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47:1)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시 47:2)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시 47:3)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시편 47편은 모든 민족과 나라들의 찬양을 받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묘사한 시지만 깊이 묵상해 본다면 한편의 메시아의 시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족속과 나라와 백성들이 순순히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 때문이다.
(빌2: 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분의 위엄은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에서 나오는 엄위하심이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인생들을 두 손을 들고 손뼉을 쳐서 그분을 찬송하게 된다. 한 손으로는 그분의 공의하심과 다른 손으로는 그분의 자비하심을 마주쳐 소리를 울려 그분을 찬양하게 된다. 위대한 찬송은 두 손이 요구된다.
서양 사람들과는 달리 아프리카 사람들은 손을 이용해서 찬양을 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일제히 손가락을 부딪치거나 손바닥을 부딪쳐서 소리를 내어 찬양한다. 그런데 손을 이용한 찬양은 반드시 두 개가 필요하다. 서로 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다. 사실 즐거움과 두려움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감정 같지만 하나님 앞에선 인생들에게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찬양과 예배가 드려진다. 여기서 말하는 즐거움이란 인간의 쾌락적인 즐거움이 아니며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단순히 무서움이서 나오는 두려움이 아닌 존경이나 경외심을 나타내는 두려움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즐거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하는 찬양은 언제 어떻게 나오게 되는가? 그것은 단지 위대하신 분 앞에서만 나오는 것도 그렇다고 자비하신 분 앞에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다. 즐거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교차하는 찬양은 자비와 공의가 하나가 되는 십자가 앞에 설 때다. 온 우주의 창조주께서 인생들을 위하여 그 목숨을 내어주신 십자가는 모든 인생들로 하여금 참으로 즐거움과 두려움 속에서 찬양하게 한다. 거기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희락이 있다. 거기에는 또한 인간의 필설로 표현 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있다. 이런 십자가 감정은 우리들의 신앙 전면에 영향을 끼친다. 하나님의 자비의 품성과 공의는 우리의 믿음과 신앙 전반에 강처럼 흐르는 사상이다.
십자가 신앙은 자비와 공의가 만나는 만남의 신앙이다. 거기에서 즐거움과 두려움이 만나고 칭의와 성화가 만나고 믿음과 행함이 하나가 된다. 십자가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이 두 축의 하나를 무시하게 된다. 지나치게 두려움이 지배하는 삶을 사는 완전주의자들이나 혹은 칭의만 강조하면서 지나치게 즐거움에 도취되어 살고 싶은 자유주의자들은 십자가가 주는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성품은 자비와 공의가 함께 공존하는 사랑의 성품이다. 그러한 사랑의 하나님 앞에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시 47:6)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시 47:7)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시 47:8)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기쁨의 떨림과 두려움의 떨림이 위대한 찬양으로 드려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온 천지의 주재시며 온 우주의 왕이신 그 하나님이 죄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영원이라는 시간을 통하여 영속적으로 선포될 찬양의 주제가 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한없는 즐거움이 솟아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 볼 때 한편 전율하는 두려움이 동반됩니다. 두 손을 들고 손뼉을 쳐서 주님을 이름을 찬송합니다. 목소리를 높여 주의 위대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 발을 구르고 손뼉을 쳐서 주의 영광을 선포하오니 주는 영원히 찬송을 받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