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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경제전 강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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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부터 1개월 간을 경제전 강조 기간으로 정하고 종합적인 국민운동을 일으키기로 되었다.
현대전의 특징이 경제전에 있고 이 경제전을 수행함에는 물자 동원이 철저하여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상식론이다. 그러므로 지나사변 발발 이래 벌써 3년 간의 전쟁 상태를 지속해온 오늘에 있어서경제전의 취의를 다시 늘어 놓을 것이 없다. 또 우리는 그 동안에 있어서 경제전 주간 혹은 정신운동 주간 등 여러 이름 밑에서 전시에 있어서의 적절한 운동을 많이 실시하여 왔다. 그러므로 이번 경제전강조 기간에 있어서도 무슨 행사를 어떻게 실시할까 하는 것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실행에 옮겨서 좀 더 성과를 나타내자 하는 것뿐이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데 항상 사람의 약점이 있거니와 알고서 또 행할 것을 선포해 놓고서 실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사람된 자의 큰 수치가 안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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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나간 무슨 주간이 있을 때마다 백 가지를 떠들기 전에 한 가지라도 기어이 실행하지는 것을 역설해왔는데 지내 놓고 보면 매양 실천에 유감된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이번 운동에 한해서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또는 그 무엇임을 불문하고 다 같이 한번 실행해보자는데 최대 목표
를 두고서 새삼스러운 실행 사항 몇 가지를 되풀이 하고자 한다. 이미 주지된 바와 같이 이번 경제전 강조 운동에 있어서는 물자 절약, 물자 활용, ☐미 절약, 생활 쇄신, 저축장려 등에 주력하게 되었다.
물론 이제 새로 필요를 느끼는 일이 하나도 없으며 더구나 어느 것이고 조금도 등한히 할 문제가 아니고 또 이때까지 일상생활에 실천화를 부르짖어오던 것들이다. 다시 그것을 열거해가면서 일반의 주의와 협력을 기다리는 것은 그래도 실행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천언만구(千言萬句)가 실행 두 자로 요약된다는 것을 거듭 지적해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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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실행에 ☐☐가 있는 원유(原由)는 무엇일까? 그것은 절대가 알고도 실행하지 않는 한 가지 타성에 있다 하겠지마는 첫째로 강조운동 그 자체가 다소 형식에 지친 공식방법에 기울어지고 마는 경향이 없지 않을 것을 볼 수 있다.
환언하면 어떤 행사를 주재(主宰)하는 측에서도 그저 공식적 행사에 대해 성랑(聲浪)71)만 높이고 또 협조하여야 할 사람들은 그 때 그 때의 체면을 ☐☐하고 마는 풍조가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실례를 든다면 한 때 한 일은 실행했으되 시간과 경우를 바꿔서 실행이 연장되지 않기 때문에 모처럼의 실행이 헛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실행할 여유가 있는 층에서 실행이 적다는 것이다.
즉 물자를 절약할 여유가 있다는 사람이 절약을 하지 않고 물자를 좀
71) 세평(世評), 음파(音波).
더 더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활용하지 않으며 ☐미 절약, 생활 쇄신, 저축 여행(勵行) 그 어느 것에 있어서고 동일한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이번 기간에는 이 실행하여야 할 사람들에 절대 실행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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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자를 절약하고 생활을 쇄신함에는 얼마든지 강력성이 있는 만치 실행할 여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할 수는 없으되 비교적 부유한 계단과 지식을 가진 층계의 사람들이 많이 경제전 강조 운동에 참가하도록 적극적으로 종용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대다수의 세민들은 실행해야 할 행사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실력이 참으로 실행할 수 없는 경우가 없지 않다.
예를 ☐미 절약에 몬다면 조선의 세농(細農)들은 잡곡 소비 등으로 평시에 있어서 ☐미 절약을 부득이 하게 된다.
그러나 실행할 수 없는 사람은 도리어 실행하되 실행해야 할 사람이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다지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이때까지 모두가 경제전에 참가해야 금일의 혁혁한 전과를 얻고 있는 것도 잘 아는 것이나 이상 언급한 바와 같이 아직도 실행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실행을 보여사변의 목적 달성에 나아가기를 다시 환기해 둔다.
<출전 : 「經濟戰强調運動」, '東亞日報', 1939년 12월 2일>
17) 부녀자의 노무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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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자의 산업 동원은 반드시 근대 초유의 현상이 아니다. 경제적 주권자가 남성이 아니고 여성이었던 상고의 모계시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농업 중심인 봉건시대에 와서도 남경여☐(男耕女☐)이 비록 분업적 형식은 적격했을지언정 부녀자가 산업권내에 제외된 것이 아니라 당당히 일과(一科)를 담당했던 것이다.
물론 소수 부귀층의 부녀에 한해서는 예절이란 질곡을 쓰고 대☐☐☐으로 일생을 규각의☐중에서 보냈으니 이를 가리켜 상업상 무능력자라 하면 동서의 역사를 통하여 누가 부정할 것인가.
그러나 이는 어찌 여성에만 편☐할 바이랴. 특권의 전당에 앉아서 농노의 노작을 성과로 향수한 남성 그들은 과연 산업상 정당한 능력자였던가. 이런 부류는 비단 봉건시대에 뿐만 아니라 산업 만능의 현대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 이상의 정도를 얼마라도 지휘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과거 혹은 구식의 여성을 무조건하고 산업상의 무능력자라 하는 것은 시정치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인식적 착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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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조선에 있어서 각종 산업 부문이 기형적이나마 발달해온 도중에서 노동력을 유일한 밑천으로 한 농촌 남녀를 남경여☐의 종래 세계로부터 현대적 산업 동원에로 소집치 아니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남성뿐 아니라 여성까지라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서 공장으로 이동한 숫자가 또한 적지 않다.더구나 근래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노무동원계획의 수행을 위하여 조선인 노동력은 여력이 없을 뿐더러 도리어 부족한 감이 적지 않은 만큼 급격히 수요되고 있는 바이다. 실례를 들면 당국이 금년 중에만 각기 도외(道外)로 알선 이주시켜야할 노동자가 8만 여명이며 또 일본 내로 도항(渡航)시켜야 할 노무자가 상당히 다수리라 한다. 현재 농번기를 앞둠에도 불구하고 내외 도시, 광산 등 대규모적 공작으로 부터 노동력의 공급지인 농촌인구에 대한 수요가 이러하므로 총독부에서는 이 노무동원에 관한 여러가지 당면 문제를 협조키 위하여 수일 전 사회과장회의를 열었는데 이 석상에서 내무국은 노동력 동원
의 특별조치로서 각 노동장에 여자를 대신 동원시킬 것을 지시했다 한다. 그런데 여자를 동원하자면무엇보다도 일정한 노무 시간에는 그들 자녀를 대리 간호하는 기관의 설치가 선결적 문제이다.
이 대책으로서 농촌마다 탁아소(托兒所)를 설치하고 적어도 농번기에 있어서는 유아를 탁아소에 맡겨 공동간호하는 동시에 그 어머니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노동에 종사할 수 있게 하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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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로 여자가 가간사(家間事)만을 맡고 옥외 활동은 남자에게 일임한 것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중 유아 양육이 중요한 조건이었다.
만일 탁아소의 설비가 예상과 같이 되면 부녀의 옥외노동이 훨씬 자유로울 뿐 따라 능률이 물론 증진될 것이며 또는 유아의 양육에 있어서도 그 성적이 훨씬 양호할 것이다.
빈한하고 바쁜 농가 여자가 적신(赤身)72)의 유아를 등에 업거나 품에 안거나 하며 노무에 종사한다는 것은 노무에 방해될 뿐 아니라 양육에도 여간 불리한 것이 아니다. 탁아제는 이 양자를 동시 구제하는 사회적 사업이다.
선진사회에서는 이 제도를 아동 보호와 농촌 건설에 대한 중요한 것으로 하여 착착 진행하고 있는 바이다.
현재 빈궁한 조선 농촌에서 만일 당국의 예정과 같이 부녀의 노력(勞力)을 전부 자유롭게 옥외 활동할 수 있게 된다면 이 비상시의 노무계획을 위하여 또는 어린국민의 보건을 위하여 최대 ☐☐할 바가 아닌가.
그러나 이것을 실시하려면 시설의 처음에 있어서는 설립 및 그 유지비는 일종의 공영사업으로서 국고가 전부 부담하며 동시에 제반 설비를 충분히 하여 모성으로 하여금 불만이 없이 안심하고 영아를 임탁(任託)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만 제도의 유명무실의 통☐을 극복할 것이다. 하루 바삐 실시되기를 기대(企待)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
<출전 : 「婦女의 勞務動員」, '東亞日報', 1940년 6월 1일>
18) 지나사변 3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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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로써 의의 깊은 사변 제3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마침 황기 2600년의 광휘 있는 식년(式年)을
72) 알몸. 맨몸.
맞이하여 국민된 자의 감개(感慨)는 실로 무량한 바 있는 것이다. 회고하면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야반의 총격을 발단으로 한 금차 ☐전도 연전연승, 이에 4년 황군공☐군의 예봉은 ☐일의 중경(重慶) 항일군에 더욱 최후적 타격을 주고 있다.
원래 금차 사변은 북지 제29군의 폭려(暴戾)한 배일 행위에 대한 자위권의 부득이한 발동으로 당초에는 어디까지든지 불확대주의를 견지하였으나 전 지나에 걸친 배일항일의 대세로 말미암아 황사(皇師)는 드디어 전면적 ☐☐의 ☐☐를 들게 되었으니 이것이 소위 침략적전쟁과 그 질을 달리함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개전 직후 8개월에 이미 북지 전역을 거의 점령하고 다시 5개월에 적(敵) 수도 남경(南京)의 역사적 공략에 성공하고 ☐☐하여 크게는 전사(戰史)
불멸의 서주, 무한, ☐☐, 남경, ☐☐의 각 공략☐을 감행하였으나 방금 지나 400여 주는 완전히 황위(皇威) 하에 ☐☐되고 있다. 이 원래 어능위(御稜威)의 의연함이시나 또 출전 장병의 진충보국(盡忠報國)의 대정신에 의한 결과라고 생각할 때 군에 대한 ☐☐의 염을 일층 깊이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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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는 바와 같이 ☐☐은 왕정위(汪精衛) 씨 중심의 남경 신국민정부 성립을 계기로 하여 종합적인 건설적 단계에 들어갔다. 지난 3월 30일 화평건국의 대이상 하에 그 역사적 산성을 올린 정통 정부는 그 뒤 4월 26일 빛나는 남경 ☐도☐축 식전을 거행하고 일로(一路) 일중 양국의 호조(互助) 연쇄적 유대강화를 목표로 그 정치적 방향을 준비 추진하여 왔다.
그리하여 재작년 5일부터는 동아 신질서 건설의 역사적 일중 국교조정교섭이 드디어 남경에서 우리 아베 특명전권대사 및 ☐☐과 국민정부 대리주석 왕정위 씨 이하 행정원, 수뇌부 간에 정식 개시되었으니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의 삼원칙이 구체화되어 동아 100년의 대계(大計)가 확립될 날도 머지않은 목전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로써 곧 사변의 전도(前途)를 낙관☐함은 절대 금물이니 항일의 미몽에서 깨지 못한 장(蔣) 정권은 아직도 집요한 책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또 그뿐만 아니라 동아 전국(全局)의 형세와 이를 위요한 국제적 동향을 통찰하면 의연히 타개할 난관은 오히려 금후에 가로놓여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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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대전과의 연관에서 극동 문제의 핵심은 벌써 제국의 뚜렷한 세계 정책으로 표시되지 않을 수 없다.
사변의 외연(外延)이 그 당초부터 극동전역을 전연 ☐☐하였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니 단적으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문제로 나타나는 전란, 구주의 파문은 아마 사변의 방향과 직접적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원래 금차 사변은 지나를 무대로 한 열강의 각축으로 공산 및 민주주의에 대한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거니와 영국·프랑스의 압력은 최근 점차 변색되고 있음이 사실이나 그 대변대행자인 미국의 태도는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한편 소련은 동란에 대하여 표면 불개입 태도를 사칭하고 있으나 항일적성(抗日敵性)을 발휘하며 장 정권을 사주하여 제국의 대소전력 소모와 지나의 피폐에 의한 적화(赤化) 촉진을 기도하고 있으니 핍간에 처하여 극동의 자주원칙 실현 즉 동아신질서 건설 운동의 전도가 얼마나 용이치 않은가는 상상키에 어렵지 않은 바이다.
사변의 외연을 이렇게 생각할 때 사변 제3주년을 맞이한 국민의 각오는 어디까지든지 군관민일체, 황국의 대이상 하에 과 감히 용왕 매진치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출전 : 「事變第三周年」, '東亞日報', 1940년 7월 7일>
4. '내선일체'의 발간 취지
1) 창간사
내선일체실천사장 박남규(朴南圭)
빛나는 기원 2,600년의 원단(元旦)을 맞이하여 본 지가 초성 높이 태어난 것은 진심으로 의의 있는 것이라 믿는다.
성전(聖戰)은 어느덧 4년, 혁혁한 황군의 위무(威武)는 바야흐로 내외에 현양(顯揚)되고, 더구나 총후의 굳건함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여유작작한 모습을 보이면서 흥아(興亞) 완수의 대 사명을 향해, 보무(步武) 당당한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전쟁이 지연되면 일본은 비명을 올릴 거라 믿고 있었던 외국인은,새삼스러운 것처럼 일본의 정체모를 실력을 똑똑히 보게 되어 경탄의 소리를 발하고 있다. 고성낙일(孤城落日)의 장(蔣)정권의 궤멸(潰滅)도 멀지는 않다.
이건 완전히 ‘천황폐하’의 능위와 황조천조대신(皇祖天照大神)의 신덕에 의한 것이라 절을 드리며 감사 합장을 금할 수 없다.
우리 반도는 성전 이후 병참기지로서 고금 미증유의 국민적 정열을 발휘하여, 혈루로써 감격의 도를 더하고 있는 것은 실로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각을 깊이 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빛나는 기원 2,600년의 벽두부터 ‘내지’ 식 씨제(氏制)로 이성양자제도(異姓養子制度)가 실시된 것은 반도 통치사상 획기적 치적(治績)이고, 실로 내선일체의 완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에 우리들 동포는 일억일심, 건국이념인 팔굉일우의 구현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불초 여기에 느끼는 바 있어, 내선일체 실천사를 창설하여 기관지 '내선일체'를 발행하는 까닭도 총독의 뜻을 명심하여 내선일체의 결실을 구현하기 위해서이다. 내선일체의 구현은 동아신질서를 신속하게 하는 첨병(尖兵)이라고 믿는다.
흥아성업의 건설을 이루는 날이야말로 일본이 명실공히 대아세아의 맹주로서 세계만국으로부터 앙모되어야 할 때인 지금은, 구주(歐洲)에 전운(戰雲)이 넘치고, 우리 제국은 국제적으로 중요성을 더하는것을 감안하여, ‘내선’ 완전 일체가 되어, 실로 황국신민으로서의 진가를 발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황기 2,600년의 신춘을 맞이하기에 즈음해서, 경건하게 황실의 번영과 국운의 번창을 빔과 동시에, 조금 소감을 서술하여 여러분의 청감(淸鑒)73)을 바란다. 바라건대 협찬지원과 격려편달을
73) 자기 작품에 대한 남의 감식을 청할 때 쓰는 말.
아끼셔서는 안 된다.
<출전 : 朴南圭, 「創刊のことば」, '內鮮一體' 창간호, 1940년 1월 1일, 1쪽>
2) 내선일체실천사 창립취지서
바야흐로 우리나라는 고금 미증유의 역사적 전환기란 좋은 때를 만나 국가 내외의 제 정세는 실로 용이하지 않고, 일본 국민인 바의 사명 또한 점점 무게를 더해가고 있다. 이러한 비상 난국에 임해서는 실로 거국일체, 국가의 총력을 받들어 그 조치에 만전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근대의 국방은 단지 제일선만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와 병행하여 국가국방의 총국력에 의해 온전함을 얻게 됨으로써 국가의 모든 부문을 조정, 동원하여, 어떻게 질서 바르게 총국력을 운용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와 같이 거국일체라든가 국가의 총력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그것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신적 결합을 말하는 것으로써, 국민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정신적 거국일체가 될지 아닐지는 즉시 거국일체의 강약과 국가 총력의 고저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처음부터 국가의 흥륭발전은, 첫째로 그 국민의 정신적 결합과 국가가 의도하는 곳을 향하여 활동하는 것에 기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특히 조선에 있어서는 정신적 국민의 결합 즉 ‘내선일체’로써 거국일체하여 국가 총력을 받들어 국가 백년대계에 따라야 된다. 그러한바 최근 무수한 기관을 통해 각종 형식과 방법으로써 ‘내선일체’의 결실을 올리려고 함도, 자칫하면 시국 하에서의 일시적 표어, 또는 정치적 지표가 되는 듯한 형식과 방법으로 해석될 수많은 결여가 있는 것 같이 미루어 짐작된 것이다.
이로써 본사는 내선 쌍방의 물심을 실천적으로 결합시키고, 그럼으로써 진실된 ‘내선일체’를 구현하고, 충실 강화된 정신적 국민의 결합 즉 거국일체를 철저적으로 기할만한 국민운동을 기도할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그 방법으로써 '내선일체'인 월간 소책자를 세상에 내보내 ‘내선일체’의 실천화를 창도(唱導)하고, 아울러 내선 결혼 촉진을 도모하는 것 외에, 강연회, 좌담회, 전람회, 영화회 등으로 이 선전알선을 행하고, 본사가 기도하는 바에 매진하려고 한다.
이것이 일본정신을 생기있게 하는 요소가 되어 우리나라의 무거운 사명을 완수하는 것은 물론, 명실공히 대 아세아의 맹주, 세계의 지표가 되어 거기에 비로소 빛나는 동양 영원의 평화, 나아가서는 세계의 평화가 초래될 것을 단언해 의심치 않는 바이다. 바라건대 세상의 제현(諸賢)이여! 본사의 사명이 무겁고 또한 큰 것을 양해하시어 진지한 지도 편달해 주실 것을 감히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출전 : 「內鮮一體實踐社創立趣旨書」, '內鮮一體' 창간호, 1940년 1월 1일, 19쪽>
3) 속간에 대하여
내선일체실천사장 대조실신(大朝實臣)74)
본지는 5월호로써 휴간하고, 오늘 이에 재간되는 단계가 된 것은 더할 나위없는 기쁨이다.
독자 제현도 또한 기뻐해 주실 거라고 생각한다. 본지가 휴간되면 안 될 처지에 빠진 경위를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본지는 올해 정월부터 시작해서 창간되었기 때문에 용지의 배급실적이 없어서 용지입수가 난관이었다.
따라서 자연히 암시세를 지불하지 않으면 입수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본사로서는 국적(國賊)적 행위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휴간하여 정상적인 종이의 배급을 갖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고 휴간을 단행하는 부득이한 사정에 조우한 것이다. 그 후 용지배급도 지지부진하게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고, 게다가 본사는 풍부한 자금을 지닌 사업이 아니라 최소한도의 자금으로써 경영해온 바 휴간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난관에 처해 쓸데없는 경비를 지출하였기 때문에 마치 탄환이 다 떨어지고 화살이 부러진 상태가 되었다.
이와 같은 고경(苦境)에 처해서 언제 속간이 가능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사선(死線)을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업은 열과 성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고 또한 돈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자칫하면 본사의 사업이 시국의 물결에 편승하여 영리적, 이기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조금씩 색안경을 통해 보는 경향도 있다.
이렇게 보여 지는 것도 과거의 선배들이 해온 흔적이 그렇게 시키는 것도 다분히 있다고 여겨진다. 결코 세상의 이 색안경을 냉정하다고 원망할 수 있을까?
그러나 본사는 창업 이후 조금도 세상에 해독은 흘려보내고 있지 않은 것을 단언해둠과 동시에 금후도 성실하게 본 사업을 문자 그대로 헌신적으로 수행하고 싶은 굳은 신념을 갖고 있다.
그래야 비로소 세상도 바르게 인식하여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행히 주위의 사람들이 물심양면으로 응원해주시게 된 것도 우리들의 적성(赤誠)을 인정해주신 증거의 일단이라고 생각하여 무척 감사하는 바이다.
본 사업 수행이 불가능해진 경우, 우리들은 제일선으로 달려가 참가하여 봉공 드리고 싶다는 각오를 여기에 약속드리고 싶다. 간단한 기분으로 본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의 제현은 하루라도 빨리 인식해 주셨으면 한다. 아니 인식이 없더라도 우리들의 힘으로 계속할 수 있을만큼 계속할 생각이다. 일개의 잡지가게로 끝낼 생각은 결코 없다. “굶어 죽는다고 해도 매는 이삭을 뜯지 않는다”라는 데, 성스런 이 사업을 절대 희생물로 삼지 않을 각오다.
국가 내외의 정세를 보라, 세계는 우주가 시작된 이래의 최대의 혼란시대를 전개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제국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들 국민은 어떠한 각오가 필요할까 말할 필요도 없이 국방국가의 완벽을 기해서야말로 비로소 제국의 국시(國是)인 팔굉일우의 정신을 안팎으로 선양할 수 있는 이치다.
국내에서는 신체제의 대혁신기이다. 내선일체의 현현(顯現)은 신체제운동으로의 박차가 되어야 한다.
건성으로만의 내선일체는 그만큼 어리석음의 최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건성으로만의 내선일체는 오히려 간판을 내리는 것과 같다.
우리 회사는 제창한다! ‘내선’ 쌍방이 결혼할 수 있을 정도의 쌍방의 장벽을 하루라도 빨리 제거해야
74) 박남규(朴南圭)의 창씨명.
한다.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언어, 풍습습관, 예의, 예의범절) 등에 장벽 부분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한 시라도 빨리 제거하여 ‘내선’의 구별이 가지 않게 되도록 만드는 방법수단을 발견해내야 한다.
물론 정치력으로써 행하는 것은 가장 강력하지만, 그러나 문화운동 없이는 만전을 기할 수 없을 것이다.
민간으로 혈아(血兒)가 모여 이 운동을 능동적으로 해야만 대중도 보다 흥미를 갖고, 이 운동에 참가할 거라는 것은 여러 말이 필요 없다.
이 운동은 일시적 정치표어로 끝나서는 안 된다.
몇 백 년 걸려서라도 달성해야 된다.
본사 사업 중의 주된 내선 결혼이 번성하게 되도록 되면 우리 회사의 운동도 거지반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라건대, 세상의 제현이여, 우리들의 운동을 바르게 봄으로써 응분의 원조를 주실 것을 또한 우리 회사는 본 운동을 방해하는 자는 비국민이라고 절규할 것이다.
하는 일 없이 올해를 보내는 것을 양심적으로 가책을 느낌과 동시에 신년에 들어가서는, 바로 한 발자국 전진해서 사업수행에 노력하고 싶다고 각오하고 있다. 오래도록 지켜보고 후원해주실 것을 간절히 희망하며 부탁드려마지 않는 바이다.
<출전 : 大朝實臣, 「續刊に就て」, '內鮮一體' 제1권 5호, 1940년 12월 1일, 67쪽>
5. '조광'의 선전 취지
1) 지나사변 3주년(권두언)
1937년 7월 7일 노구교(蘆溝橋) 상의 일발 총성은 동양 영원의 평화를 울리는 효종(曉鐘)의 프롤로그였다.
이제 세월은 잠깐이어서 금년 7월 7일로써 사변 3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이때에 있어서 먼저 우리는 이 성전으로 희생된 황군 장병의 영령을 위해 명복을 기리 기원하거니와 이 전야의 들꽃으로 핀 황군장병과 아울러 제일선 장병의 공이 있어 이미 사변은 일단락을 고하게 되어 지난 3월 30일 국민정부는 환도(還都)되고 다시 4월 26일 전 지나 4억 민과 같이 신정부 환도 경축 식전은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의기양양 신지나정부는 그의 환도를 중외(中外)에 크게 성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경 한 귀퉁이에 아직도 그 잔영을 지키고 있는 장개석(蔣介石)은 지금껏 미몽에서 깨지 못하고 다만 항전일로(抗戰一路)로 나아가고 있으니 이는 결국 항전을 위한 항전에 불과한 것이오, 무슨 승산이 있거나 또 항전할 이론적 근거가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긴다. 싸워라.’라는 우매한 인민을 선동한 그 언질에 얽매여 싸우는 것이니 청천백일만지홍(靑天白日滿地紅)의 반공화평국기(反共和平國旗)가 지나의 전 강토(疆土)에 높이 날리고 있는 오늘 이무슨 미몽일 것인가?
더구나 지나사변75)의 무대 뒤에서 장개석의 조종사(繰縱士) 노릇을 하던 영국, 프랑스, 소련의 마수가 저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그 여력을 발휘하게 못 된 지금에 있어서는 장개석의 비운, 쇠망의 길이 날로 깊어 가고 있으니 어찌 항전일로로 매진하는 것이 악몽에서 헤매는 것이 아닐까?
지금 유럽은 나치스 독일의 전승의 기폭(旗幅) 하에 일몰을 모르는 나라로 자랑하던 노회(老獪)한 영국까지 무찔러 그 위급(危急)이 목첩간(目捷間)에 닥쳤으니 세계의 역사는 다시 지어질 날이 멀지 않았거니와 1894~1895년의 일청전쟁과 1904~1905년의 일러전쟁에서 승전한 패기가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 있어서는 만주건국, 지나사변으로 인한 신동아 질서의 건설로써 우리 일본은 완전히 동양의 맹주가 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강직한 일본정신의 발로일 것이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통(皇統)을 이으신 세계 무비(無比)의 깨끗하신 역사를 가진 우리 일본 황실의 번영이 이처럼 날로 점앙(漸昻)하는 것은 위로 성명(聖明)하신 천황 폐하를 모시고 아래로 국민이 일치단결 국운의 번영을 꾀한 때문일 것이다.
이제 신국민정부가 그 새로운 기폭을 중외에 날리는 이때에 있어서 우리 총후국민은 더욱 노력하여 이 성전의 성과가 완수되기까지 은인자중 멸사봉공의 희생적 정신으로 나아가야 하 것이다.
신정부의 건실한 보조는 나아가 동양평화의 길에 크게 공헌할 바 많으므로 우리는 더욱 이를 지지하기에 총 역량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
사변이 끝났다고 낙관할 것이 아니다. 이 뒤에 오는 건설에 더 한층 총력을 모아야 할 것이니 부질없이 전승의 기분으로 여광여취할 것이 아니다. 이 시국을 정시(正視) 자중하여 동양영원의 평화가 올 때 까지 백절불요 일로매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제 지나사변 3주년을 맞이하여 우리의 소회(所懷)의 일단(一端)을 서술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출전 : 「支那事變三週年(卷頭言)」, '朝光' 제6권 7호, 1940년 7월 1일, 20~21쪽, 322쪽>
2) 시정 30주년을 맞음
광고무비(曠古無比)76)의 시국하 광휘있는 황기 2600년과 함께 금 10월 1일로서 시정 3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였다.
회고하건대 지금부터 만 20년 전 동아의 정국은 실로 난마와 같이 흩어져 구한국의 운명이 위급(危急) 존망지추(存亡之秋)에 당하였던 1910년 8월 22일 ‘일한’ 양국은 드디어 양국의 행복과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양국 ‘병합’의 조약을 체결하고 그 달 29일부터 이것을 공포 실시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 및 그 소속관공서의 관제는 제정 발포 실시하였는데 제1대 총독으로는 전 통감(統監)이요, 당시 육군대신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겸무(兼務)로 취임하였다.
데라우치 총독은 조선 통치의 대본(大本)을 정하여 창업의 토대를 쌓은 위대한 공적을 남겼거니와 이래 만20년 간 현 미나미(南) 총독에 이르기까지 7대 총독을 맞이하였는데 각각 그 시대 그 시대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혹은 제도 개혁에 혹은 치안 확립에 혹은 경제 기구와 산업 시책에 혹은 교육 시책에
75) 중일전쟁을 뜻함.
76) 광고(曠古) : 전례가 없음. 만고에 없음. 미증유.
주력하는 등 모두 특색 있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 결과는 오늘날과 같은 문화조선건설을 결실시켰다.
이제 유럽 정국을 살펴보매 유형무형의 상태에 있어 그 근저에는 심각한 민족 문제가 대립된 채 숨어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내선(內鮮) 간에 있어서는 그 통치의 근본정신이 본래부터 서양류(西洋流)의 식민지 정책과 그 범주를 달리하고 있는 것인데 특히 미나미 총독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의 강화는 이 원리를 완전히 구현시켜서 민족 융합의 이상적 경지로 매진하고 있다.
모두 어능위(御稜威)의 소치이거니와 이것은 또한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건국정신의 발로이며 그 표현이다.
생각건대 제국은 현하 전고미문의 대역사적 전변기에 당면하고 있다. 동아의 신질서 건설은 곧 제국의 백년대계인 동시에 전 동아의 백년대책이요, 또 그 공존공영의 최선책이다.
그러나 완미한 장(張)정권77)은 사변 4주년인 금일에 이르러도 오히려 그 비(非)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모든 장애물을 완전히 격파하고 동아 백년의 대계를 수립시키기 위하여는 국내체제의 정비가 당면의 급선무이다. 그런데 국내체제 정비의 안목은 결국 이 전변기에 처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일억일심(一億一心)으로써 이 역사적 사명을 다하게 하려는 것이요, 또 국민으로 하여금 역사적 사명을 다하게 하는 길은 오직 만민익찬(萬民翼贊)의 결실을 거둘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노에(近衛) 수상은 신체제운동의 출발에 즈음하여 이 정신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러나 국내 국외를 살펴보매 신질서 건설 문제이나 그 기초 공작이요 동시에 제국의 백년대계인 국내체제 정비 문제임을 막론하고 이것을 완전히 실현시킴에는 실로 다대한 노력을 요할 것으로서 국민은 일사재생(一死再生)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될것이다.
이리하여 시국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중대해지고 또 이에 따라 국민의 이 사태에 대한 인식과 각오와 결의를 요구함이 더욱 절절한 바 있다. 난국이요 또 중대시기인 이때에 처하여 2천3백만의 반도민중은 한결같이 내선일체의 결실을 거둠으로써 황국 신민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의의 깊은 시정 30주년을 맞이하여 각각 자기의 시국 인식을 반성하고 시국의 장래를 투찰하여 일층 각오를 굳게 하고 또 일단(一段)의 노력을 더하여 그 영예를 선양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출전 : 「施政三十周年을 맞음(社說)」, '朝光' 제6권 10호, 1940년 10월 1일, 20~21쪽>
3) 방응모, 조광사 혁신의 사
사장 방응모(方應謨)
나는 미력이나마 '조선일보(朝鮮日報)' 경영에는 전 성력을 다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독자 제씨(諸氏)도 또한 조선일보에 대하여는 각별한 관심과 편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조선일보로 하여금 드디어 조선 신문계의 최고위(最高位)를 차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여러분의 커다란 촉망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8월 10일로써 마침내 최종호를 내고 말았습니다. 이때 나는 심사숙고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광사(朝光社)를 따로 남겨 '조광(朝光)', '여성(女性)', '소년(少年)'의 세 잡지
77) 장개석 국민정부를 뜻함.
발행과 도서출판사업을 존속키로 결의하였습니다. 존속시킬 뿐 아니라 이것을 기회로 하여 내용 쇄신과 기구의 대확장을 단행하였습니다.
첫째 종래로 본지는 원고 검열제이던 것을 이번에는 「신문지법」에 의하여 발행하도록 수속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인가되면 여러 가지 점에서 매우 편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기구를 확충하여 사장 직속의 총무, 영업, 편집, 도서의 네 부를 설치하고 또 진용(陣容)도 일신(一新)하였습니다. 그리고 잡지의 배급에 있어서도 전 조선 각지에 지사를 설치하여 언제 어디서라도 구할 수 있도록 기구를 정비시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보다도 중요한 개혁은 지면 내용의 쇄신일 것입니다.
우리는 본지로 하여금 넓은 의미의 생활의 좋은 반려가 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길잡이의 역할을 다하게 하기를 스스로 기획하는 바입니다.
설령 이 이상(理想)이 제일보에서 완전히 구현되지 못하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결코 낙심하지 않으려 합니다.
로마(羅馬)는 하루 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 경우에도 훌륭히 적용될 것인까닭입니다.
지도적 논설과 문화 평론, 중량 있는 창작, 친절한 시사 해설, 고상한 취미와 실생활에 필요한 ‘뉴스’, 이것은 날이 감을 따라 더욱더욱 풍부한 내용으로써 결실시켜질 것이오, 이에 따라 여러분의 욕구도 또한 반드시 높은 정도에서 충족될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
이렇듯 조광사를 존속시키기로 결의하고 또 개혁을 단행하려 함은 오직 여러분에게 정신적 양식―좀 더 내용이 충실한 양식을 제공함으로써 문화 향상에 홍모(鴻毛)78)만한 기여라도 끼치기를 기하는 이외에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네 평생과 내 재력, 그것이 극히 미력한 것일지라도 나는 이미 이것을 들어 이 방면 사업에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조광사를 존속시키는 것은 결코 이것으로써 신문에 대신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신문과 잡지는 각각 독자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 까닭입니다. 오직 종합지로서의 영역을 굳게 지키면서 다만 주제마다의 내용을 좀 더 충실히 하여서 좀 더 색채와 선을 뚜렷이 하기에 전력을 다하려 합니다.
나는 가까운 장래에 본사의 기초를 또한 반석 위에 세우기 위하여 주식회사로 조직을 변경하려 하거니와 본지의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우리의 힘으로만 결실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문화사업이란 특히 한사회의 공동 노작만이 결실시킬 수 있는 사업인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이 사업은 공동사업이요, 또 이 기관은 동시에 여러분의 것입니다. 나의 미력에다 여러분의 관심과 편달이 없이는 이 사업은 성장할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청컨대 본사의 뜻을 살펴 독자 제씨와 문화인 제위(諸位)는 조선일보에 대한 것이나 다름없는 관심으로써 공동 노작을 아끼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이상 조광사를 혁신 확충하면서 본사의 뜻있는 바의 일부를 피력하여 여러분의 절절한 원조를 감히 앙청(仰請)하는 바입니다.
<출전 : 方應謨, 「朝光社革新의 辭」, '朝光' 제6권 10호, 1940년 10월 1일, 18~19쪽>
78) 기러기의 털이라는 뜻으로, 매우 가벼운 사물을 이르는 말.
4) 방응모, 창간 5주년사(권두언)
사장 방응모(方應謨)
본지는 금 11월로 창간 만5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5개년이란 세월도 긴 듯 또 짧은 듯 하면서도 나에게는 감회가 또한 적지 아니합니다.
본지가 고고(呱呱)79)의 소리를 내어 세상에 나타나는 1935년 11월과 지금 5개년 돌맞이를 하는 1940년 11월과는 실로 격세의 느낌조차 없지 않습니다.
당시 유럽에 있어서는 이탈리아 군대의 에티오피아 진격으로 영국·프랑스를 중심한 제국연맹이 물끓듯하여 대이탈리아 경제봉쇄(對伊經濟封鎖)를 결의하는 때였고 동양에 있어서는 지나에서 화폐제도개혁 등을 중심으로 영·중 합작이 급진전을 보이는 한편 일·중 관계는 날로 악화하여 마치 일지사변80)의 전야를 예상케 하던 때였습니다.
말하자면 동서양에 있어 그 사정과 성질에 다소의 차는 있었다 할지라도 역시 신질서의 서곡이 그윽하게 울려오던 때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동안 세월은 흘러 에티오피아 문제 해결의 뒤를 이어 1937년 7월에는 동아신질서건설을 목표로 하는 세기적 대사건인 일지분쟁이 발단되었고 작년 9월에는 독일의 유럽 신질서 건설 사업인 제2차 유럽대전쟁이 발발되어 세계신질서 건설은 지금 일본·독일·이탈리아 삼국에 의하여 용감하게 진전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대전변기에 처하여 본지는 그때 그때에 따라 오로지 본지에 부여된 직책을 다하기에 미력을 다하여 왔습니다. 우리는 본지 창간에 즈음하여 문화 조성(朝城) 건설의 아침 햇빛(朝光)이 되기를 스스로 기획한 바 있었습니다. 과거 5년간 본지가 과연 조선문화향상에 기여한 바가 어떠한 것인지는 스스로 촌탁(忖度)81)하기 어렵습니다마는 다소라도 비익(裨益)82)한 바 없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은 굳게 믿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부터 본사의 미력보다도 오히려 본지를 아껴 사랑하고 도와주고 하는 분들의 힘으로 된 아름다운 결정(結晶)이라 생각합니다. 이 기회에 평소에 본사를 지원해주신 제위에게 대하여 애심(哀心)으로써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는 또한 본지의 장래를 더욱더욱 빛나게 하여 제위의 간곡한 원조와 수만 독자의 기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또한 자기하는 바입니다.
◇
그런데 이제 5년 전이나 3년 전과 같이 세계의 동향은 애매한 것이 아니고 아주 확연해졌습니다. 제국은 독일·이탈리아와 손을 잡고 세계 신질서 건설에 참획(參劃)하고 있습니다. 지나에서 사변이 발발한 이래 우리는 시국인식 철저화에도 미력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시국이라고 하는 것은 3년전과도 다르고 2년 전과도 달라졌습니다. 국민된 자로서는 누구나 실로 최후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될 때를 당하였습니다.
안으로는 신체제의 확립, 밖으로는 혁신외교정책을 강행하여 하루 바삐 동아 신걸서 건설을 완성시켜서 세계의 신질서를 건설하고 한 걸음 나아가서 세계 영구 평화를 기도하지 않으면
79) 아이가 세상(世上)에 나오면서 처음 우는 울음.
80) 중일전쟁을 뜻함.
81) 남의 마음을 미루어서 헤아림.
82) 보익(補益). 보태고 늘여 도움이 되게 함.
안 되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모름지기 이 선(線)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활의 반려인 본지의 앞으로의 주력이 어디에 있겠냐는 것은 다시 노노(呶呶)83)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국가의 대이상에 따라 문화정책이 새로워질 것이오, 새 문화는 종래의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지양하고 일로 전체주의적인 방향으로 향하여 달음질치도록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국책과 신문화정책선에 따라 시국을 인식시키고 또한 조선문화 향상에 일단의 노력을 더하려 합니다.
원컨대 독자 제위는 끝까지 본지를 지켜주시고 또 끝까지 성원을 아끼지 말아주기 바라 마지않는 바입니다.
<출전 : 方應謨, 「創刊五周年辭(卷頭言)」, '朝光' 제6권 11호, 1940년 11월 1일, 18~19쪽>
5) 동아공영권 신장과 국민의 각오(권두언)
1
제국의 외교는 동아공영권의 기초를 날로 공고(鞏固)히 하고 있다. 금일의 마츠오카(松岡) 외교는 이점에서 실로 세기적 의의를 가진 것이라 할 것이다. 마츠오카(松岡)씨는 적당한 기회를 가리어 독일을 방문하였다.
그 결과는 추축진(樞軸陣)을 한층 더 강화하여 동아에 있어서 뿐이 아니라 제국은 실로 세계 신질서 건설에 기여할 결의를 더욱 굳게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마츠오카씨는 스탈린 씨와 재회견을하여 드디어 일소(日蘇) 중립조약에 성공하였다. 이 조약이 가지는 의의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우선 이것으로써 제국의 남진정책을 실현시키는데 절대적인 힘을 얻은 것이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한걸음 나아가서 이 조약이 중경(重慶)에 주는 타격은 예상 이상으로 크다. 이 조약체결 후 중경측이 얼마나 당황 초조 하였던가, 중경 측의 초조가 심하였음에 불구하고 소련은 무엇이라고 응수(應酬)하였던가.
스탈린씨는 중경 측에서 만일 국교 조정을 원하거든 장개석(蔣介石)이가 모스크바(幕府)에 올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으로써 소련의 저의(底意)를 짐작할 것이오, 또한 그와 동시에 중경 내부의 국공(國共) 마찰이 어떻게 악화할까 하는 것도 짐작되는 일이다.
2
이와 동시에 우리는 최근의 제국의 적극적 작전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복건(福建)·절강(浙江)·황하(黃河)중심 작전은 실로 그 의의 중대한 바가 있다. 적이 제국의 진의를 알기까지는 언제까지든지 군사행동을 중지하지 않을 것이다. 중경 측의 무모한 항전책도 이와 같은 작전 앞에서는 차츰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 비(非)를 깨닫는 날도 반드시 먼 장래의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다른 한편에 있어 국민정부의 기초도 날로 공고하여 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에 또한 일(日)·프랑스령 인도차이나(佛印) 경제협정과 제국의 알선으로 태국(泰)·프랑스령 인
83) 구차한 말로 자꾸 지껄이다.
도차이나(佛印)평화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이야말로 제국의 동아공영권 건설상에 있어서의 역사적 거보임에 틀림없는 것으로서 이것으로써 공영권의 남방으로의 진전이 확립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듯 최근의 제국의 군사외교의 승리를 찾아보면 정히 세기적인 대성과를 거두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3
그러나 여기에 잡음(雜音)이 있다. 동아 신질서 건설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고의로 이것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국가군(國家群)이 있다.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군이 그것이오, 그 중심이 영국(英)·미국(米)이다. 최근 비정상적인 그들의 언동은 실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어서 미국 상원에서는 심지어 중경에의 비행기 파견을 주장하고 동경(東京)을 폭격하자는 폭언까지 임의로 토(吐)하는 자가 나타났다.
무적황군이 국가를 지키고 있음에 우리에게는 쓸데없는 기우(杞憂)는 글자 그대로 일편(一片)의 기우일 다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언제나 필요한 것은 신사태에 상응할 만한 물심 양면의 준비다.
이 점은 특히 우리가 명심할 점이다. 동아공영권이 날로 진전함에 불구하고 그 완성은 아직 장래에 속하는 일이다.
우리는 천리 길을 지금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우리는 물심양부면에 있어서 오히려 전쟁은 지금부터라고 생각하고 만전준비를 다하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
지난 6일 초도순시(初度巡視)84)를 마치고 남경(南京)에 돌아온 전총(畑總)사령관은 그 시찰담(視察談)중에서 일선 장
병은 전쟁은 지금부터라는 의기에 불타고 있다고 하였고 결말에 이르러 총후국민은 국제관계의 일시적 호전에 현혹되지 말고 일선 장병의 결심을 지지하라는 의미의 말을 하였다. 오늘날 국민의 처할 바의 국민이 가져야 태도가 어떤 것이라는 것이 짐작될 것이다.
만난(萬難)을 박차고 최후의 이상에 도달하는 것이 오늘날 국민에게 부여된 의무이다.
<출전 : 「東亞共榮圈伸張과 國民의 覺悟(卷頭言)」, '朝光' 제7권 6호, 1941년 6월 1일, 22쪽, 404쪽>
6) 지나사변 4주년(권두언)
1
1937년 7월 7일 노구교(蘆溝橋) 상의 한 발의 총성은 실로 동아신질서 건설에의 효종(曉鐘)이었다.
그 동안 이 성스러운 대사업의 행진곡은 지나 천지를 뒤흔들어 마침내 사변도 최종계단에 들어간 채, 금년 7월 7일로써 그 만 4년을 맞이한다. 우리는 이 의의 깊은 날을 맞이함에 먼저 이 성전의 초석이 되어 전장의 꽃으로 사라진 황군장병의 영령에 대하여 삼가 그 명복을 비는 바이거니와 이들에게 동아신질서의 완성의 우렁찬 고종(告鐘) 소리를 들려줄 날도 반드시 먼 장래의 일은 아닐 것이다.
과거 4년간 황군이 가는 곳엔 실로 글자 그대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전 지나 400여 주(州) 중 황군의 족적(足
84) 한 기관의 책임자나 감독자 등이 부임하여 처음으로 그 관할 지역을 순회하여 시찰함.
跡)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들의 미몽(迷夢)을 깨뜨리는 폭탄이 날지 않는 곳이 별로 없었다.
전전선 3천여km(粁)로 제1차 대전의 그것은 물론, 금차 대전의 그것도 훨씬 능가하여 세계전사상(世界戰史上)에 새 기록을 지고 있다.
어찌 이 기록을 장하다 하지 않으리오. 그리고 재작년 3월에는 왕정위(汪精衛)씨를 주반(主班)으로 하여 이미 남경에 환도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일지(日支) 기본조약도 성립되었다.
그 후 국민정부는 비록 십(十)의 십(十)은 아닐지라도 점차 발전되어 가는 도정에 있으며 제국으로서도 최근 다시금 국민정부 육성의 최고방침을 끝까지 수행할 체제를 완비 시키고 있다.
2
나아가 중경 측의 곤궁한 상황을 보라. 그들은 황군에게 몰리어 겨우 촉지(蜀地)에서 여맥(餘脉)을 보존하고 있으나, 그러나 그 궁상은 우리 눈앞에 역력(瀝瀝)한 바 있다.
그들에게는 식량도 없고 무기도 없다.
그리하여 4억만 민중은 도탄에 빠지고 있다. 다만 남은 것은 일종의 발악뿐이다.
이 어찌 통탄할 바가 아니랴. 제국은 과거 3년간에 걸쳐 제국의 진의를 충분히 설명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끝내 그 미몽을 깨지 못하였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그들에겐 다만 오늘날의 궁황이 선물(膳物)되었을 뿐이 아닌가. 그런데 이 중경측이 명맥을 오늘날까지 이끌어 오는 것은 결코 그들의 자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미의 타력에 있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들의 적성(適性)은 사변 진전에 비례하여 그 정도를 더하고 있다는 것이 금일의 현상이다.
과반(過般) 영국은 자국의 궁상도 돌아봄이 없이 극동정책의 강화를 역설하였으며 미국은 지나의 항일전선을 격찬하고 끝까지 그 원조를 아끼지 않는다고 성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태평양상의 제반 군사기지를 보강하여 싱가폴(新嘉坡)에까지 군함과 군대를 파견하여 어디까지 제국의 성업(聖業)을 방해하려고 획책하고 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지나사변은 지나와 전쟁한다는 것보다 차라리 그 배후의 제국(諸國)과 싸우는 것이오, 지나가 영미의 원조를 받는다는 것보다 차라리 그 영미측의 제1선이 바로 중경 측이라고 보아야 마땅하게끔 사태는 악화되었다.
3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태가 악화되면 악화되는데 따라 거기에 상응한 준비가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방해가 온다고 한들 조금도 괘념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제국의 운명을 가늠하고 있는 이 성업에 있어
어찌 단 한 걸음인들 후퇴할 것인가. 문제는 다만 우리의 물심 양방면으로부터의 총력전 준비에 있다.
더구나 금일의 세계정세는 거의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급회전을 하고 있다. 이 정세를 똑바르게 간취(看取)하면서 일(日)·독(獨)·이(伊) 구축을 더욱 더욱 강화하여 만 4개년의 전쟁을 치렀으니 일상생활에 다소의 변화가 없을 수 없는 바이겠으나, 이것쯤은 본시부터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 보다도 앞날을 위하여 더욱 더욱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경 측의 도괴(倒壞)는 설령 가까운 장래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동아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아직 앞이 요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우선 이 위업은 거의 백년대계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을 첫째 깨닫지 않으면 안될 것이오.
이것이 국가 백년대계에 속하는 일이라고 하면 국민도 백년대계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사리(事理)의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사변 4주년을 맞아 국민은 모름지기 각오를 새로이 하여 1억 1심, 백년대계의 과정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동시에 동아영원의 평화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정신으로 돌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출전 : 「支那事變四週年(卷頭言)」, '朝光' 제7권 7호, 1941년 7월 1일, 24~25쪽, 400쪽>
7) 시정 31주년(권두언)
광고무비(曠古無比)의 비상시국 하에 있어 금 10월 1일로써 시정 만 31주년을 맞이하였다. 회고하건대 지금으로부터 만 31년 전 동아의 정국은 실로 난마(亂麻)와 같이 흩어져 구한국(舊韓國)의 운명이 또한 위급(危急) 존망지추(存亡之秋)에 있었다. 이때 1910년 8월 29일 ‘일한’ 양국은 드디어 양국의 행복과 동양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양국 ‘병합’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간 역대 조선총독은 선정을 하여 금일과 같이 경제·산업·교육 등 일반 문화 향상에 자(資)한바 실로 컸다.
이제 머리를 돌려 유럽(歐洲) 제국(諸國)의 식민지 정책을 살펴보면 그 근저에는 항상 심각한 민족문제가 대립한 채, 잠재(潛在)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항상 정복과 피정복의 관계, 지배와 피지배의 불변의 원칙과, 착취와 피착취의 엄연한 관계가 확립되어 있다. 그러나 내선(內鮮) 간에 있어서의 그 관계는 이와 전연 다른 범주에 속한다.
내선의 관계는 정복과 피정복,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가 아니고 내선 혼연일체, 그것이 바로 조선통치의 대정신이며 미나미(南) 총독이 주창하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원리이다. 내선관계는 한 마디로 말하여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 건국정신의 발로이다.
그러므로 내선관계는 동시에 신동아 건설의 기초요, 출발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제 제국은 동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또 동아의 안정을 위하여, 동아의 공영방위를 위하여 동아 신질서건설의 성업을 수행시키고 있다. 이 동아신질서 건설의 위업의 근본 원리가 팔굉일우의 대사상에 있음을 생각하면 내선관계 여하라는 것이 얼마나 중차대한 것인지를 알 것이다.
동아 신질서 건설의 위업은 지금 수행 도정상에 있다. 지나의 대평야에 성전의 검을 휘두른 지 이미4개년이로되 장개석(蔣介石)은 이 성전의 성전됨의 의의를 깨닫지 못하고 부질없이 저항을 일삼고 있다.
여기에 또한 영미 측의 책략에 승세(乘勢)하여 동아신질서의 대이상을 이해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이들 영미의 원조로 그들은 더욱 더 소리를 높이 하여 항전하고 있는 것이 금일의 현황이다.
이때에 있어 우리는 내선일체를 기초로 하여 동아 신질서건설의 위업을 힘차게 진전시키지 아니하면 안 된다.
장개석의 항전의식이 앙양(昻揚)되면 될수록 우리는 그 몇 배의 힘과 열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사위(四圍)의 정세를 살핌에 국제관계는 더욱 조잡하여지고 있다.
이때에 있어 우리는 내선일체의 정신을 더욱 깊게 하고 병합당시의 정신을 회상하여 실로 한 덩어리가 되어 이 난국을 돌파 시키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출전 : 「施政三十一周年(卷頭言)」, '朝光' 제7권 11호, 1941년 11월 1일, 25쪽, 210쪽>
8) 징병령 실시와 상무정신(권두언)
조선에도 드디어 징병령을 실시하는 날이 왔다. 1944년 봄 4월부터 우리도 제국 군인으로서 또는 제국 군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그 아내와 그 형제자매로서 영예와 광명에 찬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즉 조선 2천 4백만 민중은 이날부터 제국신민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새생활을 시작하는 것이오,
역사적인 첫 걸음을 내 딛게 된 것이다.
생각건대 지나사변 이래 반도강산에 창일(漲溢)한 애국지성은 실로 놀랄만한 바 있다. 예컨대 지원병의 성적이 우량한 사실이라든지 헌금에 나타나는 열렬한 정성이라든지 기타 총후국민으로서의 봉공(奉公)에 있어, 가지가지로 불타는 듯한 성의를 표시하여 왔다.
이제 이와 같은 정세 아래에서 우리는 징병령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은 것이다.
오직 감격할 따름이오, 우리는 즐겨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기회에 스스로 돌볼 점이 있으니 그것은 재래 반도에는 상무정신이 박약하였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조선은 확실히 문약에 홀렸고 또 현재는 그 구관(舊款)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정에 있어, 또 사회에 있어 그 교육에 있어 그 처세에 있어 항상 정신적 긴장이 부족하였고 그 행동에 있어서는 엄숙한 맛이 적었다. 이웃집에 불의가 있고 길가에 부정이 끓고 해도 이것을 그대로 눈 감아 버리는 것이 마치 신사(紳士)의 도(道)인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조차 없지아니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정(正)과 부정(不正), 의(義)와 불의(不義)가 한데 뭉치어서 그 경계의 명료성을 잃고 말았다.
이것은 현대 세계를 풍미(風靡)한 1개 기류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에 있어 차이를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상무(尙武)정신이란 인간 사회에 있어 인간문화에 있어 얼마나 존중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인지를 명확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징병령 실시에 대하여는 한층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출전 : 「徵兵令實施와 尙武精神(卷頭言), '朝光' 제8권 6호, 1942년 6월 1일, 21쪽, 222쪽>
9) 해군특별지원병제의 영광(권두언)
지난 5월 11일의 각의(閣議)에서 조선에 특별해군지원병제(特別海軍志願兵制)를 실시하는 건을 결의 발표하였다.
생각하건대 조선에는 일찍 1938년에 육군특별지원병제(陸軍特別支援兵制)를 실시하여 이래 제1선에서 이미 혁혁한 무훈(武勳)을 세운 사람도 적지 아니하거니와 작년 5월 12일에는 1944년도부터의 징병령 실시를 발표하여 2천4백만 민중을 감격시켰다.
1944년의 그 실시를 앞두고 방금 광명과 영예의 앞날을 위하여 맹훈련을 하고 있는 이때 거듭되는 광영을 입어 이제 우리는 해군으로서도 당당히 제국 군인이 되어 천황폐하의 고굉(股肱)85)으로 봉공
85) 다리와 팔이라는 뜻으로, 다리와 팔뚝에 비길 만한 신하(臣下). 임금이 가장 신임(信任)하는 중신(重臣).
(奉公)할 수 있게 되었다.
제국은 해양국이다. 4면이 모두 바다이다. 그러므로 제국의 운명은 본시부터 이 바다와 떠날 수 없는것이다.
이 지리적인 운명적 지위에다가 제국관계를 생각하면 제국은 생존상 바다를, 특히 태평양을 제패하는 것이 절대 필수조건이 아니면 안 된다. 게다가 현하의 전국으로 보면 정히 제국은 7해(七海)를 제패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기세를 높이고 있다.
제국의 해군력이 암만 증강 되어도 너무 지나친다는법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해군 국가로서 최대한의 해군력을 건설해야 할 것은 다시 설명을 요하지 않는 것이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적 영미(英米)는 꿈같은 군축회의(軍縮會議)에서 기어코 제국의 해군력을 제압하려하지 않았던가. 제국은 육해공(陸海空) 모두 세계무비(世界無比)의 정강(精强)86)을 자랑하고 있거니와 이 전통을 더욱 더 빛나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한결 같이 병역의 경험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특별한 훈련과 연성이 있어야 하리라 생각하거니와 특히 해군에 있어서는 견확(堅確)한 정신과 과학적인 두뇌를 요구함이 크다.
제국의 빛나는 해군정신을 체득하고 광휘(光輝) 있는 전통을 자랑하면서 육군은 육군으로서 해군은 해군으로서 어느 것이나 제국 군인으로 부끄럽지 않을 만큼 연성(鍊成)을 쌓아서 제국의 간성(干城)87)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출전 : 「海軍特別志願兵制의 榮光(卷頭言)」, '朝光' 제9권 6호, 1943년 6월 1일, 13쪽, 180쪽>
10) 징병제 실시에 감사합시다(권두언)
2천5백만의 전 조선민중이 대망(待望)하여 마지아니하는 징병제는 금 8월 1일로써 드디어 그 실시를보게 되어 이제 조선출신의 청장년은 일제히 군문으로 다닐 일이 눈앞에 다 닥쳐왔다.
제국의 군인은 황공하옵게도 천황어친솔(天皇御親率)의 군이며 황군의 ‘고굉(股肱)’이다.
이와 같은 군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바로서 이것은 한갓 세계무비(世界無比)의 국체에 연원하는 바이다.
제국장병의 광영이 비할 데 없이 큰 까닭도 또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이제 이와 같이 크나큰 광영이요. 명예인 징병제가 조선동포에게도 실시된 것이다. 생각하건대 이것은 조선민중에게 국가의 간성으로서의 중실을 맡겨주는 것이오, 그와 동시에 우리의 국가의식이 그만큼 향상되었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중대한 일익(一翼)을 맡아가지고 새 출발을 하는 것으로서 이 중책의 일부가 우리에게 허용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우리가 대동아의 지도자이라는 광영 있는 지위(地位)에 한 걸음 더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영예 있는 지위가 주어진데 대하여 거듭 감사 감격하는 바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광영을 입은 것을 감사하는 한편 또한 책임이 중대해 진 것을 깨닫지 아니하면 안 된다.
제국 군인의 전통과 영예는 세계무비의 정병(精兵)이라는 데 있다. 역사상 먼 예는 잠깐
86) 정력이 잇고 강함.
87) 방패와 성이라는 뜻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군대나 인물을 이르는 말.
차치하고라도 하와이 기습의 9군신(九軍神), 앗쓰섬의 야마자키(山崎) 부대의 옥쇄(玉碎)와 같은 것은 제국군인의 정신을 그대로 발휘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군인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또는 이와 같은 충용(忠勇) 정신의 지반(地盤)을 닦기 위하여는 우리는 첫째 책임 관념을 좀 더 높여서 직(職)에 몸숨바칠 각오를 굳게 가지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리하여 전투에 있어서는 “죽은 후에야 그친다”는 투지,투혼을 길러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일본정신에 투철하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일본정신이란 만민일군(萬民一君) 사상으로서 그 핵심은 충(忠)에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무비의 국체에 대한 관념을 높여야 할 것, 이런 점에 대하여 우리는 한층 더 연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우리의 책무를 다할 수 있을 것이오, 또 우리에게 주어진 광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전 : 「徵兵制實施에 感謝합시다(卷頭言)」, '朝光' 제9권 8호, 1943년 8월 1일, 13쪽, 180쪽>
6. '신시대'의 선전 취지
1) 연두사
성전 제5년.
예성문무(叡聖文武)하옵신 대원수 폐하, 어성덕(御盛德)을 받잡고 혁신창영(革新昌榮)의 세기 새로운 제1년에 당당 일보를 내딛는 회세(回歲)의 벽두에 즈음하여 1억 창생, 황토(皇土)에 부복(俯伏)88)하여 대어능위의 혁요(赫耀)하옴을 배(拜)하옵고, 흥륭(興隆) 일도(一途)를 계승하옵는 황국에 생을 향유함에감읍변무(感泣抃舞)하오며, 구중운심(九重雲深), 황실의 어번영을 우러러 축도(祝禱)하옵고, 신도(臣道)를 각준(恪遵)89)하여 지성봉공(至誠奉公)함으로써 무궁무극(無窮無極)하옵신 황운에 익찬(翼贊)하여 받들기를 깊이 서원(誓願)하옵니다.
이제 우리 황군은 광고(曠古)에 빛나는 대이상의 실현에 목첩(目睫)90)하고 있습니다.
지나사변 완수,동아공영권 확립, 세계 신질서 건설, 황기(皇紀) 새로운 신세기, 2601년과 함께 신민된 자의 사명이 가
한층 중대함을 스스로 느끼는 바입니다. 더욱 반도 2천 6백만 민중은 황송(惶悚)하게도 일시동인(一視同仁)하시는 어인자(御仁慈)하심에 욕(浴)하여 만방무비(萬邦無比)의 국체를 봉대(奉戴)하고 군민일체의 국풍(國風)을 받잡아 영광스러운 신시대의 전진을 함께 하게 되옴은 오직 감격 감격할 따름입니다.
이제 우리들 신민은 사변을 완수하고, 생산을 확충하고, 군비를 충실히 함께 한층 전 노력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시국이 더욱 중대해짐에 따라 더 큰 사건이 발기(勃起)되는 때에도 모든 인고 결핍을 감
88) 고개를 숙이고 엎드림.
89) 일이나 말 따위를 정성껏 따르고 지킴.
90) 눈과 속눈썹을 아울러 이르는 말. 아주 가까운 때나 장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내하여 외적(外敵)을 분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리하므로 우리가 제회(際會)91)한 영광스러운 신시대로 난관을 정복하여 황국의 대이상을 완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본지(本誌)의 창간도 황국의 중대 시국을 돌파 정복함에 일호(一毫)의 가치라도 있어지기를 힘쓰고, 홍대(鴻大)하신 황은의 만의 하나라도 봉답하기를 서원하옵는 바입니다.
이제 세단(歲旦)을 맞이함에 있어 삼가 성수(聖壽)의 무강(無疆)하심을 봉하(奉賀)하옵고 국운의 더욱 융창(隆昌)하옴을 기원하오며 황군장병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빌고 소회를 말씀하옵는 바입니다.
<출전 : 「年頭辭」, '新時代' 第1集, 1941년 1월 1일, 18쪽>
2) 신시대 변 -창간사에 대신하여
신시대(新時代).
얼마나 오래오래 기다려 오던 신시대이냐. 바라고 바라던 신시대가 이제 우리들의 면전에 박두(迫頭)해 버렸다.
마침내 신시대는 제군과 또 나와 또 모든 인류의 눈앞에 맞닥뜨려 버린 것이다.
기다렸던 자가 맞이할 차비가 채 못 되었다고 비명(悲鳴)할 만큼 신시대는 잽싸게 도착하였다.
왜 이다지 일찍 왔느냐 항거하여도, 좀 더 있다가 오시오 애원하여도, 이미 신시대는 도래한 것이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보다 새로운 신시대로의 전진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뒤지면 언제까지 패잔졸(敗殘卒)의 운명 외에는 남는 것이 없다.
전진이냐 패퇴냐, 남은 것은 둘 뿐이다.
잡지 '신시대(新時代)'도 이 새로운 전환과 출발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차비가 채 못 된 비명과 함께 서서 발걸음을 빨리 빨리 하여 신시대의 선봉과 맞서야할 운명을 안고서 탄생한 것이다.
고통도 있을 것이오, 결함도 있을 것이리라.
그러나 잡지 '신시대(新時代)'는 그것을 돌아보기 보다도 제군과 마음을 합하고, 힘을 합하여 우리가 맞이한 신시대의 앞으로 활개치고 용감하게 나서야 할 것이 보다 큰 사명이라고 믿는다.
잡지 '신시대(新時代)'는 평이(平易)와 명랑을 요건으로 삼고, 어린 벗으로부터 늙으신네까지를 포용할 야망으로 출발하였다. 탄생에서 출발까지에 현실적 난관을 뚫고 나와 보니 첫 번 기도(氣慆)가 무척 눌리워졌다.
그러나 뜻한 바 면목(面目)의 일단(一端)이나마 남기어 있음을 유쾌히 생각하고 힘을 다시돋구어 제군과 전진을 같이 하려한다.
오늘 우리가 맞이한 신시대의 출발도 많은 낙오(落伍)에 겁내는 것이 아니다.
1억을 뭉치고 8억을 뭉치고, 21억을 뭉치려는 열의가 첫 출발로써 완성될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직 신념과 노력을 다 함으로써 완성으로의 전진이 약속되는 것이다.
잡지 '신시대(新時代)'도 이로서 위안을 삼고 진심과 성의를 다 할 것임을 약속하고, 전진을 기약한다.
잡지 '신시대(新時代)'의 제작자는 모두 젊은 자다. 또 경험이 없다. 그러나 신시대로의 전진을 사모함에는 남에게 뒤지기를 싫어한다. 우리의 용기는 전진함에 있는 것이다.
91) 좋은 때를 당하여 만남.
신시대로의 거부(拒否)는 태평양 물결을 드높게 한다. 대서양 위의 파도를 더 흔들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도 우리 마음속의 회의와 주저가 더 두려운 것임은 알아야 한다.
신념과 노력의 최선을 다 할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신시대를 맞이하고는 또 건설할 한 사람이 된 것에 대하여 광영과 책무를 느껴야 한다.
우리의 전진은 실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젊음과 우리의 경험 없음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다. 싱싱한 마음과 미지에의 탐구와 같이 노력이 이제부터인 것임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우리의 잡지는 전진만이 약속되는 것이다. 오랜 진통과 여러 기관의 수고함을 힘입고 탄생된 잡지 '신시대(新時代)'가 제작에도 생산에도 부족함이 많음은 앞으로 완성시키려는 노력의 여지가 넓어진 만큼 도리어 기쁨도 되고 용기도 된다.
이제는 모든 것이 전진뿐이다. 보다 새롭고, 보다 아름다운 용감한 전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앞서거나 뒤서거나 다 같이 전진할 것만을 기약하고 동시에 전진할 것이다.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새 날에 함께 우렁찬 만세를 높이높이 불러 황국의 대이상의 완성에 축배를 들 것이다.
<출전 : 「新時代辯 -創刊辭에 대신하여-」, '新時代' 第1集, 1941년 1월 1일, 318~319쪽>
3) 10억 단결, 성전 완수에 -지나사변 7주년을 맞이하며 노구교(蘆溝橋)에서의 총성 한 발에서 발단된 지나사변(支那事變)은 이번 7월 7일로써 어언 만 7년의 기념일을 맞이한다.
당시 우리 측은 불확대 방침을 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화(戰火)는 마침내 전 지나에 파급하고 말았으니 이는 전혀 음흉한 미영의 모략에 빠진 항일도배(抗日徒輩)의 도량(跳粱)92)에 인하여서였다.
그러나 참다운 형제국의 우의(友誼)와 동아 영원의 평화를 기망(企望)하는 황군의 정로(征路)에 전과(戰果)는 크게 빛나게 되었고 사변의 추이에 따라 고노에(近衛) 성명·왕정위(汪精衛)씨를 중심으로 하는 신생국민정부의 남경환도·국민의 자주독립·일화(日華)공동조약 등으로 ―제국의 이상에 어그러짐 없이 신질서는 착착 확립되었다.
전국이 태평양전에 돌입되자 제국은 대동아 10억의 평화와 공영을 위하여 결연(決然)히 동아침략을 기도하는 미영을 격멸하기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에 동생공사(同生共死)를 ☐☐하는 국민정부의 참전까지 보게 되어 사변은 비약적 전말(顚末)을 보게 되었으며 일화(日華) 양국민의 우의적 제휴는 한 층 더 굳어진바 있게 되었다.
이제야 대동아전은 중대한 결전 단계에 부닥쳤다. 제국은 아니 공영권 내 국민은 일치단결하여서 어떻게든지 이 전쟁을 싸워 이겨야만 한다.
92) (어떤 부정적(否定的)인 사람이나 세력(勢力)이)거리낌 없이 함부로 날뜀.
이때에 있어서 아직껏 완미(頑迷)하기 짝이 없는 중경(重慶) 일파의 귀축 미영의 주구(走狗)가 되어 동아에 반역적 행위를 계속하고 있음은 실로 가증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제국의 대륙작전은 추호도 지나 민중을 적으로 함은 아니요, 오직 영미의 마수에 협력하는 불순분자(不純分子)를 응징함에 있음은 다시 말할 것이 없는 일관하여 오는 방침이다.
이제 7주년기념일을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 국민은 결승에 각오와 결의를 한층 맵게 함과 동시에 중경(重慶) 일파가 맹성일번(猛省一番) 동아 본연의 자태에 돌아서길 바라 마지않는 것이다.
<출전 : 「十億團結, 聖戰完遂에 -支那事變七周年을 마지하여-(社說)」,'新時代' 제4권 7호, 1944년 7월 1일, 9쪽>
4) 나아가자!! 일억특공대
적은 드디어 레이테만, 딘도로 섬을 거쳐 루손 섬(呂宋島) 한 귀퉁이로 상륙하여 왔다. 전선은 점점 늘어나 필리핀 제도(比島)가 온통 일미(日米)93)결전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필리핀 제도(比島)란 이번 전쟁에 단단히 한 몫 보는 데이므로 루손 섬의 싸움이 대동아전쟁에 승리를 거두느냐 깹박을 치느냐가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이 싸움이야 말로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 넘기지 않으면 우리는 여태 헛 애를 쓴 것이 된다.
총후국민은 적이 루손 섬에 상륙했다는 소리를 듣자, 절치부심, 그 어떤 곤란이라도 돌려치고 적을 때려 부술 각오를 했다. 그러나 전선(前線)보도는 나날이 가슴이 뜨끔뜨끔 할 뿐이다.
적이 산파비안을 중심으로 하여 다리를 놓느라고 기를 쓰는 동시에 후속부대를 긴가엔 만(灣)으로 날라 오고자 날뛰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비행기가 달린다는 소리를 듣는다.
과달카날 섬(島)이래, 우리는 절호의 기회를 맞으면서도 비행기가 없어서 공수 방관하고 있다는 전선의 호소를 몇 번이나 들었는가.
황군의 신취(神鷲)는 능히 비행기 한 대로서 군함 한 척을 무찌르고 있으나 이렇듯 용감무쌍한 우리 황군일지라도 비행기가 없으면 맨 주먹으로 대들 수는 없다. 이 난국을 타개할 열쇠는 결코 전선에 있지 않고 총후(銃後)에 있다.
총후 1억 동포가 특공정신으로 신취(神鷲)의 날개로써 필리핀 제도의 하늘을 덮지 않으면 안 될 때다.
그러면 총후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마땅한가. 무엇보다도 비행기를 들입다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된다.
직접 비행기 생산에 종사하는 산업전사는 물론 어떠한 일에 종사하는 이일지라도 1분 1초를 아껴 자기에게 맡겨진 직무에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동시에 우리 일상생활을 전력화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전력 증강에 이바지 하며 1억 특공대의 총진군을 개시할 때는 왔다.
그러면 일상생활을 전력화하는 방도는 어떠한가. 그것은 우리 마음 하나에 달렸다. 예를 들면 국민 한 사람이 하루에 쌀을 1작씩만 더 절약한다면 1년에 250만 석이 된다. 이것은 250만 석의 쌀을 증산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250만 석의 외미를 실어 들여오던 배를 달리 이용하여 만약 철광석을 날라 들여온다면 고사포(高射砲)면 2단 4천 문, 전차(戰車)면 5천4백 대, 배면 27만 톤을 만들 수 있다 한다.
93) 일본과 미국.
그리고 만약 전국 남자가 양복 윗저고리 한 벌만 새로 만들지 않는다면 비행기 한 대치의 재료인 알루미늄을 만들 수 있는 전력이 절약될 것이오. 전국 라디오 청취자가 하루에 한 시간씩만 라디오를 켜지 않는다면 일 년 동안에 비행기를 2천5백 대 만들어 낼 수 있다 한다. 하고 또, 석탄은 비행기 한 대를 만들어 내는데 약 2백 톤이 든다는데 이 석탄을 중간에다 두고 비행기 생산과 일상생활과의 관계를 숫자적으로 본다면 하루의 생산에 있어서 연탄(煙炭)을 매 호에 한 개씩만 절약한다면 64대, 맥주 한 병을 절약하면 14대, 가스를 하루 쉬는데 122대의 비행기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설탕은 항공기용 가솔린의 원료가 되고 우유는 목재기에 없을 수 없는 접착제 카제인이 된다.
전국 남자가 바르고 있는 포마드를 집어 치운다면 1년에 2천만 톤의 식물성 기름을 전력화 할 수 있다 한다.
소금으로부터 나오는 쓰디쓴 즙이 주리로민보다도 가벼운 막네네의 원료로 되고 다른 성분인 가성 소다는 비행기 제조에 필요한 약품이 된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는 전력 증강에 쉽사리 공헌할 수 있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동기는 소극적이되 그 결과는 적극적인 것이니 무심히 태워 물은 담배 한 개, 소홀이 꺼버린 성냥 한 개비에도 전쟁을 더디게 만드는 요마가 깃드는 것이다.
우선 이기고 나서! 이것이 우리 살림살이의 길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옷치레, 배부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든 개인적 욕망은 우선 이기고 나서 볼 일이다.
나아가자 1억 특공대! 말로만 듣던 적(敵)은 우리네 대문간 까지 닥쳐왔다. 언제 우리 머리에 폭탄을 내려뜨릴지는 모른다. 우리 1억 특공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 돌파하자. 승리의 깃발을 날리는 날이 이 전쟁이 끝나는 날이다.
우리는 죽어도 이겨야 한다.
<출전 : 「나아가자!! 一億 特攻隊(卷頭言)」, '新時代' 제5권 1호, 1945년 1월 1일, 10~11쪽>
5) 숙망의 징병제 실시되다(권두언)
5월 9일 이날로 2천 4백 만민의 숙망(宿望)은 이루어졌다. 성국 이래의 대건설전(大建設戰)인 대동아전쟁에 명예있는 제국 군인의 일원으로 용약(勇躍) 뛰어 나갈 날이 왔다. 이제 참된 신민이 된 것이다.
천추에 빛날 무훈을 세워 홍은(鴻恩)에 보답할 길이 열린 것이다.
앞으로는 황민(皇民)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금도(襟度)94)를 가지고 전심전력을 다하여야 되겠다.
<출전 : 「宿望의 徵兵制 實施되다(卷頭言)」, '新時代' 제2권 6호, 1942년 6월 1일, 15쪽>
94)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도량.
6) 병제 70주년과 조선징병제
무릇 무위도식(無爲徒食)으로 세월을 송영(送迎)하는 자에게 근근 일일이라도 이것을 허송하자면 극히 장구할 것이나 촌음(寸陰)이라도 애석히 하여 사업에 골몰하자면 시간의 부족을 의외에 통감하게 되는 바이다.
고성(古聖)도 세월은 ‘여류수재(如流水哉)’라 하였지만 연년세세(年年歲歲) 우리의 경험을 소급(遡及)하여 비추어 보면 금년 같이 빠른 해도 일찍이 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덧없이 흐르는 광음(光陰)의 시속을 뉘 모르겠느냐마는 이제 새삼스럽게 그것이 상기된다는 것은 우리 생활이 노력의
1년이었다는 것을 시사(示唆)95)하는 것이다.
과거 1년 우리는 공고(鞏固)한 결의와 심심(深甚)한 활동 중에 그 지성(至誠)을 다 바쳐 왔다.
과거1년을 회고할진대 대결전체제 속에서 오직 성전의 완수를 기필(期必)하고 지나온 노력의 1년이었다.
1억 국민이여! 명기(銘記)하라. 12월 8일 이날을 숙원(宿怨)의 구적(仇敵) 영미(英米)에 대한 선전의 대조(大詔)96)를 배수(拜受)한지 이래 만 1년 어능위(御稜威)와 충용무비(忠勇無比)한 황군장령의 역전분투(力戰奮鬪)로 세계의 지도는 변경되고 있어 황국의 전도(前途)는 양양(洋洋)히 전개 되려 한다.
대조를 배수한 그 순간부터 1억 동포의 가슴(胸) 속에도 필승의 통렬한 직관과 심각한 결의가 약동하는 가운데전 생활의 초점을 오로지 미영 격멸에 두고 전 국민이 일체가 되어 진력을 다 해 왔다.
그것은 물론 숭고무비(崇古無比) 우리 전통정신의 발로이지만 특히 금차 대동아전쟁이 황도 일본의 대도의를 세계에 현양(顯揚)하고 만방 도민에게 각각 그 자리를 얻게 하는 팔굉위우(八紘爲宇)의 대이상을 사강(四疆)에 떨치는 성전(聖戰)인 동시에 대동아의 해방전이라 1억 국민의 노력과 결의가 철석과 같은 바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금년 생활은 성전완수를 목표로 하고 일심전력의 봉공을 다해왔고 또 이후에는 더욱이 이와 같은 정신이 빛날 것이라 믿는 바이다.
대동아전쟁에 있어서의 황군의 혁혁한 전과는 어능위하의 일선 장령의 분투와 노력이 큰 바가 있는 것은 누누이 설명할 바도 없거니와 더 나아가서는 금일 정강(精强)의 기초가 되는 병제발포 상시의 건군의 의의를 탐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치 금년의 1872년 징병제 발표 이래 70년에 해당하는 해다.
멀리 일·청(日·淸), 일·러(日·露)의 양대전역(兩大戰役)을 비롯하여 근자(近玆)에는 만주사변(滿洲事變)·지나사변을 거쳐 금차 대전 등 미증유의 국난에 조우할 때마다 충성용무(忠誠勇武)의 황군의 진가를 발휘하고 항상 경이적 전과를 나타내는 것도 실로 우리 징병제의 진가를 발휘한 것이며 국민일체의 우리 제국 전통정신으로써 팔굉위우의 대이상에 매진하고 있던 것도 그의 발현이다.
우리 제국의 병제는 만방에 관절(冠絶)97)한 국체에 기인하여 임금을 모시는 국민개병(國民皆兵)의 진의에 의하여 건설된 것이다. 실로 유구 3천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 하에 연면(連綿)하게 계속해 내려온 숭고한 국민도의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홍업(鴻業)을 베풀게 되자 아국 본연의 자태를 발현한 것이 곧 1872년의 징병제 발포로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이 그 근본에 있어서 타국에 견주어 볼 수 없는 지고지대(至高至大)한 병제(兵制)이므로 금일
95) 미리 암시하여 일러줌.
96) 조직, 조서, 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
97) 가장 뛰어나 견줄 사람이 없음, 으뜸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뛰어남.
과 같은 필승 일본의 현상을 ☐성해 내인 것이다. 적국 미영(米英)등은 당황(唐慌)하게 금차 전쟁을 맞이하여 근근히 징병제도를 채용하고 또는 징병하기 위하여 강제발록제(强制發錄制)를 채용하게 된 것에 비하면 우리 제국 병제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하여야 될지 감격 특히 무량한 바가 있다.
이제야 말로 대동아전쟁은 바야흐로 본격적 단계에 들어갔으니 1억 국민의 진충봉공(盡忠奉公)의 대정신 하에 총력을 집결할 필요가 금일보다 더할 바 없다. 70년 병제의 묘(妙)를 무쌍(無雙)히 발휘시킬 때가 오고 만 것이다.
이때 우리 반도에 징병제가 시행되며 반도 동포도 역시 황군의 일원으로서의 영예에 욕(浴)하게 되었으니 성은에 감읍하여 마지않으며 박두한 1944년도 실시기를 앞에 두고 우리 병제의 진의를 체득하여서 성지(聖旨)를 받들지어다.
‘임금님’을 섬기며 ‘몸’을 바치고 ‘나라’를 위하여 ‘나’를 희생시키는 마음이나 ‘중(衆)’과 행동을 같이 함으로써 ‘욕(慾)’을 억제하는 ‘얼’이나 이 모두가 우리에게는 얼마나 결핍하였던가.
이와 같은 정신의 함양은 인류에 있어서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수양의 길이며 또한 나 개인의 인격을 향상시키는 데도 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으니 만약 불연(不然)하다면 제 아무리 물질이 풍부하고 과학이 정비되었다 할지라도 어찌 국가의 융성을 바랄 수 있겠으며 지도자로써 자처할 수 있으랴. 따라서 병합 이래 역대 총독의 통리(統理)하에 다년 황국신민으로서 수련에 노력해온 조선동포가 황군요원이 되는 광영을 입게 된 것은 일본적 정신을 최종적인 형태에서 체현시킬 기회를 파악한 것이니
제도 실시 후의 성적(成績)이 양호(良好)할진대 그 전도는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 있다고 확언한다.
끝으로 우리 병제의 정신은 ‘권리’의 주장, ‘의무’이행도 아니며 다만 ‘멸사봉공(滅私奉公)’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를 재삼 제언한다.
<출전 : 「兵制七十週年과 朝鮮徵兵制(社說)」, '新時代' 제2권 12호, 1942년 12월 1일, 19쪽>
7) 장정의 길, 순충봉공(殉忠奉公) 있을 뿐 -징병제도실시기념일에 제하여
국민 총돌격의 의기 불타는 가열(苛烈)한 전국(戰局)하에 반도민중은 광영과 감격에 넘치는 징병제실시기념일을 맞이하여 성전완수의 신념을 한층 굳게 맹세하는 바이다.
작년 8월 1일 반도에 마침내 징병제가 실시되었을 때 우리의 감격, 그 환희는 얼마나 하였었던가.
오랫동안 문약(文弱)에만 흐르던 반도 민중이 용맹하게 황위선양(皇威宣揚)의 총검을 잡게 되는 감격이며, 폐하의 적자(赤子)로서의 자격을 완미(完美)하게 된 감루(感淚) 넘치는 최고 최대의 환희인 것이다.
실로 과거 1년 동안 2천6백만 반도민중은 이 감격과 환희 속에서 살아왔으며 이 영예로운 징병실시의 역사로 하여금 유종의 미 있도록 모든 노력을 집주(集注)하여 온 결과, 반도 장정은 징병검사도 순조로이 진행하여가 만반의 용의(用意)98)로써 마침내 광영의 첫 입영도 머지 않은 날로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전국(戰局)은 처창가열(悽愴苛烈)을 극(極)하여 더욱 긴박성을 띄우고 있다.
이때에 있어서 입영을 앞둔 반도 장정의 의기는 모든 감격과 환희를 충성의 불덩이로 뭉쳐 폐하의 고굉(股肱)으로서 순
98) 어떤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음. 또는 그 마음.
충봉공(殉忠奉公)할 단심(丹心)을 연마함에 용왕매진(勇往邁進)함이 있을 뿐이오. 전 민중은 모든 힘을 다하여 이에 보조를 맞춰 협력하는 각오를 다시 명심하는 바이다.
<출전 : 「壯丁의 길, 殉忠奉公있을 뿐 -徵兵制度實施記念日에 際하여-」,'新時代' 제4권 8호, 1944년 8월 1일, 7쪽>
7. '춘추'의 선전 취지
1) 청년조선의 영예 -자라가는 육군지원병제도
5회째의 입영
청년조선의 영예와 감격의 표상인 육군지원병훈련소에서는 지난 11월 27일에 제5회 수료식을 장엄하게 거행하였고 이번 수료생 1천여 명은 29, 30일 양일(兩日)에 원기왕성하게 각 부대에 입영하였다.
이 지원병제도는 미나미(南) 총독 시정의 대영단(大英斷)과 총후조선의 열성에 의하여 그 성과가 점점 양호하여 가는데 작년도 모집 인원은 3천명이 있음에 대해 응모자 8만 5천명 이라는 초기록을 보였고 그 중에서 2천명을 엄선하여 제1기생으로 1천명을 훈련시킨 것이다. 이 1천명은 4개월 동안 경성부외 양주군(楊洲郡) 노해면(蘆海面)에 있는 지원병훈련소에서 심신 양면으로 맹훈련을 받았고 수료식 당일에는 지축(地軸)도 흔들리게 씩씩한 분열식(分列式)과 목검의 황국신민 체조를 실연하여 청년 조선의 기염을 올리고 동양수호의 신념을 굳게 하였다.
앞으로 이 지원병제도의 더욱 확충이 기대되는데 젊은 건아(健兒)들의 쟁선지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원병제도는 어떤 것
조선통치사상 획시기적인 사실의 하나는 육군특별지원병 제도의 실시다. 그러면 이 지원병제도는 대체 어떤 것인가. 여기에 그 개요를 소개하여 앞으로 입소자 혹은 부형들에게 예비지식을 삼고자 한다.
이 지원병제도는 총독부 정치시정 이래 29년 만에 조선 동포의 적성(赤誠)이 표현된 것이므로 연령17세 이상의 남자로 육군병지원자훈련소를 나온 자를 육군특별지원병으로 하여 제국 육군의 현역 또는 보충 병역에 편입시켜서 군무에 복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지원병이 되자면
육군지원병은 만 17세 이상의 남자이면 누구나 다 지원할 수 있는데 지원자는 우선 육군병지원자훈련소에 입소시켜서 일정한 훈련을 받게 한다. 입소는 채용 적격자에 대해 각 도청과 조선군에 2차의 전형을 마친 후에 허가한다. 이에 채용하는 적격조건은 연령 만 17세 이상, 신장 155㎝ 이상으로써 체격은 갑종(甲種), 또는 제1을종(乙種), 소학교 4년 수료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지조(志操)가 견고하며 가계(家計)가 그다지 곤궁하지 않는 자임을 요한다.
지원병훈련소
이 훈련소는 육군특별지원자에 장래 군대생활상 필요한 예비훈련을 시키는 관립 훈련소로서 경성부외 양주군(楊州郡) 노해면(蘆海面) 공덕리(孔德里)에 설치되어 있다. 종래 생도를 매년 6월과 12월에 입소시켜서 전후기생(前後期生)으로 나누고 수료와 동시에 전기생(前期生)은 현역 보병에 후기생(後期生)은 보충병으로서 고사포대(高射砲隊), 경중대(輕重隊) 등에 교육 소집시키고 병종(兵種)은 체격과 자질에 의하여 결정한다. 그리고 훈련 기간은 전기 후기가 다 6개월이 있으나 1940년도부터 채용인원을 일약 3천명으로 증가하고 1기 천 명씩 3기에 나누어 훈련시키기로 되었기 때문에 훈련기간, 4개월로 되어있다.
훈련의 일과
훈련생은 엄숙한 입속식에서 분골(粉骨)하여서 충절을 다하고 훈련에 정려(精勵)할 뜻(旨)의 선서를 마치고 훈련생활에 들어가는데 그 생활은 병영생활과 다름없고 규율있는 단체생활을 통하여 정신의 수련, 육체의 단련을 다하고 다른 날 황국의 군인으로서 완전히 그 임무를 다하도록 지도한다. 규율이 바른 단체생활은 교련에 의하여 훈치되는 것이므로 교련이 중시되는 것은 물론이나 학과도 게을리 하지 않아서 고등소학교 정도를 기준으로 국어력99)의 충실과 정신훈육에 중점을 두고 완전한 황국신민육성을 기하고 있다.
지원병의 최고 오장(伍長) 신정재식(新井在植)군의 영예
본적을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상동면(上東面) 녹전리(碌田里)에 둔, 현재 〇〇부대 특별지원병 신정재식[구명(舊名) : 신재식(辛在植)]은 11월 1일부로서 조선에 지원병제가 실시된 후 처음으로 오장(伍長)이 되었다.
동군(同君)은 1920년 7월 29일에 출생하여 향리의 소학교를 졸업 후 가사에 조력하다가 지원병에 지원하여 재작년에 훈련소를 졸업하고 현재에 이르렀다. 재소(再所) 중에는 모범생으로 동료의 존경을 받았고 함경도 ☐☐☐☐에도 선발되어 일신을 국가에 바쳤던 것이다. 그 가정에는 부모형매(父母兄妹) 9인으로 그 부친도 부락에서 모범인물로 존경을 받고 있다 한다.
<출전 : 「靑年朝鮮의 榮譽-자라가는 陸軍志願兵制度-」,'春秋' 제2권 新春號, 朝鮮春秋社, 1941년 2월, 32~34쪽>
99) 일본어 실력을 뜻함.
2) 선만일여(鮮滿一如)의 기본방침
선만일여(鮮滿一如)의 이상실현에 한뜻으로 매진하고 있는 미나미(南) 총독은 4월 9일 만주국을 정식으로 방문하고 관동(關東) 매진(梅津)군사령관과 장(張)국무총리와 격의 없는 의견교환을 전후 5차에 걸쳐 행한바 마침내 미나미(南)·매진(梅津)회담의 내용은 지난 22일 만선(滿鮮) 양 당국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이번 회담은 1936년 10월 29일 미나미 총독과의 우에다(植田) 전 군사령관과 도문(圖們)회담에 의하여 수립된 선만일여(鮮滿一如) 방침을 재차 강화 조장한 것으로 그 내용은 선만일여 강화조장책으로써 기본 방침으로 하고 다시 지도요강을 설정한 후 실시방침을 착착 실현하는 삼단계로 된 것이다.
그 중점은 제2. 요강 중 ①과 ④항으로 이는 무엇보다도 주목된 바 미나미(南), 매진(梅津)회담의 내용 전문은 다음과 같다.
회담 내용 전문(全文)
1. 기본방침
동아공영권확립의 근간인 일본·만주·지나 일체의 중추인 일(日)·만(滿) 일덕일심(一德一心)이 국시(國是)에 기반하여 선만일여의 관계를 강화조장하는 데 있다.
2. 지도 요강
① 만선일여의 정신은 제1차 도문 회담 이래 만선간의 국방·행정·경제·산업·교통·무역 등을 조장하여온 성적을 비추어 금후 더욱 이것을 강화 조장 하는 것으로 한다.
② 만주 측에서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조선통치의 근본 방침을 존중하여 이에 전폭의 협력을 함과 동시에 조선 측에서는 만주국의 일덕일심의 건국정신, 민족협화의 지도를 존중하여 이에 전폭의 협력을 하기로 한다.
③ 일본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만조선인은 황국신민인 본질을 기초로 하고 선량한 만주국 인민인 교양을 하기로 한다. 이를 위하여
(가) 인정, 풍속, 습관이 다른 전통을 급격히 변경하지 않고 점차 선도할 것.
(나) 청소년 훈련, 학교생도의 연성을 통하여 가정과 사회에 삼투(滲透) 시킬 것
④ 조선과 만주 간에 안건 처리에 있어서는 선만일여 정신에 즉하여 각 문제마다 실제에 즉하도록 협의 해결한 것으로 한다.
⑤ 조선과 만주 간에 상호인식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효적절한 구체적 방책을 강구하기로 한다.
⑥ 선동적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반도의 황국신민화에 대하여 방해를 가하고 또 만주국의 민족협화의 지도를 파괴하며 총후 교란을 기도함과 같은 사상의 동향에 대하여서는 엄중히 취체(取締)100)하기로 한다.
100) 단속.
3. 실시 방책
① 조선과 만주간의 안건의 현지 처리를 위하여 간담회협의회를 개최하는 등 적의(適宜)의 조취를 강구할 것.
② 전 항목적 달성을 위하여 인사교류에 관하여서도 고려를 할 것.
③ 조선과 만주 관공리와 민간 유력자의 상호 실지(實地) 시찰과 격의없는 간담에 의하여 개인적 접충(接衝)을 될 수 있는 한 많게 하고 현지의 실정에 대하여 상호로 인식을 깊게 할 것.
④ 매년 교호(交互)로 조선만주경제 교육 개척 등 각 부문에 긍하여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긴밀한 연대를 도모하고 선만일여의 기본 방침 달성에 유감없도록 할 것.
⑤ 상호로 관련 있고 또는 장래에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항상 지체 없이 상호 통보 할 것.
<출전 : 「鮮滿一如의 基本方針」, '春秋' 제2권 5호, 1941년 6월>
3) 조선청년의 나아갈 길, 각계인사의 제언
오늘 전시 하에 있어서 조선청년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어떤 훈련이 필요하며 무엇을 실천해야 할것인가?
또는 조선 청년에 특별히 부탁할 말은 무엇인가? 여기에 몇 분 선배의 지도 원리를 전하여 조선 청년의 분발을 촉구하는 것이다.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사상을 가지라
연희전문학교장 이동치호(伊東致昊)101)
우리 반도청년이 확실히 인식하고 각오할 것은 반도 민중의 운명인 것이다. 이 민중의 운명은 일본제국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조선청년들에게 아직까지도 부족한 점은 훈련방면일터인데 이 훈련에 대해서 선결문제는 전도가 양양한 청년으로서 전진할 목표와 방향을 확인하고 우리도 일본 청년들과 같이 살아도 제국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제국을 위하여 죽는다는 확고 부동한 각오와 결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요령이 미정하여 갈팡질팡 방황하는 훈련이 부족한 점을 먼저 우리는 반성하여 확고한 목표를 세운다면 지금까지의 결점은 없어 질 줄 안다. 일본에 가서 유학하는 반도학생이 약 1만 8천여 명이나 된다는데 들리는 소식이 허송세월하여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 많아 경찰 당국에 신세를 끼친다고 하는데 내 생각 같아서는 조선학생들의 소질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표가 미정되어 방황하고 있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 도전(途前) 참으로 인식한다면 확정된
101) 윤치호의 창씨명.
목표 하에 수양은 자연 따라올 것이다. 인간에게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물론하고 훈련에 필요한 것인즉 석금(昔今)을 통하여 건전한 신체와 건전한 사상은 훈련의 표어(標語)라고 해오는 것이다.
이 전시 하에 처한 훈련의 표어도 역시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사상일 터인즉 좀 더 그것을 강조하여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할 것이다. 건전한 신체라 하면 보신(保身)만으로 오해하는 이가 있으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 제1선에서 분투하는 용사들과 같이 근로하는 정신으로서 어느 방면으로나 막연한 생각만을 말고 좀 더 적극적인 실천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 한다. 다시 말하면 신동아 건설에 위반(違反)되는 사상은 청산해야겠다.
예를 들면 민족주의라든지 공산주의라든지 향락주의라든지 도개심(盜開心)을 철저히 버리고 즉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이상(以上)도 말했지만 우선 확고한 방향과 목표를 세워 방황하지 말고 건전한 심신으로 근로하는 훈련을 하기를 특별 부탁하는 바이다.
명확하고도 정확한 점을 배우라
경성제대 총장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
인간의 각 방면이 인간 그들 길을 지지해 나가는데 다 필요하듯이 각각 자기의 맡은 바 직무 그 직분에 각자가 충실한다는 것은 한 사회를 원활하게 할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부분이나 고저(高低)를 물론하고 다 필요한 것이 하나도 버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이 전시 하에 있어서는 기왕에 가지고 있는 눈과 귀가 더 잘 보여야 되고 더 잘 들어야 될 것이겠다. 즉 역할을 더 잘해야 되겠다는데 불과하다.
더욱이 조선청년들에게 있어서는 물론 30년 전의 청년과 현재의 청년과는 너무도 차이나는 발전을 보이고 있어서 감탄할 만큼 잘들 하고 있으나 어느 일부를 보면 그저 노라리 식으로 아무 의식도 없이 허송세월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가끔 호텔 같은데 식사를 하러 가보면 거기 앉아 식사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조선청년들인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골프장 같은데도 거의 조선 사람들이 회원이 많으며 자동차를 타지 말자는 명이 있음에도 불고하고 턱 타고 다니는 일부의 청년들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물론 돈 많이 가진 사람들일 터인데 그렇게 자기의 안일과 향락을 위하는 돈이라면 좀 더 의미 있게 쓰는 것이 더 가치 있지 않을까 한다. 무의식적으로 무의미하게 돈을 쓰는 것보다 정 쓸데가 없다면 비행기 만드는데 헌금을 한다든지 해서 좀 더 의미 있는 사용을 하는 연각(練刻)도 했으면 좋겠다.
때론 대학에서 보면 학과(學科)하던가 여러 방면에는 조선학생들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유머스러운 일은 학교명령으로 삭발(削髮)을 해라 할 것 같으면 일본학생들은 순응하고 있는데 조선학생은 멀지 않아 결혼을 하겠으니 못 깍겠소 하는 등의 구실로 명령에 정정당당히 순응하지 않고 모발 그 물건에 애착을 가지는 경향이 보이는데 물론 이것은 일반 조선청년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일부의 예를 들어 본 것인데 즉 일본청년들의 명확한 점, 정확한 점에 아직도 좀 못 미치는 점이 있다고 본다.
그런 까닭에 모든 것을 보며 현재 참으로 잘들 해 나가고 있는데 좀 더 의미 있는 세월을 보내며 현재의 노력을 좀 더 강조해 가라고 부탁하고 싶다.
청년의 긍지를 가지고 철한금인(鐵漢金人)이 되라
중동(中東)학교장 최규동(崔奎東)씨 드림
긍지와 정당한 자존심을 가지라.
대체로 요새 청년들을 가만히 보면 문약(文弱)에 흐르고 있는 감이 잇다. 우선 신체부터 약하다.
예를 들어 보면 때로 몇 백 명 학생을 세워 놓고 몇 시간 강연을 계속 하려고 하면 졸도하는 학생이 수두룩 하는 것을 보게 되니 몹시 애처로운 일이다. 우선 문약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느낀다.
옛 시에 ‘백련차신성철한(百鍊此身成鐵漢) 삼함기구학금인(三緘其口學金人)’이란 구절이 있는데 즉 백번 단련한 이몸이 쇠몸을 이루어야겠고 세 번 입을 봉했으니 금으로 만든 사람을 배워야겠다는 것이 이 전시하의 청년에게 주고 싶은 말이다. 백번이라도 신체를 단련하여 쇠같이 강한 몸을 만들어야겠고 입은 함구를 하여서 실천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실천을 가지고서 봉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특별이 부탁하고 싶은 것은 ‘조선청년들이어 사내스럽자’는 것이다.
풀이 죽고 어깨가 쳐지지 말고 긍지를 가지고 자기 검토를 자기가 해서 정당하게 솔직하게 자존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야비하고 그 천박한 것 적은 것을 문제시하지 말고 좀 더 큰 것 사내스러운 것에 착안하여 특별히 이 전시 하에 조선청년들은 용기를 가지라고 부탁하고 싶다.
노무(勞務)는 국민의 의무다
국민총력연맹 오천교원(烏川橋源)102)
재래의 조선청년들에 비하여 최근에 와서는 조선청년들도 훈련방면에 있어서 매우 좋아졌다.
일반 훈련방면에 있어서 사실 감격할 만큼 진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전시 하에 있어서 더욱이 인적자원을 풍부히 가져야할 모든 점으로 보아서 보다 더 규율 있는 행동을 해야 되는 시기인 만큼 인고단련(忍苦鍛鍊)의 훈련이 계속 돼서 진보해야 할 것이다. 훈련에 있어서는 일정한 통제와 규율 하에서 첫째 극기의 정신과 둘째 적극적 진보성이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훈련의 구체적 방면인 실천에 있어서는 종래의 노무(勞務)에 대한 관념을 다소 정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무는 천한 사람 아랫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건강한 사람은 다 노무를 하지않으면 안 되는 관념을 가져야 되겠다.
흔히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정신과 육체를 그리 분리할 수 없는 상 싶다. 정신노무를 하는 사람도 괭이와 호미를 쥐고 땅을 파보는 육체노동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노무자가 다 되어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공익상 노무를 당할 때는 도피하지 말고 자진해서 충심(衷心)으로 일하는 각오를 해야 되겠다.
노무는 국민으로서의 공민으로서의 의무인 것이다. 일의 종류는 귀천이 구별이 없다.
자진해서 해야 될 것을 각오하는
102) 정교원의 창씨명.
동시에 실천해야 되겠다.
비단(非但) 훈련방면뿐만 아니라 조선청년들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은 좀 더 충심으로 진실로 아무일에도 충심으로 할 것을 부탁해 마지않는 바이다.
<출전 : 「朝鮮靑年의 나아갈 길, 各界人士의 提言」, '春秋' 제2권 9호, 1941년 10월>
4) 병역, 국어, 생산(권두언)
지나사변에서 대동아전쟁으로 동아의 전국이 확대된 후 충용한 제국장병의 분투선투(奮鬪善鬪)에 의하여 연일(連日) 연야(連夜) 혁혁한 전과를 거두어서 그 종국적 목표적인 동아 내지 세계 신질서의 건설이 실현되어 가는 것은 자못 경하스러운 일이며 한편 이 대동아전쟁과 함께 세계 전쟁의 일환(一鐶)이 이 되어 있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더욱 심각 격렬한 중에서 점차 승리를 얻고 있는 연방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하여 적잖이 감사하는 바이다.
그러나 적 미영은 금일까지 세계의 패권을 잡고 있었던 만큼 아직도 상당한 전력, 국력을 가지고 있어 그를 철저히 격멸 굴복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완전한 승리를 가져온다고 할 수 없는 터이니 동서(東西)에서 일본·독일·이탈리아는 기타 연방과 함께 합심 협력하여 적을 포위하고 혹은 분단(分斷)하고 혹은 제압하여 그들을 격파한 후에 비로소 최후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최후의 승리를 가져오는 길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군관민이 물심양방으로 총동원하여 모든 것을 국가에 바치고 모든 것을 전장에 보내는 길이 있을 뿐이겠다고,또 현재도 그렇게 실천하고 있는 터이지만은 금일 조선이 당면한 긴급한 과제로써 중점적으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먼저 국어의 보급, 징병제의 취지철저, 생산력의 확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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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의 국력과 전력(戰力)은 그 국민의 지식과 기능에 비례되는 만큼 국민의 교육보급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원칙론이 되겠거니와 동일한 국민으로서 그 국어를 해득(解得)하여야 하겠다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현금 조선에는 아직도 초등 교육이 보급되지 못한 관계로 전 인구의 약70%가 문맹이오, 80% 이상이 국어를 해득하지 못할 터이니 앞으로의 학령 아동의 국어해득은 머지않아 실시되는 의무교육으로 해소될 문제이거니와 취학의 기회를 놓친 성인층의 국어해득은 위정당국의 권도적(權度的) 시책과 각자의 자진한 수습(修習)에 의하여 적어도 국어를 해득하지 못하는 문맹을 하루속히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 국어보급은 징병제의 전제도 되는 것이니 국어를 해득하지 못하고서 어찌 영예스러운 제국의 군인이 될 수 있으랴.
우리가 대망하던 조선의 징병제도 드디어 오는해부터 실시되게 되었으니 1944년이야말로 역사에 빛나는 영광스러운 해다. 이런 영광스러운 일을 한해 앞두고 그에 대한 각오와 준비가 철저하여 모처럼 실시되는 징병제를 더욱 빛나게 하여야 할 것을 다 명심하여야 하겠다.
무릇 병역이라는 것은 국민된 자의 의무요, 또 가장 광영스러운 일인데 이런 의무와 광영이 조선 동포에도 돌아오게 된 것은 오직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를 받자온 것이니 이 성은에 보답하는 길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또 튼튼히 하여 병역에 복무함으로써 충용을 다하는 것 뿐이다.
조선에는 오랫동안 병역이 없었기 때문에 일부 부로들은 병역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있을지 모르나 이들은 먼저 숭고한 병역의 의무를 깨닫고 각 가정마다 건병건민(健兵健民)을 육성할 것이며 더구나 병(兵)에 징집될 자는 진충보국(盡忠報國)에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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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前線)의 장병들은 나무 열매를 따고 풀뿌리를 뜯어서 적어도 독이 들지 않은 물건이면 다 주워서 굶주림을 견디고 해수(海水)를 마셔서 염기(鹽氣)를 취하였다.
또 용수(榕樹)103)에다 총검을 찔러서 혹은 ‘정글’의 갈(葛)104)을 군도로 끊어서 거기서 나오는 물로서 목을 축이고 여러 주야(晝夜)를 보낸 사람도 있다.
이것은 지난 2월 10일 의회에서 보고한 남태평양 작전경과의 1절이다.
전선장병의 신고(辛苦)가 이러하거늘 총후에 있는 자 온갖 물자를 절약하려니와 온갖 생산에 힘써서 한 개의 무기와 한 가지의 군수품이라도 더 만들어서 전선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전쟁에서는 장병의 충용한 정신력이 근원이 되지만은 이 정신력을 충분히 발휘함에는 경제력도 그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도조(東條)내각 총리대신은 진두(陳頭)에 서서 초중점의 결전경제체제를 강화하고 실시에 옮기고 있으며 고이소(小磯) 총독도 부임 이래 각 부문의 생산력 확충을 강조하고 벌써 각종 시책을 단행하고 있는 터이다. 돌
아보면 조선에는 농(農)·공(工)·광(鑛)·수산(水産)·임업(林業)의 자원이 풍부도 하려니와 작금 근대적 개발에 의하여 약진적으로 발달되어 가는 터이니 여기에 인적 자원을 동원하여 전시생활에 필요한 생산증강에 나아간다면 세계에 부를 자랑하던 미영(米英)도 굴복하고 말 것이다.
바라건대 지금에 국민된 자 전선장병의 신고를 생각하고 이 중대 시국을 돌파하여 미영의 야망을 중도에 파쇄(破碎)하고 세계의 신질서가 건설되는 날이 하루라도 속히 오기를 기약하여야 하겠다.
<출전 : 「兵役, 國語, 生産(卷頭言), '春秋' 제4권 3호, 朝鮮春秋社, 1943년 3월, 16~17쪽>
5) 학도의 출진에 입하여(권두언)
조선에도 내년도부터 징병제를 실시한다는 시정사상(施政史上) 획기적 법령이 발표되자, 이 땅의 방방곡곡에 감격의 물결은 넘쳐 흐른 것이 이미 오래된 일이다.
제국 국민인 조선청년으로서 ‘추(醜)한 방패(御楯)’가 되지 못함은 천추의 한일 터인데 징병제 실시로 말미암아 무상(無常)의 영광에 욕(浴)할
103) 뽕나뭇과에 속하는 아열대성 낙엽 교목.
104) 칡을 말함.
수 있음은 물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귀중한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이 위대하고도 엄연(儼然)한 사실에 우리는 얼마나 감격하였던가. 이 감격이 그칠 줄 모르는 중에 다시 특별지원병제실시로 인하여 징병적령에 벗어나 이 광영에 욕(浴)할 기회가 없던 우리 학도들까지 출진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영광의 균점이라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우일지 모르나 현재 학업에 정진하고 있다는 데에 미련을 두고 주저준순(躊躇浚巡)하는 학부형과 학도가 혹은 있을까 두려워하는 바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국민으로서 민족으로서 생을영위하고 또한 확고(擴古)의 우리 이상인 팔굉일우(八紘一宇),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해서는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싸움의 승리자가 되자, 매일 보도되는 전승보(戰勝報)에만 도취되어 일각이라도 방심을 해서는 아니 된다. 학문과 개인의 행복도 국가와 민족이 건전유지 되고서야 비로소 운운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학업을 일시 버리기는 하나 후일 위대한 승리자로서 다시 책상을 대할 때의 감격과 환희를 지금 상상이라도 해보라. 어찌 용약(勇躍)지원의 굳은 결의가 용솟음치지 아니할 것인가.
그리고 부모된 사람으로서도 자기 아들이 국가를 위하여 피를 흘렸다는 인생의 최대의 의무와 영광을 수행했다는 것과 이러한 국민총동원의 결정(結晶)으로 우리 민족의 생활권이 확립되고 세계의 지도자가 될 것을 생각해 보라. 어찌 내 아들을 전진에 세우기를 주저할 것인가. “이 어버이에 이 아들”얼마나 아름다운 사실이냐.
특별지원병제의 취지를 이해하는 자 미련을 가질 리 없을 것을 확신하고 학도의 총진군보(總進軍譜)가 고막(鼓膜)을 울릴 날을 기다리는 바다.
<출전 : 「學徒의 出陳에 立하여(卷頭言)」, '春秋' 제4권 10호, 1943년 11월, 19쪽>
6) 학도의 총 출진보
10억 민족의 신망(信望)을 지고
경성제대 山南知資
세계를 황화(皇化)하려는 것이 일본의 이상이며,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를 모조리 황화하려면 숭고한 황군의 실력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적 미영(米英)은 병력의 충실과 무기의 확충에 광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제압하고 격쇄(擊碎)함은 세계 황화를 위한 우리들의 의무입니다.
지난 10월 2일에 학도들에게도 동원령은 내렸습니다. 법문계(法文系)의 일본인 학도는 전부 전열(戰列)에 달리고 있는데 어찌 우리들만이 그대로 학원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들도 특별지원병이 되어 동아시아 민족 10억의 절실한 신망을 지고 세계의 결전장에 뛰어 나설날은 왔습니다.
오랫동안 짐승과 같이 취급 받아 오던 동아 모든 민족을 미영(米英)의 구속으로부터 해방하고 다시 그들과 손을 마주 잡고 나설 날은 왔습니다. 우리들의 나갈 길은 명확합니다.
세계의 결전장을 항햐여!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실현
경성 법전(法專) 夏山正義
현재 나의 형이 황군의 일원으로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집에 남아서 늙은 부모나 도우면서 집일을 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적은 이제 맹렬한 반공작전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전국(戰局)은 더욱 중대화 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자기 한 개인이나 한 가족에 고착하여 운운할 때는 아닙니다.
오직 전쟁 목적을 위하여 총을 잡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때입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는 애국심과 도의심(道義心)에서 우러나서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현하기에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대동아전쟁에 있어서도 내선일체가 되어 적 미영(米英)을 격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적 격멸을 위하여 내지인 학생들과 같이 총을잡고 제1선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하여 이 성업을 완수하면 내선일체는 자연히 실현되리라고 믿는 바입니다.
정심(征心)은 철석(鐵石)과 같다
보성전문 松原寬
지금 일본 출신 장년학도들은 읽던 책을 접어놓고 일제히 군문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감히 바라지도 못하고 있던 영예의 출진 명령이 뜻밖에 우리들 반도 학도들에게도 내린 것입니다.
우리들 앞에도 오랫동안 장 속 깊이 갇혀 있던 날 짐승 앞에 무한히 큰 대공(大空)이 열리는 듯이 눈부신 재생의 길이 열리었거늘 무엇 때문에 한시각인들 주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할아버지는 방에서 돌아갔었지만 나는 소년 항공병이 되어서 하늘에서 죽겠습니다.’
이것은 열 세 살 먹은 손자가 할아버지의 장례 때에 한 말입니다.
중대한 결전의 모습은 이런 순진한 동심에까지 철석과 같은 결의를 갖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철모르는 어린이 말 가운데서 우리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우리들이 출진할 때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부모님의 자애(慈愛)이며 조부모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외아들인 나로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평시에도 아들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차마 막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우리가 조국을 위하여 전장으로 가는 중대한 길을 어찌 막을 수가 있으랴. 나는 주저 없이 외칩니다. 우리들이 갈 길은 오직 하나 정전(征戰)의 대도(大道)뿐입니다.
방관은 불허(不許)
연희전문 松江嘉城
마침내 우리가 일어설 날은 왔습니다. 궐연(蹶然)히 일어서서 세계 창조의 대 사명을 완수할 날이 왔습니다.
우리는 현재 용약(勇躍) 교문을 등지고 성전(聖戰)의 제1선으로 달려가 끓어오르는 젊은 피로 대지를 붉게 물들이며 귀축 미영(米英)을 마음껏 무찔러 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941년 12월 8일선전(宣戰) 대조(大詔)가 환발(渙發)105)된 이래 충용하기 짝이 없는 황군장병의 용전분투(勇戰奮鬪)로 대동아건설은 바야흐로 이루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도 적입니다.
그들은 물자와 생산력을 믿고 온갖 힘을 다 기울여 총 반공(反攻)을 꾀하여 이제야 남쪽 전선에는 처창가열(悽愴苛烈)한 결전이 벌어지고 있음은 여러분이 다 아는 바와 같습니다.
세계 신질서를 세우기 위하여 1억 국민이 3천년의 빛나는 역사를 걸고 싸움을 하고 있는 이때 우리들 반도의 학도들만이 오직 적령기를 지났다는 그 한가지 이유로 한가로이 방관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분연히 궐기할 때가 왔습니다.
특별지원병임시채용규칙발포에 따라 우리도 일본 학우들과 함께 황군의 한 사람으로서 용맹히 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씩씩하게 전선으로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역사를 창조하자
혜화전문 武山忠治
황기(皇紀) 2603년 10월 20일 마침내 우리들의 앞에는 새로운 여명의 날이 왔습니다.
학도 임시특별지원병령! 조국을 위하여 나를 바칠 새 날이 온 것입니다. 역사란 배우는 것이 아니고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힘차게 역사를 창조할 황국의 용감한 청년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환경에 얽매인다는 것은 우리들의 죽음보다 몇 만 배 부끄러운 치욕입니다.
대동아전쟁은 엄숙하기 그지없는 대현실입니다.
우리는 청년의 힘찬 투지로 어디까지나 이 현실을 뚫고 나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현재 세계에는 이르는 곳마다 청년들이 조국을 위하여 총과 칼을 잡고 싸움터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 반도학도들도 빨리 전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총 자루를 힘입게 잡아 숙적 미영(米英)의 귀축(鬼畜)과 같은 심장을 마음껏 찔러버려야 할 것입니다.
후배에게 수범(垂範)할 때
명륜전문 岩本壯雄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 될 일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 비상시국 아래 나라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두 말을 할 것도 없이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서 싸우고 또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감정의 동물입니다.
굳게 결심을 하고서도 자칫하면 약한 인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아직도 결심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선에도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용감한 명장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그들 용감한 조상들의 피를 받아
105) 임금의 명령을 세상에 널리 알리던 일.
왔습니다. 그 증거로 이미 수많은 지원병들이 제1선에서 터럭 같이 가볍게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몸 가운데 흐르는 용감한 피로써 후배에게 모범을 보이며 성전의 초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열성은 드디어 출진케 되었다
성대 예과 柳井哲
나는 지난 명치가절(明治佳節)의 3일을 기하여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에 황군의 한사람으로서 전열에 끼여주도록 지원하였습니다.
일본의 학우들이 징병연기가 폐지됨으로 지금까지 연마하던 학업을 던지고 순국(殉國)에 불타는 열성으로서 출진하려고 합니다.
이제 출진하는 일본인의 형들에 끼어서 지금까지 책상을 마주 놓고 형설(螢雪)의 길을 닦던 우리 반도인 학도들은 이 전진에 참가할 수 없게 되어 밤낮으로 비관하고 있던 바 이제야 우리들도 손을 마주잡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대동아전쟁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빨리 귀축(鬼畜) 미영(米英)을 격멸해 버리는데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 영미격멸에 총출진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줄 믿습니다.
<출전 : 「學徒의 總出陣譜」, '春秋' 제4권 10호, 1943년 11월, 20~23쪽>
7) 최남선(崔南善), ‘성전(聖戰)’의식에의 투철
거국취진(擧國就陣)의 선두로 청년학도의 연신(挻身)을 보게 되었다.
진실로 당연한 의무요, 두 번없을 번듯한 걸음이지마는 이것이 일사(一死)를 필정(必定)하는 일이오. 젊은이 특유의 생활의욕에 대한 적극적 제약인 만큼 일번의 대오(大悟)에 이르기 갖기에는 말 못할 고뇌를 치르는 것이 사실인 양하다.
말하기 어려운 이 고뇌를 몰래 하소연 하러 오는 청년을 많이 만나 보고서 한 가지 고개를 숙이고 어설프게나마 손목을 잡아끄는 것이 근래의 일사무(一事務)이다.
진심의 비오(秘奧)를 피력하는 말인 만큼 다만 형식적 관념론으로써 임할 수 없음은 물론이오.
더욱 이론과 주의로부터 오는 심각한 갈등에는 우리의 둔도(鈍刀)로써 결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일찍 신라(新羅) 석일(昔日)의 국민동원강행기에 당시의 청년심리를 대표하였다 할 귀산(貴山), 추항(箒項) 두 사람이 일세의 고덕(高德)인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가서 이에 대한 필요를 물었을 때 법사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말하고 특히 ‘임전무퇴(臨戰無退)’ 일조를 강조함에 시대 청년의 심저(心底)가 이에 일침에 탁 터져서 아무 지의(遲疑)도 없이 제시광난(濟時匡難)의 대업으로 치진(馳進)하였다.
뒤에 보면 ‘임전무퇴(臨戰無退)’라는 그 구어가 진실로 평범하여 기이한 것 없지마는 당시 청년들에 대한 ‘막망상(莫妄想)’의 통봉(痛棒)106)으로는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천년학도가 와서 문의하는 조목은 다종다양(多種多樣)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종합하여 보면 시국의 진상(眞想)에 대한 의식분열에서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이 나의 죽을 때냐, 죽을 일이냐, 일체를 다 바치고 선선히 눈을 감을 절대경이냐 아니냐에 대한 미혹이 그네들의 가슴을 혼란시키고 있음을 간취(看取)할 수 있다.
비교적 죽음에 대한 외포(畏怖)는 보이지 아니하지만은 죽음에는 양심적 만족을 가져야 하겠다는 의념(意念)이 매우 강렬하다. 일사를 결정하는 마당에 ‘죽는 보람’을 요량(料量)해 봄은 생명의식의 엄숙한 표적으로서 그것을 칭양(稱揚)은 할지라도 결코 비의(非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까지 훈련 또 제시(提撕)에는 이 점에 있어서 꽤 큰 소홀이 있지 아니하였는가를 생각하게 함이 있다.
나는 그네들에게 대하여 임시(臨時) 임시(臨時)하여 다소의 광설(廣舌)을 허비하기는 하지마는 주로 그 행동의 양심성을 감발(感發)하자면 영혼의 어느 모를 어떻게 따라야 할까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子)가 ‘성전(聖戰)’ 의의를 투철시킴에 있었음을 알았다.
성전이란 말은 유행어가 되다시피 상기되지마는 선전대상 된 이들의 이에 대한 감수(感受) 실적은 그리 명백하지 못한 혐(嫌)이 있다.
‘성전(聖戰)’임을 용인하지 못함에 온갖 미장(迷障)이 나는 것이니까 이 점을 일☐맹괄(一☐猛刮)함이 물론 가장 유효한 대증☐(對症☐)이었다.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부터 지나사변 내지 대동아전쟁의 일련적 전개는 진실로 ‘당유불능무(當有不能無)’의 역사적 귀추(歸趨)요, 바꿔 말하면 곧 절대한 천명이랄 밖에 없다. 고금(古今)의 온갖 인연적 약속이 겹치고 쌓여서 마침내 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이 계기를 가지고 세계 역사의 합리적 전환이 행하려 하며 대동아의 해방이 실현되려 하며 인류의 생활이 도의(道義)의 위에 건설되려 하며 신황(神皇)의 대도(大道)가 팔굉(八紘)에 광피(光被)되러 하나니 이러한 것을 ‘성전(聖戰)’이라 이르지 아니하면 다시 무엇이라 일컬으랴.
그야 순연(順緣)으로 이름 받는 이도 있고 역연(逆緣)으로 이를 당하는 이도있어서 ‘☐제감촉(☐際感觸)이 각기 달라 서로 같지 못함(各異不相同)’을 면할 수 없지마는 세계의 일물(一物)치고 이 성전의 대파(大波)에 흔동(掀動)되지 아니할 것이 없고 마침내 결과에 함욕(涵浴)하지 안할 자가 없을 줄을 깨달으면 누구든지 이를 순응하고 이를 협동하는 이외의 다른 일이 무엇이랴.
원래 천운(天運)과 공리(公理)와 대세(大勢)의 외에 따라 각 개의 자유란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진실로 운(運)과 리(理)와 세(勢)일진대 이 앞에서는 각 개적 이유로써 하는 반항이 절대로 허락되지 아니한다.
오늘 날 대동아인으로서 이 성전에 참가함은 대운(大運)중의 대운(大運)임이 다시 의심 없다.
어떻게든지 참가하고야 마는 최후 명령을 받으면 천하에 이 이상의 우망(愚妄)이 다시없을 것이다.
한 청년이 1-2뿐 아니었다.
‘성전(聖戰)이다’ 하는 일념과 함께 대장부의 의기를 나타낼 때가 시방이다 하는 결심을 그대의 미우(眉宇)에 볼 때에 눈에서 더운 물이 솟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새삼스레 ‘성전막의(聖戰莫疑)’의 일구(一句)를 제거(提擧)하면서 아울러 옛 원광법사의 ‘임전무퇴(臨戰無退)’의 4자까지를 진두(陳頭)의 청년학도에게 선물하고 싶다.
<출전 : 崔南善, 「‘聖戰’意識에의 透徹(出陣하는 靑年學徒에 告함)」,'春秋' 제4권 11호, 1943년 12월, 19~20쪽>
106) 좌선할 때 쓰는 방망이. 스승이 마음의 안정을 잡지 못하는 사람을 징벌하는 데 쓰는 방망이.
8) 오무라 겐조(大村謙三), 징병과 지원병
1. 역사적 필연적 숙명
고이소(小磯)총재는 지난 8월 1일 조선 징병제 실시에 즈음하여 반도 청년 일반의 분기를 요망하는 그 열렬한 방송 중에서 “내선은 ‘동근동조(同根同祖)’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면 옛날부터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누구나 아는 스사노노미코토(素戔鳴尊)가 아들인 이타케루노미코토(五十猛命)와 함께 신라의 소시모리(曾尸茂梨)107)로 간 이야기108)라든가, 이즈모(出雲)의 구니히키(國引)전설109), 또 조선 측에서 이야기하자면 신라 제3대의 탈해왕과 재상 호공(瓠公)이 내지로부터 도래한 사람이라는 정설 그 밖에 신대 이후 내선 간에 공통된 각종 전설을 비롯하여 아직도 남은 풍속, 말, 체질, 지하에서 발굴되는 유물 등을 종합해서 생각할 때, 내선 동근동조설이 상당히 강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오늘날의 상식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 상대에는 그 경륜이 조선에 미쳤던 것, 또 삼한의 귀화민이 줄줄이 계속해서 내지의 황민이 되어 긴키(近畿)지방 명족의 약 3분의 1을 이들이 차지하고, 동국지방으로도 왕성하게 식민되었다는 것 등은 역사상 명백한 일입니다.
그런데 중세 이후 조선이 많은 대륙 정정의 영향하에 처하면서 이렇듯 밀접했던 내선관계가 메이지(明治)에 이르는 6, 7백년 사이에 희박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결과, 마치 전혀 다른 민족인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민족이나 문화가 그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외관 내용이 어떻게 변해 가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알고 오늘의 조선을 대하면, 1910년 메이지천황의 천황의 계책에 의해 이루어진 한국병합이라는 것은 완전히 부자연스럽게 떨어져 있던 두나라가 원래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환원되어 일체가 된 것으로, 이것은 바로 진의에서 출발하여 하늘의 뜻에 따라 역사가 필연적인 숙명의 귀결에 도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이 시국 하에서 조선 동포의 왕성한 의욕을 반영하여 일시동인의 성지에 따라 징병제가 실시되는 것에도 또한 분명히 신의 뜻이 작용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바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역사에 나타난 내선 동근동조의 사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예를 들면 스이닌(垂仁)천황대에 대가라국(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에 국호를 미마나(任那)로 하여 일본부를 두고 많은 일본인이 관리로서 미마나국에 들어와 그 땅에 오래 거주하고 있었다든가, 또 오진(應神)천황대에 백제로부터 아직기, 왕인 두 박사가 내지로 건너와 조정에 논어와 천자문을 바치고 한학전래의 유래를 만들어 자자손손 그 땅에 거주하고 있던 사실을 돌이켜 보면, 내선인의 선조는 결국 같으며 전혀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 진다.
그러므로 우리 조선인이 가진 그 피 속에는 내지인의 혈조가 흐르고 있으며, 내지인의 피 속에도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조선인의 혈조가 흐르고 있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사실로
107) 일본 측에서는 서라벌로 추정.
108) “일본서기”.
109) “이즈모(出雲) 풍토기”에 나오는 이야기로 신라의 여분의 땅을 끌어와 이어 붙였다는 전설.
관찰하면 내선의 융합은 상고 2천년의 옛날부터 완성되어 있던 것이지 오늘에 이르러 내선일체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까의 방송 요지에도 있듯이 덴치(天智)천황 이래 메이지 초년에 이르기까지 피아의 친밀은 단절되면서 조선은 그 사이에 지나의 세력 하에 들어가 오랫동안 대륙문화에 지배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극히 최근까지 내선 사이는 전혀 생소한 타인처럼 생각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징병제 실시를 계기로 하여 내선 불가분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매우 깊이 반성하여 옛날의 친밀한 관계로 환원된 것은 우리 모두가 가장 기쁘게 생각하는 바이다. 내선은 같은 정을 받아 태어난 형제 동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징병제 실시의 의의도 여기에 있다.
2. 반도는 원래 문약하지 않았다
또 고이소 총재는 같은 날 방송에서 “조정의 방패, 국가의 간성이 되는 경우에 다만 한 가지 식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그 전통 중에 상무의 기풍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즉 조선의 역사와 전통 중에서 특히 이조기 오백년간은 유교를 국교로 삼은 관계로 유명한 석학이 나타나 문교가 흥했던
반면에, 사람들은 서서히 문약의 폐단에 빠져 ‘사적 쟁투에는 용감하지만 공직에는 비겁하다’라고 평해지는 습성에 길들여지고, 또 지나의 ‘좋은 철은 못은 되지 않고, 어진 사나이는 병사에 적합하지 않다’는식으로 병을 멸시하는 관념이 유교를 통해서 조선 사회에 전해져서, 우리나라의 빛나는 국민개병의 본지를 과연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하여 우리도 일단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의 동향을 검토해 보면 과연 내선동원이라 불리는 피의 흐름에 수긍되는 점이 있습니다.
옛날 신라 청년들도 내지인과 마찬가지로 대군시대에는 화랑도라는 것이 있어서, 마치 내지의 무사도와 같이 사직을 지키는 청년자제가 문무의 도를 힘써 연성하고 이에 힘을 쏟은 적이 있었다는 것을 돌이켜보고, 조선인이 반드시 문약만을 전통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긍지를 가지고 징병제를 맞이하려는 청년들도 적지 않습니다.
또 조선도 삼국시대 이전에는 그 세가 왕성하여 반도로부터 대륙지방에까지 무위를 떨친 사적도 있어서 결코 문약이 그 진정한 전통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 과거 5년간 실시해온 지원병제도의 성적으로부터도 엿볼 수 있어서, 혹은 높고 큰 중심을 향해서 자신을 귀일하고 온몸의 감격으로써 일에 임하는 경우 조선인 청년도 역시 당당하게 사지를 밟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훌륭한 무사로서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반도는 이조 오백년간 문약정치의 전통을 이어받아 일반 사회에서도 ‘못 먹는 자가 병(兵)이 된다’라든가 ‘병(兵)은 인간쓰레기’라는 등으로 병역을 무턱대고 멸시하는 사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조시대의 병(兵)은 거의 최하급 층의 인간들뿐이었고 양가 자제들은 ☐☐로 병(兵)이 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대저 당시를 조용히 관찰해 보면 다음과 같은 생각도 무리가 아니다.
조정에서는 평화가 오래 계속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유교를 극도로 장려했다. 그 때문에 문예는 왕성하게 번성하고 여러 방면에서 석학들이 봉기했으며, 특히 ‘과거’라는 시험제도를 창설하여 문에 뛰어난 자에 한하여 국가의 관리로서 이를 등용했기 때문에, 민중은 자연스러운 추세로 문에 열광적인 노력을 기울여 부지불식간에 무는 내버려져 돌아보지 않게 된 것이다. 또 이를 돌아보지 않는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무인을 멸시하고 천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를 직으로 삼았던 병사들은 당세에는 뜻을 얻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어찌 할 바를 모른 끝에 살기 위해서 약탈, 강도, 협박 등을 자행하면서 양민을 괴롭혀 이로 인해서 사회 질서는 어지러워졌다.
즉 병(兵)이 도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따라서 양민들의 병(兵)에 대한 공포심도 크고 병(兵)을 보기를 마치 승냥이나 늑대와 같이 멸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병(兵)을 멸시하는 기운은 이때 처음으로 반도 사회에 일어난 것이다. 병(兵)은 즉 도적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양가의 자식은 결코 병(兵)이 되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
그러나 이러한 비상무적 기상은 결코 반도인의 소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지도성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지당할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반도에도 많은 상무적 사실이 역사에 확실히 나타나 있다. 삼국시대 당과 신라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국력이 점차 쇠퇴해 가던 백제는 아베노히라후(阿倍比羅夫)110)가 이끄는 일본 원군과 협력하여 당군과 하쿠손코(白村江)111)에서 자웅을 결했으나 패배, 백제는 결국 성문을 열고 적에게 항복했다.
그 때 적병으로부터 오욕을 받을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백제의 삼천 궁녀들은 새하얀 조선 버선을 신은 채 자작나무 무성한 낙화암의 정상에 서서 차례차례로 백마강에 몸을 던져 한 줄기의 물거품과 함께 사라졌다.
이 순결하고도 고상한 궁녀들의 죽음이야 말로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의 아이즈(會津)의 부인들에 비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즈의 부인들도 적이 성하로 공격해 들어오자 모든 가족 일동이 백의로 갈아입고 불전에 모여 자살했다.
조선 부인들도 이미 오랜 옛날부터 일본 부인이 지녔던 훌륭한 상무적 소질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조시대의 태조대왕은 어릴 적부터 무에 뛰어나 활의 명인으로 성망이 높았다. 점점 자라면서 그 상무적 기상은 여지없이 발휘되어 결국 고려조정에 발탁되면서 사방에서 일어나는 동란을 진정시키고 또 북방의 만주족 및 도이(刀伊)112)의 침입을 막았으며 한 때는 세력을 북방에까지 신장시킨 일조차 있다.
또 극히 최근의 예를 들자면 제일선에서 활약한 지원병들의 무용이다. 이미 이인석(李仁錫), 이향수(李享洙) 두 상등병의 혁혁한 무훈은 모두 잘 알고 있는데, 이인석 상등병은 내가 일찍이 북지 산서전선에 출정했을 때 같은 중대 게다가 같은 소대에 있던 둘도 없는 전우였다. 우리 소대가 산서의 절이 있던 고지에서 적의 우세한 습격을 받았는데, 적이 던진 수류탄 파편에 사망자가 속출하고 피아의 총포소리가 시끄러운 가운데 우리가 늠름한 용기를 떨쳐 일으켜 처절한 전투의식과 열렬한 적개심으로 가슴을 끓이고 있을 때, 이인석 상등병도 혼신의 용기를 떨쳐 적과 맞대결을 연출하며 분전하고 있었다.
“이인석! 위험하다. 머리를 숙여라.”
미야케(三宅) 분대장이 부르는 비장한 소리가 들렸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 자식 죽여 버리겠어.”
하면서 총신이 녹을 정도로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 때 적이 던진 수류탄 소리는 비할 바 없이 처절했는데, 그것은 오히려 수류탄이 파열하는 소리라기보다도 절이 있던 고지 전체가 화약고로 되어 있어
110) 원문에는 阿曇比羅夫로 되어 있으나 이는 아베노히라후(阿倍比羅夫)와 아즈미노히라후(安曇比羅夫)를 혼동해서 쓴 것으로 보이며, 일본 측 기록을 따르면 당시 왜군을 이끌고 있던 지휘관은 아베노히라후였다.
111) 현재의 금강 근교.
112) 고려시대에, 지금의 중국 헤이룽장성과 러시아 연해주 근방을 점거하던 여진족.
서 그 화약고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한 큰 굉음이었다. 결국 이인석군은 수류탄 파편에 좌대퇴부 부상을 당해 장렬귀신도 울게 할 정도로 훌륭하게 전사했는데, 굉음, 신음 소리, 병사들이 쉴 새 없이 들락날락하는 아비규환 속에서 용맹 과감, 목숨이 계속하는 한 적과 교전한 이군의 그 무사다움에는 우리 모두가 다 같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이군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바야흐로 최후의 호흡을 거두려 할 때 곁에 있던 당시 중대장인 다케하나(竹鼻)대위님이 이군을 꼭 껴안고
“상처는 깊지 않다. 정신 차려라.”하고 격려하자
“예,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체념한 중대장님은
“뭔가 남길 말은 없는가?”하고 물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전장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성전의 중도에 죽는 것이 무엇보다도 유감입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완전히 기절해서 인사불성이 되어 버렸다. 잠시 지나서 창백해진 양 눈을 뜨고 고통을 참으면서 용기를 고무하여 혼신의 힘을 내서
“천황폐하 만세”라고 외쳤다.
물론 그 소리는 모기가 우는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죽어가던 이군으로서는 온 힘을 다해 소리를 내어 외쳤음에 틀림없었다. 생사지경을 넘나들면서 낸 이 외침이야말로 삼천년의 전통을 이어온 우리 일본 군인의 최후를 장식하는 외침이었다. 이인석 상등병이야말로 순충지성(純忠至誠)하고 용감한 병사였다.
이외에도 지원병들의 수많은 무용담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진남(晋南)숙청전에 참가하여 여러 산하의 싸움터를 전전하며 혁혁한 무훈을 세운 전남 담양군 출신의 김용주(金容柱) 같은 이는 중상을 입고도 굴하지 않고 최후까지 부대와 함께 싸웠다. 중대장이
“그런 몸으로는 안 된다. 야전병원으로 물러나라.”라고 권해도 전혀 듣지 않고
“상처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후방에 물러나면 모두에게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힘을 내어 몰려오는 적병과, 계속 내리는 진남의 호우와, 그리고 진흙의 바다와 싸우면서 수 백리 산길을 괴로운 가운데에서도 진군을 계속하면서 상처를 치료했다고 한다.
또 살아서 금치훈장을 받은 백승길(白承吉)[송원승길(松原承吉)], 장송주(張松冑)[동원휘선(東原輝善)]양군을 비롯하여 비록 금치훈장은 받지 못했지만 훌륭한 무훈을 세워 명예로운 상이군인이 된 심봉환(瀋鳳煥)(전남 장흥군 출신), 반병석(潘柄錫)(충북 음성군 출신), 오정식(吳丁植)(충북 영동군 출신) 등의 지원병들은 포연 가득한 전장에서 적진을 탈취하거나 첨병으로서 척후 임무를 완수하여 우리 주력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고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혹은 기습 작전에 참가하여 적에게 섬멸적 타격을 주는 등 용전분투하여 훌륭한 공적을 남겼다.
이는 주로 현저한 것을 예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전장에서 활약한 지원병들 모두가 곤고결핍(困苦缺乏)을 견디면서 끝까지 잘 싸워 왔다. 우리 중에서 비겁하고 미련을 남긴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것은 필경 내선동원에 의한 상무적 소질이 반도 청년의 그 혈조 속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것이다.
따라서 ‘조선인은 반드시 문약하지는 않다’는 것을 사실로써 명백히 증명할 수 있다.
뜨거운 피가 끓는 젊은 반도 장정들은 지금이야말로 어떤 올바른 지도하에 스스로를 귀일하고 하나의 고상하고 커다란 목표를 향해서 고유의 상무적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3. 병역은 국민의 숭고하고 지순한 최대의 의무
황군은 신병(神兵)이다. 왜냐하면 천황 친솔 하에 세계의 부정을 징계하고 또 한편으로는 정의를 옹호하여 국위를 안팎에 떨쳐 팔굉일우의 대정신을 현현하기 위해 신의에 따라 생긴 군대이기 때문이다.
황군은 외국 군대와 같이 민권주의 혹은 물질주의를 중심으로 편성된 것과는 근본적으로 그 취지를 달리 하고 있다.
그들은 대군을 위해, 조국을 위해 신명을 바쳐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의무 관념에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약한 적에 대해서는 터무니없이 강하지만 일단 이빨이 먹히지 않는 강력한 적에 부딪히면 또한 터무니없이 약하다.
그들은 전장에서도 좀 위험하다 싶으면 포기해 버리고 백기를 들거나 또는 양손을 들어 아무렇지도 않게 추태를 청천에 드러내며 투항해 온다.
그리고 이를 치욕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다. 이 이상은 어쩔 수 없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우리로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병역은 군신일체의 아름다운 우리 국체를 연원으로 하고 있어서 위로는 천황을 우두머리로 받들고 밑으로는 일개 병졸에 이르기까지 맥락을 일관하여 폐하의 고굉(股肱)으로서 전 심혼을 기울여 국방의 대임에 임해왔다. 따라서 거기에는 공격 전진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베개를 나란히 하여 모두 죽든지 두 가지 길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황군의 전통적인 위대함이며 다른 모든 외국의 군대와 다른 점이다.
바다에 가면 물에 잠기고 시산(屍山)에 가면 잡초 무성한 시체
대군의 곁에서 죽으리 결코 뒤돌아보지 않으리
이와 같이 건국 당초부터 일본 병사는 모든 것을 대원수 폐하에게 바치고 한 번 죽어 군국에 몸을 바칠 각오로 봉공의 성을 다했기 때문에 유사 이래의 외전에 필승 불패의 영예를 오늘날까지 이어 왔다.
이와 같은 영예 드높은 황군의 일원으로 가담하여 국방 일선에서 일하는 것은 청년의 최대의 영광이며 꽃이다.
이 선발에서 빠지는 것은 최대의 치욕이며 국민으로서 그 이상 불명예는 또 없을 것이다.
군인에게 내리신 칙유 중에도
“짐은 너희 군인의 대원수이다. 그러므로 짐은 너희를 고굉으로 의지하고 너희는 짐을 우두머리로 받듦으로서 그 친밀함은 특히 깊어질 것이다”
라는 말씀이 계셨으며 또,
“우리나라의 존엄함 위세를 떨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너희는 짐과 그 근심을 함께 하라.
우리의 무가 앙양되어 그 영예가 빛나면 짐은 너희와 그 명예를 함께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충절, 예의, 무용, 신의, 검소의 5개조의 성훈을 내려 간곡히 가르쳐 주고 계신다.
황공하게도 폐하로부터 이와 같은 고마운 칙유를 받든 것은 우리 군인들뿐이다.
따라서 신명을 국가에 바쳐 대군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동양 도덕의 본원이며 국민의 숭고한 의무이다.
빛나는 역사를 가진 세계무비의 황군 중에 그 한 병원으로서 반도 청년도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초망(草莽)의 민초가 부르심을 받아 폐하의 고굉이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마나 영예로운 일인가.
몸이 떨리는 기분이다.
오늘부터는 뒤돌아보지 않고, 대군의 보잘 것 없는 방패로서 나갑니다.
우리는.존엄한 위세에 거스르는 것은 결코 이를 용서하지 않으며 일곱 번 다시 태어나 적을 쳐부수는 불멸의 투혼과 충성을 다하여 아무것도 뒤돌아보지 않고 대원수 폐하의 말 앞에서 반도 청년은 생긋 웃는 얼굴로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또 병역에 따르는 근본이념이다.
‘활은 손에 들고 칼은 허리에 차고 아침에 지키고 저녁에 지키고 대군의 문을 지킬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으랴’
자칫하면 일부에서는 병역을 타산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의무 관념에 근거한 권리의 뒷받침을 주장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으나 이는 커다란 잘못이다. 그것과 병역 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존재이다.
피로써 조국에 몸 바치는 이 숭고하고 지순한 국역의 의무를 타산적 견해로 더럽히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반도 청년은 입영하여 그저 폐하의 고굉이 되는 것과 금치훈장 혹은 정훈장(精勳章)이외에는 그 대상물로서 아무것도 바라서는 안 된다.
여기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반도인이 우리나라의 병역의무가 얼마나 신성하고 명예로운 일인가를 하루라도 빨리 이해 납득하고, 전통적인 ‘병(兵)을 멸시하는’ 생각을 깨끗이 청산하여 곁눈질도 하지 않고 오로지 병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4.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병영 생활
징병검사 결과 장하게도 합격의 영예를 안은 반도 장정들은 일본 남아로서 숙원이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어엿한 남자가 아니더냐. 징병검사에는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 조선에도 ‘남자는 죽더라도 전쟁에 가서 죽어라’라는 속담이 있듯이 만약 선발에 빠지는 일이 있으면 이는 청년에게 최대의 치욕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하튼 합격의 영예를 안은 장정들은 합격한 그 날부터 이미 자신의 몸은 대군에게 바친 소중한 몸이다.
즉 자신의 몸이면서 자신의 몸이 아닌 것이다. 만약 몸을 훼손하여 부르심에 응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단지 한 가문의 굴욕이라고 하기보다도 대군에 대해 진정으로 죄송스러운 일이다. 항상 심신을 단련하고 모든 준비를 갖추어 강건한 육체와 견고하기가 철과 같은 의사를 가지고 입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의 모든 하나하나의 자기 동작에 주의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매우 엄격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요는 합격해서 입영할 동안에 부절제한 일만 없으면 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옆길로 빠졌는데, 부르심을 받아 입대를 명받은 장정들은 필연적으로 일정 연한 동안 입영생활을 해야 한다. 그보다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의무가 있다. 입영 생활이란 무엇인가? 이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화기애애한 군인의 가정생활이라고 나는 대답할 수 있다.
군대 내무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병영은 고락을 함께 하고 생사를 같이 하는 군인의 가정이며 병영 생활의 요는 기거하는 동안 군인정신을 함양하고 군기에 익숙하게 하여 견고한 단결을 완성하는데 있다.”
눈을 돌려 우리 인류의 사회생활 상태를 가만히 응시해 보면 거기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여러 모습들이 있어서 바로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귀영화, 귀천빈고가 자연히 나뉘어 웅장한 건물에 살면서 매일 안일한 꿈을 꾸는 호걸지사도 있고 그런가 하면 그날그날 입에 풀칠하는 게 고작이라서 적빈에 급급한 사람도 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을 즐겁게 웃고 지내는 사람도 있으며 같은 인생을 괴로움을 겪으며 울면서 지내는 사람도 있다. 또 관리가 있고 상인이 있으며 농민도 있고 시정아치도 있는 등 여러 가지이다.
그런데 이것이 군대 내 즉 병영 생활이 되면 완전히 그러한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잘 것 없는 방패로서 한번 영문을 통과해 병영에 들어오면 지위나 신분 여하를 따지지 않으며, 또 대신, 대장의 자
식이든 시골 농민의 자식이든 전혀 그러한 것과는 관계없이 고로신산(苦勞辛酸)도 안일쾌락도 모두 함께 하며, 국가라는 하나의 커다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 나라를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같이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대신의 자식이라서 라는 따위의 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군대 내에서는 음식물이라든가 혹은 금전 등을 자기 집으로부터 송부하게 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
고 있다. 물론 경제적인 것을 고려했기 때문인데, 그 주된 것은 음식물이라든가 금전 등을 얼마든지 보내도 상관없는 유복한 집에서 온 병사는 그렇다 쳐도 그런 반면에 그런 것들을 용이하게 보낼 수 없는 빈곤한 집에서 온 병사들의 입장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금하지 않고 마음대로 보내게 놓아두면 부잣집 자식은 기뻐하겠지만 유복하지 않은 집안의 자식은 자신의 가난을 오랫동안 탄식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이미 거기에는 틈이 생겨 고락을 함께 하고 생사를 같이 해야 할 병영 생활은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군대는 여기까지 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이상 이야기한대로 병영 생활은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곳이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병사끼리의 의사 충돌이라든가 이해관계라든가 혹은 인간의 본성인 욕망적 심리 등이 일어날 리가 없고 청렴결백하다.
엄격함 속에도 화합일치의 협동심이 생겨 견고하기가 철과 같은 대단결을 이루어 마치 한 가족처럼 화목해 지는 것이다. 한 개인의 가정을 예로 들어 보아도 조부모, 부모, 형제, 자매 등의 구별은 있지만 거기에 통하는 애정은 단 하나이다. 부모로서는 특별히 형이 귀엽다거나 혹은 동생이 특히 귀엽다는 등의 마음은 가지고 있지 않다. 애정은 형제자매 모두 같다. 병영 생활도 이와 마찬가지 이념이며 병영 내에 있는 장교, 하사관, 고참병 등은 초년병 입장에서 보면 각각 장교는 조부 또는 부친에 해당하며 하사관은 모친에 필적하고 고참병은 형님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사관이나 고참병이 초년병을 교육하는 것도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형이 자기 동생을 기르는 것 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육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러한 생활이 하루 이틀 지나 오래 계속되는 동안에 자연히 군인정신을 체득하게 되고 군대의 모든 규칙에 완전히 익숙해지면서 단결은 더욱 굳건해져 간다. 이것이 병영 생활의 본의이다.
이로써 군기가 엄정하고, 순식간에 말레이반도를 석권하였으며, 하와이 진주만두에서 미국 해군을 일거에 물리치고, 네델란드령 동인도, 버마감정전(勘定戰)을 통해 대동아 지역으로부터 미영 세력을 완전히 구축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용장무비, 질풍신뢰와 같은 황군이 나날이 육성되어 가는 것이다.
즉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황군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우리 병영 생활에서 배양된다. 애투섬113) 투혼도 이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요컨대 병영 생활은 처음에는 다소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의 방임 생활로부터 갑자기 규율 바르고 엄격한 생활환경으로 변했기 때문으로 무리도 아니다. 그러나 점차 익숙해지면서 고통감은 사라지고 유쾌해 지는 동시에 칠칠치 못한 생활이 오히려 괴롭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5. 조선인 의식을 버려라
입영 전후에 반도 청년은 완전히 조선의식을 버리고 일본인 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내선인의 혼화(混和)는 유구한 2천 년 전 옛날에 이미 완성된 것으로 극히 최근의 내선일체라는 것은 떨어져 있던 양자가 손을 잡고 역사적 이념에 근거하여 그것을 철저하게 실천에 옮긴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여기에 형제가 있다.
그 형제가 어릴 때 서로 헤어져 그 후 여러 해가 지나 각자가 어른이 되고 우연한 기회에 양자가 다시 만나 감개무량해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선 관계도 조금도 그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조선은 내지의 조선이며 조선인은 내지인 속의 조선인이다.
오늘날 큐슈(九州)인이 있고, 홋카이도(北海島)인이 있고, 시코쿠(四國)인이 있듯이 그 중에 조선인이 있는 것이다.
제군은 이 이념을 확실히 납득하고 입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정 이래 30여 년, 황도문화에 의해 반도는 약진 또 약진하여 오늘날의 대반도를 건설할 수 있었다.
천황폐하의 존엄한 위세 하에 우리 반도인의 생명, 신체, 재산은 완전히 보증되고 이조시대의 극히 악랄했던 제 투쟁, 계급제, 착취 등은 모두 타파되었으며 관민은 협화하여 엄숙한 법규 하에 사회 치안은 유지되어 확실히 왕도 낙토를 쌓아올렸다.
산업, 교통, 교육 등은 급속한 진보를 이루고 위생 설비는 정비되었으며 병합 전 감소 추세에 있던 조선의 인구도 병합 후 일약 증가하는 숫자를 보이고, 민둥산은 푸르게 무성해 졌으며, 강도의 출몰로 변변히 가족 여행도 못했던 것이 오늘날의 이 평화롭고 안락한 현상에서는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을 것이다.
이조시대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고 한다면 오늘의 이 조선을 어떤 눈으로 볼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 반도 동포는 성은의 고마움에 감사 감격하고 어디까지나 천황폐하에게 귀일하지 않으면안 된다.
우리는 일본과 함께 살고 일본과 함께 죽는 것 외에는 길은 없다.
<출전 : 大村謙三, 「徵兵と志願兵」, '春秋' 제5권 2호, 1944년 2월, 76~86쪽>
113) 알류산 열도의 니어 제도의 최서단에 위치한 섬(Attu Island)이다. 일본이 점령했을 때는 아쓰타 섬(熱田島)라고 불렀다. 2차대전 중 일본군과 미군의 격전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