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회의 성공한 PR 상품, 곽원갑
1909년 봄, 상해탄(上海灘)에는 곽원갑 선풍이 불었다. 선풍의 시작은 중국에 돈을 벌러 온 영국의 대역사(大力士) 오비인(奧比音, 혹은 奧皮音)이다. 영국에서 온 이 보디빌더는 상해시 사천북로의 아폴로 영화관에서 역도, 헬스 시범을 보였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는 그저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재주를 팔아먹는 서양재주꾼이다. 그는 격투에서는 그저 약간의 주먹쓰는 법을 익혔을 뿐이다.
서양도 재주꾼들은 큰소리를 치는 법이다. 오비인의 큰소리가 약간 도를 지나쳤다. 그는 무대에서 공공연히 중국인과 겨뤄보겠다고 소리쳤다. 신문기자들은 바로 이것을 가지고, 중국인들을 '동아병부(東亞病夫)'라고 모욕했다고 써댔다. 그리하여 청나라 백성들의 상처받기 쉬운 감정을 크게 자극했따. 그리하여 상해인들은 들고 일어나서, 중국의 영웅이 나라의 명예를 빛내주기를 바랐다.
곽원갑은 바로 이런 순간에 등장한다.
곽원갑을 위하여 배후에서 기획한 사람은 그의 친구 농경손(農勁蓀)이다. 농경손은 천진에서 장사를 하고, 집안이 부유했다. 경제적으로 곽원갑을 계속 돌보아왔다. 소문에 따르면, 곽원갑의 정치적 계몽자이며 곽원갑의 거의 모든 활동을 막후에서 조종한 인물이다. 바로 그의 기획과 포장하에 곽원갑은 주먹질로 입에 풀칠하던 일개 무부(武夫)에서 민족영웅과 비슷한 빛나는 이미지를 지니게 된다.
농경손은 동맹회의 회원이었다. 그의 배후에는 더욱 은밀한 인물이 숨어있었다: 그는 바로 진기미(陳其美, 그의 아들이 진과부, 진입부이다)였다. 진기미는 손문의 조수였고, 당시는 아직 이름이 나지 않았던 장개석의 결의형제였다. 청방의 핵심인물이면서, 동맹회의 고급간부로서, 진기미는 상해에서 이 두 방파의 혁명에 관한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 흑방을 동원하여 혁명을 꾀했지만 연전연패했던 동맹회는 더더욱 심각하게 자신의 무장세력을 건립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때, 청나라정부는 정치체제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역사상 보기드문 관용의 국면이 형성되었다. 지방자치운동에서, 일부 강신건체(强身健體, 신체를 강건하게 하는 것)를 모토로한 민간준군사집단이 속속 나타났다. 동맹회도 자연히 이 기회를 잡으려 했다. "10년내에 천만명의 강건한 신체와 기백을 지닌 사람을 훈련시키고, 또한 군사기능을 지닌 청년으로 하여금 대규모 혁명운동과 군사개량으 필요에 맞추도록 하여야 한다"(진기미 어록). 곽원갑은 강호에서 이름이 높았다. 그리고 농경손이라는 친구까지 있으니 가장 먼저 고려할 대상이 된다.
동맹회가 곽원갑을 부추겨서 이미 상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오비인과 대적하도록 한 것은 아주 성공적인 'PR"이었다. 신문은 연이어 이 내용을 보도했다. 곽원갑, 오비인의 싸움은 중화민족의 존엄과 체면이 걸린 일로 간주되었고, "황혼(黃魂, 황인종의 기백)"을 드높이는 대결로 간주되었다.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기획자들은 상해의 유명한 '장원(張園)'(2달후, 대청국 최초의 주식제기업인 윤선초상국도 여겨기에서 제1차주주총회를 개최한다)내에 비무대를 설치한다. '높이 4척, 너비 20척'이었다. 곽원갑은 신문에 광고를 실어, 애국주의의 기치를 높이 내걸었다: "세상은 우리 나라를 병부(病夫)의 나라라고 비웃는다. 나는 바로 병부의 나라의 한 병부이지만, 천하의 건자(健者)와 겨뤄보고 싶다." 그러면서, "외국대역사를 상대하겠는데, 비록 동근철골(銅筋鐵骨)이어도 꺼리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사람들의 입맛을 다시게 했던 곽원갑, 오비인의 대결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류의 의견은 오비인이 곽원갑과 그를 대표로 하는 중국의 쿵후에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이라고 한다.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은 상책중 상책이다" 이런 국면이 나타나자, 중국인들의 사기는 올라갔고, 제국주의분자를 쫓아버렸다는 위풍도 당당했다.
그러나, 번역을 맡았던 또 다른 동맹회회원이자 손문의 고향사람인 진공철(陳公哲)의 회고에 따르면, "오비인이 처음에 중국에 올 때는, 중국인들의 무술대결방법을 잘 몰랐다. 그리하여 서양의 권투경기규칙만을 알았다. 손에 장갑을 끼고, 그저 허리 위쪽만 때리는 것이지, 발길질은 허용되지 않는 것을 원했다. 그러나 곽원갑은 중국의 비무방식을 고집했다. 손발을 모두 쓰고, 아무런 제한도 없으며, 사상자가 나오더라도 그것은 하늘의 뜻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 협상을 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사실 오비인은 그저 재주를 팔아먹는 자에 불과했다. 입으로 큰소리는 치지만, 머리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대영제국의 명예를 자신의 한 몸에 떠안고, 중국쿵후의 고수와 싸울 이유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대거 선전된 이 비무에서 곽원갑은 이미 싸우지 않고 이겼다. 현장에 모인 관중의 열정에 보답하기 위하여(동맹회가 입장료를 얼마나 받았는지는 기록이 없다), 주최자는 관중들 중에서 초청하여 비무를 했다. "서로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몸이 땅에 닿으면 승부가 나는 것"으로 했다. 민족의 명예가 걸린 싸움에서, 그저 친선경기로 변모된 것이다. 곽원갑과 그의 제자들은 손쉽게 승리를 거둔다. 이리하여 상해탄에 그의 명성은 진동하게 된다.
곽원갑의 브랜드가 상해탄에서 확실히 수립된 후, 동맹회는 다음 단계를 기획한다. 1909년부터 갑북의 왕가택에서 "정무체조회(精武體操會)"를 조직한다. 여기에도 곽원갑의 이름을 걸었다. 곽원갑이 무술을 책임지고, 농경손이 회장이 된다. "정무체조회"는 상무정신을 제창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했따. 그러면서 12살에서 35살까지의 신체건장한 남자들을 받아들인다. 1인당 회비는 2원을 받았다.
다음 해, "정무체조회"가 적법하게 성립된다. 최초의 회원은 73명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반청의 핵심인물들이 된다. 곽원갑 본인은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하게 죽는다. 일반적으로는 일본인들이 독살했다고 한다.
동맹회는 정무회의 "황포군관학교와 유사한' 정치적속성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손문의 가까운 심복인 소원충(邵元沖)은 그 시기를 회고하며 이렇게 할한다: "그때 북방의 권술가인 곽원갑이 상해로 왔다. 선생(진기미)는 기술을 중시하여 서로 알게 된다. 얘기하는 과정에서 곽군이 애국사상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어, 상해 각계인사들을 움직여 학교를 만들고, 동지들중에서 뜻이 굳건하고 체격이 강건한 자들에게 곽군이 권법을 전수하여, 군사 및 혁명에 쓰고자 하였다" 그후, 정무체조회를 정무체육회로 개조할 때, 정치적으로 실의기에 있던 손문이 직접 침석하여 훈화를 한다. 이때까지 자신의 군관학교처럼 여겼다.
사실, 정무체조회와 유사한 무술단체는 청나라말기 및 민국초기에 우후죽순처럼 전국에서 나타난다. 그동안 자연히 강신-강국의 소박한 바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각종 정치세력의 세력확장의도가 관련되어 있다. 이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총잡이(칼잡이)들 속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현실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1909년에 성격이 온화한 소주인들도 지방자치운동에서 "관전대가시민공사"를 건립한다. 나중에는 "소주시인민공사"로 변경된다. "공사"의 정관에 따르면, "본공사는 연합단체로서 상호 보위하고, 본 거리의 공익적인 일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길거리 상인과 백성의 자치기구였따. 그러나 이런 주민회는 얼마후 신체단련을 목적으로 하여 정부허가를 받고 준군사적인 보안조직으로 성장한다. 소상체육회등 자치기구가 '소주상단'으로 바뀌고, 민국시기에는 45개지부, 2000여명의 '단원'을 보유하며, 1400여개의 총과 기타 군사장비를 갖춘 방대한 무장조직이 된다.
사실, 대청국의 개혁과정에서, 지방의 분리추세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리고 정권의 근본에 관계된 경찰, 국방에도 계속 침투한다. 일찌기 무술변법기간동안, 호남에는 '보위국'이 성립되는데, 관청, 시민, 상인이 연합하여 만들었고, 지방의 공안권을 장악했다. 신정개혁때, 상해에는 '남시상회공회'(상해상단공회)가 성립되는데, 공개적으로 무장역량을 조직했다. 정부허가하에 160정의 소총과 500발의 총알을 구비했고, 인원은 2000여명에 달하였다. 그후 이 상단무장은 '상해보위단'으로 이름을 바꾼다. 상해에서 계속되는 정치투쟁에서, 때로는 이쪽 편을 때로는 저쪽 편을 들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들은 상해지방무장세력이 정치에 간여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총부리에서 정권이 나온다" 역대이래로 중국에서 불변의 진리이다. 마찬가지로, 이 진리의 반추도 역사에서 무수히 증명되었다. 총잡이들이 손을 벗어나면, 정권에는 문제가 생긴다. 청나라말기의 정치개혁이 가속화되면서, 최종적으로 통제불능이 되어 차가 뒤집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지방에 준무장세력을 건립하도록 한 것과 이들 준군사역량이 중앙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것이 직접적으로 중앙의 권위상실, 응집력의 약화를 불러왔다. 대량의 지방준군사세력이 출현하면서, 헌정개혁에서 설정된 지방자치가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방의 이반을 초래한다. 그리고 이후 군벌난립의 풍요로운 토양이 마련된다. 청나라말기에서 민국으로의 전환은 일정한 정도에서 애신각라가족이 통일한 중앙독재가 각지실력파들이 지방에서 축소된 독재를 하고, 군주를 공화로 대체하였지만, 권력만능과 승리자가 독식하는 구조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만세만세만만세'의 소리는 대강남북, 장성내외에 여전히 울려퍼졌다. 다만 이전의 '황제'가 세상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호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런 환경하에서 쿵푸가 뛰어났던 곽원갑은 자연히 총잡이의 숙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영웅의 비극은 시대의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은 비극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과 후인들을 격려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