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장]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설교]
어제 말씀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지금 자신들을 불법적으로 심문하는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에서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다 당황한 모습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 유대 지도자들은 본래 사도들을 학문 없는 범인으로 여겼습니다. 이때 ‘학문 없는’이란 헬라어로 정확히 번역하면 ‘학위 없는’이란 뜻입니다. 사도들이 글자도 모르는 문맹이란 뜻이 아니라, 정규적인 학위가 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놀라운 지혜가 펼쳐졌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당연히 사도들을 모함하고 위협하면 저들이 쉽게 굴복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어떻습니까?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완전히 유대 지도자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은 오늘 본문에서 전혀 사도들에게 위협이 되질 않았습니다. 억지로라도 위협해서 사도들의 입을 닫으려고 했지만, 전혀 저들의 말이 먹혀들질 않았습니다. 특히나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의 입을 꾹 닫으려는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 이러한 말을 남겼습니다. 본문 19~20절, “베드로와 요한이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어쩌면 우리가 날마다 가슴 깊이 새겨야할 말씀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그럴까요?
첫째,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누구보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코람데오’ 정신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둘째로,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더 옳게 여겼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일종의 ‘선택’의 문제가 아닌, ‘절대성’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절대성의 문제?! 절대성은 말 그대로 비교불가, 상대불가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사람의 말을 듣는 것과 비교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닌, 절대성의 문제란 것이지요.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삶이 과연 어떠한 원리에 의해 지도받는지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삶을 살아갈 때, 과연 우리는 이러한 절대성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한번 돌아보십시오. 혹여나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기보다 평소 사람의 말에 더욱 귀 기울이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선택의 문제이지 절대성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우리에게 선택의 문제가 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절대적인 분이 아닌 것이지요. 차선책 혹은 제2순위, 이런 식으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은 뒷방으로 밀려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우리 삶의 중심에 과연 어떠한 원리가 있는지를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어진 본문 23절 이하에서는 사도들이 이제 옥에서 풀려나 공동체로 돌아가게 됩니다. 돌아가서 동료들에게 지금껏 자신들이 겪은 일들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하죠. 이때 동료들은 이러한 사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어, 한마음으로 소리 높여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 내용이 바로 본문 24~30절입니다. 이 기도는 일종의 공동체 기도입니다. 한 사람이 선창하면, 다른 사람이 합창하는 식으로 공적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이 기도는 마치 구약시대 당시 시편을 연상시키듯 자유자재로 구약의 이미지들을 끌어 옵니다. 예를 들어 기도의 도입부인 본문 24절을 보면 하나님을 일컬어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모두 지으신 대 주재”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대 주재’는 흔치 않은 표현인데, 구약의 표현대로 하자면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절대자이신 여호와를 높일 때, 주로 쓰는 말이지요.
이어진 본문 25~26절은 시편 2편을 인용한 것입니다. 세계 열방이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일어날 것인데, 천지의 주재께서는 이를 보고 비웃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지요. 이것이 정확하게 성취된 사건이 바로 사도행전 4장의 사건이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해하려 했지만, 도리어 결과는 반대가 되었죠.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이처럼 지키시고 보호하신 것입니다. 또한 본문 29절 이하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표적과 기사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복음이 지금보다 더욱더 급진적으로 세계만방에 퍼질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만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우리 역시 이러한 표적이나 기사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일들이 꼭 굳이 없더라도, 우리는 결코 실망해선 안 됩니다. 복음이란 꼭 굳이 이러한 일들이 없더라도, 언제라도 능력 있게 맹위를 떨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말씀을 통해 누누이 접하게 됩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4장을 통해 보았던 사도들의 복음 증거, 이것이 보여줬던 놀라운 능력, 담대함, 이런 것들이 모두 다 표적이나 기사 못지않게 여전히 우리 안에서도 충만하게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이러한 복음의 능력이 동일하게 오늘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하길 위하여 기도하길 원합니다. 복음에는 정말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무너진 삶을 일으켜 세우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는 놀라운 권세가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복음의 능력이 오늘 우리 삶에 가득하여, 오늘도 세상 가운데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설 수 있기를 간구하는 교우들 되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