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물 쓰듯 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물이 귀하디귀한 사막기후의 사람들에겐 아연한 말일 것이다. 기후 재앙의 시대, 봄 가뭄이 연례행사가 된 요즘은 우리도 물 부족을 절감하곤 하나, 한국을 포함한 극동아시아는 비교적 물이 풍부한 지역에 속한다. 특히 여름 장마철 습기는 대단하다. 꼭 우기가 아니더라도 습윤한 기후를 체감할 기회는 적지 않다. 비 갠 뒤 내 건너 앞산 중턱에 피어오르는 운기는 한국 전원의 흔한 풍경이다. 새벽 농무를 가르며 촘촘한 물길을 오가는 거룻배를 젓는 삿갓 쓴 어부는 중국 강남을 대표하는 정경이다. 정원의 낙숫물 소리와 함께 음미하는 농밀한 말차는 습기 가득한 일본의 여름 차밭 공기를 응축한 듯한 맛이다.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 사람들 마음속 한구석엔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자리가 깃들어 있다.
“임리(淋漓)”라는 한자어가 있다. 어느 언어나 의성어 의태어는 어려운 법이지만, 예전 문어체 한문에서 많이 쓰였고 요즘은 별로 볼 일이 없어 더욱 낯선 느낌을 준다. 그러나 뜯어보면 그리 난해한 말도 아니다. 이 말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구 표면 아래에 파악하기 까다로운 심원한 심상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어구를 이루는 두 글자에 모두 ‘물’(氵=水)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물기나 습기와 관련 있는 단어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머지 요소, 즉 ‘림(林)’과 ‘리(离=離)’는 음가 표지이다. 한자 어구 중 서로 연관된 음가를 갖는 두 글자로 구성된 것을 쌍성첩운(雙聲疊韻)이라고 한다. 한자의 음은 초성(初聲)인 ‘성(聲)’과 중성ㆍ종성의 합인 ‘운(韻)’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강(江)’이란 글자에서 ‘ㄱ’은 성이고 ‘앙’은 운이다. ‘쌍성’은 성이 겹친 두 글자로 이루어진 것, 그리고 ‘첩운’은 운이 같은 두 글자로 이루어진 어구를 가리킨다. 즉 ‘기구하다’(길이 울퉁불퉁함. 험난하고 곡절 많음의 비유)의 ‘기구(崎嶇)’는 쌍성이고, ‘지리멸렬(支離滅裂)’의 ‘지리’와 ‘멸렬’은 각각 첩운이다. 그러므로 ‘임리’(림리, linli)는 쌍성어임을 알 수 있다. ‘림(淋)’은 ‘물을 끼얹다, 물이 흘러내리다, 젖다’, ‘리(漓=灕)’는 ‘스며들다, 물이 흐르는 모양, 물이 흘러내리는 모양’ 등의 사전적 뜻을 가지나, ‘림리(淋漓)’라는 결합어의 의미는 두 글자 각각의 뜻의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물기와 관련된 어떤 상태를, 그 자체의 음악적 리듬감은 갖되 의미로부터는 자의적으로 독립된 ‘림리’라는 소릿값으로 지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임리’라는 두 글자 어구는 흘러 흥건한 모양, 뚝뚝 떨어지는 모양, 흠뻑 젖은 모양, 아름답게 이어진 모양, 풍성한 모양 등등을 뜻하게 된다.
자의적 음가의 기원을 찾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최초의 의미가 형성된 이래 그 의미가 구르고 흘러 풍성한 영역을 아우르게 된 과정을 더듬는 것은 지난한 작업이 될 터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두 음절의 소릿값이 가리키는 이미지의 근원을 멀리서 바라보는 일은, 희미하고 몽롱하여 용이하지 않되 웅숭깊고 풍부하여 충분한 보람이 있는 독해가 된다.
먼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점은, ‘임리’는 자의적일지 몰라도 ‘淋’과 ‘漓’라는 두 글자는 결코 자의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리(离)’는 ‘리(離)’와 같으며, 지금은 ‘이별’의 첫 글자인 것에서 알 수 있듯 ‘떠난다’는 의미가 첫 번째 뜻이지만 원래 ‘붙다’, ‘걸리다’의 뜻이었다. 이 글자는 본래 새를 잡는 자루 달린 그물로서, 형태상 ‘필(畢)’, ‘한(罕)’ 등과 동일 계열의 글자였다. 그런데 금문(金文) 시기에 위쪽에 소릿값을 표지하는 요소가 추가로 붙기 시작한다. 비슷한 음가의 ‘림(林)’이 그것이다. 어떤 형태에서는 ‘木’ 하나로 줄어들기도 하고, 어떨 때는 ‘艸’의 형태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 ‘艸’가 ‘屮’로 줄어들었다가, 현재의 ‘亠’로 살아남았다. 결국 현재의 해서체 정자엔 드러나 있지 않으나 ‘림리(林离)’는 원래 떨어질 수 없는 한몸의 소릿값을 가진 두 글자의 만남이었던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