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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34,1-11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3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4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5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7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8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9 그러니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10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 떼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 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리니, 다시는 그 목자들이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저 하느님의 포도밭에 와 있음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 대한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속에는 하느님 자비의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세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인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일의 실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계산이라고는 모릅니다.
사실 그는 애시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해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주어진 은총입니다.
둘째는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준다는 점입니다.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와 자비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능력이 없는 까닭에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셋째는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이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일한 시간이나 일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먼저 온 품꾼에 대한 부당한 대우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두에게는 계약을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고,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을 뿐입니다.
사실 주인은 품삯을 셈 해줌에 있어서,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쳐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권한 행사와 너그러운 처사는 절대적인 하느님의 주권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는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 이유’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들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온 이든 나중에 온 이든 모두가 자비를 입은 이들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평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마태 20,12-13)
사실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교회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이와 나중 온 이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첫째라고 뻐기거나, 혹은 꼴찌라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포도밭에 와 있음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마태 20,4)
주님!
당신은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꼴찌들부터 품삯을 주시니
애시당초 일을 부리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당신은 일한 시간이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으시고 똑같이 품삯을 주시니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당신 포도밭에 불러들인 까닭입니다.
이토록, 부르심이 이미 은총이요, 은총은 계산이 아니라 자비오니, 주님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당신 부르심이 제게는 영광이오니
오, 나의 주 나의 임이시여!
찬미 영광 받으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이 세상이 첫째인 저세상의 꼴찌>
어제 복음의 끝과 오늘 복음의 끝은 같은 내용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마태 20,16)
그리고 이 말씀은 종말에 인생 역전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나가던 사람이 저세상에서는 꼴찌가 될 거라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첫째이던 사람은 무조건 꼴찌가 되는 건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선정을 펼친 세종대왕은 어떻게 되고 저처럼 이 세상에서 첫째도 꼴찌도 아닌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그러므로 첫째인 사람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종말에 인생이 역전된다는 것이니, 역시 인생 종말에 어떤 인생이냐가 관건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순간에도, 다시 말해서 죽을 때까지 아직도 이 세상이 첫째이고 저세상은 꼴찌인 사람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에서 꼴찌가 될 첫째입니다.
그리고 종말의 순간에도 이 세상을 집착하여 하느님 나라 갈 생각도 없고 채비가 안 된 것이 문제이지, 마지막에라도 그러니까 저녁 6시를 1시간 앞둔 5시에라도 가겠다고 하면 됩니다.
이는 마치 마감 1초 전이라도 응시 원서를 내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착순으로 천국 지원자를 자르지 않고, 10시간 전에 응시한 사람과 1초 전에 응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평생 착하게 산 사람과 평생 악하게 산 사람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평생 악하게 산 사람이라도 죽기 전에 회개한다면, 다시 말해서 평생 악하게 산 것을 후회하고 하느님께 애원한다면, 평생 착하게 산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를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이십니다.
이때 평생 착하게 산 사람이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인데 왜 나와 똑같이 받아주시냐고 따진다면, 그 사람이 실은 착한 사람이 아니고 악한 사람입니다.
평생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수도 생활 열심히 한 사람일지라도 마지막에 대세 받는 사람을 시기한다면, 그 신앙인과 수도자는 신앙생활과 수도 생활을 헛되이 한 것이고 불행한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을 착실히 한 착한 사람이란 하느님의 후하심을 닮아 다른 사람, 악한 사람에게도 후하고 특히 구원 문제에 있어서 후할 것입니다.
나만 하늘에 오르고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자기만 지붕에 오르고 사다리를 걷어차는 세속인과 다르지 않지요.
사실 일찍부터 포도밭에서 일한 사람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을 일찍부터 한 사람은 일찍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사한 것을 행복으로 여겼어야 했습니다.
하느님을 일찍 안 것이 불행입니까?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를 일찍부터 한 것이 손해입니까?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를 고역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손해 봤다고 할 것이고, 그런 사람은 일생 고역을 치렀으니 일생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인이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가 진정한 행복이요,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후하심을 닮아 다른 사람도 구원되길 바라는 사람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그저 감사하라>
어려서는 삼촌이나 누나에게 용돈을 얻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명절이 되면 서울의 일터로 떠난 누나를, 삼촌을 동네 어귀에서 기다렸습니다.
누나를, 삼촌을 기다렸다기보다 용돈을 기다렸습니다.
그 액수가 얼마가 되든지 상관없이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용돈을 기대하게 되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용돈을 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어느 날 그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삼촌이, 누님이 용돈을 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겉으로는 아닌 척 했지만 용돈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습니다.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를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관한 비유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아홉 시에 일을 시작한 사람이나 열두 시, 오후 세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시작한 사람과 똑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일꾼들은 계약을 맺을 때는 그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러나 품삯을 받게 되는 시간이 되자 일찍 일을 시작한 사람은 뒤늦게 시작한 사람보다는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 기대를 채울 수 없었고, 그래서 투덜대며 급기야 따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상대적으로 비교를 하는 순간 자기의 첫 마음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분명 그는 계약한 만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받지 못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누가 용돈을 주면 주는 대로 감사히 받을 것이지 투덜댈 자격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계약대로 받았으면 족해야지 왜 따집니까?
주인은 분명 정의를 지켰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시기심 때문에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로마 11,32).
주님께서는 언제나 후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선을 베풀고자 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선은 주님께서 자유로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품삯을 받기 위해 일을 한 사람과 일 자체를 고마워하며 일을 한 사람과는 분명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지만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나라에서는 결과보다는 동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급은 인간이 노력해서 이룬 업적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물은 감사히 기쁘게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
(성 아우구스띠노)
포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음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일을 해도 해야 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
(성 요한보스코)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마태 20,16).
하느님 아버지는 너그러우시고, 나는 쩨쩨하고 시기질투하며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임을 뉘우칩니다.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사가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 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 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심판 이후에 받게 될 영광에 대한 기대가 지금 행복을 좌우한다>
존 뉴턴은 반항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에 참여하며 노예들을 가혹하게 다루었고, 고난과 도덕적 타락으로 가득찬 소란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1748년 3월, 그의 배 그레이하운드(Greyhound)는 북대서양에서 격렬한 폭풍에 휘말렸습니다.
배는 심하게 손상되어 침몰할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배의 키잡이였던 뉴턴은 폭풍 속에서 배를 조종할 때 배 밖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키에 몸을 묶어놓아야 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이 시련 동안 뉴턴은 심오한 영적 각성을 경험했습니다.
배가 파도에 부서지자 뉴턴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종교적 가르침을 떠올렸습니다.
배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 뉴턴은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며 절박한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기적적으로 그레이하운드는 폭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뉴턴은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기대를 할 수 없었고 정말 지옥에 갈 사람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는 점차 이전 삶의 방식을 버렸고, 1754년에는 노예무역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성공회 신부가 되어 노예 폐지 운동에 영향력 있는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찬송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에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납니다.
“놀라운 은혜, 감당할 수 없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잃었던 나를 찾았고, 눈먼 날 보게 하셨네.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
오늘 복음에서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아침에 만난 이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아홉 시에도,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다섯 시쯤에도 나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인은 다섯 시부터 온 이들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씩 주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세 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이들은 조금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은 그들을 꾸중합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일해놓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는 이들입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그들을 포도밭에서 일하게 한 이유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존 뉴턴과 같은 사람은 어떨까요?
지옥에 갈 줄 알았고 또 지옥의 사람처럼 살았던 뉴턴은 늦었을 때 주님께 돌아왔고, 자신과 같은 죄인을 살리신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를 노래하였습니다.
그가 나중에 성공회 사제로 살았지만, 그의 봉사는 자신이 받은 은혜에 비해 너무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힘이 들 수 없었습니다.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려면 더 높은 영광을 기대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비르짓다의 7기도’를 바치면서 연옥에 가지 않고 순교자의 지위에 오른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달랑 그 기도를 한다고 피를 흘리며 순교하신 분들의 영광이 주어진다는 것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지금 내가 하는 봉사는 그 은혜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 때문에 진짜 하늘 나라에서 그런 지위에 오를 것을 압니다.
지금부터 행복하려면 한 데나리온의 값을 무한히 큰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이 갔어야 할 지옥을 보고 체험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한 데나리온의 값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결코 힘들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크루지 영감’은 자신이 죽고 난 후의 무덤과 비석에 사람들이 침을 뱉는 미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자신의 무덤에 많은 이들이 꽃을 놓아주는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만큼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전 수전노의 지옥의 삶이 아닌 천국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더 큰 영광을 기대합시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한 데나리온의 값이 하느님 아드님의 피 값임을 믿읍시다.
그러면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해 그분 뜻을 따르는 삶이 전혀 고생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항상 부족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이 행복이 진짜 영원한 행복을 보증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은총은 ‘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1)
오늘 복음에서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라는 말은 뒤의 20절-23절에 있는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의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태 20,20-21)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입니다.
두 사도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요청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두 사도가 요청한 것입니다.
두 사도의 요청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열두 옥좌’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에 연결됩니다(마태 19,28).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고, 예수님께서 어떤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만 데리고 가신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두 사도는 자기들이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로서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은 포도밭에 맨 먼저 온 이들이 늦게 온 이들보다 품삯을 더 받기를 기대한(요구한) 것과 같습니다.
2)
또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라는 말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말과 비슷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루카 15,29-30)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나오는 ‘맨 마지막에 온 이들’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과 같고, ‘맨 먼저 온 이들’은 ‘큰아들’과 같습니다.
두 비유는 모두, ‘맨 먼저 온 이들,’ 또는 ‘큰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는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맨 마지막에 온 이들’, 또는 ‘작은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을 시기하거나 항의하지 말고, 그 자비에 동참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3)
‘구원의 은총’은 노동의 대가로 요구하는 품삯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자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일꾼들, 품삯’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신앙생활을 ‘노동’으로, 또 은총을 ‘품삯’으로 생각하는 것을 꾸짖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신앙생활은 결코 노동이 아니고, 은총은 품삯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그리고 ‘은총’은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4)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고 평생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와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회개한 사람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는 다른 나라가 아니라 같은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더 좋은 나라가 따로 있을 수 없고, 덜 좋은 나라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성당에 일찍 와서 잘 준비하고 미사 참례를 한 사람이 받아먹는 성체와 늦게 온 사람이 먹는 성체가 다를 수 없고, 일찍 왔다고 성체를 두 개씩 주는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평생 마음껏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이고, 그런 진정성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미사 시간이 다 지나가도록 밖에서 놀다가 영성체 때가 되어서야 성당에 들어와서는 성체를 받아먹어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도 역시 어리석은 생각이고, 만일에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성체 모독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기본소득제의 원조 - '착한목자 주 그리스도 예수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23,1)
2000년 전통의 가톨릭교회의 자랑은 역대 교황들이요 무수한 성인들일 것입니다.
어느 종교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유구한 전통의 반영입니다.
지금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에 앞서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제257대 성 비오10세 교황입니다.
역대 교황마다 얼마나 큰 분투의 노력을 다해 교황직을 수행했는지 그들의 행적에 감탄하게 됩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비오 10세도 참 탁월한 교황이었습니다.
교황이기 이전에 주님을 닮은 참목자였습니다.
옛 분원장 시절, 30년이 지난 지금도 장상의 충고를 잊지 못합니다.
“장상이기 이전에 목자(牧者)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며, 목자처럼 형제들을 섬기고 돌보라는 충고였습니다.
성 비오 10세 교황의 감동적인 생애를 대략 나누고 싶습니다.
성인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에페 1,10)라는 사목 표어에 따라 교황직을 시작합니다.
우체국장의 아들로 태어난, 가난한 가정 출신인 비오 10세는 항상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으려고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라고 할만큼 가난을 사랑하였습니다.
성인의 매일 일과만 봐도 얼마나 부지런한 사목자인지 잘 드러납니다.
하루의 일과는 매일 일정했으니, 오전 4시에 일어나서 6시에 미사를 집전하고, 8시 정각 바티칸 궁전 2층에서 개인적인 연구와 사사로운 알현이 있었습니다.
큰 책상 중앙에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와 ‘잔 다르크’ 성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정오에는 공식 회견을 열었고, 1시에는 측근들과 함께 점심식사, 그리고 잠시동안의 휴식을 취합니다.
저녁식사는 오후 9시에 이루어졌고, 그 이후에도 밤이 깊을 때까지 다시 일했다 합니다.
성 비오 10세는 어린이들을 각별히 사랑했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종교적 삶을 쇄신시키기 위해 힘썼으며, 특히 미사성제의 경우 그러했습니다.
성찬례의 대미를 장식하는 영성체에 대해 “하늘나라를 향한 가장 짧고 안전한 길”이라고 유난히 강조했으며, 성체에 대한 존경심으로 후대 신자들에게 '성체의 교황'이라는 명예로운 호칭도 지녔다 합니다.
비오 10세는 가톨릭 신자가 영성체를 자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어린이 첫영성체 나이를 기존의 10-12세에서 7세까지 낮추어 영성체를 쉽게 해주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많은 신자들은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도 보통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영성체를 할 뿐이었고, 많은 이가 대축일 때에만 영성체를 했습니다.
비오 10세의 치세 중 가장 걱정거리는 가톨릭 신앙에 큰 위협이 되었던 근대주의와 상대주의로 철학, 신학, 성경주석에도 그 사상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이신론과 불가지론, 무신론에 이르게 한 근대주의를 “모든 이단의 총집합”이라고 규정지었으며, 참으로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총력을 다한 사목자의 삶이었습니다.
교황님의 다음 말씀도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 기인함을 봅니다.
“교회에서 사도직의 가장 큰 장애물은 신자들의 소심함이라기보다는 비겁함입니다.”
교황은 생전에 기적을 많이 일으켜 살아있는 성인으로 대접받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도 있어, “1914년이 가기전에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말했고, 전쟁을 막고자 노력을 기울였으니 허사가 되었고, 대적하기 위해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신학생들에게는 눈물을 흘리며, “그대들이 고백하는 신앙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전쟁터에서는 애긍심과 동정심을 잊지 마십시오.” 당부했다 합니다.
교황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공포와 우울증 상태에 빠졌고 그해 뇌졸중으로 선종하니, 한평생 예수님을 닮은 착한목자 교황으로서 최선을 다한 삶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여기 나오는 포도밭 주인은 바로 착한목자 주님을 상징합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착한목자 하느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는 온통 에제키엘 예언자들 통하 악한 목자들에 대한 착한목자 하느님의 격렬한 분노의 표출로 가득합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너희는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나 이제 양떼를 찾아서 보살피겠다.”
비단 교회지도자들 뿐 아니라 작금의 위정자들에게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아, 정말 이제 나라의 지도자들, 위정자들이 민생을 챙기며 착한목자영성을 살아야 할 절박한 시점에 이른 것 같습니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절박한 아우성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의 포도밭 선한 주인은 착한목자의 모범이 됩니다.
그는 결코 유능한 사업가 비즈니스맨이 아닌 착한 목자입니다.
포도밭 선한 주인은 일꾼들의 일한 시간과 양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하루 한 데나리온 일당을 나눠줍니다.
분명 선한 주인은 일꾼들의 내적사정을 충분히 고려했을 것입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기회도 일거리도 없는데 딸린 많은 식솔들의 가장들임을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대로 자비롭고 너그러운 착한목자 주님의 모습입니다.
착한목자 주님이야말로 요즘 회자되는 기본소득제의 원조임을 깨닫습니다.
기본소득제도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제가 모든 구성원 개개인에게 아무 조건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입니다.
앞으로 보편적인 빈곤화로 인해 조만간 실현되리라 봅니다.
얼마전 좌절된 ‘전국민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도 일종의 기본소득제에 속합니다.
'억강부약 대동세상, 먹사니즘'을 주장한 모 정치인의 이상도 오늘 복음의 정신과 일맥상통합니다.
강자의 욕망은 절제시키고, 약자의 삶은 보듬으며, 모두가 어울려 평등하게 사는 보편복지가 실현된 세상이요, 2000년부터 쓰인 ‘먹고사는 게 최고 가치’라는 조어가 먹사니즘입니다.
착한목자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제 분수를 모르고 월권한 철부지 일꾼의 항변에 대한 선한 주인의 통쾌한 반응이 복음의 옹졸한 일꾼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착한목자 주님의 자비하시고 너그러운 마음을 닮게 합니다.
모두가 똑같이 받아 모시는 하나의 성체가 기본소득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주님,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시편 23,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내맘대로' 사랑 안에서 나는 온전한 주인공입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관대한 포도밭 임자이시며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진심이 드러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마태 20,1)
밭 임자가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구하러 장터로 나갑니다.
그는 첫 새벽에 만난 일꾼들을 자기 포도밭에 보내고도,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이렇게 네 차례나 더 장터에 나갑니다.
거기에 일을 얻으려 기다리는 이가 있으면 자기 포도밭으로 보내어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지요.
주인 중심이 아니라 일꾼의 바람를 우선하는 고용 방식입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마태 20,12)
분명 밭 임자가 첫 일꾼들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보았는데도 그들이 불평합니다.
가장 먼저 선택되었던 기쁨은 사라지고, 노동은 고생이 되었으며, 일한 시간과 수고가 억울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본주의 경쟁 문화에서 자라난 우리에게 이 항변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공정과 평등의 기치 아래 상위 1%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가치, 노동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는데 익숙한 세상이니까요.
타인이 덜 받는 것에 함께 분노한다면 정의, 연대, 사랑이겠지만, 타인이 동등하게 받는 것에 분노하는 것은 질투이고 시기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루 밥값을 벌기 위해 하루종일 가슴 졸인 수고까지를 노동에 준하는 가치로 보아 주는 주인의 마음씀씀이와 관대함이 놀랍습니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마태 20,13)
주인이 그들에게 첫마음을 일깨웁니다.
오히려 합의를 뛰어넘는 허상을 품은 이는 첫 일꾼들인 셈이지요.
그들은 '조금만' 일한 이들이 자기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분노한 나머지, 가장 먼저 선택되어 마음 놓았던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온종일 뿌듯했던 노동의 보람을 박탈감과 상실감으로 맞바꾼 형국이니 주인은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하고 싶은 만큼 자유롭게 무한히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각 사람의 됨됨이와 자격을 따져 사랑의 양을 제한하거나 계산하는 분이 아니시지요.
만일 그렇다면 주님께 사랑받을 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도 안 될 겁니다.
누군가는 이런 주님이 못마땅할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 비유 속 일꾼들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주님을 닮아 관대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가끔은 깃털 하나 꼽을 자리 없이 마음이 편협하고 옹졸해지니, 남이 무얼 더 받았는지를 살피기보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에 더 주목하는 것이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사실 어쩌면 이런 주인 덕분에 우리는 무수한 죄와 약함에도 불구하고, 턱걸이로라도 포도밭 울타리에 아슬아슬 매달려 아직까지 희망을 가지고 순례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1독서에서는 목자들을 호되게 꾸짖는 주님의 노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목자들도 그렇게 대해 주길 바라셨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 이제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에제 34,11)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다시 우리를 그들 손에서 거두어 친히 보살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사랑하는 양들을 사람들의 손에, 그들의 방식에 맡겨놓았더니 사랑이 숫자나 도식으로 대치되어, 온기 없이 건조하고 냉랭한 조건 아래 갇혀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마음으로 양떼를 돌보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누구이건 어떤 몰골이건 더, 더, 더 사랑하고, 그래서 더, 더 더 주고 싶어하는 분이십니다.
끝내는 목숨까지 내놓으실 만큼 말이지요.
우리 주님이 그런 분이시니 이미 우리는 과분하게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목자 앞에서 보상과 댓가의 양을 비교하고 따지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잘났건 못났건, 의인이건 죄인이건, 당신 포도밭으로 불러 함께 할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괜한 곁눈질은 마음만 흐트릴 뿐이지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갑시다.
관대한 주인이시고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오직 하나의 관심사는 '나'뿐이랍니다.
주인의 이 눈먼 '내맘대로' 사랑 안에서 나는 온전한 주인공입니다.
그 주인이 그토록 아끼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해야 할 일>
댈러스 성당에는 새 신자 분과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타주에서도 전입한 교우들이 많은 편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전입교우 소개를 하는데 지난달에는 6가구 20명이 넘었습니다.
새 신자 분과는 전입 교우들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구역과 반으로 안내합니다.
저도 점심에 함께 하면서 인사를 나누곤 합니다.
한국에서 오면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주택, 학교, 자동차, 의료보험, 구직과 같은 것입니다.
주재원으로 오면 큰 어려움이 없지만 이민으로 오면 직장을 구할 때까지 마음을 졸이게 됩니다.
아이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새 신자분과는 영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현지 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전입한 교우들은 성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습니다.
최근에 서울에서 후배 신부님이 문자를 보냈습니다.
본당에서 활동하던 청년이 댈러스로 갔다고 합니다.
숙소, 자동차, 직장까지 구하려고 하는데 도움을 원했습니다.
저는 청년과 연락했고 본당 교우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낯선 이웃을 귀하게 대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스웨덴은 특이한 월세 계약이 있습니다.
한번 계약을 맺으면 몇 년이 지나도 월세를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가 상승으로 관리비는 올릴 수 있지만 월세는 안 올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입자는 월세 걱정 없이 아이들 교육시키고 생활할 수 있다고 합니다.
20년 전이나 20년 후나 같은 월세라면 세입자 입장에서는 큰 혜택입니다.
스웨덴은 집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집이 더 있으면 월세계약을 맺고, 한번 계약을 맺으면 물가가 올라도 집세를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회적인 합의이고, 이런 합의가 있으니 집이 없는 사람도 큰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집이 재산증식의 수단이 되면 집이 많은 사람은 더욱 부유해지고, 집이 없는 사람은 집세 걱정하면서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제도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트렌트 코리아 2024>를 읽었습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돌봄 경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봄에는 3가지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배려 돌봄, 정서 돌봄, 관계 돌봄입니다.
배려 돌봄은 혼자서는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돌봄입니다.
아이, 장애인, 노인에 대한 돌봄입니다.
영국에서는 조부모가 손자를 돌보면 그에 대한 보상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가족이라도 고령의 부모를 돌보면 그에 대한 보상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이제 배려 돌봄은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정서 돌봄은 방황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돌봄이 있습니다.
자살에 대한 충동이 있는 청소년, 약물 중독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 있습니다.
외로운 노인에게 말벗이 되어주고, 프로그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활력을 주는 돌봄입니다.
관계 돌봄은 건강한 사람도,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식입니다.
많이 배웠어도, 많이 가졌어도, 전문적인 직업을 가졌어도 외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도자들도, 성직자들도 이런 관계 돌봄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침부터 일한 사람, 낮부터 일한 사람, 오후에 나와서 일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인은 모두에게 같은 품삯을 주었다고 합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은 주인에게 더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지만 똑같은 품삯을 받은 것에 대해서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없다는 말이요?"라고 대답합니다.
미국 정부는 흑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흑인들의 주거와 복지, 문화와 교육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흑인들의 동네에 도서관을 세워주고, 깨진 유리창은 갈아주고, 노후되어서 허물어져가는 건물은 다시 세워주면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흑인들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흑인들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흑인 재소자들의 비율도 줄어들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흑인들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흑인들의 슬픈 역사에 대한 보상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하고 있지 않는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참고 견디면서 주님의 뜻인 ‘주는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먼저 주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내가 먼저 원하는 것을 받아야 할까요?
이것도 아니라면 동시에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아야 할까요?
많은 사람이 자기 받을 것을 먼저 생각하고 있으며, 받아야 줄 수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야 각박하고 불합리한 세상에서 손해보지 않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라면서 미소 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산적으로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요?
실제로 사람들은 계산적인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어에서도 ‘take and give’라고 하지 않고, ‘give and take’라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내가 먼저 많은 것을 베풀었는데도 전혀 자기에게 되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다고 억울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에 대해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순간의 만족보다 영원한 만족을 위해 힘쓰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동창 신부 중에 항상 앞서서 무엇인가를 하는 신부가 있습니다.
지난 일본 성지순례 때도 다른 동창의 불편을 생각하면서 약국도 다녀오고 편의점도 다녀오면서 동창의 불편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날도 더워서 귀찮을 법도 한데, 자기 돈까지 쓰고 땀도 뻘뻘 흘리면서 앞서서 행동합니다.
또 아픈 동창을 챙겨주다가 코로나 확진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억울해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돕는 일을 무척이나 기뻐합니다.
‘주는 것이 손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의 구차한 변명이 아닐까요?
포도밭 일꾼의 품삯에 대한 비유 말씀을 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부터 일한 사람,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무엇보다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이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포도밭 주인의 처사가 불합리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많이 하건, 적게 하건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무조건 주시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받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봉사에 대한 대가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봉사했으니 이 세상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성당도 나오지 않는데도 많은 것을 누리냐며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충분한 보상을 주십니다.
단지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보상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얼마나 큰 보상이었는지를 발견합니다.
참고 견디면서 주님의 뜻인 ‘주는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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