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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3일 월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1열왕 21,1ㄴ-16
복 음 : 마태 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21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씨의 인터뷰 기사 내용 중에 인상 깊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작은 역할만 맡고, 대부분 사람이 날 싫어해 고통스러웠다.
관객들이 야유하며 ‘이혼녀는 텔레비전에 나오면 안 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굉장히 좋아한다. 이상하지만 인간은 원래 그렇다.”
이혼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지금 역시 없는 것이 아니지만, 과거에는 정말로 대단했었지요.
더군다나 공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에 대한 공격은 더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윤여정 어록’이라는 글이 회자할 정도로 사람들의 사랑이 아주 뜨겁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이를 틀렸다고,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할 수 없다면서 못 살겠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려니’하면서 나를 변화시키면 그만입니다.
나를 좋아했다가도 금세 싫어하기도 한다는 것,
반대로 싫어했다가도 금세 좋아하는 것이 인간 아닐까요?
따라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그러려니…. 싫어하는 것도 그러려니….
어렵지만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러려니….’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구약성경을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
상대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라는 말로 대신하십니다.
오히려 더 주라고 하시지요.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오른손으로 오른뺨을 치기 위해서는 손등으로 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 근동지역에서는 이렇게 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뺨을 치는 것이
아주 모욕적인 행위였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대로 한다면, 나도 오른뺨을 손등으로 때려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는 것입니다.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속옷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속옷을 입지 않은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겉옷입니다. 밤에 이불로도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겉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또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주라고 하십니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똑같이 반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판단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사랑 실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에 대해 ‘그러려니’하며 받아들이고,
어떻게 사랑 실천을 통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어떨까요?
더 멋있는 삶 같지 않습니까?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복수동태법의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는 ‘악인에게 무관심 하라’, ‘악인을 피하라’, ‘악인에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곧 악에 대한 무저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요, 자기기만이요, 비겁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맞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맞서지 말라’기보다 ‘맞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말라’,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악과 맞대응하다 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런다고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악을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는 일,
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맞서 대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진정으로 맞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악을 도피 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사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불로 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불이 아니라 물로 꺼야 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대는’(마태 5,39) 것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길이 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이기게 되는 길입니다.
사랑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악이나 악인에게 맞서기보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비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0-42)
<오늘의 말 · 샘 기도>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주님!
맞서지 않게 하소서!
대적하거나 앙갚음하지 않게 하소서.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뺌을 돌려대게 하소서.
당신께서 처벌할 권한이 아니라 사랑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인 까닭입니다.
아멘.
그러나 너희에게 말한다.
송영진 모세 신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원래 ‘사적인 복수’를 허용하는 규정이 아니라,
‘공적인 처벌’에 관한 규정이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거짓 증언’에 대한 처벌 규정입니다.(신명 19,21)>
그리고 이 규정은 ‘과잉 처벌’을 하지 말고
‘죄에 상응 하는‘ 처벌을 하라는 규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원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사적인 복수‘를 할 때의 근거 규정으로 악용했습니다.
구약시대를 ’사적인 복수‘가 허용되었던 시대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적인 복수‘는 그 시대에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카인‘의 경우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주였을 때,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내린 벌은 사형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창세 4,11-12)
(이 벌은, 오늘날의 ’종신 징역형‘과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사형을 선고하시지 않고 종신형을 선고하신 것은,
카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카인은 그 형벌이 너무나 크다고 말하면서,
“만나는 저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라고 하소연합니다.(창세 4,13-14)
<카인은 하느님보다 사람들 더 두려워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카인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아벨의 후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벨의 후손‘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있었다면 카인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사적인 복수‘를 금지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창세 4,15)
우리는 구약시대 때에 ’도피성‘ 제도가 있었음도 생각해야 합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경우에,
사적으로 보복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정식 재판이 열릴 때까지 가해자를 보호해 주는 곳 입니다.(신명 19장)
예수님께서는 사적인 복수를 금지하신 하느님의 뜻을 재확인하시면서,
그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적극적인 사랑 실천으로
악을 물리치고 악인들을 회개시키라고 가르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악인에게 ’악으로‘ 맞서지 마라.”이고,
이 말씀은 “악인에게 ’선으로‘ 맞서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법제도와 공적인 처벌을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법제도와 공적 처벌제도는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제1독서에 아합왕과 이제벨 왕비의 악행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 상황이라면 왕과 왕비를 ’탄핵‘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여기서 중간에 인용되어 있는 말은 잠언 25장에서 온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라는 가르침은 구약시대 때에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6ㄱ. 17)
회개시키기 위해서 꾸짖고 타이르는 것도 사랑입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의 재판 장면이 연상됩니다.
재판 도중에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친 일이 있었습니다.(요한 18,22)
그때 예수님께서는 다른 뺨을 돌려대신 것이 아니라,
경비병을 꾸짖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한 18,23)
그 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행동을 하셨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모순이 아니라,
그 경비병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사랑으로‘ 타이르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속 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또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라는 말씀은,
“그가 죄를 짓기 전에 먼저 사랑을 주어라.
그래서 그의 죄를 미리 막아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다가 살아남기 위해서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하게 된 경에,
그를 굶주림 속에 방치한 사람들에게도 죄가 있습니다.
그 경우에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도둑질과 강도짓을 예방하는 일이 됩니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는
“사랑을 주기를 거절하지 마라.”입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7-18)>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유튜브를 통해서 ‘미국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정학적으로 축복받은 땅이라고 합니다.
영토를 넓히는데 전쟁을 하지 않고 넓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독립전쟁 후 영국은 배상금으로 당시 미국 13개 주의 영토만큼이나 큰 땅을 주었습니다.
프랑스는 자국의 영토를 미국에게 팔았습니다.
처음 시작했던 미국의 영토는 이내 4배로 커졌습니다.
멕시코와 거래를 통해서 많은 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텍사스,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캘리포니아를 얻었습니다.
이로써 동부에서 시작한 미국은 서부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동부에는 대서양, 서부에는 태평양을 바다로 둔 나라가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알라스카를 미국에게 팔았습니다.
하와이는 미국의 한 주가 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역사를 보면 짧은 시간에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 큰 전쟁도 없었습니다.
대서양과 태평양은 미국을 보호하는 안전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캐나다는 미국과 혈맹관계에 있고, 멕시코는 미국 경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때문에
미국의 안보에 위험을 주지 않습니다.
축복받은 미국에도 반지성주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상식과 이성에 어긋나는 행위를 반지성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작은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사냥입니다.
평온한 마을에 아이 둘이 아팠습니다. 의사는 마귀에 들린 것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목사님을 중심으로 아이들을 저주한 사람들을 찾아내면서
평온한 마을은 광란의 마을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이 마귀로 지목을 받으면 재판을 받아야 했고, 죽어야 했습니다.
흑인과 유색인종을 아무런 이유 없이 차별하고,
폭력을 가하고 죽였던 ‘KKK'단이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할 수 없는 행위를 벌였습니다.
선량한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던 메카시의 열풍도 있었습니다.
반지성주의는 코로나 팬데믹에도 나타났습니다.
코로나 초기에 미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의학과 과학의 상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였고, 백신접종을 거부하였습니다.
첨단 과학을 선도하는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축복받은 땅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축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고통받고 있을 때는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원하면 하느님께서는 왕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돌아 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 가문을 통해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사명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말씀과 표징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 진리에 목마른 이들이 예수님의 곁으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발하셨고,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병자를 고쳐주도록, 마귀를 쫓아내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축복받은 이스라엘에도 반지성주의의 역사가 있습니다.
야곱은 부당한 방법으로 형인 에사오의 장자 상속권을 가로챘습니다.
다윗은 부당한 방법으로 충실한 부하의 아내를 가로챘습니다.
나탄 예언자는 다윗의 부당함을 지적하였고, 다윗은 회개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회개한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부당한 방법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과 에제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합도 회개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회개한 아합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반지성주의의 그물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에도 깊게 드리워졌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고, 도망갔습니다.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고발하였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아무런 죄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재판하였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던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간구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땅의 축복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반지성주의의는 교만과 오만한 마음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납니다.
반지성주의가 자라나는 곳은 축복받은 땅마저 광란의 도가니로 만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감사와 겸손에서 드러납니다.
감사와 겸손이 있다면 사막에서도 꽃이 피기 마련입니다.
감사와 겸손이 있다면 이 땅이 바로 천국이 됩니다.
“당신은 나쁜 짓 하는 자 모두 미워하시고, 거짓을 말하는 자를 없애시나이다.
피에 주린 자와 사기 치는 자를, 주님은 역겨워하시나이다.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나는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윤리를 말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은
기원전 1700년경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 복수법(lex taleonis)이다.
이것이 구약성경 윤리의 일부분이 되었다.
탈출 21,22-25에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 임신한 여자와 부딪쳤을 경우,
그 여자가 유산만 하고 다른 해가 없으면,
가해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벌금형을 받아야 한다.
그는 재판을 통해서 벌금을 치른다.
그러나 다른 해가 뒤따르게 되면,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라고 하고 있다.
이 율법은 인간이 자신의 지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상대방에게도 악행을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법은 재판관을 위한 것이지 개인이 복수하기 위한 법이 아니었다.
또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도 않았다.
본 피해 이상을 벌을 주지 말라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39절)
이 말씀은 단순히 인내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어떤 교회와 신앙을 비방하여 말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지닌 믿음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된(1베드 3,15 참조) 자세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교리를 알게 도와주면 그들은 비난을 그치고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손찌검에 당신 뺨을, 채찍에 당신 어깨를 내주실 것이다.
“네 속옷과 겉옷을 내주어라.”(40절)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이나 박해하는 이들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소송을 걸어 우리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의 겉옷을 그들의 손에 던져 주고
더 좋은 옷인 의로움을 입고 달아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육신의 옷을 찾으려 하는 동안에
영적인 가장 고귀한 옷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41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모욕하는 이들에게도
어려움에 부닥쳐 있으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모욕하는 이들에겐 용감한 정신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또한 비신자나 아직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만물을 세우신 분, 곧 하느님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라는 뜻이다.
즉 그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이웃 사랑으로 변화시키라고 하신다.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간을 요구할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 자세도 그렇게 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시간을 기다리고 기회를 보아 서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폐기되는 ‘탈리오’ 법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다섯 번 째 대당명제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출애 21,23-25⋅레위 24,20⋅신명 19,21 참조)는 명제를 폐기하시고,
“앙갚음 하지 말라.”는 반명제를 제시하신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는 앙갚음은 피해자가
받은 것과 같은 종류의 해를 가해자에게 주거나
같은 종류의 방법으로 가해자를 해치는 소위 동해형법(同害刑法),
또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말한다.
그렇다고 이 법칙이 앙갚음이나 보복을 정당화하고
복수를 부추기는 법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모든 종류의 형법은 사전에 범법행위를 방지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 규정은 오히려 가해자에 대한 어떤 조치가 개개인의 일이 아니라
이를 관장하는 기관이나 공동체의 장치에 속한 일임을 밝히려는 것이다.(민수 35,24)
나아가 구약의 율법은 가해자에 대한 일련의 조치가
하느님의 전적인 통치권에 속함을 강조하고 있다.
(신명 32,39-43⋅집회 28,1⋅이사 35,4⋅예레 46,10⋅에제 25,17)
이러한 동해형의 가해 형법이 원시사회나 고대문화권에서는
어느 정도 통용된 규정일지 모르나
법이 발달한 오늘날 사회에서는 국가가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복수와 보복의 오해를 내포하고 있는 동해형법, 또는 동태복수법이라는 용어보다
“탈리오법(lex talioni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탈리오(talio)”sms “이러한, 동등한, 동일한”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형용사 “탈리스(talis)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그 원초적인 유형은
바빌론 제1왕조의 6대 대왕인 함무라비(Hammurabi, 재위 B.C 1792-1750) 법전에서 발견된다.
탈리오 유형의 형법은 고대 아시리아와 그리스 문화권에서도 발견되며,
고대 로마 문화권에서는 십이동판법(十二銅版法)이라고 불리는
법전의 한 조항으로 성문화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의 사지를 분리시키고,
타협에 이르지 못하면 탈리오 해야 한다.“(제8표 2)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의 뜻은 어떤 사람이 남의 손이나 발을 부러뜨렸는데
가해자와 피해자가 금전적 배상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탈리오“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곧 가해자도 동일한 해를 입도록 조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탈리오는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소멸 되고
국가에서 정하는 특정한 형법이나 재산에 의한 손해 배상으로 변화하였는데,
그 근본적 사고방식은 응보(應報)이며,
이러한 견해는 형벌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탈리오법은 어뜻 보기에 적응이 쉽고, 상당히 이성적이며, 정의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앙갚음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요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수께서는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으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되갚으라고 하신다.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재판 거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와 십리를 가 주라는 것이다.
또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악을 관용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대사제 안나스가 예수를 심문하는 자리에서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묻자, 예수께서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한 말은 그들이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자, 경비병이 예수의 뺨을 때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않으시고
”내가 한 말이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 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요한 18,20-23 참조)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라.
악은 분명히 악이다.
예수께서 악을 선으로 되 갚으라고 하시고,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베풀라고 해서 옳고 그름의 척도가 파기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악의 도전을 받았을 때나 어떤 요구를 받았을 때,
이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요구는 분명 실천하기 어려운 면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보다 선을, 밥보다는 사랑을,
강함보다는 약함을 더 선호하시는 것이다.
이 선호는 그리스도의 참다운 자유에 뿌리 박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