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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9:16f | 막 10:17f | 눅 18:18f |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무슨선한일을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ti, agv aqo.n poih,sw i[na scw/ zwh.n aivw,nionÈ)
|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ti, poih,sw i[na zwh.n aivw,nion klhronomhs, wÈ |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ti, poih,saj zwh.n aivw,nion klhronomh,swÈ)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
위의 표에서 공관복음 가운데 마가복음이 원래적인 표현을 보존하고 있고,마태복음 본문의 밑줄 친 부분은 마태의 독자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뚜렷하게 나타난다.21) 이 중에서 우선 마태는 독특하게 우리의 핵심 용어 ‘클레로노메 소’(klhronomh,sw) 대신 “scw/”(e;cw의 가정법 단순과거형)를 사용한다. ‘e;cw’는 특별한 신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일반적인 동사로 ‘가지 다/소유하다/있다’(have)에 해당한다.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일단은 마태복음 의 현재 우리말 번역 “얻다”가 완전히 오역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마태복음의 “얻다”(scw/)에 동화되어 마가/누가복음의 “klhronomh,sw”도 “얻다”로 번역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본문비평을 예로 들자면, 의도 하지 않게 공관복음 병행 문장에 영향을 받아 필사 오류가 생기는 경우가 있 는데, 말하자면 이런 현상이 번역에서 일어났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본문 비평에서 교리적 숙고로 인한 의도적인 이독(異讀)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것 이 번역에서도 일어났을 수 있다.22) 사실, ‘영생을 상속한다’는 어감이나 표 현은 그렇게 부드럽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교리적인 거리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생을 상속한다’는 신학적 개념은 요한복음 3:16로 대표되는 믿 는 모든 자는 ‘영생을 얻다/갖다’(evcei/n thn. zw,hn)는 보편적인 진술23)과 대립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이 보편적인 진술과 부합되는 마태 복음 번역을 그대로 마가/누가복음 번역에 그대로 사용했을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현재 대부분의 영어 번역(ASV, KJV, NAS, NIV, NRS) 마 태복음은 ‘have’로, 마가/누가복음은 ‘inherit’으로 번역한다(독일어역 LUT도 참조).
신약성서 Nestle-Aland 27판에는 16절 “i[na scw/ zwh.n aivw,nionÈ”의 몇 가지 이문(異文)들이 본문 하단의 비평장치에 제시된다. 먼저 단순과거형 ‘scw/’ 대 신 현재형 ‘ecw’를 사용하는 사본들은 서방계 사본(W-zwhn ecw의 어순만 바 뀜)과1과13족및소문자사본들(f1.13 M)이있다.‘i[na’다음에직설법현재형 이 사용되는 것은 비평장치에만 나오는데, 이런 경우 신약에서는 대부분 필 사자들의 오류로 간주된다.24) 하지만 ‘e;cw’의 경우 가정법 현재형과 직설법 현재형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25) 본문의 비평장치의 많은 사 본이 간직하고 있는 이문이 단지 필사오류가 아니라 문법적으로 가정법 현재 로 옳게 쓰였다면, 그 뜻은 영생의 소유가 ‘일회적인 행위’(단순과거)보다는‘지속’(현재)의 의미를 강화하는 셈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이본(異本)의 뜻은“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내게 영생이 있으리이까?”(ti, avgaqo.n poih,sw in[ a ec; w zwh.n aivw,nionÈ)의 어감을 갖는다. 다른 한편으로 ‘scw/’ 대신 아예‘klhronomh,sw’를 사용하는 사본들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존재한다. 이는 병행 본문 특히 누가복음(poihsaj z) ai) klhronomhsw)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한 다.26) 또한 21:38하반절에는 ‘scw/’와 ‘klhronomh,sw’의 명사어원 ‘유산’ (klhronomi,a)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scw/men thn. klhronomi,an). 이 모든 본문 들은 결국 상속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킨다. 하지만 ‘scw/’를 사용하는 현재 본 문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는 아마도 행위의 신학을 강조하는 마태가 특별히 상속의 행위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scw/’를 사용한다고도 볼 수도 있다. 그러 므로 본문과 비평장치를 종합하면 부자 청년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지금(!)영생을 소유하려는 의지로 예수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마태복음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은 계명을 지키는 것 과 충돌되지 않는다. 마가/누가(“네가 계명을 아나니” 막 10:19//눅 18:20)와는 달리 마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eiv de. qe,leij eivj th.n zwh.n eivselqei/n( th,rhson ta.j env tolaj, Å 19:17하)는 독특한 표현을 부가하 고 있다. ‘생명’과 ‘계명 준수’를 직접 연관시키는 것은 당시 유대교의 통념과 다르지 않다. 마태는 처음부터 율법을 순종하는 것을 ‘선을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것이 ‘영생을 소유하는 길’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부자는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과는 달리 예수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질문도 “무엇을 하여야”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무슨 선한 일을 하여 야”(ti, agv aqo.n poih,sw)라고 한다. 또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 니라”를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로 에둘러 표현한다. 이렇게 마태는 기독론적 관점에서, 예수가 선(善)이 아닐 수 있다는 결론을 피해나간다.27)그는 여기서 하나님 혹은 예수가 ‘선한 자’라는 인식 자체를 말하는 데 있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는 선(善)은 오직 하 나님이며(암 5:14; 미 6:8) 더 나아가 기록된 하나님의 뜻, 즉 율법(토라)이기 에 ‘토라 이외에는 선한 것은 없다’(미쉬나 Abot 6,3; b. Ber. 28b)는28) 유대교 의통념을마태가공유하고있는것이라할수있다.
21) U. Luz, Das Matthäusevangelium nach Matthäus 3, EKK I (Neukirchen-Vlyen: Neukirchener Verlag, 1997), 120f; 도날드 헤그너, 마태복음 14-28 , 채천석 역, WBC 33상 (서울: 솔로몬 출판사, 2006), 879-881; W. D. Davies and Dale C. Allis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3, ICC (Edinburgh: T&T Clark, 1997), 38-43; E. Schweizer,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 (Göttingen/Zürich: Vandenhoeck &Ruprecht, 1986), 251f.
22) Bruce M. Metzger and Bart D. Ehrman, 신약의 본문 , 장성민 · 양형주 · 라병원 공역 (서울:한국성서학연구소, 2009), 368f.
23) 신약에서 “생명을 가짐”(ecv ei/n thn. zw,hn)이라는 표현은 거의 압도적으로 요한전승에서 사 용된다. 총 34번 중 요한복음에는 19번, 요한일서에 10번이나 사용되는데, 여기서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은 거의 “생명이 있음”으로 번역하지 “생명을 얻음”으로 번역하지 않는
다. 이는 우리말 표현도 그렇지만 요한 전승의 강조점이 종말론적 현재에 있기 때문이다.
24) F. Blass, A. Debrunner und F. Rehkopf, Grammatik des Neutestamentlichen Griechiesch(Göttingen: Vandenhoech &Ruprecht, 2001. 18 Auf.), 299(6번).
25) Ibid.,300(12번)에나오는이런종류의목록에도마19:16은나오지않는다.
26) 이러한 경향은 א L 33 (579에서는 이들과 약간 다른 형태로 다시 poihsw z) ai) klhronomhsw가 나타남) 892와 성구집 2211과 시리아와 북아프리카 이집트의 소수의 번역 본들의 변형된 형태(sy1s.c.hmg sams bo)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판단은 바로 앞 didaskale에agaqe를 첨가하는 이본들(C W Q f13 33 M lat sy sa mae bopt)에서 이미 누가복음과 시작하기 때문에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런 견해에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한다. J. W. Wenham, “Why Do You as Me about the Good?”, NTS 28(1983), 116-25; 도널드 헤그너, 마태복음877 , 14-28
27) 예수가 반면 누가는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목적절(i[na)을 사용하지 않고 분사 “poih,saj”(직 역하자면 “행한 후에”)를 사용하여 문장을 좀 더 윤색할 뿐이다.
28) Berakh 28b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랍비 엘레아잘(기원후 90년경)이 병들었을 때 그의 제자들이 그를 문병하러 와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 셔서 우리가 그 길에서 장차 올 세상의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אבה םלועה ייהב הכזנו). 그는 이 렇게 대답했다. ‘너희의 동료들의 영광을 함께 누리라. 너희의 자녀들이 (성경을 헛되이)읽지 않게 하고 학자의 제자들과 무릎을 맞대고 앉게 하라.’” Hermann L. Strack und P. Billerbeck,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aus Talmud und Midrasch 1 (München: C. H. Beck, 1978. 7.Auf.), 808; 헤그너, 마태복음 14-28 , 881; U. Luz, Das Matthäusevangelium nach Matthäus 3, 122.를 참고하라.
2.3.2. ‘klhronomew, ’의 신학적 의미
이제 마태복음 전체에서 ‘klhronome,w’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공관복음 본문은 모두 동일하게 3단락, 즉1 영생에 관한 부자와 예수의 대화(마 19:16-22//막 10:17-22//눅 18:18-23),2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비유(마 19:23-26//막 10:23-27//눅 18:24-27), 그리고 3 모두 모든 것을 버리고 예 수를 따른 제자들에 대한 종말론적 축복 선언(마 19:26-29//막 10:28-30//눅18:28-30)으로 구성되어 있다.29) 그런데 마태복음의 경우 24절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은 본문의 정중앙에 자리할 뿐만 아니라 전체의 주제가 된다.이렇게 마태는 예수와 부자 청년의 대화를 종말론적인 구원이라는 주제로 승 화시켜가고 있다. 그래서 첫 질문(16절)과 대화의 종결부의 선언(29절)사이,그 중심에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들어감”(eivselqein/ eivj th.n basilei,an tou/ qeou/) 19:23f. 비교 17b)이 정교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태는 24절에서 자신의 전형적인 강조 문구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pa,lin de. le,gw u`min/ )를 사용하 여 이 주제를 부각시킨다. 그러니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전체 대화의 소 재가 되는 재물 포기를 전적으로 제자도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지만, 마태는 이 소재를 처음부터 ‘영생의 상속/소유’의 행위에 관심을 두는 부자의 질문을“(하나님의 나라/영생)에 들어감”(eivselqein/ eijv )이라는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마태는 3번째 단락의 제자 담화를 맺는 19:29에서 다시 “영생을 상속하리 라”(zwh.n aivw,nion klhronomh,sei)는 표현을 사용한다. 반면 마가와 누가의 경 우 여기서는 ‘상속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일반적인 동사 ‘la,bh|’ (取하다)를 사용한다.
마 19:29 | 막 10:30 | 눅 18:30 |
lh,myetai kai. zwh.n aivw,nion klhronomhs, ei | eva.n mh. la,bh|... | o[j ouvci. la,bh| |
...받게 되고 영생을 상속하리라 | ...와 영생을 | ...와 영생을 받지못할자 |
그러니까 마태는 일시적인 소유 행위를 나타내는 표현(‘scw/’)으로 부자의 질문의 한계를 드러내고, ‘클레로노메오’를 종말론적 심판의 관점에서 제자들 이 누릴 축복 선언에 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하게 사용하는 셈이다. 그래서 마태 는 ‘클레로노메소’(미래형)를 사용하여 종말론적인 미래를 표현한다. 마태복 음에서 ‘클레로노메오’는 모두 3번 사용되는데, 산상수훈의 서막 5:5에서도 이 용어(미래형)는 제자들의 종말론적인 축복을 선언하는데 사용된다. 뿐만 아니 라 마가복음 10:30이나 누가복음 18:30은 이 세상에서 누릴 백배의 ‘집과 가족 과 땅’을 “현세에 있어”(evn tw/| kairw|/ tout, w|)라고 표현하지만, 마태는 이것 생 략하고 종말론적인 축복으로 돌린다(마 19:29).30) 그런데 이 문장 바로 앞에는 마태만이 간직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심판에 관한 어록이 담겨 있다.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라(19:28).
인자가 이스라엘을 심판할 때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즉 이스라엘을 심판하 는 자리, 이를테면 ‘배심원’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이스 라엘 전체가 유산을 상속한다는 유대교의 통념은 뒤집어지고, 도리어 이스라 엘이 심판대에 세워진다. 이미 세례요한의 메시지에서도 이러한 심판의 관념 이 표현되어 있다(마 3:8f). 마태복음 19:28은 누가복음 22:30과 병행을 이루 고 있는 예수의 말씀 전승에 속한다. 이 말씀과 관련된 마태복음의 특수 전승 들은 마태의 심판 사상의 다른 차원을 열어준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 를 갈게 되리라”(8:11f).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doqh,setai e;qnei) 21:43)
두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상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표 현한다. 더 나아가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민족에게 주어지리라(doqh,setai e;qnei)”, 즉 불특정 민족(e;qnoj)에게31) 주어진다는 선언이다. ‘클레로노메오’는 마지막으로 ‘인자의 종말론적 심판’을 묘사하는 종말강화에서 양과 염소 를 구별하듯이 이번엔 “모든 민족”(pa,nta ta. e;qnh) 25:32)을 심판하는 장면에 서 사용된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klhronomh,sate th.n h`toimasme,nhn u`mi/n basilei,an)25:34).
“모든 민족들”은 앞서 설명한 대로 이방인으로서, 본문에서는 불특정 대상 을 지시한다.32) 이번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심판의 대상이 되는 셈이 다. 물론 여기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심판이 제외되지 않는다.33)
결국, 마태가 사용하는 ‘클레로노메오’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선택과 계약관념이 들어있으면서도, 예수를 따르는 결단을 통과하여 마침내 영생에 이르는 종말론적 구원의 전 과정을 표현하는 독특한 신학용어라 하겠 다. 물론, 계약의 유산을 받은 유대인이나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민족”(이방 인) 그 누구에게나 종말의 때에 심판을 통과해야 할 ‘상속의 완성’이 남아 있 게 된다. 여기에는 종말론적 구원에 이르는 필연적으로 긴장이 존재하는데,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계명의 준수 여부는 그 긴장의 본질에 해당한다.마태의 경우는 산상수훈에서 보이듯이 사랑의 계명으로 집약되고 개별적인 행위로 구체화된다(마 19:17하. 아래 2.3.4를 보라).
29)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이렇게 구분한다. U. Luz, Das Matthäusevangelium nach Matthäus 3, 120; W. D. Davies and Dale C. Allis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3, 38; E. Schweizer,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 (Göttingen; Zürich: Vandenhoeck &Ruprecht,1986), 251f.
30) 마가복음에서도 이 용어의 종말론적 특징은 분명하다. J. H. Friedrich, “klhronome,w ktl)”, H.
Balz and G. Schneider, Hrg. Exeget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 2 (Stuttgart; Berlin; Köln; Mainz: Kohlhammer, 1981), 298f.
31) 이스라엘이심판아래있다는사상은마태복음에가장뚜렷하게드러난다.이를가장잘보 여주는 중요한 사실은 “백성”으로 번역된 ‘e;qnoj’는 복수(‘ta. e;qnh’)로 사용될 때는 유대인 이 아닌 ‘이방인’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마태복음에서 이 단어는 총 18회 쓰이고 있 는데, 3번(21:43; 24:7x2)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방인”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단수 로 쓰여도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24:7)라는 표현이나, “이 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18:17)처럼 이방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이 단어 는 이방인을 의미한다 해도 무방하다.
32) U. Luz, Das Matthäusevangelium nach Matthäus 3, 521-525; 도날드 헤그너, 마태복음14-28 , 1134f; 여러 가지 해석에 대한 학자들의 분류에 대해서는 참조: W. D. Davies and Dale C. Allis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3, 422.
33) 마태복음 13:24-30; 36-43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 이른바 ‘혼합된 몸’(corpus mixtum)이라는 마태의 교회론은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도 심판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3.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
그러면 ‘영생의 상속’이라는 유대교적 관념은 신약의 보편적인 주제인 ‘하 나님의 나라에 들어감’과 어떤 신학적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초기 유대 교에서 토라는 단지 ‘성문화된 율법’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하나님과 이스라 엘의 계약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살아있는 실체였다. 토라의 본 질은 계약이요, 계약은 생명의 근원이 된다. 이를테면, 쿰란 공동체의 계약사 상은 ‘생명의 물의 원천’과 동일시된다(CD 4.8; 7.16; 19.33-35).34) 그래서 토 라는 구원과 생명의 길이었고, 인격화된 토라 존재론(Torah-Ontologie)으로까 지 발전된다.35) 자신들을 종말론적인 계약공동체로 생각하는 그들의 정체성 의 중심에는 토라가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다는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새 로이 공동체에 가입하는 사람은 새로운 계약 안에 사는 것이고 생명의 기원 이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다.36)
신약은 유대교의 이런 생명 사상을 공유하면서도 본질적인 차이를 갖는다.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종말에 일으키실 부활의 행위는 이미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사건에 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37) 죽었던 그가 살 아 있다는 것은 기독교적 선포의 핵심이 된다. 물론 공관복음의 예수의 설교 에서는 미래의 생명만이 언급된다. 왜냐하면 그의 선포에서 ‘영생에 들어감’이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38) 따라서 그의 선포의 주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 적 생명과 대치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공관복음에서 영생은 곧 생명과 동일 어로 사용되고, 양자(兩者) 모두 종말론적인 심판과 구원의 배경에서 ‘들어가 다’라는 표현과 어울려 사용된다(마 18:8f//막 9:43, 45). 이렇게 공관복음에서 생명 개념은-우리의 본문에서와 같이-영생,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되고 만다.39) 또 그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나라를 선취(先取)하는 종말론적 현재 사건에서 복음으로 선포되어 드러난다. 즉, 마태는 부자 청년의 ‘일회적 인’ 행동(‘scw/’)보다는, 미래적 심판의 관점에 서서 하나님의 나라에 마침내 들어가는 시금석을 현재의 결정적인 예수 추종의 결단에 두고 있는 셈이 다.40) 최종적 칭의는 이 순종의 행위와 분리할 수 없는데, 필자는 이것이야말 로 역사의 예수의 언어로 번역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34) 배재욱, “신약 성경의 생명 사상에 대한 고찰”, 「선교와 신학」, 22 (2008), 45-78(54); “초기 유대교, 예수와 바울의 생명 사상”, 「신약연구」11:1 (2012), 131-159.
35) M. Hengel, 유대교와 헬레니즘 , 3권, 167f.
36) 배재욱, “신약 성경의 생명 사상에 대한 고찰”, 55; Simon J. Gathercole, Where is Boasting?,91-96.
37) 육체적인 생명과 죽음의 근원에 대한 신약의 관점은 근본적으로 유대교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즉 생명과 죽음은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서 이해될 수 있기에 하나님께 속한다. 이 생명은 죽음에 복속된 육체에 사는 것으로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속한 참된 생명과 구분된 다. 하지만 미래적인 생명이 참되고 본래적인 것이기에 유대교에서 ‘생명’이라 함은 ‘불멸 의’라는 수식어 없이도 종종 ‘영원한 생명’이라 특징지어진다.신약에서도 영생은 죽음에 서부터의 구원과 결합되어, 인간은 영생을 ‘상속하고’, ‘받고’, ‘얻고’, ‘들어가게’ 된다. 생 명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통해서 인간에게 수여된 것처럼, 영원한 생명도 종말의 때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인간에게 수여된다. 그래서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 님의 능력에 속한다(마 19:26 공관 병행). 그러므로 미래적 생명, 즉 영생의 소유와 보존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행위에 근거하게 된다.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 된 생명에 관한 온갖 다양한 표현은 여기서 나온다(요 3:15f; 행 3:15; 11:18; 15:7-9; 13:48;롬5;10;6:8ff; 8:2;10:9;엡3:2;7:2;골3:3f;딤전1:16;딤후1:10;딤후1:1;요일5:11;요일5:20 등). R. Bultmann, “za,w ktl)”, ThWNT II, 856-874 (864f).
38) Ibid., 867; G. Dalman, Worte Jesu (Leipzig: J. C. Hinrich's Buchhandlung, 1930), 127-132.
39) 배재욱,“신약성경의생명사상에대한고찰”,57f.
40) 막 10:9 “나와 복음을 위하여”, 눅 18:29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마 19:28f “인자가 자기 영광의보좌에앉을때에...나의이름을위하여”.
4. 결론
우리가 다룬 본문들인 공관복음의 부자와 예수의 대화를 바르게 이해하고 번역하는 출발은, 그 저변에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원론이 교차되고 있 음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진지한 질문의 당사자는 분명히 유대인이 었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율법사와 예수의 대화(눅 10:25-28)에서도 마찬가 지였다. 그의 진지한 질문의 전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become)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being)의 삶에 관한 문제였다.계약 백성 이스라엘의 ‘자격’(status)의 유지는 토라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마지막 심판의 때에 이스라엘은 영원한 생명에 들어 가는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41) 초기 기독교는 예수가 선 포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서 지금 이 세계로 돌입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마태는 ‘klhronome,w’(상속하 다)라는 용어를 부자 청년의 질문(19:16)에서 사용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 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에게 종말론적 상급으로 수여하는 데 사용한다(19:29).여기에는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의 유산을 공유하면서도 종말론적인 구원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함을 보여준다. 이제 하나님의 선택은 유대인 가운데서 도 예수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수여되고, 더 나아가서 이방인에게로 확 장될수있게된다.
여기서 예수를 믿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즉 이방인들도 토라의 계명을 저버릴 수 없다(마 5:17-19)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유대인 이나 이방인이나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뜻을 추구하고 ‘이것을 행함으로 산다’(tou/to poi,ei kai. zh,sh|Å 눅 10:28). 이 신앙이야말로 1세기 유대교와 기독 교가 서 있었던 공통의 토대였다.
그러므로 “내가 무슨 선한 일(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유 대인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율법에 나 타난 하나님의 뜻을 행함은 영원한 생명을 (새로이) 획득하려 함은 아니지만,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현재적 생명(구원) 안에서 살아가려는 삶의 문제이다.동시에 이 대화는 이방인에게도 유효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결 단에 들어선 모든 사람에게 율법의 본질적 요구는 영생을 이어가는 삶의 과제가 된다. 이와 같은 복잡한 신학적 의미를 놓치지 않고 적절하고 바르게 그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필자는 현재의 번역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막 10:17//눅 18:17. 비교. 눅 10:25)를 다음과 같이 번역할 것을 제안한다.
성경 원문 | 개역개정 | 제안 |
표준개정 | 제안 | |
마 19:6 |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 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내게 영생이 있으리이까 |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 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 내게 영원한 생명이 있으 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 |
막10:16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상속하리이까(유업으로 받으리이까) |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 려면, | 내가 영원한 생명을 상속하 려면(유업으로 받으려면)무엇을 해야 합니까? |
부수적으로 개역개정 의 몇몇 곳에서 이 동사를 ‘기업/유산으로 받다’로 번역하는 경우도 ‘유업으로 받다’로 통일하는 것이 좋겠다(마 5:5; 고전15:50; 히 1:4).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12:7에서도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대신“축복을 상속받으려고”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되겠다. 이 외에도 표준개정 은 마태복음 5:5와 25:34에서 “klhronome,w”를 “차지하다”로 번역하는데, 다 른 곳에서와 같이 “상속하다”, 혹은 “유업으로 받다”(갈 4:30; 고전 6:9f; 갈5:21)로 통일적으로 번역하여야 하겠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원론에 관한 미묘한 차이를 나타내는 신학적 용어‘klhronomew, ’는 비록 하나의 단어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구원의 신앙 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신학 용어라 필자는 생각한다. 이 용어는 공관복 음서에서 영생에 관한 진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의 술어(述語)가 될 뿐만 아니 라, 누가복음에서는 독특하게 예수의 지고한 부름이 담긴 ‘사랑의 이중계명’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까지 결합되어 있다. 제시된 번역의 차이가 비록 작고 미묘한 것 같지만, 이러한 번역은 구원을 향한 삶에서 믿음과 행함의 딜 레마를 경험하고 고민하는 진지한 독자들에게, 믿음과 행함의 신학적 긴장을 유지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가는”(빌 2:12) 계기가 되기 를 소망한다.
41)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이런 자신의 고뇌를 표현하고 있는데, 그는 최종적으로 “그리하 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kai. ou[twj pa/j VIsrah.l swqh,setai)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 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11:26-27)고 선언한다. 하지만‘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서 의견이 나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가능한가? 물론 기독교 신학자들은 전자에 서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 떻게’라는 세부 각론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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