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마음 파란마음
전영순
파란 티 없이 맑은 하늘.
저 하늘을 습관처럼 보고 있노라면 내 가슴은 벅차오른다 아, 내가 이
자연 속에서 맘껏 노래할 수 있는 행복함을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형마켓을 찾아 한 달에 한번 어김없이 그곳에 가기 위해 좋아
하시는 골든볼 빵, 고등어, 생닭, 이슬로, 컵라면…………. 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작은
정성을 차곡차곡 챙긴다. 올 들어 그곳을 찾을 때마다 변함없이 펑펑 내리는 흰눈은
동구 밖에 서성이며 포근하게 맞이하는 내 시어머님 같았다.
십여 년 전, 이 길은 나에겐 한없이 낯설고 가슴에는 알 수 없는 긴장으로 불안케만
했던 길이다. 곤지암에서 소목재까지 거친 도로는 이방인을 대하듯 냉담했다. 시댁을
찾을 때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무겁게 당기는 듯한 압박감을 떨칠 수 없었고, 긴장
감은 나지막한 스레트 지붕이 보일 때쯤이면 극에 달했다.
허리춤을 드러낸 늙수레한 할멈의 엉덩이마냥 엉성히 내려앉은 부엌 뒷간.
그 뿐인가 가마솥 사이로 둘러빠진 부뚜막은 부끄럼 모르고 과감히 드러낸 새댁의
빨간 엉덩이처럼 둥숭둥숭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어둠이 찾아오는 밤,
시어른과 시동생 둘 그리고 우리 부부가 이렇게 한 방에서 함께 잠자리에 들 때 어머
님은 며느리에 대한 큰 배려로 아랫목을 내어 주셨지만 난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
편했다.
어머님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피난 온 이래 이 동네에서 떠난 일이 없다고 하신다.
그 생활에 익숙해진 소박한 시어머니와 아파트 생활에 편리하게 길들여진 며느리와
의 어긋난 정서는 마당을 지나 뒷간에 버티고 있는 대추나무 꼭대기까지 찌르는 듯 스
트레스로 내게 왔다. 시댁을 찾을 때마다 나의 아랫배는 신경성으로 임신 몇 개월 된
산모마냥 더부룩하게 부풀어 올랐고, 식욕이 없어 숟가락만 달그락 달그락 눈치만 보
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본 어머님은 '여자가 입이 그렇게 짧나, 그 둥치로 손이 귀한 집안에 언
제 손주 구경하겠냐.'며 퉁명스럽게 말을 던져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러나 난 그
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댁에 갈 때면 시골 아낙네 못지않게 밭일과 허드렛일까
지 마다않고 땀을 흘렸다.
그리고 난 딸 하나 아들 둘 이렇게 삼남매를 두었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그렇게 낯설기만 했던 산골 풍경이 언제부턴가 정겨운 나들이 길로 변해가고 있으
니. 어머님도 며느리의 마음을 읽으셨는지 건너편에 현대식 건물을 마련하시고, 투박
하게만 들리던 말투는 질화로의 溫氣가 되어 포근하게 나를 감싸 안는다. 가끔 옛집이
그리워 둘러보겠다고 하면 뭘 구태여 가느냐며 웃음으로 얼버무리신다. 이젠 고부간
의 만남이 아니라 친정에 온 딸처럼 우리는 한 자리에 마주한다.
어둠이 내려 밤이 깊어지면 어머님은 윗마을 장 서방네부터 아랫마을 다섯 살배기
이름도 모르는 승근씨 아들까지 한 달 동안 일어난 일들을 며느리 앞에 신이 나서 늘
어놓으신다. 마치 장독대에 숨겨두었던 엿가락 하나하나 끄집어내듯이 끝이 없다 어
스름한 달빛이 지붕위에 얹혔다가 비켜갈 때쯤이면 어느새 어머님의 목소리도 촉촉이
달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나도 덩달아 아득한 그곳으로 빠져 들어간다. 겨울 찬바
람도 좋거니와 소목재의 원적산에서 풍기는 친정어머니의 자애로움 같은 정감은 나를
이렇게 끌어당겨 안았나보다.
그 정겨움이 그리워 살며시 빠져 나와 혼자가 되어본다. 고요함이 잠들어 있는 뚝방
길을 혼자 걷노라니 산자락의 스산한 바람은 내 가슴을 적시고, 펑 쏟아졌던 눈발은
어느새 살며시 발밑으로 감긴다. 원적산의 한적한 기운만이 온 동네에 가득하다. 스산
한 겨울의 청명한 하늘의 별 하나가 파르르 떨면서 가슴으로 안겨든다. 항상 변함없이
정겹게 다가오는 저 원적산을 어머님은 어떤 눈으로 바라 보셨을까?
이젠 모든 것이 낯설지 않은 정겨운 내 마을 같다.
시댁을 떠날 때쯤이면 어머님은 곳간에서부터 비닐하우스까지 샅샅이 뒤져 먹을 거
리를 차 안에 가득 채우시느라 분주하다. 개중에 필요치 않은 물건도 웃으면서 받아드
린다. 80kg나 되는 큰 덩치이지만 울적한 마음을 애써 누르시며 운전 조심해서 잘 가
라 손짓을 하시더니 금세 외양간의 누렁이마냥 눈시울을 붉히시는 어머니.
돌아서는 내 마음은 왜 이렇게 무거운 것일까.
아직도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은 탓일까.
시댁에 갈 때 한 달 동안 드실 두 분의 찬거리며 생활용품까지 꼼꼼히 챙겨 올라갔
건만, 내려올 때 차 안의 무게는 올라갈 때 보다 훨씬 무거워 그것이 내 마음을 누르
고 있다. 나 또한 시부모님과의 통하는 알싸한 마음의 전율을 훨씬 더 많이 느꼈나 보
다.
원적산에 쌓였던 흰 눈만큼이나 어머님의 하얀 마음은 며느리를 감싸 안으시고, 그
마음을 닮으려 이 며느리는 파란 마음으로 저 맑은 하늘을 꿈꾼다.
2005. 20집
첫댓글 원적산에 쌓였던 흰 눈만큼이나 어머님의 하얀 마음은 며느리를 감싸 안으시고, 그
마음을 닮으려 이 며느리는 파란 마음으로 저 맑은 하늘을 꿈꾼다.
스산한 한겨울의 청명한 하늘의 별 하나가 파르르 떨면서 가슴으로 안겨든다.
원적산에쌓였던 흰 눈만큼이나 어머님의 하얀 마음은 며느리를 감싸 안으시고 그 마음을 닮으려 이 며느리는 파란 마음으로 저 맑은 하늘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