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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24,15-24
15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16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 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17 조용히 탄식하며, 죽은 이를 두고 곡을 하지 마라.
머리에 쓰개를 쓰고 발에 신을 신어라.
콧수염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도 먹지 마라.”
18 이튿날 아침에 내가 백성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다.
그다음 날 아침에 나는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
19 그러자 백성이 나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일러 주지 않겠습니까?”
20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나에게 내리셨습니다.
21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의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희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
너희가 두고 떠나온 너희 아들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22 ─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한 것처럼 하게 될 것이다. ─
콧수염을 가리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을 먹지도 못할 것이다.
23 머리에는 쓰개를 그대로 쓰고 발에는 신을 그대로 신은 채, 슬퍼하지도 울지도 못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죄 때문에 스러져 가면서 서로 바라보며 한탄할 것이다.
24 에제키엘이 이렇게 너희에게 예표가 되고, 그가 한 것처럼 너희도 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16-22
그때에
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 속한 존재가 되는 길>
오늘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해 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은 루카복음(10,25)에서는 율법학자가 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마태 19,16)
그는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혹시 우리도 그렇게 여기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 어떤 공로를 쌓고 그 공로의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여기지는 않는지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마태 19,17)
생명을 얻는 길이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곧 ‘주님께 속한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길은 ‘행위’를 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되는 데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러한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21)
이 말씀은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자신이 가진 재산을 팔라',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 그리고 '당신께로 오라',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네 가지 행동의 실행으로 알아듣기 쉽습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더 깊은 차원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네 가지를 통한 ‘행동의 전환’을 말씀하고 계신다기보다,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존재의 전환’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곧 이 문장의 핵심은 뒤 구절에 있습니다.
뒤 구절은 당신께로 와서 당신을 따르는 존재, 곧 ‘당신께 속한 사람’, ‘당신의 소유’가 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 구절은 그러한 존재가 되는 전제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부자청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쥐락펴락하는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기의 재물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고, 재물을 따랐던 것입니다.
곧 '자신이라는 우상', '재물이라는 우상'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 속한 사람,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존재적 전환을 요청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이 그 부자 청년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를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자신의 실상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마태 19,22)
오늘 우리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머뭇거리고 주저하다가 슬퍼하고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무슨 위대한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소유, 주님께 속한 존재가 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마태 19,21)
주님!
주님께서는 저의 허울을 벗기십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위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이기심의 옷을 벗기십니다.
이제는 이기심과 자애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다 나누게 하소서.
나아가, 낮은 이를 섬기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 당신을 위하여 하고, 당신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기껏 사랑하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오늘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랄까 단계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복음에선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라고 달리 말씀하십니다.
둘을 합치면 완전한 사람이란 부족함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고,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부족을 하나하나 메꿔가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십계명의 대인 계명 준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대인 십계명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 외에 나머지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처럼 다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이것도 이웃 사랑이긴 하지만 소극적이고 그래서 부족하지요.
그래서 대인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부자에게 더 적극적인 사랑을 주문하십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이 말씀만 가지고는 팔아서 다 주라는 것인지 일부만 주어도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폐나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이웃 특히 가난한 이웃에게 보탬이 되는 적극적인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완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직 아닙니다.
이것을 다 했어도 마지막 한 가지, 곧 주님을 따르는 것, 이걸 하지 않으면 작은 것 하나 놓친 것 정도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불완전입니다
사실 앞의 모든 것 곧 대인 십계명의 준수, 자기 소유물의 포기, 이웃을 위한 자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 하고, 그래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곧 주님 따름, 이것을 위한 것이니, 아무리 앞의 것들을 모두 다 했어도 이것을 하지 않으면 다 헛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잘못은 가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않은 것이고, 가장 잘못한 것은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것은 다 천국 가기 위한 것이고 천국 가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단한 사랑을 했지만 인간적인 세상 사랑에 그치는 사랑, 그래서 기껏 사랑하고도 천국에 가지 못하는 사랑을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옭아매는 것>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면 흐뭇합니다.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닙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간혹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주머니를 비워놓던 사람은 그런 것에 자유롭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 21)
그러나 젊은이는 답을 얻었으면서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답을 얻었으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면서 길을 알려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지만, 본인이 거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부자에게는 돈이 전부입니다.
그의 재산은 곧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것을 알지만 돈에 매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돈 때문에 형제 부모도 없는 사람처럼 싸우는 사람들의 추한 모습을!
주목할 것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공로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공로로 구원을 얻지 않고 주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우선으로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학식도 명예도 권력도 재물에 속합니다.
그러한 것을 지니면 지닐수록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다 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먼저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고 항상! 주님'을 앞세울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르 8,35)
버림으로써 얻는 신비에 눈뜨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무엇으로부터의 옭아매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만을 갈망하여 세상 것에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율법과 진리의 차이점: 도움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
오늘 복음에서 돈이 많은 젊은이는 어떻게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될지를 묻습니다.
그는 사실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 압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주소를 잘못 찾아왔다는 식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여기서 예수님은 선한 일에 관련된 분은 아버지 한 분뿐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데, 생명을 유지하려면 계명을 지키라 하십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입니다.
그러자 그는 구약의 율법을 다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제 ‘완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냥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아직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 복음은 더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 나라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아리송하기 그지없는 내용이지만, 사실 ‘율법’과 ‘진리’의 차이점을 알면 쉽게 이해가 되는 복음입니다.
요한은 율법과 진리, 그리고 은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요한 1,17)
이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말씀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 6,44)
구원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예수님께 이끄실까요?
바로 율법을 통해서입니다.
율법은 창조자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실천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 옵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말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을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찾으라고 하란으로 보냈습니다.
레베카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라 처음 보는 사람이 물을 달라고 하자 그 하인과 낙타에게 물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자 하인은 그녀에게 장신구를 달아줍니다.
하인이 율법이라고 한다면 장신구는 은총입니다.
그러나 이 은총은 이사악에게 다가갈 힘을 주는 것뿐이지 그것 자체로 구원은 아닙니다.
구원은 이사악과 혼인하여 가지게 되는 아브라함의 유산입니다.
레베카가 이사악에게 다가오자 이사악은 그녀를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 사라의 처소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사라는 이사악이 어머니를 잃은 아픔을 달래주었으므로 레베카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레베카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우리는 레베카와 같습니다.
창조자, 적어도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키려 할 때 하늘에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할 도움을 주십니다.
저에게는 이 도움의 은총이 ‘하.사.시.’였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갈 수 있었고 성체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악에게 어머니를 잃은 아픔은 무엇과 같을까요?
왜 당신께 오는 이들을 그 자리에 채워 당신 자신을 위로하려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아픔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조물들이 배고픈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뜻을 부자 청년에게 전달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는 그리스도를 위로하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는 계명입니다.
분명 이웃을 돕는 것은 구약의 계명일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필요를 위해 요구하시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분 안에 머물게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에게 붙어있어라!”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위로해드리기 위해 성체조배를 하였습니다.
이 성체조배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는 저에겐 진리가 된 것입니다.
또한 사제서품 때 성구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도 저에겐 그리스도께 붙어있게 만드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로하는 계명이고 내가 그리스도 품 안에 머물게 만듭니다.
율법도 도움의 은총이 필요했다면, 진리는 생명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생명은 하느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만약 제가 그리스도께 붙어있기 위해 따라야 하는 진리에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신 감동이 없었다면 그 계명에 그렇게 목숨을 걸고 붙어있으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부자 청년처럼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 안에 머물려면 은총도 필요하여 성사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부자 청년에게 부족했던 것은 생명의 은총,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아직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언젠간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사막의 교부 성 안토니오도 오늘 부자 청년처럼 부모의 죽음으로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늘 복음을 듣고는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생명의 은총인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생명까지 바치셨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없다면 진리는 자신 안에서 실현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로 힘을 얻는 진리가 있어서 그것을 실천하여 그리스도께 머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재물과 관련해서 때로는 용기도 필요하고, 때로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재물과 관련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늘 고민해야 할 질문 한 가지가 있습니다.
'과연 재물이 주님 나라 입국과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재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고민입니다.
오늘 복음이 풍기는 뉘앙스는 재물이 천국과 영생으로 가는 길에 큰 장애물이 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 대한 보다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재물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듯한 저희 수도자들에게도 이 부분은 참으로 큰 고민거리입니다.
적극적인 홍보 활동과 목숨을 건 후원 회원 확보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그를 바탕으로 엄청난 규모의 수도원과 시설을 건립하고, 본인들도 모르게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낼 럭셔리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물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도 많이 하십니다.
그러나 규모가 확장되면 될수록 청빈과는 거리가 먼 생활로 전락하고 맙니다.
벌써 그 공동체는 천국이나 영생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탁발과 섭리에 의존하기에, 내일 먹을 양식도 확보되지 않고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면, 거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과 위화감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청빈을 사는 데 있어서도 조화와 균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관건은 '재물을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 부자들을 미워하거나 경멸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직하게 일해서 모은 재물은 주님이 주신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 재물을 통해 가족을 부양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관대하게 나눌 때, 그러한 재물은 축복이요 선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계하시는 부는 부정한 방법으로 남을 짓누르고 축적한 천박한 부, 절대 나누지 않는 이기적인 부입니다.
그저 한도 끝도 없이 모으기만 모았지, 죽어도 나누지 않은 재물을 주님께서 슬퍼하실 부끄러운 부입니다.
가끔 형편에 맞지 않게 과도한 기부나 헌금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즉시 따로 모시고 가서 차근차근 설명해드립니다.
"바야흐로 백세 시대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자식들, 절대 확실한 보험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건강과 노후를 위해 지혜로운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 퍼주고 나중에 쫄쫄 굶다가 무료 급식소 신세 지면 누구 책임입니까?"
재물과 관련된 오늘 주님 말씀, 때로는 지혜가 필요하고 때로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재물에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 재물이 주님보다 상위에 위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수도자들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시간이 재물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하루하루 우리네 남은 인생이 재물보다 더 중요한 자산입니다.
이 소중한 자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잘 계획해봐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먼저입니다.>
1)
오늘 복음에서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그의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입니다.
그는 지상에서는 많은 재물을 소유하면서 살기를 원하고,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둘 다 누릴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그 생명만 추구해야 합니다.
재물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허무한 것들에 마음을 두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슬퍼한 것은 둘 다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즉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슬펐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는 자기 자신이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슬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떠나갔다.’는 말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냥 가버렸다는 뜻은 아니고,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을 나중으로 미루었다는 뜻입니다.
2)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들이 재물에 대한 애착심도 큰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긴 한데, 가진 재물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별로 다르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진 것이 없어서 오히려 더 재물에 대해 집착하고, 더 많이 욕심을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부유한가, 가난한가?'를 묻기 전에 먼저, 즉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 없는가?' 라고 묻기 전에 먼저,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라고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재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마르 7,15)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마르 7,20-23)
그런데 이 말씀은 '재물을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이 나쁜 것이지 재물이 나쁜 것은 아니다.'는 아닙니다.
악한 일의 원인은 악한 마음이지만, 재물 자체에도 사람을 지배하는 악한 마성(魔性)이 숨어 있고, 그래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끊어버리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3)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입니다.
재물을 모두 버린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소유’나 ‘청빈’을 강조한 가르침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무소유나 청빈을 실천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빈손’이나 ‘빈 몸’이 아니라 ‘믿음’과 ‘따름’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유다도 다른 사도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빈손’과 ‘빈 몸’으로 따랐을 것입니다.
유다가 언제부터 마음이 돌아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그는 겉으로 보기에만 ‘빈손’과 ‘빈 몸’이었을 뿐이고, 마음속에는 탐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요한 12,6).
그 탐욕은 그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4)
이야기의 첫 부분에 있는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라는 말씀은 “나를 ‘사람’으로만 생각하면서 어찌하여 나에게 ‘하느님의 선’과 ‘영원한 생명’을 묻느냐?” 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당신을 믿는 일이 먼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도 십계명은 잘 지켰습니다.
신앙과 종교가 아예 없는 사람들도 착하게 살고 불우이웃 돕기도 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나라는 곧 예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만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립니다.
물론 예수님을 몰라서, 또는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못 믿은 경우에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면서도 믿기를 거부한 경우에는,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그 자신이 거부해서 그 생명을 못 받게 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생명’이신 주 예수님 - “나를 따라라.”>
어제 주일 강론에서 저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예수님을 선택할 때, 예수님께 선택될 때, 참행복임을 역설했습니다.
참행복에 예수님을 대체할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생명의 빵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참행복이요, 모든 행복이 뒤따를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요약하여 흥겹게 노래로 고백한, 모두가 좋아하는 어제의 화답송 후렴 시편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
(시편 34,9)
오늘 복음도 어제의 연속선상에 있는 듯 합니다.
어떤 젊은이가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이 질문은 옛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의 내적 갈망을 대변한 어떤 부자의 물음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저는 이 물음에 속으로 웃었습니다.
바로 생명의 빵이자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이런 질문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접근이 참 치밀합니다.
어떤 부자의 문제가 무엇인지 꿰뚫어 통찰했음이 분명합니다.
우선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했을 때 어떤 젊은이는 당당히 고백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신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목마름은 여전할 뿐입니다.
다음 오고가는 대화가 오늘 복음의 중심입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바로 사막의 성 안토니오를 결정적으로 회심케한 예수님의 말씀이요, 모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이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많은 재물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합니다.
과연 이 결정적 시험에 통과할자 몇이나 될런지요.
외적으로 계명을 잘 지킨 삶이었지만, 삶의 중심에는 주님이 아닌 재물이 자리잡고 있었던 부자 젊은이였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주님을 따라 제길을 제대로 가는 것입니다.
나무들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면 결코 숲을 벗어나지 못하고 숲안에서 계속 해맬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재물에 소유되어, 탐욕의 무지에 눈이 가려, 길을 잃은, 삶의 전망과 삶의 목표, 그리고 삶의 방향을 잃은 젊은이였습니다.
이보다 더 큰 영적 재난, 불행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초대받은 젊은이인데 안타깝게도 그 결정적 구원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계명을 잘 지켜서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몰랐던 젊은 부자였습니다.
더 이상 내적성장은 좌절되었고 영원히 영적 목마름을 지닌채 살아가게 된 젊은이입니다.
바로 젊은 부자의 예화를 통해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과연 날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삶에 충실한지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라’ 명령하십니다.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젊은 부자는 주님을 따르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자 청년처럼 누구에게나 똑같은 포기를 명령하지 않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날마다 평생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여기서 다시 인용하는, 늘 나눠도 새로운 제 자작 좌우명 고백 기도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이 길 하나뿐이겠습니다.
재물을 소유하되 재물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이, 주님의 제자가 되어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묵묵히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생명의 빵,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버림과 따름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과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수님은 물론 참된 제자의 예표가 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생애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을 나타내는 상징이 됩니다.
주님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아내의 죽음을 상징으로 삼습니다.
두 말씀이 그대로 하나로 이어집니다.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이어지는 모든 말씀이 주님의 처사에 동요하지 말고 주님의 제자답게 묵묵히, 담담히 받아들이라 합니다.
에제키엘 아내의 죽음이 상징하는 바 우상들을 섬기며 많이도 탈선해 죄를 지었던 이스라엘의 불행입니다.
“나 이제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희의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
너희가 두고 떠나 온 너희 아들딸들도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참된 제자의 예표가 되는, 부단히 주님께 돌아와 주님을 따르라는 회개의 예표가 되는 에제키엘 예언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따르는 회개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진정한 자아를 보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인터넷에서 감동을 주는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2009년 사스(SARS·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가 퍼져나갈 때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처럼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사스에 걸리면 사망률이 높았습니다.
딸이 사스에 감염되어서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딸은 아이를 가진 산모였습니다.
산모의 남편은 딸과 함께 임진 중에 있는 아이도 하늘나라로 보내자고 했습니다.
엄마도 사위의 의견에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의료진은 산모가 2달만 버텨주면 아이는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산모는 그렇게 2달을 버텨 주었고, 드디어 아이는 태어났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산모는 모든 힘을 바친 후에 하느님께 갔습니다.
의료진과 아이와 산모를 위해서 기도했던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산모의 남편과 산모의 부모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어느덧 중3이 되었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닙니다.
생사불이(生死不二)입니다.
음악인 노영심씨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노영심씨는 2009년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선종하신 후에 추모 음악회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처음 나온 기획안은 예술의 전당에서 음악회를 개최하는 안이었다고 합니다.
비용은 5,000만 원 정도였다고 합니다.
노영심씨는 김수환 추기경님을 추모하는 음악회를 좀 더 의미 있게 하고 싶었고, 전국 교도소를 순회하면서 음악회를 개최하는 안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한 번의 음악회도 좋지만 김수환 추기경님의 추모 음악회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준비위원회도 그 안을 받아들여서 전국 교도소를 순회하면서 음악회를 하였고, 서울에 와서 사형제 폐지 음악회로 마무리 했다고 합니다.
노영심씨를 잘 모르지만, 노영심씨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도소와 세상도 둘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밭에서 같이 자라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선악불이(善惡不二)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미래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과거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의 차원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존재의 차원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바로 지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지금 감동이 없다면, 지금 기쁨이 없다면, 지금 감사가 없다면, 영원한 생명은 허상(虛像)일 뿐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옷>이라는 이야기를 남겨주었습니다.
“그대의 옷은 그대의 아름다움은 많이 가리면서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가리지 못하는 것.
그대는 옷으로 개인의 자유를 얻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갑옷이 되고 사슬이 됨을 깨닫게 되리라.
그대가 옷을 좀 덜 입고 살을 좀 더 내놓아 태양과 바람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생명의 숨결은 태양 속에 있고, 생명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으므로.
잊지 말라.
부끄러움은 순수하지 못한 이의 눈을 가리는 방패일 뿐.
순수하지 못한 것이 거기 더는 있지 않을 때, 부끄러움은 오히려 마음의 족쇄, 마음의 얼룩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잊지 말라.
대지는 그대 맨발의 감촉을 기뻐하고, 바람은 그대의 머리카락과 장난치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오늘 복음에서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는 규율과 율법이라는 옷을 잘 입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예수님께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체면, 가식, 율법이라는 옷까지 벗으라고 하십니다.
욕심, 시기, 질투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보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자아를 보면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떤 결단을 하고 있을까요?>
동네 산책을 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비둘기, 까치 등의 새를 쉽게 볼 수 있는데, 사람이 바로 옆을 지나가도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둘기, 까치가 애완동물처럼 키우는 것도 아닌데, 야생동물이라 할 수 있는 이 새들은 도망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새들도 사람들이 자기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섬에 들어가기 위해 배를 탔는데 기러기가 계속 배를 쫓아옵니다.
사람들은 갑판에 모여 기러기를 향해 새우깡을 던져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새우깡에 맛을 들인 기러기는 다른 먹잇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또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노력 없이 편한 방법으로 먹이를 구하는 그 모습이 걱정되었습니다.
실제로 먹이 주는 사람이 없어져서 자생능력이 없어진 기러기들이 죽는다는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나 지인에게 계속 도움만 받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두 번이야 도울 수 있겠지만, 계속된 도움 요청이 있다면 서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계속 도와주어야 하느냐며 화를 낼 수 있고, 또 반대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도움 요청을 외면할 수 있느냐면서 화를 내면서 상대에 대한 상처의 골이 커지기만 할 것입니다.
도움에만 의존하면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무조건 우리의 도움을 다 들어주신다고 믿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성장을 위해 당신 손길을 거두시기도 합니다.
진짜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밖에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다시 묻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재산을 포기하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그가 슬퍼하며 주님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계명을 모두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열심히 살고 있던 젊은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예수님께 자랑하듯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본인의 결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젊은이가 예수님을 곧바로 따를 수 있도록 재산을 모두 없앨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알아서 모든 것을 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야 그가 진정으로 성장하면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결단에 대해서 묵상했으면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떤 결단을 하고 있을까요?
혹시 알아서 해달라면서 자신이 선택하고 해야 할 것을 주님께 미루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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