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앙의 변법
손빈이 제나라에서 병법가로서 한창 이름을 떨치고 있을 무렵 진(秦)나라에서는 공손앙(公孫鞅)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일대 정치 개혁이 추진되고 있었다.
공손앙은 원래 위왕(衛王)의 첩의 소생이었다. 나중에 진(秦)나라에 등용되어 상(商)이라는 곳에 봉해졌기 때문에 상앙(商鞅) 또는 상군(商君)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일찍부터 형명학(刑名學)을 연구하였으며 철저한 법치주의자였기 때문에 법가(法家)라고도 불린다.
처음 그는 위(魏)나라 재상 공숙좌의 가신으로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벼슬길이 열리지 않았다. 공숙좌가 죽기 얼마 전 그가 병석에 있을 때 위나라 혜왕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소신이 죽거든 공손앙을 등용하십시오. 만약 등용하지 않으시려거든 그를 죽여 없애야 하옵니다.”
그러나 혜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공숙좌가 죽은 후 공손앙은 진(秦)나라로 갔다. 이때 진의 효공(孝公)은 널리 인재를 구하기 위하여 등용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일찍이 진나라는 진의 목공 때 춘추 오패의 한 사람으로 인정할 정도로 국력이 강성하였으나, 그 후 삼진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황하 서쪽의 땅을 빼앗겼고 중원의 여러 나라들은 진나라를 오랑캐로 대우하여 그들의 회맹에서조차도 배척하는 형편이었다. 효공은 이러한 치욕을 씻고 목공의 전성 시대를 재현하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공손앙은 진나라에 가자 먼저 효공의 중신(寵臣) 경감(景監)을 통하여 효공에게 접근하였다. 그는 진나라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해서는 먼저 낡은 법률과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손앙이 법률·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자 진나라 조정에서는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조정의 중신 가운데도 감룡(甘龍)·두지(杜摯) 등이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감룡은 반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어진 임금은 언제나 백성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이지 백성들의 습관을 고치려고는 하지 않는 법입니다. 또 현명한 관리는 언제나 법을 근거로 하여 모든 일을 시행할 뿐 법률·제도를 변혁하려고는 하지 않는 법입니다. 옛 법을 따라 지키면 나라의 상하가 모두 안심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으니 모든 것에 얼마나 유리합니까?”
감룡의 말에 공손앙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지금까지 총명한 사람이 법률·제도를 확립하면 범상한 인물들은 그저 그 법률을 지킬 줄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언제든지 불편한 옛 제도를 개혁하려고 하는 법입니다. 요컨대 선인들보다 못한 어리석은 사람은 옛 법률을 그저 완고하게 지킬 줄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두지도 감룡에 합세하여 반대 의견을 들고 나왔다.
“내가 보는 바로는 옛 규칙에 따라 일을 운용하면 하나도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대의 국왕들이 제정해 놓은 제도를 그대로 지키면 무리한 길을 걷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공손앙은 침착한 태도로 이에 정연하게 반박하였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夏)의 우왕(禹王)·상(商)의 탕왕(湯王)·주(周)의 무왕(武王)은 옛 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운용의 묘를 살렸기 때문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할 수가 있었고, 하의 걸왕·은의 주왕은 다 같이 옛 제도를 완고하게 지키려고만 했기 때문에 망국(亡國)의 군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국민 전체에게 유리하다면 구태여 선왕이 정해 놓은 옛 법률에 구속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국가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법률은 반드시 개혁해야 하는 것입니다.”
공손앙의 논리는 정연하였다. 국가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옛 법률을 개혁해야 한다고 효공을 설득하였다.
효공은 “그 말이 옳소!” 하고 공손앙을 좌서장(左庶長)으로 삼아 법률 제도 개정령을 제정하여 정치 개혁에 착수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공손앙의 정치적 개혁은 진나라를 전체주의 국가로 만들자는 데 있었다.
공손앙이 제정한 법의 내용은 엄벌주의·연좌제(連坐制)·밀고의 장려·신상필벌(信賞必罰) 등 법률 지상주의였다. 모든 사항이나 사물에 대해서도 세목별로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어 일거수일투족에 이르기까지 법률의 구속을 받을 정도였다.
법률은 제정되었으나 아직 공포하기 전이었다. 공손앙은 생각했다. 아무리 훌륭한 법률과 제도를 만들어도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는 백성들이 자기의 법령을 믿지 않을 것이 두려워 법률을 공포하기 전에 법령은 지켜져야 한다는 결의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번 영을 내리면 국가에서도 그대로 착오 없이 시행한다는 본보기를 보여주기로 했다.
그는 3자 길이 나무를 수도의 남문에 세워 놓고 백성들을 불러모아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십 금(十金)을 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이를 괴이하게 생각하여 아무도 옮기는 자가 없었다. 이에 다시 이번에는 오십 금(五十金)을 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러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이를 북문으로 옮겼다. 공손앙은 즉석에서 오십금을 주고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다음 새로 개정된 법률을 공포하였다.
새로운 법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나자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법률의 불편을 호소해왔다. 그런 가운데 태자가 법률을 위반하였다.
공손앙은 “법률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서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태자를 법대로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태자는 임금의 뒤를 이을 사람이어서 형벌을 가할 수 없으므로 태자 대신 그의 부(傅, 후견인) 공자 건(公子 虔)을 처벌하고 그의 사(師, 교육 담당) 공손가(公孫賈) 또한 자자형(刺字刑)1) 에 처하니 이로부터 진나라 사람들이 모두 법령에 따랐다.
상앙의 변법
상앙이 법개정을 실시하고 백성들을 시험하고 있는 모습
새로운 법령이 시행된 지 10년이 되자 진나라는 크게 실효를 거두어 길에서는 남의 물건을 줍지 않고 산에는 도둑이 없어졌으며 국가를 위한 전쟁에는 용감하고 개인 사이의 싸움을 겁내어 전국 방방곡곡이 잘 다스려져 나갔다.
처음에 법률이 제정, 공포되고 나서는 새로운 법이 불편하다고 호소하였으나 이제 와서는 그것이 편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손앙은 이들에게 “당신들은 모두 법을 어지럽히는 자들이다.”라고 하여 이들을 모두 변경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공손앙에 있어서 법은 절대적이었다. 법을 비난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법을 찬양하는 사람도 처벌하였으니 아무 소리 말고 묵묵히 따라오라는 것이었다. 그 뒤로 백성들은 감히 법령에 대하여 왈가왈부 논의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의 내정은 정비되고 산업이 진흥되어 국력이 신장되면서 효공이 노렸던 부국강병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나라 손빈의 작전으로 위나라가 마릉에서 대패하자 공손앙은 위나라를 공격하자고 효공에게 진언하였다. 다음해 공손앙이 장군이 되어 동으로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 장군 공자 앙(公子 卯)이 방심하도록 속임수를 쓰고 그 사이에 허를 찔러 공격하였다. 장군이 쓰러진 위나라 군사는 대패하여 황하 서쪽의 땅을 진나라에 내어 주기로 하고 강화를 맺었다.
진나라로선 오랫동안 기다렸던 실지 회복의 숙원을 이룬 셈이었다. 이 공로에 의해 공손앙은 상(商)에 봉해지고 이로부터 상앙 또는 상군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위나라는 서쪽에 위치한 수도 안읍(安邑)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동쪽인 대량(大梁)으로 옮겼다.
상앙이 진나라의 재상으로 있은 지 10년 동안에 종실과 귀척 가운데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엄벌주의의 통제 국가였기 때문에 그 원망하는 소리는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지하수처럼 사람의 마음속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태자 대신 처벌을 받았던 공자건이 다시 법을 어기자 이번에는 의형(劓刑)2) 에 처하니 그는 집 안에서 한 발짝도 외출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상앙의 정치적 개혁은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제1차 개혁은 효공 3년(기원전 359)에 실시되었고, 제2차 개혁은 효공 12년(기원전 350)에 실시되었다.
제2차 개혁에서는 부자 형제가 한방에서 동거하는 것을 금하였으니 이것은 인간성에 도전하는 잔악한 법이었고 또 도시와 시골과 취락(聚落)을 모아서 현(縣)을 만들고 현에는 중앙에서 영(令, 현의 장관)과 승(丞, 부관)을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전체주의 국가가 관료 통제국가임은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도량형(度量衡)의 통일도 제2차 개혁 때 실시되었는데 이것은 진일보한 개혁이라 할 수 있겠다.
상앙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망의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10년 동안이나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효공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효공이 죽고 나면 상앙이 실각되리라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효공이 죽기 다섯 달 전에 조량(趙良)이란 사람이 맹난고(孟蘭皐)의 소개로 상앙을 만난 일이 있었다. 조량은 바른말을 하더라도 문책하지 않겠다는 상앙의 다짐을 받고 일찍이 진의 목공 때 명재상으로 있던 오고대부가 덕정(德政)을 베푼 사실과 상앙의 가혹한 정치를 비교하면서 앞으로의 처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상군의 위태함이 아침이슬과 같은데도 오히려 수명을 더하려고 하시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차라리 봉지(封地)로 받은 상 땅의 15고을을 나라에 돌려주고 시골에 돌아가 농사를 짓는 것이 상책인가 합니다.”
상군은 조량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로부터 다섯 달 만에 진의 효공이 죽고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공자건의 무리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상군이 배반할 뜻을 품고 있다 하옵니다.” 하고 혜왕에게 참소하였다.
혜왕은 즉시 아전에게 명하였다.
“상군을 즉시 잡아오도록 하라.”
상군에게 체포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안 상군은 급히 도망하여 함곡관(函谷關)의 객사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기를 청하였다. 객사의 관리들은 그가 상군임을 알지 못하였다.
“상군의 법에 여행권이 없는 자를 유숙시키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상군은 속으로 탄식하였다.
‘아, 내가 만든 법으로 내가 피해를 입는구나!’
상군은 그 길로 위나라에 갔다. 위나라 사람들은 그가 공자앙을 속여 위나라의 군사를 격파한 것을 원망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위나라에서는 도로 진나라로 돌려보낼 작정이었다.
“상군은 진나라의 적이다. 진나라는 강성한 나라다. 만약 국적이 위나라에 들어온 것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이다.”
상군은 결국 진나라로 추방당하였다.
진나라로 돌아온 상군은 상으로 달아나 그의 무리들과 함께 상 땅의 군사를 동원하여 북쪽으로 나가 정(鄭)나라를 쳤다. 이에 진나라에서는 군대를 출동시켜 상군을 공격하여 정나라의 민지(澠池)에서 상군을 죽였다.
진의 혜왕(惠王)이 상군을 차열(車裂)3) 하여 여러 사람에게 돌려보이면서 “상앙처럼 배반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상군의 일가를 몰살시켰다.
진나라는 상앙이 죽은 후에도 상앙이 쌓아올린 부국강병의 기반 위에 더욱 강성해졌다.
상앙은 진나라의 국정 개혁의 희생자가 되어 무참히 살해되었지만 그는 진나라로 하여금 장차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그가 죽은 후 117년에 진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룩하게 되었다.
춘추·전국 시대 화폐
칼 모양으로 생겨서 도화라고 하며, 왼쪽은 춘추 후기, 오른쪽은 전국 시대의 것으로 주로 제나라나 연나라에서 주조되었다.
춘추·전국 시대 후기의 화폐
진나라에서 만들어져 유통되던 것으로 원전이라고 한다.
춘추·전국 시대 화폐
평수포. 춘추 시대의 진나라, 전국 시대의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출처] 상앙의 변법|작성자 새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