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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4일(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요한계시록 2:12~17
여러분의 진정한 왕은 누구십니까?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본문 접맥적 주제설교 형식
김규태 목사
*설교 주제: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회개를 명령하셨다.
*설교 목적: 우리는 회개하고 왕이신 예수님을 섬겨야 한다.
where?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갑자기 쏟아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건물의 좁은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이미 한 청년이 서 있었습니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할아버지 한 분이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잠시 후에, 중년 아저씨, 아주머니 한 분이 비좁은 틈으로 끼어들었습니다. 작은 처마 밑이 금세 꽉 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뚱뚱한 아주머니 한 분이 이 가련하기 짝이 없는 대열로 덥석 뛰어들었습니다. 그 바람에 맨 먼저 와 있던 청년이 얼떨결에 튕겨 나갔습니다. 모두 딴 곳을 바라보며 모른 척하는데, 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셨습니다. “젊은이, 세상이란 게 다 그런 거라네”
그 청년은 물끄러미 할아버지를 쳐다보더니 길 저쪽을 뛰어갔습니다. 사오 분쯤 지났을까. 그 청년이 비에 젖은 채로 비닐우산 다섯 개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씩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청년이 쥐여 준 우산을 쓰고 총총히 제 갈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 그런 거라네!’라고 말한 할아버지만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계시더니 우산을 바닥에 내려놓고 장대비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조금 다른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지 않을까요?
-출처; 김병삼, 「교회가 이 땅의 소망입니다」(넥서스CROSS, 2010); 「생명의 삶」(두란노, 2011년 7월호), 67쪽에서 재인용.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루이 16세의 아들은 왕을 내몰았던 사람들에 의해 붙잡혀 유배지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지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획을 더 쉽게 달성하기 위해 묘책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것은 젊고 혈기왕성한 그를 온갖 술수로 유혹해서 도덕적으로 파멸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아들이 얼마 가지 못해 불명예와 불신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왕의 아들에게 술, 여자, 도박, 음식, 창녀, 불량배들의 협박과 공갈 등 계속되는 회유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6개월이 지나도록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또렷한 정체성과 강한 신분 의식으로 무장해 왕으로서의 품위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유혹하려는 그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요구하는 것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을 것이오. 당신들이 아무리 나를 회유와 함정으로 넘어뜨리려 할지라도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오. 왜냐하면, 나는 이 나라의 왕으로 태어났기 때문이오.”
그가 세상의 온갖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왕의 정체성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도 세상 속에서 이러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출처; 김상수, 「풀타임 크리스천」(두란노, 2023);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4월호), 289쪽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두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최근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지금의 튀르키예(구, 터키) 서해안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위시해서 시계 방향으로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번째 교회인 버가모 교회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고대의 신전 도시였습니다. 버가모 지역에는 높이가 12m에 이르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이 있었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있었습니다.
또 버가모 지역은 아시아에서 로마 황제 숭배가 가장 많이 이루어지던 지역이었습니다. 주전 29년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신전이 건축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주님께서는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사탄의 권좌’가 있는 도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많은 고난이 뒤따릅니다. 주님께서는 충성 된 증인 안디바가 순교를 당한 일을 언급하셨습니다. 한 자료에 의하면, 안디바는 로마 황제 숭배를 거절하다가 뜨겁게 달궈진 놋쇠 솥 안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생명의 삶」, 두란노, 2024년 11월호, 120).
이처럼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진 고난을 견뎌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what’s problem?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이유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 안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리 사람들을 쳐서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압 왕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이방 선지자였던 발람에게 신하를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발람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모압 여자들이 이스라엘 남자들과 음행하도록 꾀를 내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남자들은 음행과 우상숭배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 버가모 교회의 일부 신자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행음한 일은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일과 같았습니다.
또 버가모 교회의 일부 신자들은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켰습니다. 주께서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셨습니다(2:6). 니골라는 초대 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니골라당은 훗날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어지럽혔습니다.
그들은 성도가 율법에 더는 매일 필요가 없으며, 육신으로 무슨 일을 하든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성도가 방종과 음행과 우상을 숭배하도록 이끌었습니다(「생명의 삶」, 두란노, 2024년 11월호, 116쪽).
버가모 교회에는 두 가지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사탄의 권좌가 있던 버가모 지역은 외부적인 박해가 극심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지역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 중에 일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순교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일부 성도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라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였습니다. 그들은 세속화되었고, 그리스도와 이방 신을 겸하여 섬기는 혼합주의 적인 신앙 양태를 지녔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도 발람의 유혹에 빠져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행음했던 이스라엘 남자들의 모습과 같지는 않습니까? 혹시 우리는 버가모 교회의 일부 신자들처럼,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라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행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연 주께서 이들에게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주께서는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주께서 속히 그들에게 가셔서 그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실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고, 같은 성경을 보고, 같은 목사님의 설교를 듣더라도, 여러분이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는다면 함께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주님께 칭찬을 받을 때, 여러분은 책망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깨어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옆에서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성도를 깨워야 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해안으로 간첩이 침투하는 사건이 종종 있었습니다. 해안에 철조망을 쳐 놓고 보초를 설 때 군견도 함께합니다. 그런데 초병이 졸면 군견도 함께 존다고 합니다. 그러다 순찰대에 들키면 기합으로 끝나지만, 행여 간첩이라도 들어오면 정말 큰일이 납니다.
그런데 간첩이 들어왔을 때 군견이라고 깨어서 초병에게 알리면 병사는 간첩도 잡고 군견 덕분에 1계급 특진도 하는 영광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옛날에는 그런 장한 일을 한 군인에게 헬기 타고 고향에 간다고 표현하지 않았습니까?
개도 깨어있으면 주인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항상 깨어서 내 삶에 침투하는 사탄을 능히 물리친다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출처: 김양재, 「뜨겁게 행하라」(두란노, 2013);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11월호), 213쪽에서 재인용.
what?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모습니다. 과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요? 우리 다 함께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이 구절에서는 과연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소개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은 마치 입에 검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12절에서도, 예수님은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좀 낯설어 보여도, 당시 이 편지를 수신하여 읽었던 버가모 교회 성도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버가모에는 로마 총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좌우에 날 선 검’은 로마 총독이 사용하던 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검은 로마 총독이 죄수에게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냈습니다.
당시 버가모 사람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사형집행권을 위임받은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 총독이 가지고 있던 검을 ‘이소 글라디이(ius gladii)’ 즉, ‘정의의 검’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좌우에 날 선 검’을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먼저 로마 총독의 특별한 권리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과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과연 진정한 심판자가 누구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5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것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 선 검’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4장 12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날 선 검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버가모 사람들은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진 로마 총독이 세상을 심판하는 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을 심판하는 진정한 심판자가 되심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던 충성 된 증인 안디바는 이 진리를 믿었기에,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순교의 제물로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습니다.
what’s then?
과연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기는 그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생을 상징합니다. 그 돌 위에 새겨진 새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세상 사람은 ‘그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돌을 받는 자는 ‘그 이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비밀이 되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튀르키예 카파도키아 지역의 데린쿠유 지하 도시를 방문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나누었습니다.
그곳은 로마의 카타콤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동굴로 이어진 지하 도시 속에 약 5천 명이 살았습니다. 땅 위로는 사람 한 명이 들어갈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 아래로 지하 30m까지 파 내려간 것입니다.
아직까지 완전히 발굴되지 않았고, 바닥까지의 깊이도 측정되지 않았습니다. 개미굴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그 안에 교회와 학교와 심지어 침례탕까지 지어 놓았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세상 밖으로 나와 보지 못한 채 동굴 안에서만 살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믿음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쾌락과 풍요에 물들어 있는 세대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삶입니다. 인생의 목적이나 사명을 모르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입니다. 신앙이란 믿음으로 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소명의 사람은 땅에서 살아도 땅의 것에 매이지 않고 땅의 시간에 갇히지 않습니다. 소명을 따라 살다가 소명을 이루고 떠나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출처: 조정민, 「사후대책」(두란노, 2019); 「생명의 삶」(두란노, 2024년 11월호), 111쪽에서 재인용.
오늘은 교회 절기상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 보면, 오늘이 일 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다음 주일부터 ‘기다림’을 상징하는 대림절 주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력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로 진행되고, 그 마지막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 끝을 맺습니다.
결국, 교회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세상을 심판할 진정한 왕은 누구십니까? 로마 황제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이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진정한 왕은 누구십니까? 그 입에서 나오는 날 선 검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 아니겠습니까?
혹 우리가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했다면, 회개하고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깁시다. 그러면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