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지 : 징용-중국전선 일본군의 중지(中支)파견군으로. 팔로군(八路軍)이란? <6회>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남경이 일본군에 점령당하자 장개석은 임시로 수도를 중경으로 옮겨갔고, 일본군의 중지파견군 사령부도 중국임시정부가 설치된 중경을 공격목표로 정하고 무창 항구에 진출하여 그곳에 최전방 작전 지휘부를 설치하고 있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한 군수물자 창고가 남경, 포항 등지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연합전선을 펴고 있는 미 공군은 연일 이곳 일본군 중요기지를 폭격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도 중국의 국민정부가 피신해 있었던 중경으로 옮겨가 있었다. 일본군의 목표는 중경을 함락하는 것이었으나 미군의 공습과 팔로군의 집요한 기습공격으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남경에 머물러 있었다.
1944년 12월 21일 용산에서 조선인 징병입대자들을 태운 열차는, 객차 18대에 차량지휘 통솔자인 일본인 하사관, 그리고 헌병까지 5명이 합승했다. 기차 앞뒤 출입문에 1명씩 배차되었고, 3명은 수시로 좌석 사이를 다니며 이상 유무를 파악하였다.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북쪽으로 향해 질주하였다. 기차는 달려서 어느덧 의주를 지나 만주 땅으로 접어들었다. 말로만 듣던 만주 땅을 밟으니 감회가 무량했다. 더군다나 산해관을 지나면서 만리장성이 눈에 들어오자 모두들 밖을 내다보았다.
우리가 내린 곳은 중국 강소성 서주(徐州)를 거쳐 포항에 도착했다. 앞에 보이는 양자강은 폭이 10 리나 되는 듯했다. 언뜻 보기에는 강이 아니고 바다같이 보였다. 강물을 배로 건너니 남경 땅이었다.
우리병력의 행선지는 중국국민정부의 수도가 피신해 있는 중경이었으나, 미국과 영국의 공습과 팔로군의 게릴라전이 두려워 당분간 남경 주둔 사령부 산하에 예속되어 야전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 중에서도 우리 공병대는 특공대로 훈련이 다양했다. 높은 성을 뛰어 오르내리기, 적들이 땅에 매설한 지뢰를 탐지하는 법, 적들의 전차가 올 때 미리 숨어 몸을 빨리 움직여 대전차포탄을 던지고 난 뒤 피신하는 요령, 파괴된 교량을 긴급 가설하는 훈련들이었다. 이러한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우리 조선병사들은 일부러 철저히 익혔다.
그 이유는 일본군의 군사지식을 익히고 심신을 단련해야 어느 때인가는 우리민족의 철천지원수인 일본 놈들을 타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전선의 동향을 들으면 매일같이 연전연승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었으나, 대 병력이 이동해 갈 행선지가 중경인데도 가지 못하고 남경에 몇 달간을 대기상태로 있다는 것은 보도내용대로 믿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전쟁은 정확한 첩보전이 선행되어야 제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당시 일본군대는 중국 팔로군(八路軍)의 저항으로 중경까지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의 팔로군은 누구인가?
팔로군은 1937년에 창설되어 1945년 까지 일본군과 싸운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 가운데 하나이다. 규모는 약 2만 명으로, 정식명칭은 ‘국민혁명군 제 8로군’ 이며 1927년 남창 폭동 때는 홍군(紅軍)으로 불렸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당시 ‘국공내전’에서 패망위기에 처해있던 중국공산당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개석에게 모택동, 주덕, 팽덕회, 임표 등의 이름으로 전문을 보내, 전체 홍군은 장개석 위원장의 지휘 하에서 ‘국민혁명군’으로 개명하여 항일전쟁에 임할 것을 제의하였다.
7월 15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공부국난선언(共赴國難宣言)’을 발표하고,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국공합작을 요구했다. 그들은 삼민주의의 실현, 국민당정부의 전복운동 취소, 홍군명칭취소, 폭력에 의한 지주들의 토지몰수정책 중지, 그리고 국민혁명군으로의 개편을 조건으로 제시했고 장개석의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명령에 절대 따를 것을 약속했다.
1937년 8월 22일 장개석의 국민정부군사위원회는 이 제의를 수락했고 중공군을 ‘국민혁명군 제 8로군’으로 개편했다. 총 지휘에 주덕, 부 총지휘에 팽덕회를 임명하는 한편, 총 3개 사단에 병력수를 2만 명으로 제한 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팔로군 산하에는 임표의 제 115, 하룡의 제110, 류백승의 제 119사단이 있었고, 팔로군에 대한 지휘권은 여전히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이 가지고 있었다.
모택동이 팔로군 간부들에게 말하길, “중일전쟁은 중국공산당의 발전에 좋은 기회이고, 우리들이 결정한 정책은 70%를 우리 공산당 발전에, 20%를 타협에, 10%를 대일본군작전에 두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도 알 수 있듯이, 이 제 2차 국공합작은 항일전을 위한 중공군의 일시적인 전략이었다.
신사군(남방에 잔류한 홍군)이 화중 지방에서 활약했던데 비해, 팔로군은 화북지방에서 항일전을 벌였다. 해방 후인 1947년에 팔로군이란 명칭을 인민해방군으로 다시 바꾸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조선인과 만주인을 앞세워 중국대륙의 북쪽을 제압하고 대륙의 중원을 침공 중이었으나, 광활한 중국대륙의 전 전선에 투입된 군대에 물자를 보급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황의지의 일대기, 장군의 후예 2-106 참고)
♨출처/남원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