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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읽고 맘에 드는 구절 타이핑 해 놓았네요.^^*
미움 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 전경아 옮김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 어쨌거나 시도를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네. 지금의 생활양식을 바꾼다는 것은 그런 거야. 시도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어.
우선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네. 그리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보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아들러는 이를 ‘우월성 추구’라고 했네. … 여기서는 간단히 ‘향상되기를 바라는 것’,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열등감일세. … 아들러는 “우월성 추구도 열등감도 병이 아니라 건강하고 정상적인 노력과 성장을 하기 위한 자극이다”라고 말했네. 열등감도 제대로만 발현하면 노력과 성장의 촉진제가 되는 거지.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콤플렉스’라는 말이 열등감과 같은 말처럼 쓰이고 있지. “나는 홑꺼풀이 콤플렉스예요”라거나 “그 남자는 학벌 콤플렉스가 있어요”라는 식으로 말이야. 이건 완전히 잘못 쓰고 있는 거라네. 원래 콤플렉스란 복잡하게 얽힌 도착(倒錯)적인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 용어로 열등감과 관계가 없네. 예를 들어, 프로이트가 제기한 ‘오이디푸스 콤플레스’만 봐도 동성 부모에 대한 도착적인 대항심이라는 맥락으로 파악되지.
… 아들러도 말했듯이 열등감은 노력과 성장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 … 하지만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가리킨다네. 구체적으로는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라고 하거나 “나는 못생겨서 결혼을 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지.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A라서 B를 할 수 없다”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이미 열등감의 범주를 벗어난 걸세. 그건 열등 콤플렉스지.
마치 자신이 우월한 것처럼 행동하며 ‘거지 우월성’에 빠지는 걸세. … 예를 들어 자신이 권력자와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짐짓 어필하는 걸세. 그를 통해 자신이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지. 경력을 속이거나, 옷이나 장신구 등 브랜드 제품을 과시하는 것도 일종의 권위 부여이자 일부분 우월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지. 어떤 경우든 ‘나’라는 존재가 월하다거나 특별해서 그런 것이 아닐세. ‘나’와 권위를 연결시킴으로써 마치 ‘나’라는 사람이 우월한 것처럼 꾸미는 거지. 즉 거짓 우월성일세.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네. … 인간은 누구나 달라. 그 ‘차이’를 선악이나 우열과 엮으면 안 된다는 걸세. 어떤 차이가 있든 우리는 대등하니까. …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네.
경쟁과 연결된 얘기니까. 기억하게 인간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 경쟁의 무서움이 그걸세. 설사 패자가 되지 않아도, 경쟁에서 계속 이긴다고 할지라도 경쟁 속에서 사는 사람은 마음이 편할 새가 없어.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아. 그리고 패자가 되지 않으려면 늘 이겨야 하지. 남을 믿을 수도 없어.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고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은 그들이 늘 경쟁 속에서 살기 때문이지. 그들에게는 세계가 적으로 넘쳐나는 위험한 장소니까.
자네가 전에 말했지?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가 없다”라고 말이야. 그것은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패배’로 여기기 때문에 축복하지 못한 걸세.
나는 옳다, 즉 상대는 틀렸다. 그렇게 생각한 시점에서 논쟁의 초점은 ‘주장의 타당성’에서 ‘인간관계의 문제’로 옮겨가네. 즉 ‘나는 옳다’는 확신이 ‘이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그러니까 나는 이겨야 한다’며 승패를 다투게 된다네. … 잘못을 인정하는 것, 사과하는 것, 권력투쟁에서 물러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패배는 아니야.
아들러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 양 측면에서 아주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지. … 먼저 행동의 목표로는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이라는 두 가지를, 이러한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로는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갖는 것과 그로부터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는 의식을 갖는 것을 제시했네.
행동의 목표
1. 자립할 것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위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
1.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
2.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가질 것
아들러는 이런 과정에서 생기는 인간관계를 ‘일의 과제’, ‘교우의 과제’, ‘사랑의 과제’라는 세 가지로 나누고 이를 합쳐 ‘인생의 과제’라고 불렀네. …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 살고자 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 그것이 인생의 과제네.
아들러는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태를 가리켜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했어. …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한다. 남 탓으로 돌리고, 환경 탓으로 돌리고, 인생의 과제에서 도망친다.
…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소유의 심리학’이고 결국엔 결정론으로 귀결돼. 반면 아들러 심리학은 ‘사용의 심리학’이고 결정은 자네가 하는 걸세. … 우리 인간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휘청거릴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닐세. 목적론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생활양식을 자신의 손으로 고르는 걸세. 우리에게는 그럴 힘이 있네.
예를 들어 눈앞에 ‘공부한다’라는 과제가 있을 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네. … 공부하는 것은 아이의 과제일세. 거기에 대고 부모가 “공부해”라고 명령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에, 비유하자면 흙투성이 발을 들이미는 행위일세. 그러면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지. 우리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 타인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다. 그것뿐일세.
… 여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네. 아들러 심리학은 방임주의를 권하는 게 아닐세. 방임이란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라네. 그게 아니라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켜보는 것. 공부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이 본인의 과제라는 것을 알리고, 만약 본인이 공부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전하는 걸세. 단 아이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말아야 하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
믿는다는 행위 또한 과제의 분리일세. 알겠나? 상대방을 믿는 것, 이것은 자네의 과제일세. 하지만 자네의 기대와 신뢰를 받은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제인 걸세. 그 선을 긋지 않은 채 자신의 희망만 밀어붙이면 그건 스토커나 다름없지. 그것이야말로 하지 말아야 할 ‘개입’이라네. 비록 상대방이 내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 믿을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아들러가 말하는 ‘사랑의 과제’에는 그런 질문까지 포함되어 있다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단단하게 묶인 매듭을 보자마자 단검을 꺼내 단칼에 끊어버렸네. 그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 “운명이란 전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라고. 나는 전설의 힘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내 손으로 운명을 개척하겠다. 라는 뜻이지. … 사람들에게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으로 알려진 유명한 일화일세.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매듭, 즉 인간관계의 ‘실타래’는 더 이상 기존 방법으로는 풀 수 없네. 완전히 새로운 수단으로 끊어야 하지. 나는 ‘과제의 분리’를 설명할 때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떠올린다네.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것은 내 과제야. ‘나를 싫어하느냐 마느냐’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고.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나는 거기에 개입할 수 없네. 물론 전에도 말했듯이 ‘말을 물가로 데리고 가는’ 노력은 할 걸세. 하지만 거기서 물을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제지. …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인정받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면 인간관계의 카드는 언제나 남이 가질 수밖에 없어. 인생의 카드를 남에게 맡길 것인가, 내가 쥘 것인가의 문제라네.
개인심리학은 영어로 ‘Individual Psychology’라고 하네. 그리고 이 개인을 뜻하는 ‘Individual’의 어원을 살펴보면 ‘분할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네. …아들러는 정신과 신체를 나누어 생각하는 것, 이성과 감정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 등의 모든 이원론적 가치관에 반대했네. … 그렇게 인간을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존재로 파악하고 ‘전체로서의 나’를 생각하는 것을 ‘전체론’이라고 하네.
인간관계는 과제를 분리하는 데서 끝나지 않아. 오히려 과제를 분리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출발점이야. … (청년: 그러면 인간관계의 ‘목표’는 어디에 있습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공동체 감각’이라고 할 수 있지. …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공동체 감각’일세.
… 아들러는 가정이나 학교, 직장,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국가와 인류 등을 포괄한 전체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축, 나아가서는 동식물과 무생물까지도 공동체에 포함된다고 했네. … 다시 말해 ‘공동체’라고 했을 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존의 범위뿐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 그리고 우주 전체를 아우른, 글자 그대로 ‘만물’을 공동체라고 역설한 걸세.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간은 얼핏 타인을 보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밖에 보지 않아.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지. 즉 자기중심적이라네. … 그래서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소속감이 가만히 있어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네. … ‘인생의 과제’에 직면하는 걸세. 즉 일, 교우, 사랑이라는 인간관계의 과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 내 발로 인간관계의 과제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네.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해줄까?’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그것이 공동체에 공헌(commit)하는 길일세. …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일세.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원칙이네. … 만약 자네가 이의를 제기해서 무너질 정도의 관계라면 그런 관계는 없느니만 못하네. 이쪽에서 끊어버리면 그만이지. 관계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은 타인을 위해 사는 부자유스러운 삶이야. … 눈앞의 작은 공동체에 집착하지 말게. 보다 다른 ‘나와 너’, 보다 다양한 ‘사람들’, 보다 큰 공동체는 반드시 존재하네.
칭찬한다는 행위는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지. … 즉 “장하다”, “잘했다”, “훌륭하다”라고 칭찬하는 것은 엄마가 아이를 자기보다 아래로 보고 무의식중에 상하관계를 만들려는 걸세. … 인간이 남을 칭찬할 때 그 목적은 ‘자기보다 능력이 뒤떨어지는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라네. 거기에는 감사하는 마음도, 존경하는 마음도 일체 없지.
…
누군가의 칭찬을 받고 싶다고 바라는 것. 아니면 반대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 이는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 바라본다는 증거일세. 자네가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은 수직관계에 익숙해졌기 때문일세.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하네.
…
과제의 분리에 대해 설명할 때 ‘개입’이라는 말을 쓴다네. 타인의 과제에 불쑥 끼어드는 행위를 뜻하지. 그러면 왜 인간은 개입을 하는 걸까? 그 배경에는 사실상 수직관계가 있지.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보고 개입을 하네. … 그럴 때에는 개입이 아니라 ‘지원’이 필요하네. … 지원이란 과제의 분리와 수평관계를 전제로 하지. 공부는 아이의 과제라는 것을 이해한 상태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거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부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거라네. … 강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과제를 분리한 상태에서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게 지원하는 거야. … 칭찬하지도 야단치지도 않네. 이러한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라고 하지. … 어떤 사람이 과제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야. 능력이 있든 없든 ‘과제에 맞설 용기를 잃은 것’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 아들러의 견해지. … 칭찬받는 것이 목적이 되면 결국은 타인의 가치관에 맞춰 삶을 선택하게 돼. … 먼저 과제를 분리할 것. 그리고 서로가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대등한 수평관계를 맺을 것. ‘용기 부여’란 그 과정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네.
일을 도와준 파트너에게 “고맙다”라고 인사하겠지. 아니면 “기쁘다”, “도움이 됐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전하거나 이것이 수평관계에 근거해서 용기를 부여하는 방법일세. …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것이네. 평가란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말일세. 만약 수평관계를 맺고 있다면 감사나 존경, 기쁨의 인사 같은 더 순수한 말이 나오겠지.
…
칭찬받는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는 걸세. 그리고 그 행위가 좋은지 나쁜지를 결정하는 것은 타인의 기준이고. 칭찬받고 싶다면 타인의 기준에 맞춰 행동할 수밖에 없어. 자신의 자유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네. 반면 ‘고맙다’는 말은 평가가 아니라 보다 순수한 감사의 인사라네. 인간은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되지. …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
마침 공동체 감각에 대해 아들러에게 비슷한 문제제기를 한 사람이 있었지. 그때 아들러의 대답은 이러했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 하든 상관하지 말고.”
아들러 심리학에서 내놓은 답은 간단하네. 일단 다른 사람과, 한 명이라도 좋으니 수평관계를 맺을 것.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걸세.
결국 공동체 감각이 필요하지. 구체적으로는 자기에 대한 집착(self interest)을 타인에 대한 관심(social interest)으로 돌리고, 공동체 감각을 기르는 것. 이에 필요한 것이 ‘자기수용’과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라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거네. … 그대로의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낸다. 그것이 자기수용이야.
다른 사람을 믿을 때 조건을 일절 달지 않는 걸세. 비록 신용할 수 있을 만큼의 객관적 근거가 없더라도 믿는다, 담보가 있든 말든 개의치 않고 무조건 믿는다. 그것이 신뢰라네. … 자네가 배신을 해도 무조건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 무슨 짓을 해도 신뢰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자네는 몇 번이나 배신할 수 있겠나?
신뢰의 반대가 뭔가? … 회의(懷疑)라네. … 자네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 상대방은 바로 알아채지. “이 사람은 나를 신뢰하지 않는구나”라고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네. 거기에서 어떤 발전적인 관계가 만들어지겠나? 우리는 조건 없는 신뢰를 가져야 하네. 그래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지. … 배신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네가 아니야. 그것은 타인의 과제지. 자네는 그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면 되네. “상대가 배신하지 않는다면 나도 주겠다”라는 건 담보나 조건이 달린 신용관계에 불과해. … 조건 없는 신뢰란 인간관계를 잘 맺기 위한, 수평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
…
‘타자신뢰’를 통해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가질 때 인간관계의 즐거움이 늘어나고, 인생의 기쁨 또한 늘어나게 되는 거지.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배신이 타인의 과제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타인을 신뢰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을 걸세. … (배신으로부터 비롯되는 분노와 슬픔은 어쩌라는 겁니까?) 슬플 때는 마음껏 슬퍼하게. 고통이나 슬픔을 피하려고 하니까 운신의 폭이 좁아져서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걸세.
타자공헌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희생이 아니라네. 오히려 아들러는 타인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사람을 보고 ‘사회에 지나치게 적응한 사람’이라며 경종을 울리기도 했지. …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인 셈이지.
남이 내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해보라는 걸세. … 사실 그 순간 짜증을 내면서 설거지를 해봤자 본인도 마음이 불편하고 가족들도 선뜩 다가오지 못할 거야. 반대로 콧노래라도 부름ㄴ서 즐겁게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팔을 걷어붙일지도 몰라. 적어도 돕기 쉬운 분위기는 만들어지겠지. … 다른 사람을 ‘적’으로 간주한 채로 하는 공헌은 어쩌면 위선일지 몰라. 그런데 다른 사람이 ‘친구’라면 어떠한 공헌도 위선이 아니라네.
자네의 공헌이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사람은 자네가 아니라네. 그건 타인의 과제이지 자네가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진짜로 공헌을 했는지 아닌지는 원칙적으로 알 수도 없고. 즉 타인에게 공헌할 때 우리는, 설사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 곧 ‘공헌감’을 가지면 그걸로 족할 걸세. … “행복이란 공헌감이다.” 이게 행복의 정의라네.
왜 ‘특별’해지려고 하는 걸까? 그건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지. … 평범함을 거부하는 것은, 아마도 자네가 ‘평범해지는 것’을 ‘무능해지는 것’과 같다고 착각해서겠지.
선(linear?)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점이 연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분필로 그어진 실선을 확대경으로 보면, 선이라고 여겨진 것이 실은 연속된 작은 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선처럼 보이는 삶은 점의 연속, 다시 말해 인생이란 찰나(순간)의 연속이라네. …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어. 우리의 삶이란 찰나 안에서만 존재한다네. 이걸 알지 못하는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선’의 인생을 강요하지. 좋은 대학, 대기업, 안정된 가정 등 이런 선로를 따라가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면서. 그래도 인생은 선이 아니라네.
자네가 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인생은 ‘키네시스(kinesis)적 인생’이라고 할 수있네. 그에 반해 내가 말하는 춤을 추는 인생은 ‘에네르게이아(energeia)적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인용해보겠네. 일반적인 운동-이를 키네시스라고 하네-에는 시점과 종점이 있네. 그 시점에서부터 종점까지 이르는 운동은 가능한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달성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급행열차를 탈 수 있다면 일부러 역마다 정차하는 보통열차를 탈 필요가 없는 것처럼. …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여정은 불완전하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말이야. 그것이 키네시스적 인생일세. … 반면 에네르게이아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가 된 운동을 가리키네. … 달리 말하면,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이라고 할까. 춤을 추는 것이나 여행처럼 말이야. … 집에서 나온 순간, 그 자체가 이미 ‘여행’이네.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순간이 ‘여행’이야. 물론 어떤 사정이 생겨 피라미드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여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네. 그것이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이야. … 등산의 목적이 ‘정상에 오르는 것’에 있다면 그것은 키네시스적 행위라고 할 수 있지. … 물론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경우 그 등산은 실패고. 하지만 목적이 산 정상이 아니라 등산하는 그 자체라면 에네르게이아적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산 정상에 올랐는지는 관계없다네.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 과거와 미래가 보이겠지. 아니,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 하지만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되네.
먼 장래에 이룰 목표를 설정하고 지금은 그 준비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걸 하고 싶은데 아직 때가 아니니 그때가 되면 하자’라고 생각한다. 이런 건 인생을 뒤로 미루는 삶의 방식이네. 인생을 뒤로 미루는 한 우리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단색으로 칠해진(monochrome) 따분한 나날만 보내게 될 걸세. ‘지금, 여기’는 준비 기간이고 참는 시기라고 여기고 있으니까.
인생 최대의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라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지금 여기 그리고 어렴풋이 보이는 희미한 미래 조금.
자네는 헤매고 있네. 왜 헤매는 것일까? 그건 자네가 ‘자유’를 택하고자 하기 때문일세. 즉 타인에게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타인의 인생을 살지 않는, 자기만의 길을. /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파우스트 中
미움 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hwp
첫댓글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네. … 인간은 누구나 달라. 그 ‘차이’를 선악이나 우열과 엮으면 안 된다는 걸세. 어떤 차이가 있든 우리는 대등하니까. …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네.'
어떤 차이가 있든 우리는 대등하니까....좋은 말이네요. 수직관계에서 수평관계로 가야하는 근거가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