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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거인
삼등 열차 ⓒ 서해문집
영화 고야의 유령 포스터
고야, 자화상, 카프리초스 연작 중에서, 부식동판화, 1799년 ⓒ 서해문집
프란시스코 드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는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다.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교차하는 시대를 살았던 그는 뛰어난 초상화가이자 풍속화가로서 명성을 드높였다. 고야는 귀족적인 화려함과 민중적인 빈곤함을 모두 경험했다. 그를 단지 궁전에 봉사했던 화가로만 본다면 그의 예술은 다른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천편일률적인 찬사만을 받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동시대를 살았던 힘없는 스페인 민중들의 고통과 절규에 귀 기울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층의 무지와 포악함에 촉각을 세우고 그림으로 표현해 냈다.
고야가 살았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앙시앵 레짐(전제정치)에서 시민 사회로 이전하는 혁명의 시대였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으며 프랑스는 대혁명으로 왕정을 몰아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고야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그해에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그가 궁정화가로 있던 1808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을 침략했다. 그는 참혹한 정복전쟁의 고통을 맛보았다. 고야는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받아들인 진보적인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시민 사회를 추종한 혁명의식을 가진 화가였다.
고야, 양산, 캔버스에 유채, 1777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서해문집
스페인 특유의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고야의 인물화와 풍속화는 궁정에서 그가 그린 어떤 왕자와 공주의 초상화보다 빛나는 것이었다. 고야는 삶의 아름다운 면만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고통스러운 상처에 붓을 댄 화가였다. 특히나 그의 판화는 회화보다 더 깊은 감성을 전달해 준다. 1799년 2월 6일 고야는 마드리드의 일가에서 판화 시리즈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것이 훗날 〈카프리초스(Caprichos)〉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질 그의 판화 시리즈였다. 〈카프리초스〉는 변덕스럽고 괴상한 80개의 연작으로, 인간의 관습과 무지를 비판하는 내용의 판화들로 채워져 있었다. 고야는 사회에 퍼져 있는 부조리한 현상들과 실체들로부터 악몽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형상들과 상황들을 만들어 냈고, 그것을 누구도 구상하지 못했던 그림으로 뱉어 냈다.
〈카프리초스〉의 모든 그림들은 어쩐지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감상이 깊어지면 비애와 반성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그림들이다. 〈카프리초스〉의 그림들은 대부분 인간의 무지와 교만을 꼬집고 있다. 더욱이 그 형상들은 당시의 도상학적 형상언어로는 분석하기 힘든 것이었다. 〈카프리초스〉 가운데 'Ydioma universal(보편적인 바보짓)'은 바로 고야가 본 계몽의 시대였다. 이 그림의 역설적인 상황은 민중의 비이성적인 삶을 비판한 것이었다.
고야, 너도 어쩔 수 없는 너, 카프리초스 연작 중에서
ⓒ 서해문집
고야는 1797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청각을 잃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카프리초스〉는 고야가 귀를 먹은 뒤에 겪은 깊은 사념의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카프리초스〉 작업을 통해 고야는 인간의 무지와 탐욕, 이성의 상실을 짚어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폐해가 바로 낡고 오래된 정치제도, 귀족과 승려로 대변되는 지배층이 민중에게 가한 끝없는 수탈과 억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스페인의 민중들은 플라멩코와 투우를 즐기며 남국의 깊은 흥취에 젖어 산 것이 아니라 억눌리고 가난하게 겨우겨우 살아 나갔다. 미신과 무지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웃나라 프랑스는 스페인과 달리 변혁의 시대를 구가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라는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켰다. 고야는 나폴레옹이 스페인 민중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세운 스페인 왕조(조셉 왕)에서 궁정화가로 봉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에서 자행되었던 점령자 프랑스군의 전횡을 목격했고, 그 경험은 〈전쟁의 참화(Desastres de la Guerra)〉라는 연작 판화를 낳았다. 이 작품은 1810년에 착수하였지만 찍어 내지는 못하고, 훗날 그가 프랑스로 이주했을 때 거기서 한정판으로 찍어 냈다.
고야, 전쟁의 참화, 부식동판, 1863년(1820년대 제작)
ⓒ서해문집
〈전쟁의 참화〉에서 고야는 죄 없이 학살당한 민중들의 모습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표현해 냈다. 때론 이 사실적 표현이 너무나 참혹하고 혐오스러워서 초현실적으로 비춰지기까지 했지만, 그림 속 잔혹함은 현실이었다.
스페인에 고야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민중의 현실적인 삶을 대변한 화가로 오노레 도미에(Honoré Victorin Daumier, 1808~1879)가 있다. 도미에는 미술사에서 들라크루아(Delacroix)와 더불어 천재적인 낭만주의 소묘가이다. 그의 그림은 미켈란젤로나 틴토레토 같은 르네상스 거장들의 힘찬 필치를 연상케 하며, 그의 화풍은 로코코의 뛰어난 화가 프라고나르에 비교되었다.
오노레 도미에, 진흙 캐리커처, CharlesPhilipon, 1832~1833년ⓒ 서해문집
오노레 도미에, 진흙 캐리커처, Guizot, 1832~1833년
ⓒ 서해문집
1816년 처음 파리에 온 도미에는 법정의 사환으로 일했다. 그는 법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직접 체험하였다. 이후 루브르 미술관을 드나들며 고대 조각을 사생하는 등 독학을 하다가 알렉상드르 르누아르의 수업을 듣게 되었다. 신고전주의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그는 르누아르의 수업을 들으면서 루벤스식 바로크 회화에 매료당했다. 1828년 도미에는 석판화(Lithography) 기법을 배웠다. 이것은 그의 대표작을 만들어 낼 주요 수단이 되었다.
열정적인 공화주의자였던 도미에는 정치적인 내용을 판화에 담는다. 그리고 그 덕에 감옥 생활을 하기도 한다. 도미에는 1832년 체포되어 6개월간의 투옥 생활을 한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입법부의 속셈〉, 〈트랭스노냉가의 4월 15일〉 같은 석판화를 연이어 발표하며, 작품을 통해 동시대의 정치적인 음모를 꼬집는다. 여기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은 모략과 기만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정치 권력에 대한 도미에의 비판적인 인식을 보여 준다.
오노레 도미에, 대식가 오노레 도미에의 정치가 캐리커처는 정치가들과 관료들의 비리와 탐욕, 비열함을 해학적으로 보여 주었다.ⓒ 서해문집
그는 또한 사회의 다양한 계급과 신분을 적절한 인상과 형상으로 그려 냈다. 1832년 필립퐁이 창간한 잡지 『라 카리카튀르(La Caricature)』에 발을 디딘 후, 그는 잡지가 폐간될 때까지 계속해서 여기에 그림을 실었다. 첫 삽화는 정치가들의 얼굴을 그린 풍자화였다. 그는 이들의 얼굴을 그리기 전에 먼저 진흙으로 소조를 만들었는데, 여기서 그의 대표적인 석판화들이 탄생하였다. 정치가 캐리커처(풍자인물화)는 정치가들과 관료들의 비리와 탐욕, 비열함을 해학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1835년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이 제정되자 그의 정치풍자화는 중단되었고 곧이어 잡지도 폐간되었다.
도미에에게 판화는 일종의 생계 수단이었다. 『라 카리카튀르』가 폐간된 1835년부터 그는 화가로서 작품을 남기기 시작했으며, 1848년 2월 혁명 후에는 유화 제작에 몰두하였다.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된 〈공화국〉과 뉴욕 현대미술관의 〈망명자〉는 도미에의 대표작들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이었던 공화정을 추구했고, 장 자크 루소의 추종자였던 부친을 이어받아 계몽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정치적 변화에 민감했던 그에게 왕정복고와 공화정의 몰락, 뒤이은 실정과 사회적 혼란은 그림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오노레 도미에, 공화국, 캔버스에 유화, 1848년
ⓒ 서해문집
오노레 도미에, 망명자, 1848~1849년
ⓒ 서해문집
고야가 전쟁과 혼란의 참혹한 실상을 드러내면서도 낭만주의적인 성격의 작품을 했다면, 도미에는 비트는 방법, 즉 우의적인 형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러한 현실을 전달했다. 그의 우의적인 방법은 바로 풍자화이다. 이탈리아어로 '과장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caricare에서 나온 캐리커처는, 바로크 화가 카라치(Caracci) 형제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미술 내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캐리커처는 형상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상의 성격과 인상을 과장해서 기이한 형상으로 왜곡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표현법은 오히려 사실적인 재현에서 자칫 희석될 수도 있는 특징을 잘 드러내 준다. 아울러 감상자에게 일종의 재미와 의미 확인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매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작풍이라고 할 수 있다.
글김정락
독일 프라이브르크대학교 박사학위취득(서양미술사학), 카이스트 강의교수, 서양미술사학회 등 다수의 미술사학회 임원. 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자료출처 미술의 불복종
트랑스노냉 거리의 1834년 4월 15일 Rue Transnonain, April 15, 1834. 오노레 도미에 Honoré Daumier, 1834년, 리소그래피 (lithography) 석판 인쇄, 29 x 44.5 cm, 프랑스 파리 국립 도서관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BnF), Paris, France 소장.
https://m.youtube.com/watch?v=vy9qPLqIugE
오노레 도미에 _ 삼등열차그림 읽어주는 여자 - 홍옥희 영상해설사 (2016년 5월20일 금요일)www.youtube.com
감자 먹는 사람들/고흐, 1885년/ⓒ 서해문집
나는 램프 밑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접시를 드는 것과 같은 그 손으로 대지를 팠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 곧 이 그림은 ‘손과 그 노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정직하게 스스로의 양식을 구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우리들 문명화된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법이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따라서 누구나 다 갑자기 이 그림을 좋아해 주기 바란다든가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 이 그림이야말로 진정한 농민화라는 것을 인정받게 되리라 ··· 나는 귀부인 같은 사람보다도 농민의 딸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먼지투성이이고 누덕누덕 기운 자리투성이인 푸른 치마를 입은 농민의 딸이.
-고흐의 편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