 창명학교의 교장이었고(홍승로의 기고 등) 송준헌과 황인수는 그들 외 여러 선비, 유지들과 함께 창명학교에 찬동하여 교사 초빙 등에 노력하였다. 한편 김명수는 1906년 3월 15일에 광동학교를 설립하면서 진명학교에서 떨어져 나갔다. 또 창명과 진명학교의 위치가 같은 옥천읍내라는 것 등을 고려해 보면 진명과 창명은 같은 학교로 판명된다.


넷째, 1906년 4월 14일 자 「황성신문」에 홍승로가 기고한 글이 실려 있는데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원문과 번역문을 아래에 함께 소개하겠다.


《?라 國權之維持와 民志之發達이 若非學文上敎育이면 焉得全國之獨立乎아 所以로 我韓人士가 學文이 ?昧?으로 國權과 民力을 鞏固? 熱誠이 貫通치못?야 隣邦에 羞?를 自作?고 世界에 指笑를 甘受?으로 本郡居前?奉金奎興氏가 憤惜慨嘆?야 捐金設校에 廷聘敎師?고 聚集生徒?야 勸勉熱心故로 一境之內에 ?聾? 靑年子弟가 如昏衢遇燭?야 弱冠之十와 ?艸之童이 雲集就學?야 文明之基가 漸於時日?고 敎育之?가 習於耳目?니 未及幾年이면 知識發達이 大踏前進矣러니 不意에 敎師全聖朝氏가 公佈學員?되 本校財政이 不贍?즉 面?校長?야 經理校??기로 斷斷牢約?고 休學上京터니 不幾日에 還歸本校?야 較甚利益이던지 忽然改路?고 本郡校東居光山人金命洙氏에 新設? 光東學校로 移去?얏스니 本校之不幸은 訓誨無人?야 七十名學員이 猝地廢學에 如窮人無所歸러니 衆心所願에 事必歸正?야 校長閔衡植氏가 補助金外에 每朔四十元式義捐優助?시고 遠近有志僉君子도 補助를 多捐?야 敎師도 續聘?터이오 財政도 繼用케?야 本校를 維持케?시니 學校復興?과 人民에 發達됨을 欣▣頌祝?오니 現今聖詔屢降?샤 廣設學校?야 敎育人民?라신 旨意를 本校校長閔衡植氏가 奉承對揚?시기 公心熱誠을 不可泯默故로 玆以寄書?오니 惟貴社? 人民에 耳目이오 全國에 指南大車이오니 照亮?신 後記載廣佈?심을 敬要 洪承老寄書》


[번역] 《아아! 국권의 유지와 민지의 발달이 학문을 익히는 교육이 없다면 어찌 전국의 독립이 있을 것인가? 이런 까닭으로 우리 한국 인사가 학문이 몽매하므로 국권과 민력을 굳게 지킬 수 있는 열성이 이 세태를 꿰뚫어 보지 못하여 이웃 여러 나라에 부끄러움을 스스로 만들고 세계의 웃음거리와 손가락질을 감수함으로, 우리 옥천에 사는 전 참봉 김규흥씨가 이에 울분하고 심히 애석한 마음으로 태산 같은 걱정거리에 탄식을 하고 스스로 돈을 내서 학교를 설립함과 동시에 교사를 연빙(예의를 갖추어 초빙함)하였으며 또 생도를 불러 모아 열심히 공부하게 한 까닭으로 이 일대에 있는 소경과 귀머거리(무식한 사람)의 청년자제가 어두운 길거리에 등불을 밝힌 것 같아서 10대의 젊은이들과 이곳의 모든 학동들이 구름같이 모여서 학문을 배워 문명의 틀이 갈수록 더하고 교육의 효과는 배움을 더 할수록 귀와 눈이 트이게 되니 몇 해 안가서 지식의 발달이 큰 발걸음으로 앞서 나갈 터인데,


뜻밖에 교사 전성조씨가 학원들에게 공포하기를 이 학교의 재정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하고 교장을 만나 뵈옵고 품하는 것이었다. 이 두 분은 학교의 경리 상황을 개선하기로 굳게 약속하고는 잠시 휴교를 하고 상경하더니 불과 몇 일만에 학교로 되돌아와서는 자기 이익이 딴 곳으로 가는 것이 더 많았든지 홀연히 노선을 바꾸어 본군 교동에 사는 광산인 김명수씨가 신설한 광동학교로 이거하였으니 이 학교의 불행은 가르칠 사람이 없게 되어 70명 학생이 졸지에 페학하기에 이르러 갈 데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소원이 있기에 사필귀정이라고 교장 민형식씨가 보조금 외에 매월 40원씩 의연부조하시고 원근유지와 여러 군자도 보조를 하여 교사도 계속해서 모셔올 터이고 재정도 계속해서 지원하여 이 학교를 유지케 하시니 학교의 부흥함과 인민의 발달됨을 기쁜 마음으로 송축하오니 현금(現今) 성조(聖詔, 조칙 여기서는 좋은 일)가 여러 번 내리게 되어 광설학교(廣設學校)하여 인민에게 교육 하라고 하신 그 뜻을 이어받아 보다 더 크게 일으켜 세우시는데 공익을 위한 마음으로 열성을 다하시니 차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에 이 글을 드립니다.


오직 귀사(황성신문)는 인민의 귀와 눈이요 전국에 교도를 위한 큰 수레이오니 이점 밝히 헤아리시기를 바라며 이후에도 기제광포(記載廣佈)하심을 우러러 요청합니다. 洪承老寄書》


아무튼 황성신문 뿐 아니라 대한매일신문 등 당시의 언론 보도와 유족의 증언 등을 종합해보면 죽향초등학교의 전신인 창명학교 설립 시 김규흥이 깊게 관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확신된다. 죽향초등학교는 개교 100년을 자랑하기 이전에 학교의 설립 과정, 창립자의 사상이나 이력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 학교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것이 창립한 분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3-2) 상해에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하다.

비자금 사천만원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려한 고종... 범재 김규흥이 상해에서 추진

범재 김규흥의 업적이나 활동기간에 비해 그에 대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특히 망명 전의 초기 활동에 대한 자료가 그러하다. 단편적인 자료를 통하여 그가 대한자강회 회원이었으며 고향에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는 사실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다행히 범재 김규흥의 이종사촌이자 독립지사인 김현구가 남긴 자서전에 망명이전 김규흥의 교유관계, 활동범위 특히 고종의 비자금을 이용한 상해 무관학교 설립에 대한 전말이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향후 범재의 사상을 조명하는데 많은 참조가 되리라 본다.


이 책 그리고 국민보에 의하면, 범재는 민영환과는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청일, 노일 전쟁의 결과로 우리에게 위험이 닥쳐올 것이라는 등을 예견하고 조국이 직면하고 있는 비탄한 현실을 매우 걱정스럽게 상론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 판서 민영휘가 설립한 계산학교에 이종 동생인 김현구를 등록시켜주었는데 그 학교의 경영은 민영휘의 아들인 민태식이었고 학감과 선생들은 유근, 원영의, 심의송 등이었다. 그들은 독립협회 시절부터 범재 김규흥과 절친한 친구들이었다.


범재의 교유관계 중 특이한 것은 원영의, 정안립, 양기탁 등 동년배 학자들과도 친분이 있었으나, 민영환, 김택영 등 자신보다 연상의 당대 문사, 정객들과 교분이 두터웠다는 점이다. 그리고 망명 이후에도 창강 김택영, 백암 박은식, 취당 전병훈 등 10년 이상 연배의 선배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특히 창강 김택영은 김규흥의 사론(史論)에 반하였었다고 했으며「향강잡지」의 창간호에 매천 황현의 자결을 애도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전병훈은 항일독립운동사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1910년 3월, 김규흥이 광동성 부근 나부산을 탐방할 때 동행했고 1916년 <조선인과 독일인의 음모> 건으로 작성된 일제 기밀문서에도 김규흥과 함께 등장하며, 북경 요시찰 인물 대장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항일독립운동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망명 이전 이력 중 김규흥에게 가장 큰 사건은 을사늑약 이후 추진했던 상해무관학교 설립이었다. 을사늑약으로 인해 많은 인사들이 국외로 나가기를 희망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김규흥은 장사꾼으로 위장하여 1905년에서 1906년 사이에 중국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그곳 시류의 흐름과 여러 가지 상황을 탐지하고 내린 결론은, 나라를 구하는 최선의 조치는 중국의 혁명지사들과 제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그의 동지들에게 강조하였는데 이때 참석한 모든 이들은 이에 동의하였고 계획의 실행인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 고종(조선제26대왕, 1852~1919.1.21)


이에 따라 김규흥은, 판서 이경직의 부인, 판서 민경호, 판서 조민희의 비밀스런 준비에 의해 상해 아청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고종의 비자금 4,000만 원을 의미있게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그 다음으로 범재 김규흥은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민용익, 서장집같은 한국인 부호와 친분이 있는 중국의 명망가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조처하였다.


또 무관학교 설립을 대비하여 미국, 영국, 중국 등의 군사교육 전문가들을 섭외하여 무보수로 교육을 담당하여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 후 곧 귀국하여 고종의 비밀조칙을 받아 특별밀사로 출령(出令)하게 되었고 30여명의 학생들도 미리 상해로 보냈다. 하지만 고종의 조칙을 들고 출발하는 중 인천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이 사건의 전말이다. 100일 간의 투옥이후에도 1년 이상 가택 연금을 당했는데, 당시 조선의 외채 두 배 정도의 엄청난 금액에 눈독들인 통감부의 의도 때문이었다.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전혀 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종사촌인 김현구와 이교성을 동원하여 무관학교 설립을 계속 추진했으나 이교성이 일제에 의해 암살당한 이후, 고종의 비자금 획득을 포기하고 1908년 초 광동으로 망명하게 된 것이 범재 김규흥의 망명 전후의 사정이다. 비자금이 은닉되어 있던 아청은행은 러시아와 청나라의 합작은행이었는데, 러시아 혁명 와중에 은행이 파산되어 그 돈은 모두 허공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튼 무관학교 설립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진행 과정을 통하여 쌓게 된 중국 개화 인사들과의 인연 특히 진형명, 당소의 등은 일생을 통하여 동지의 연을 맺는 사이가 되었다. 이 외에도 김현구 자서전은 범재 김규흥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을 제공해 준다.


이종사촌이라지만 17세 연하의 김현구는 범재에게 조카 같은 동생이었을 터이다. 김현구가 근대 개화사상을 알게 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범재와의 만남 그리고 그가 추천하고 선물해 준 각종 도서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특히 상해무관학교 설립 건 때문에 김규흥이 분주해지자 그를 대신하여 출석한 대한자강회 모임을 통하여 박은식, 양기탁, 장지연 등 개화 인사들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음은 행운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김현구의 자서전에는 무관학교 설립에 관여했던 중국의 조진사라는 지식인과 범재와의 토론도 소개하고 있는데, 입헌군주론을 제청했던 강유위, 양계초 보다 더욱 급진, 개혁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2단계 혁명론을 주장하는 조진사에 비해 단 한 번의 혁명을 주장하는 범재의 주장이 이채롭다.


범재는 특별히 계급차별의 타파와 빈부격차의 해소를 중요시했으며 독재적인 권력은 결단코 거부해야한다고도 했다. 이 토론을 통해 알 수 있는 범재의 사상은 요즘으로 치면 사민주의에 가깝다. 즉 범재는 망명 이전부터 공화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중국의 개화 지식인들의 집합소였던 광동으로 망명을 떠났으며, 또 그곳의 혁명지사들과 피차에 지기지간이 되었으므로 혁명 시에는 자연스레 그들과 합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 좌로부터 환제 왕영은(중국인), 취당 전병훈, 범재 김규흥,

1910년 3월 13일 광동인근 나부산 방문 때의 기념사진이다.


주목할 것은 범재의 망명지 선택이다. 을사늑약 이후 많은 우국지사들이 선택한 곳은 간도, 연해주 지역 혹은 미주 방면이었다. 그러나 김규흥은 광동으로 망명을 떠났다. 광동(廣東)은 중국이 외래문화와 가장 먼저 접촉한 곳으로 변법자강파이자 무술유신의 주인공이었던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의 고향이었을 뿐 아니라, 혁명파의 핵심이었던 손문, 호한민, 진형명, 추노, 당소의 등의 출신 지역이었으며 우리나라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대만출신의 정치가 구봉갑이 활동하던 곳이었다.


김규흥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창강 김택영, 취당 전병훈 등 한국의 개화파 학자, 사상가들이 망명지로 선택한 곳도 광동이었다. 광동은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등 개화사상과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무장한 신지식인들의 요람이었다. 김규흥의 독립운동 그리고 혁명에 대한 방략과 중국인과의 연대는 모두 광동에서 출발했음이 분명하다.


4. 신해혁명의 주역 범재 김규흥는 공화주의자

▲ 혁명정부의 도독부참의겸 육군소장, 범재 김규흥의 관복을 입은 모습


중국근현대사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고 할 수 있는 신해혁명, 그렇다면 그 사건은 우리 민족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신해혁명의 전개 과정과 결말은 우리나라의 역사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을까? 사실 신해혁명에 대한 조명은 중국 뿐 아니라 상당수의 한국 학자들도 논문 등을 통하여 고찰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해혁명에 참여한 한국인의 역할과 신해혁명이 한국독립운동사와 한국의 공화주의 사상에 끼친 영향 등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해방되었을 때 왕정의 복고나 입헌군주제를 고려하지 않고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공화제 도입을 지지했다. 정치체제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제헌헌법 제1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명문화되기에 이른다. 공화주의에 대한 천명은 1919년 4월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의 헌장 제1조도 마찬가지였다.


500년 왕조가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정부를 세울 때 전제왕정의 부활은 물론이고 입헌군주제조차도 의제로 상정되지 못했다. 민주공화제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준비가 그만큼 철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범재 김규흥은 1913년 홍콩에서 발간된 최초의 한중합작 언론인「향강잡지(香江雜誌)」의 축사에서 자유 민주사상을 설파했으며, 1911년 제1차 신해혁명 봉기 시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참여하여 혁명정부의 고위직을 역임하기도 한 인물이다.


망명이전부터 철저한 공화주의자였던 범재 김규흥은 상해무관학교 설립과 신해혁명에 참여하면서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 회원들과 동지의 연을 맺었다.


범재는 <향강잡지>, <동제사>, <신한청년당> 등의 활동을 통해 중국의 혁명지사들을 상해임시정부 설립과 대동단결선언 발표의 주도인물이었던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조소앙, 여운형 등에게 소개했고, 이러한 계기를 통해 그들은 민주공화주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받아들였음에 틀림없다.


지금까지 제1차 신해혁명에 유일하게 참여한 인물은 예관 신규식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과 망명시기, 일제의 기밀문서, 중국측 자료 그 이외 유족이 보관하고 있는 김규흥 본인의 편지와 사진 등을 종합하면 강단 사학이 심각한 오류를 범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해혁명 주역 중의 한명인 추노(鄒魯)가 1945년 10월, 중경에서 발행된 중앙일보를 통하여 ‘한국의 광복을 축하하며’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을 아래에 소개하겠다.


《전에 내가 중국 남쪽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할 때 김범재(金凡齋)라는 조선인 한 사람이 참가했다. 그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먼저 중국의 혁명이 성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중국 혁명운동에 참가하러 왔다“고 했다.…김 동지는 진영사(진기미)의 절친한 친구였다.…무창봉기 이후 나는 광동 북벌군의 병참총관으로 선두 부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상해에 도착했을 때, 군인들에게 잠잘 방과 많은 비품이 필요했는데, 진 선생은 나 대신에 사람들을 시켜 완전하게 준비를 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전적으로 김범재 동지가 사전에 연락을 취해준 때문이다. 광복 이후 김 동지는 광동성 정부의 고문이 되었다.》


추노에게 고백했듯이 범재 김규흥의 원래 목적은 조국의 독립이었으며. 중국 측 혁명동지들도 범재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범재와 동맹회 회원 간의 동지적 유대관계는 오랜 세월에 걸쳐 유지되는데, 다음 장에서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다.


5. 최초의 한중합작, 향강 잡지 발간

▲ 향강잡지 창간호 표지


1914년 1월 7일, 박은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저는 백수(白首)에 나뭇잎처럼 나부끼어 영락하나 다행스럽게 병 없이 지탱하고 있습니다. 작년 겨울에 또 상해로부터 홍콩으로 이주하였으니 김군(金君) 범재[凡齋(범재 김규흥)]가 보관(報館)을 설립하여 경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미 제 일호를 방행함이 있으니 대개 중·한(중국·한국)합동기관입니다. 만약 우리들의 단독기관으로 하면 다만 힘이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시국상황이 허락하지 않는 바입니다.……만약에 실지 사업이 없으면 결코 믿음을 얻을 도리가 없는데, 의사를 발표하는 것은 보장(報障)보다 필요한 것이 없으나 우리들이 이러한 실력이 있는 자를 또한 얻을 수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김군(金君)의 주선이 있어 이 보장의 실현을 얻게 되었으니 생각하건대 고명(高明)께서는 헤아림이 있을 것입니다.》


제2차 혁명 실패 후 박은식과 함께 홍콩으로 피신했다는, 일제기밀문서의 내용과 시기가 일치함을 우선 밝힌다. 이 편지에 의하면 범재 김규흥이 보관(報館)을 설립하여 경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보관은 1913년 12월 간행된 한중합작 언론인「향강 잡지」를 말하고 있는데, 제4호까지 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창간호만 발굴된 상태이다.


「향강 잡지」는 그 제호부터 홍콩(香港)이란 명칭 대신 아편 전쟁 이전의 명칭인 향강(香江)을 사용함으로써 반제국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내용의 많은 부분이 공화주의를 선전하는데 치중하고 있는데 중국 인민 뿐 아니라 이 잡지를 접할 수 있었던 동제사 요원을 비롯한 한인 독립지사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범재는 잡지의 첫머리에 수록된 축사를 통하여 자유민주사상을 설파함과 동시에 준법정신을 지킬 것이며 특히 민기(民氣)를 기르는 일에 공헌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창간축사에서 언급한 민기에 대해서는 본문 중 민기란 제목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다음은 그 일부 내용이다.


《…이러므로 우리의 혁명이 성공하였다 하여도 우리가 믿을 바가 아니요 우리가 공화제를 세웠다하여도 우리가 믿을 바가 아니요 우리의 민족주의가 달성했다 해도 또한 우리가 믿을 바가 아니니 우리가 믿을 바는 오직 우리의 民氣 뿐이다. 만약 우리의 민기가 믿을만하지 못하면 우리는 믿을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민기는 과연 믿을 만한 것이 도무지 없다고 하는 것일까? 내가 이전에 각지를 유람하면서 우리의 민기를 살펴본즉 진실로 한심하였다.…》


민기 즉 민족(民族) 정기(精氣)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현재 민중들의 의식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다. 이 글은 다음에 소개되는 민덕(民德)과 함께 우리나라의 초기 공화주의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되리라 본다.


민덕에서는 백성(百姓)의 도리(道理)를 설명하고 있는데, 전제시대가 마감되어도 백성의 도덕적 가치가 새로워지지 않았다면 그 나라가 새로워 질수 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과 함께 정치체제를 새롭게 하고, 백성의 힘이 바탕이 되는 단체를 조직할 것이며, 교육과 병역의 의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특히 금권 타락 선거에 대한 경고와 투표권 포기에 대해서도 엄중히 경고를 하고 있다, 오늘의 우리들도 눈여겨봐야할 지침으로 보인다.「향강 잡지」의 발간, 신해혁명의 참여, 혁명 후 한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조력 등으로 동지의 연을 맺은 진형명은 범재의 평생지기라 할 만하다. 그와 함께 구상한 대단히 웅대한 프로젝트를 다음 차례로 소개하겠다.


6. 한중러 3국 연합군의 창설 시도

러시아와 중국이 무기와 자금지원하고 한국인 군대 설립

▲ 좌로부터 자중 김진영(범재의 조카), 몽양 여운형, 범재 김규흥, 진형명, 포타프

1920년 6,7월 경 한ㆍ러ㆍ중 3국 연합을 추진하였으나 임시정부의 비협조로 무산된 바 있다.

김복(김규흥)이 주관하고 여운형이 실무를 담당하였다.


1920년 7월경에 찍은 것으로 추측되는 한 장의 사진을 보면, 좌로부터 자중 김진영(범재의 조카), 몽양 여운형, 범재 김규흥, 진형명, 포타프 등 5명의 인물이 서있고, 그 뒤에는 중국 국민군으로 보이는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포타프는 1920년 3월 1일 자 독립신문 제1면에 ‘짜르 정부를 전복한 공화국 건설의 원훈’이요 ‘대붕’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그 당시 한인독립 제 단체의 관심을 받던 인물이다. 그 이유는 전해에 끝난 파리강화회의가 강대국들의 승전 잔치로 끝났지만, 러시아만이 약소민족의 독립과 지원을 공언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임시정부의 요인들도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등 각 계파별로 접촉하기 시작했다.


범재 김규흥은 다른 독립지사들과 달리 러시아의 지원에 중국 국민당을 합쳐 한?중?러 3국 합작으로 6개 사단 규모의 병사를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즉 러시아 정부가 장소와 무기를 제공하고, 러시아와 국민당이 자금을 지원하여 한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설립하여, 우선 국민당의 북경 군벌의 토벌을 지원하고 차후 그 세력을 극대화하여 한국의 독립을 완성케 하기로 하는 계획이었다.


1920년 7월 9일 회담에서 범재는 계획의 총주관자로 도산 안창호를 추대했지만, 도산의 거절로 인해 안타깝게도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성사되지 못했다. 만약 김규흥과 진형명의 이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몇 년 후 발생한 손문과 진형명의 갈등도 봉합되었을 것이며 중국 역사와 한국독립운동사도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기만 하다.

 

7. 3.1운동, 임시정부수립의 지휘자는 범재 김규흥 (8부)

파리강화회의 대표단 파견의 숨은 지휘자도 범재 김규흥

▲ 파리강화회의, 임시정부 수립, 삼일운동의 배후로

김복(김규흥)과 신정(신규식)을 지목하고 있는 일제의 기밀문서


우리는 삼일운동의 주관자를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으로 배웠다. 그리고 삼일운동의 여파로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그 임시정부가 김규식을 파리에 대표로 파견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일제는 다르게 생각한 모양이다.


1919년 8월 23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官房外事課長)가 일본외무성정무국장(埴原正直)에게 보낸 기밀문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즉 민족자결주의를 부르짖고 조선의 현상을 호소하여, 미국 및 세계 여러 나라의 동정에 의해 조선의 독립을 이루어 내려는 자들로서, 재미조선인과는 위치 문제 등이 있지만 가장 밀접하게 연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락은 문서에 의하지 않고 대부분 사람들이 서로 왕복하면서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김복, 신정 등인데 김복은 항상 그가 즐겨하는 문필로서 지나(중국)신문을 통해 배일기풍을 고취하고 있으며 또 이들 조선인은 지나남방파와 통하여, 이들을 이용하길 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서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대단히 귀중한 자료이다. 조금 더 이 문서를 살펴보자.

《이리하여 민족자결주의를 미국 대통령이 부르짖게 되니까 재미조선인과 기맥(氣脈)이 상통하여 강화회의에 진상청원을 위해 대표자의 파견을 결의하고 김규식을 그 대표자로 선발하여, 김규식은 3월(1월의 오기)상순에 상해를 출발하여 파리로 향하였습니다. 또 상해 방면 획책의 발걸음을 진척시키기 위하여 유력자인 안창호를 4월 하순에 하와이를 출발하여 상해에 도착하도록 했는데, 이때부터 그는 이 방면(상해) 배일자의 중견인물이 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임시정부가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수립일(1919년 4월 13일)과 김규식의 일정(1919년 1월 상해 출발, 3월 파리 도착)의 괴리, 그밖에 1919년 4월 3일 날짜로 된 ‘한국위원이 강화회의에 제출한 13개조’에는 ‘신한청년당대표 김규식’이라고 기록 되어 있는 사실 등 여러 정황상 임시정부 파견설은 점차 철회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는 상기 문서 외 재판기록 등을 통하여 모든 일 즉 파리강화회의, 임시정부 수립, 삼일운동의 기획자이자 배후로 신규식과 김규흥을 지목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일제의 파악과 별도로 범재 김규흥이 깊게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중합작「진단」이란 주간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애국당이란 곳에서 국내외 독립선언을 주도했으며, 이 단체는 다섯 차례의 중요한 독립선언을 기획했다. 최초는 1917년 상해에서 선포한 <대동단결선언(서명자 신규식 외 14인)> 두 번째는 1919년 2월 동경에서의 <일본동경유학생독립선언서(최팔용 외 11인) 세 번째가 1919년 2월 길림에서 선포한 <국외한인대표단독립선언서(김교헌 외 39인)> 네 번째는 1919년 3월 경성에서 발표한 <국내한인독립선언서(손병희 외 33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삼위에서 1919년 3월 선포된 <해삼위한인국민회의선언서(서명자 없음, 해삼위의 주요인물은 대한독립선언서에 대부분서명 했음)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대표가 실은 국내 대표라고 한다. 실제 당시의 조선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인물 즉 신규식, 박용만, 이동휘, 안창호, 이승만, 김좌진, 신채호, 조소앙, 김규식, 조성환, 박은식 등 독립운동 명망가들은 대부분 ‘국외한인대표단독립선언서’에 서명했으며, 입헌군주론자 내지 보황론자들은 공화주의를 주창한 상기 5개 선언서에 모두 불참하였다. 무언가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 예관 신규식과 범재 김규흥


우리는 서울의 3·1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전국방방곡곡, 전 세계 조선인 거주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발발했으며 임시정부도 수립되었다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가설은 3·1운동 이전부터 독립운동가 명망가들이 상해로 속속 모여들었고, 3월 1일을 전후하여 70여 종의 독립선언서들이 전 세계 각지에서 발표되었음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중심축을 파리강화회의에 두고 임시정부, 3·1운동을 함께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의문이 풀린다. 즉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우리의 실상과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한편 조선인의 기개를 보여 주기 위해 평화적이고 거국적인 시위를 결행함과 동시에 망명정부격인 임시정부 정부를 수립함을 전 세계에 알린다면 우리의 독립은 이루어지라고 생각한 것이 당시독립지사들의 신념이었음에 틀림없다. 신규식과 김규흥을 배제하고 삼일운동을 비롯한 임시정부 수립,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서술한 현재의 역사는 분명히 수정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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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4.10.13 22:34

    첫댓글 우리 역사 바로 알기

  • 작성자 15.12.18 07:36

    안터넷에서 )" 3ㆍ1운동의 숨은 대부 범재 김규흥"을 검색하시면 KBS특집으로 방영되었던 내용을 보살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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