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45년(1566) 가정제가 방사 왕금(王金)이 바친 단약(丹藥)을 마시고 죽자 융경제(隆慶帝)가 제위를 이었고 융경제에 이어 만력제(萬曆帝)가 제위에 올랐다. 만력 20년(1592)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는 우리나라 역사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명사》에 기록되어 있는 자료를 참고하여 전반적인 것만 서술하기로 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국호 개정을 청원해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게 했다는 기록이 명나라 홍무 25년(1392) 《명사(明史)》의 〈조선전(朝鮮傳)〉에 나타나 있다.
명나라는 속국의 내정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는 것이 기본방침이었다. 명나라의 책봉을 받은 이상 일본은 명나라의 연호와 역법(曆法)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명나라 역시 이런 이유로 일본을 문책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국서(國書)에 명나라의 연호만 쓰여 있으면 그대로 묵인하는 정책을 썼다.
그런데 똑같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은 조선이 명나라에 대하는 태도는 일본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 구체적 실례를 들면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함으로써 명나라와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되어 조선과의 관계가 극히 밀접해졌다. 일본이 10년 일공(十年一貢, 10년에 한번 조공함)인 데 비하여 조선은 일세양공(一歲兩貢, 1년에 두 차례 조공함)을 원칙으로 했다.
이러한 일본이 임진년(1566)에 무려 15만 8천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범했다.
《제감도설(帝鑑圖說)》
만력제가 9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장거정은 제왕이 지켜야 할 덕행을 그림으로 설명한 책을 저술해 황제에게 바쳤다.
그러면 당시 중국에서 일본을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명사》 〈일본전〉의 1절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예로부터 왕이 있고 그 밑에 ‘관백(關白)’이라는 최고 실권자가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당시의 관백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 노부나가가 어느 날 사냥을 갔다가 나무 밑에 누워 있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자가 놀라 일어나다가 노부나가의 행렬과 충돌하였다.
노부나가가 그 자를 잡아 힐문하였는데 그 자는 자기 이름이 다이라노 히데요시(平秀吉)라 했고, 사쓰마 주(薩摩州)의 노예 출신이라 했다. 말을 잘할 뿐 아니라 웅용(雄勇), 민첩하여 노부나가의 호감을 샀다. 노부나가는 처음에는 마굿간 일을 시키고 기노시타(木下)라 불렀다. 그 후 차츰 노부나가의 눈에 들었고 노부나가는 기노시타의 계책을 이용하여 20여 주를 병합함으로써 마침내 그를 섭진진(攝津鎭) 수비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노부나가의 참모 아기지(阿奇支)라는 자가 죄를 짓자 노부나가가 히데요시로 하여금 그의 토벌을 명하였다.
이윽고 노부나가가 그의 부하 아케치(明智)로부터 살해당하자 히데요시는 아기지를 토벌한 후 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과 함께 군사를 돌려 아케치를 주멸함으로써 그의 명성을 더욱 떨쳤다. 마침내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을 폐하고 관백의 자리에 오르니 그때가 만력 14년(1586)이다.”
관백이 된 다이라노 히데요시(나중의 豊臣秀吉)가 조선에 출병한 일에 대하여 《명사》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조선 침략과 아울러 중국을 침략하고 조선을 빼앗아 갖고자 함이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로선 일본이 명나라를 침략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나라에서는 일본을 규모가 좀 큰 왜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서전에서는 크게 승리하였다. 당시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왔기 때문에 전국의 난세에서 전쟁에 익숙한 일본군을 대항할 힘이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조총(島銃)이라는 신무기의 이점을 이용하여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고니시 유키나가가 거느린 부대는 한양을 함락한 데 이어 평양까지 북상하였다.
동래부 순절도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과 휘화 장병의 순절 그림.
한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거느린 부대는 함경도까지 유린하여 호남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토가 유린되고 두 왕자가 포로로 잡히는 등 매우 급박한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조선의 선조 임금은 의주까지 몽진길에 올랐고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사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의 원병 요청 문제를 검토한 끝에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여송(李如松)이 명군의 제독(提督)으로서 구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것은 임진년 12월 25일이었다. 이여송은 건주위(建州衛)1) 의 여진인 왕고(王杲)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당시의 실권자 장거정(張居正)이 토벌사령관으로 기용한 인물이었다. 많은 전공을 세운 그가 바로 조선족 출신 이성량(李成梁) 장군의 아들이었다. 그러니까 이여송은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고국의 위기를 구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간 것이다.
이여송이 거느린 원군은 요동병과 남방병(南方兵)2) 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요동병은 이여송의 직속 부대였고 남방병은 대포와 화전(火箭)3) 등 강력한 무기로 무장된 부대로 급히 편성되었다.
이여송이 평양 공격에 나선 것은 임진년을 지난 계사년 1월 8일이었다. 이여송은 호준포(虎蹲砲, 옛날의 대포)와 화전으로 무장한 부대를 앞세워 일제히 평양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여송도 친히 진중으로 말을 달려 직접 지휘에 나서니 포성은 천지를 진동하고 화전은 적진을 향해 마구 날았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왜병들은 조총을 마구 쏘아댔으나 대포의 위력 앞에 맥을 쓰지 못하여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날 밤 왜병들은 대동강을 건너 한양 쪽으로 달아났다.
이여송이 별 힘을 안 들이고 평양을 탈환한 것은 주로 남방군의 호준포와 화전의 위력 덕이었다.
이여송은 평양 탈환에 이어 개성을 수복하고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직속 부대인 요동병만을 이끌고 내려갔다. 이여송의 작전은 한양 탈환의 공을 자신의 직속 부대인 요동병에게 돌리기 위해서였으나 예기치 못한 패전을 맛보게 되었다.
이여송의 직속 부대가 한양을 향해 내려가던 중 벽제관(碧蹄館)에서 왜병에게 포위되어 이여송은 위급한 순간에 몰렸고 그의 부장이 육탄방어해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였다. 왜병들은 대포나 화전이 없는 명나라 군사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벽제관에서의 패전 후 강화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다. 이여송은 이 난을 강화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는 심유경(沈惟敬)을 적진에 보내어 궁지에 몰린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와 담판짓고 왜병들을 한양에서 철수토록 하였다. 사실 이 강화 문제는 평양 탈환 이전부터 심유경이 추진하던 일로서 처음부터 도저히 성립 불가능한 것이었다.
양측 수뇌부에서 제시한 강화조건을 참고로 살펴보자. 먼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시한 강화의 조건은 7개 조항이었다.
1. 명나라 황녀(皇女)를 일본의 후비(后妃)로 삼는다.
2. 무역 증서제(貿易證書制)를 부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건네준다.
5. 조선의 왕자 및 대신을 인질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두 조선 왕자를 귀국시킨다.
7. 조선의 권신이 앞으로 일본에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이에 명나라가 요구한 조건은 3가지였다.
1. 조선에서 완전 철군할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죄할 것.
심유경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상대국에서 제시한 조건이 피차 양측에서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 확실하므로 양측에 모두 숨겼다. 심유경은 명나라 황제 만력제에게 다음과 같은 사죄문을 위조하여 바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바라는 것은 오직 왜왕으로 책봉되는 일이며 그리 되면 그는 대대로 번신(藩臣)으로서 영구히 조공을 바치겠다 하옵니다.”
이 사죄문이 위조된 사실을 알 까닭이 없는 북경의 조정에서는 신중히 검토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책봉은 허락하지만 조공은 허락할 수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책봉하는 것은 허락해도 좋지만 조공 무역은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책봉만 하고 그 후의 태도를 보아 조공 무역 문제를 결정하겠다는 속셈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나라에서는 이종성(李宗城)을 책봉정사(冊封正使)로 임명했는데 이종성은 강화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겁을 먹고 부산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래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던 양방형(楊方亨)을 정사로 승격시키고 수행원이었던 심유경을 부사로 임명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왜국왕에 책봉한다는 책서(冊書)와 일본국왕지인(日本國王之印)이라 새긴 금인(金印), 그리고 명나라의 관복을 가지고 왜국으로 건너갔다.
이들 사절단이 오사카 성(大阪城)에 들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들을 직접 인견하고 책봉서와 금인·관복을 받았다. 다음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에서 내린 관복을 입고 사절단을 잔치에 초대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은 당초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여 강화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억지 연극을 꾸며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강화 7개 조항이 무시되었음을 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게 노하여 제2차 출병을 명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곧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2차 출병은 고전의 연속이었다. 결국 히데요시가 죽어 왜병이 철수함으로써 7년간이나 끌어오던 임진왜란은 그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7년에 걸친 왜란은 조선의 정치·경제·문화·사회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국제적으로 명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을 틈타 여진족의 청(淸)나라가 두각을 나타냈고 왜국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막부 시대가 열렸다.
마지막으로 《명사》 〈일본전〉에 나타난 임진왜란 총괄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았다.
“오랫동안 끌어오던 이 난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왜병이 철수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이래 7년 동안에 수십만의 군사를 잃었고 군량과 군비의 지출이 수백만에 달했다. 이 싸움은 실로 명나라와 조선에 있어 승산 없는 싸움으로 끝을 맺었다.”
[출처] 임진왜란과 이여송|작성자 새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