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치기 노년의 문학가 ,자칭 문학가라해서 죄송합니다 꼭 공무원의 문학상에 도전이라기보다 나의 제2의 인생의
삶에 있어서 문학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그 이야기를 잔잔히 써 보고져 합니다. 삶방의 방제하고는 좀 거리가
있는듯하나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기 바람니다 제1부는 이미 1차적으로 올렸고 나의 후반부의 글을
올리고져 합니다
〈 수필 〉
나의 인생의 제2의 삶 '문학'
글 / 만장봉(김용상)
나의 인생에 있어서 제2막 문학(文學)은 한 마디로 책과의 싸움이며 비경제적이고 정신적인 세계에서 우리의 삶과 함께 하는 학문이며 그 중에서도 ’문학이라‘는 장르이다. 산골의 농촌에서 학교를 다녀서 학교에 갔다 오면 소깔이나 베어서 소죽을 써 주는 일들은 나와 작은 누나의 몫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하얀 모시옷에 두루마기에 나주향교의 제관이나 문중일을 보는 선비셨다. 그러니 평상시에 소설책이나 시집 한 권을 읽어보지 못한 문학(文學)의 문자도 모르는 문학의 문맹인이었다. 겨우 중학교,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한 참 우리들에게 공부를 가르치시다가 김소월의 시 ’진달레‘’못잊어‘ ’산유화‘’금잔듸‘ 또는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 김광균의 ’설야‘(雪夜)등을 낭송을 하며 우리들을 시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신 훌륭하신 시인이시며 국어 선생님으로 우리들의 머리에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고대문 시간에는’장끼전‘이라든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등의 가사문학과 고산 윤선도의 시가에 대하여 머리에 남아 있고,특히 고향이 나주라 고대문 시간에 백호 임제에 대하여 자세한 가르침과 그 분의 훌륭하신 문학세계를 특별히 강조 하시며 가르치신 기억이 머리에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리고 특별히 공직에 있을때에도 문학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없고 직업이 법을 집행하는 공직이라 법학과 행정학이라든가 사회과학에 관한 책들을 주로 읽었다.
2004년 6월 상반기 서울시 정년 퇴임식을 하면서 나의 정들었던 서울시정의 무대에서 내려 오고야마는 현실 앞에 가슴이 멍멍하고 직장을 잃은 허전한 마음이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이미 암(癌)이라는 판정을 받고 평온한 가정이 파탄의 길로 가고 있었다. 정년은 하였지, 아내는 유방암이라는 병명으로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집 부근에 있는 성당에 나가 영세도 받고 신앙생활로 나를 달레 보기도하고, 내가 퇴직을 하면 초등학교 교사자격 있고 또한 젊어서 하고 싶었던 일이라 비록 나이는 들었으나 초등학교 교단에 서 보고 싶었다. 전라남도 초등학교 임용고사에도 도전을 하였고 또 한 일차에 합격을 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계약제 교사로 시간을 보냈다. 전라남도 곡성의 ’고달초등학교‘ 강진의 ’계산초등학교‘등에 있으면서 원래가 글쓰기를 좋아하여 년말의 학교의 교지에도 나의 글이 나가고 강진에 있을 때에는 일요일이면 ’영랑‘의 생가와 다산 정양용의 유적지등을 다니면서 시심(詩心)을 키우며 서투른 시를 써 보기도 하였다. 아름다운 자연은 우리 인간의 스승이며 나의 삶을 뒤돌아보고 반추를 해 보는 성찰의 시간이며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더듬어 보는 자기만의 시간이다.
나는 서울시를 정년을 하면서 이제는 나의 시간뿐이니 원(願)없이 책장을 넘기기로 마음을 먹었다.그러나 아내의 암의 투병생활에 항상 마음편할 날이 없었다. 아내는 3년만의 긴 여정의 투병 끝에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아내 잃은 서글픔, 허전함, 아이들은 집을 떠나고 나혼자 식사문제 ,혼자 생활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이었고 삶의 늪속에서 허덕이는 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명심보감 논어 사자소학등 한문공부를 하여 한자1급자격도 확보 하였으며 역사 문학 유적지 답사등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고 ,저의 12 대조 시서 김선 할아버지의 유고집이 나주시청과 동신대 김종섭교수에 의해 이 세상에 나오게 되어 할아버지께서 훌륭한 한시가 1250수의 유고집에 실려 있고 조선 중기의 훌륭한 학자요 시인이며 유학자임을 알고 그 유고집의 한시를 이해하기 위하여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이 어떠한 학문인가에 대한 의문과 함께 도전을 하였으며, 문학 답사도 부지런히 병행을 하였다. 저의 할아버지의 유고집인’시서유고집‘의 한시를 이해하는데 한국방송통신대학의 고전문학분야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나이도 있고 몸도 아픈몸을 이끌어가며 올 상반기에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을 앞두고 있다.
안동의 농암(聾巖) 이현보 선생의 유적지와 낙동강 상류의 생가와 정자에서 ’어부단가‘의 작품을 이해 하였고 도산서원 이황의 작품들을 청량산을 가는 도중에 접할 수가 있으며 하회마을의 입구의 ’병산서원‘을 답사를 갔을 때에는 정말 자연의 산수와 우리 인간의 삶의 조화를 이루어져가는 느낌을 받아 입이 벌어질 정도의 감정을 느낄수가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의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이육사 문학관도 답사를 하여 시집과 이육사평전을 구입하여 책을 부지런히 넘겼다. 그분은 시인이기 전에 일제강점기의 우리 민족의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의 선각자로 중국의 감옥에서 싸늘한 시체로 후손들에 의해 운구되어 왔을때에는 정말 가슴이 뭉쿨 하였다. 훌륭한 독립운동가임을 느꼈다. 역사의 현장을 좋아하니 당연히 고전문학을 좋아하여 문학공부를 하는데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 외에도 문학 답사로는 남춘천에 있는 김유정 문학관도 2~3번을 찾은거 같으며 김유정 작품을 거의 다 독서를 한 거 같으며 충청도 옥천의 ’정지용‘문학관과 생가를 답사하여 그의 작품 ’향수‘를 실감 나게 그의 문학의 세계를 이해하게 큼 되었으며,경기도 양평의 북한강변에 있는’황순원 문학관‘도 답사를 다니면서 문학의 시야를 현장과 접목을 하면서 나의 문학의 세계를 넓혀 갔다.
이외에도 해남의 ’녹우당‘의 윤고산의 종택을 자주 찾아 유물관도 부지런히 찾아 다녔으며 작품들을 현장과 병행한 문학공부를 하였다 보길도를 찾아 남해의“이뫼를 지나면 저뫼가 나타나니”윤고산의 ’어부사시사“를 실감나게 문학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나의 삶에 자아를 발견할 수가 있었으며,고향으로 낙향을하여 ‘무등산’의 줄기를 따라 정자들을 찾아 다니며 담양의 송강정(松江亭)을 찾아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의 현장에서 주옥같은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그리고 식영정과 서하당의 주변에서는 ‘가사문학관’이 우람히 건립이 되어 가사문학의 고장임을 자랑이라도 하듯 우뚝 솟아 있다.이곳은 무등산의 계산풍류(溪山風流)의 흥취가 더욱더 난다 그 주변에는 소쇄 양산보의 원림인 소쇄원이 있으며,환벽당 그리고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장군의 원혼을 달레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취가정’이 말없이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이고 있다.무등산의 동쪽으로는 ‘적벽강이 흐르며 한가로히 백구들이 하늘을 유유히 나르며 김삿갓이 한 시대를 풍미하고 보냈던 고장이기도 하며 문인묵객들이 항상 드나들던 ’물염정‘’환벽당‘’송석정‘등의 정자들이 요소요소에 자리를 하고 있어 ’적벽풍류‘(赤碧風流)속에 옛 문인들의 시 한수가 김삿갓의 시와 어울러 그시혼이 물위에 흐르면서 호남문학의 정취;를 보여 주고 있다.
저는 저의 12대조 시서김선 할아버지의 문학의 현장을 찾고져 영산강변의 ’호가정‘’요월정‘호남의 십대안에 든 ’영모정‘안에는 지금도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세지면의 벽류장에도 당대의 4대 문장가 계곡 장유와 주고 받은 시문이 고스란히 정자안에 소장하고 있으며 영산강변의 풍광이 좋고 백구가 나르는 아름다운 정자에는 저의 할아버지의 시문이 남아 있으며 소실된 정자에도 책자에는 남아 있다. 훌륭하신 할아버지의 그 어려운 한시를 이제는 좀 이해를 하고 호남의 향토문학을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으며,그 토록 원했던 2023년 6월경에는 할아버지의 묘소 앞에 조그마한 공원을 조성하여 4개문중과 후손들의 협조로 4천만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시비(詩碑) 건립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화순문학회 이사,서울의 시우문학회 전 이사로 계속해서 글을 올렸으며 나주.화순.광주 지역신문에도 기고하고 있으며 향토문학의 심취를 하여 호남의 문학의 우수성을 알리고 물질문화에 뒤로 밀린 정신문화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작금의 세태에 조그마한 역할을 하고 있다. 끝
첫댓글 아주 귀감이 되시는 일 하시는 만장봉님 훌륭하십니다
향토 사랑 나라사랑 ~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흥핮
요 애국자 만장봉님 대단하십니다.
문학의 길은 고독한 방랑자의 길이자 수행자의 길입니다.
누군가가 읽어주지도 않고 책장에서 서고에서 잠자는 글들은 한 개인의 일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문학을 너무 쉽게, 우습게 보면서 대드는 문인이라는 사람들이 너무 많지요.
쉽게 쓴 글, 빨리 쓴 글, 고통 없이 탄생한 글, 정정과 퇴고 없이 쓴 글은 그 만큼 독자에게 감동도 주지 못합니다.
구도자가 깨달음이라는 도를 얻기 위하여 숱한 고행의 길을 가면서 수행하듯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가는 문인만이 작품으로 살아 남습니다. 문인은 작품으로 말합니다.
문학이라는 제2의 삶을 선택한 만장봉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2015년 제15회 한국글사랑문학대상을 받은 제 시 한 편을 올립니다.
아내의 지우개
-------------------------- 박 민 순
서랍을 여니
구석으로
또르르 굴러가는 지우개
본래 네모였을 텐데
세월의 무게 지우느라
둥글둥글 모서리 닳았다
손바닥에 지우개를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리다가
아차 하는 순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통통 튀어 오른 지우개
지구의 자전 속도보다 더 빠르게
싱크대 앞으로 굴러가더니
설거지하던 아내의 발뒤꿈치를
툭 치고는 이내 멈추어 섰다
아직도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여
지우고 또 지우는 나를
오디처럼 탱글탱글 여문 눈빛으로
곱게 흘기는 아내
내 삶은 연필과 지우개만으로도
자유로운 삶이었지만
아내는 내게서 떨어져 나온
수북한 지우개 똥을 치우느라
물기 마를 새 없는 행주였을 것이다.
네 문학 열심히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