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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여태후의 전권
혜제 2년(기원전 193) 제왕 유비(劉肥)가 장안에 입조(入朝)하였다. 유비는 고조의 장남이고 혜제의 서형이었다.
당시 궁정 안은 궁중과 외전으로 나뉘어 있었다. 외전이란 군신들이 출입하면서 정사를 의논하는 곳이고, 궁중은 황제의 일족들이 사생할을 하는 곳이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주석자 호삼성(胡三省)의 주석에 의하면 당시의 황족들은 외전에서는 황제에 대하여 군신의 예를 취했지만 궁중에서는 사가에서처럼 항렬과 나이를 따졌다. 그래서 제왕 유비는 외전에서는 동생인 혜제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갖췄지만 궁중에서는 혜제보다 윗자리에 앉았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혜제가 윗자리에 앉도록 여러 번 권했다고 한다. 제왕은 동생이 자꾸 권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윗자리에 앉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를 본 여태후는 크게 노여워하였다. 아무리 윗자리를 권하더라도 제왕이 윗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여태후는 그 자리에서 제왕을 독살하려 하였다. 여태후는 사람을 시켜 독술이 든 술잔을 제왕에게 권하였다. 혜제는 자기 어머니가 무엇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제왕 앞에 놓여진 술잔을 들어올렸다. 당황한 여태후는 재빨리 일어나 혜제의 소맷자락을 힘껏 당겼다. 그 바람에 술잔은 혜제의 손에서 떨어지고 술은 엎질러져 버렸다. 제왕은 그제서야 눈치를 채고 술에 취한 척하면서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숙소로 돌아온 제왕은 위험한 고비는 겨우 넘겼으나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었다. 어떻게 하면 여태후의 노여움을 풀게 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는 가신과 의논 끝에 성양군(城陽郡)을 노원 공주(魯元公主)의 탕목읍(湯沐邑, 세금을 일상 생활의 경비에 충당하는 토지)으로 바치기로 하였다. 그러니까 결국 제왕 유비는 조그마한 군 하나와 자신의 생명을 바꾼 셈이었다.
여후의 옥새
조왕 여의가 살해된 후 여태후는 회양왕 유우(劉友)를 조왕으로 세웠다. 유우는 고조의 아들이지만 그 어머니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기》·《한서》도 똑같이 그를 제희(諸姬)의 아들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척부인처럼 고조의 총애를 받아 자신을 괴롭혔던 여인이나 그의 아들에 대하여는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던 여태후였지만, 후궁으로 있으면서 고조의 총애를 받지 못했던 여인의 아들에 대하여는 관용을 베풀었던 모양이다.
그 하나의 예로 조왕이 된 유우를 들 수 있다. 여태후는 여씨 일족의 딸을 유우에게 주어 그를 자신의 세력권 내에 묶어두려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우 쪽에서 오히려 여태후를 적대시하였다. 유우가 여태후를 적대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형제인 조왕 여의는 살해되고 제왕 유비도 하마터면 살해될 뻔하였다. 그녀의 전권으로 황족인 유씨들은 전전긍긍하고 여씨 일족들은 자기들의 세상을 구가하고 있으니 여태후를 좋게 볼 수 없었다. 유우는 왕비로 주어진 여씨를 사랑하지 않고 박대하였다. 여씨는 이것을 원망하여 여태후에게 조왕 유우를 고자질하였다.
“조왕이 항상 말하기를 ‘여씨들이 어째서 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내 여태후가 죽으면 기필코 이들을 쳐 없애고야 말테다!’라고 합니다.”
이때 여태후는 이미 여씨 일족을 왕으로 세우고 있었다. 유씨가 아닌 사람은 왕으로 세우지 말라는 고조의 맹약을 어겼기 때문에 유우는 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씨의 고자질을 들은 여태후는 조왕 유우를 장안으로 불러 감금하고 “이 자에게 절대 음식을 주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마침내 유우는 굶어 죽고 말았다.
유우가 죽음으로써 공석이 된 조왕에 이번에는 양왕 유회(劉恢)를 세웠다. 그리고 양왕의 자리에는 자신의 오빠의 손자인 여산(呂産)을 세웠다.
새로 조왕이 된 유회는 여씨 일족의 여인들 성화에 옴짝달싹 못할 지경이었다. 본의 아니게 여산의 딸을 왕후로 맞이할 도리밖에 없었던 조왕은 그녀가 어마어마한 동족의 가신들을 데리고 조나라에 들어오자 어안이 벙벙하였다. 마치 자신을 감시하러 온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유회에게는 전부터 총애하던 여인이 있었는데 이를 시기한 왕후가 그 여인을 독살해버렸다.
유회는 4장의 노래를 지어 악사들로 하여금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는데 이 노래의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다. 그는 울분을 참다 못해 정신착란을 일으켜 마침내 자살하고 말았다.
조왕이 되었던 세 사람의 유씨는 모두 불운한 최후를 마쳤다. 유여의는 독살당하고, 유우는 유폐되었다가 굶주려 죽고, 유회는 자살하였다. 이 세 사람은 왕으로 세워진 순서에 따라 은왕(隱王), 유왕(幽王), 공왕(共王)으로 시호를 붙여 구별하고 있다.
혜제는 재위하는 동안 완전히 허수아비였다. 혜제의 황후는 그의 누이인 노원 공주의 딸이니 말하자면 생질녀를 정처로 맞이한 셈이다. 성은 장이지만 사실상은 여씨 일족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 부부 사이에서는 끝내 한 사람의 자녀도 태어나지 않았다.
병약한 혜제가 죽고 난 후의 일을 걱정한 여태후는 후궁이 낳은 아들을 혜제 부부가 낳은 것처럼 꾸며 길렀다. 그리고 이 황자를 낳은 여인의 입을 막기 위해 그 여인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혜제가 24세로 죽자 그의 아들이 황제 위에 오르니 이 이가 소제(少帝)이다. 이 소제의 황후는 여태후의 둘째 오빠의 아들 여록(呂祿)의 딸이었는데 아주 어린 나이에 황후로 내정되어 있었다.
여태후는 이렇게 여씨 일족의 천하를 다져갔다.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력이 제일이라고 생각한 그는 조왕인 여록을 상장군으로 삼아 북군(北軍)의 지휘권을 맡겼고, 양왕인 여산에게 남군(南軍)의 지휘권을 맡겼다. 이들은 각각 제후로서 그들의 나라가 있는데도 부임하지 않고 수도 장안에서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한제국의 군대는 완전히 여씨가 장악하고 있는 셈이었다.
일찍이 혜제가 죽은 후 여태후는 여씨를 왕으로 세우고자 하여 먼저 우승상 왕릉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릉은 “선제께옵서 백마를 잡아 피를 마시며 맹약하시기를 ‘유씨가 아닌 사람을 왕으로 세우거든 천하가 모두 함께 쳐 없애라.’고 하셨습니다. 여씨를 왕으로 세울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여 여태후의 제의를 일축하였다.
그러자 여태후는 몹시 불쾌히 생각하여 이번에는 좌승상 진평과 태위(大尉)1) 주발에게 똑같이 물었다. 진평과 주발은 여태후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찬동하였다.
강직한 왕릉이 진평과 주발의 어이없는 태도에 분개하여 두 사람을 꾸짖자 그들은 “지금 당장 곧은 말로 조정에서 다투는 일은 우리들이 당신만 못하고, 한제국과 유씨의 자손을 안정기반 위에 올려 놓는 일은 당신이 우리만 못할 것이오.”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 여태후는 여러 여씨를 왕으로 세우고 정권을 전단하자 우승상 진평은 그 일을 근심하였으나 반대해서 다툴 만한 힘도 없고 또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항상 근심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어느 날 육가가 진평의 집에 이르러 곧바로 들어가 앉으며 진평의 근심에 잠긴 모습을 보고 말하였다.
“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정승에게 기울이고, 천하가 위태하면 뜻을 장군에게 기울입니다. 정승과 장군이 서로 화합하면 선비들이 사모하여 따르기를 힘쓸 것입니다. 선비들이 힘써 따르면 천하에 변이 있을지라도 권력이 나누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사직을 위한 계책으로는 두 분이 서로 화합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진평에게 여씨를 누를 몇 가지 계책을 말하였다. 진평은 육가의 계책을 써 두 사람이 서로 결속하니 이로써 여씨의 음모는 점점 약화되었다.
여태후의 집권 시대는 혜제 재위 8년을 포함하여 거의 15년에 이른다. 혜제가 죽고 난 후 명목상의 황제로 소제가 즉위하였으나 사실상 여태후가 전권하였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고후(高后) 몇 년이라 부르고 있다. 고후 8년 3월 여태후는 불제(祕除)2) 를 올리고 환궁하는 길에 파란 개(蒼犬)와 같은 요물이 여태후의 겨드랑이 밑으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점쟁이에게 점을 친 결과 “조왕 여의가 재앙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 여태후는 액상(掖傷)3) 을 앓기 시작하여 7월에 이르러 더욱 악화되었다. 그에게 참변을 당한 망령들의 원혼이 있다면 병상에 있는 여태후를 얼마나 저주하겠는가?
여태후도 자신의 임종이 가까워옴을 알고 여씨 일족의 중심 인물인 여록과 여산을 불러 경계의 말을 당부하였다.
“고조께서 천하를 평정한 후 대신들과 맹약하기를 유씨가 아닌 왕은 천하가 모두 함께 쳐 없애라 하셨다. 지금 여씨 일족을 왕으로 세운 데 대하여 대신들이 모두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으니 내가 죽은 뒤에 변이 일어날까 두렵다. 부디 내 장례는 소홀히 하더라도 군대를 잘 거느려 궁궐을 지키는 데 전력을 기울이라. 유씨 일파가 궁정을 제압하면 큰일이니 재삼 경계하도록 하라.”
여태후는 고후 8년 7월 신사(辛巳)에 죽었다. 그의 유조(遺詔)에 따라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여산을 상국으로, 여록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
여태후가 병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연왕 유건(劉建)이 죽자 유건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구실을 붙여 여씨 일족인 여통(呂通)을 새로운 연왕으로 세운 일이었다. 사실은 연왕 유건에게는 애첩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으나 여태후는 무참하게도 그 아들을 암살해버렸던 것이다.
이렇듯 여태후는 여씨의 천하를 만들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썼으나 천하의 일은 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가 죽자 제왕 유양(劉襄)은 여씨를 타도할 목적으로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유양은 노원 공주에게 성양군을 바치고 겨우 목숨을 건진 제왕 유비의 아들이다. 유양이 군사를 일으키기로 한 것은 주허후 유장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유장은 제왕 유양(劉襄)의 동생으로 장인이 여씨의 중심 인물인 여록이었다. 여태후가 죽자 여씨가 서울의 방비를 튼튼히 하여 유씨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그들의 천하를 만들기 위한 책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서울 장안은 여씨가 완전히 군권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쳐들어간다면 그 소문을 듣고 장안에 있는 유씨파의 공신과 대신들도 분발해서 여씨 타도에 가담할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생각한 유장은 유양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던 것이다.
제왕 유양이 군사를 일으키려 하자 여씨 일파의 인물로서 감시 임무를 띠고 제나라에 재상으로 파견되어 있던 소평이 한발 앞서 제나라 궁전을 포위해버렸다.
그러자 제왕 유양의 가신 위발(魏勃)이 왕궁의 경호를 도와주겠다고 소평을 속여 소평의 저택을 포위하였다. 소평은 입술을 깨물고 자살하였다.
제왕 유양은 제나라의 군대만으로는 너무 미약함을 느끼고 낭야왕 유택을 속여 그 휘하의 병력까지 합쳐 마침내 여씨 토멸의 깃발을 높이 들고 각 제후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여씨 토벌에 호응할 것을 권하였다.
제왕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은 재상 여산은 관영에게 군사를 주어 제왕을 토벌케 하였다.
관영은 명령에 따라 대군을 거느리고 제나라 토벌에 나서긴 했으나 조금도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는 형양에 이르자 제나라 군중에 밀사를 보내어 전하였다.
“우리가 서로 싸우면 여씨를 이롭게 할 뿐이오. 태후를 잃은 여씨는 몹시 불안해하여 얼마 있으면 일을 일으킬 것이오. 그때 우리는 힘을 합하여 ‘여씨 토벌’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장안으로 쳐들어갑시다. 그때까지는 싸움을 하지 말도록 합시다. 나는 이 이상 전진하지 않겠소이다.”
이리하여 제왕 유양은 국경선까지 후퇴해버렸고 관영은 형양에 주둔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한편 여씨 일파들은 서둘러 유씨를 몰아내고자 하여 회의를 거듭하였으나 좀체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제나라의 침공이 두렵고 관영군도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안으로 유씨 지지 세력들의 움직임도 두려웠다. 중신 가운데도 주허후 유장과 태위 주발의 존재가 특히 두려워 그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여씨 토멸의 열쇠는 여록·여산이 장악하고 있는 군사적 지휘권을 어떻게 빼앗느냐에 달려 있었다. 장군의 인수가 없으면 군사의 최고책임자인 태위로서도 군사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제도였다.
태위 주발은 여씨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허점을 노려 역기(酈寄)를 여록에게 보내어 그를 설득하여 장군의 인수를 빼앗을 계획을 세웠다. 역기는 여록과 친구 사이였다.
역기는 여록을 설득하여 말하였다.
“고조와 여후가 함께 천하를 평정하매 유씨는 9명, 여씨는 3명이 왕으로 봉해졌습니다. 이는 모두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정한 것으로서 이미 제후에게 포고하여 제후들도 모두 당연한 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태후께서 돌아가셨고 황상께서는 나이가 어린데 족하는 조왕의 인수를 차고 있으면서도 조나라에 가지 않고 상장군으로서 대군을 거느리고 궁정에 머물러 있으니 대신과 제후들이 모두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안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상장군의 인수를 반환하고 군사를 태위에게 넘기십시오. 그리고 양왕 여산에게도 재상의 인수를 반환하게 한 다음 이 같은 사실을 대신과 제후들에게 알리고 봉국인 조나라로 가셔야 합니다. 그러면 제나라 군대는 돌아갈 것이며 족하께서는 마음 편안히 지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신과 제후들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며 일이 늦으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여록은 역기의 말을 옳게 여겨 태위인 주발에게 군사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주발은 곧바로 군문에 들어섰다. 거기에는 북군의 수만 병사가 벌여 서 있었다. 주발은 큰 소리로 외쳤다.
“여씨에게 편들 자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유씨에게 편들 자는 왼쪽 어깨를 벗어라!”
군사들은 모두 왼쪽 어깨를 벗어 유씨를 지지하는 결의를 보였다. 군사들이 여씨를 두려워했던 것은 여씨가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군의 지휘권이 유씨 지지 세력의 중심 인물인 주발에게 돌아왔으니 승패는 이미 결정지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 여산이 장악하고 있는 남군에는 여씨 일파가 가장 두려워하는 유장이 쳐들어갔다. 난데없이 큰 바람이 불어닥쳐 여산이 달아나자 남군은 싸우지도 않고 모두 달아났다. 유장은 달아나는 여산을 추격하여 베어 죽이고 다시 궁정에 깊이 들어가 장락궁의 경호 책임자 여경시(呂更始)를 베어 죽이고 북군에 달려가 태위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여씨 일족의 남녀노소는 모두 참살당했다. 북군의 지휘권을 넘겨준 여록도 조나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칼에 맞아 죽었다.
연왕 여통은 사람을 보내어 주살했고 여태후의 여동생이며 번쾌의 아내였던 여수는 매를 맞아 죽었다. 여수가 낳은 번쾌의 아들 번항까지 살해되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정변에 대하여는 몇 가지 의문을 갖게 한다. 여태후가 정권을 쥐고 흔들 때 소하·조참·장량·번쾌 등 이른바 건국의 원훈들은 모두 혜제 재위 시에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살아남은 역전의 호걸들이 어째서 여씨 일족의 전횡을 수수방관하고 침묵을 지켰을까?
가장 큰 이유는 여씨 일족의 진영에는 걸출한 인물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세도를 부려봤댔자 여태후가 살아 있는 동안뿐이라는 생각에서 느긋이 여태후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아진다.
그러기 때문에 슬기주머니라고 불리는 진평마저도 여태후 시절에는 술만 마시고 정치에 무관심한 척 하면서 여태후의 지목을 피하였다. 진평도 술에 빠져 별 볼 일 없는 인간으로 인식시킴으로써 생명의 안전을 꾀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사실 공신과 대신들의 두려운 존재는 여태후임에 틀림없었다. 한신·팽월 등 건국의 공로자들을 숙청한 것도 주로 여후의 획책에 의한 것이었다.
한신을 죽인 시기는 고조가 친정 중이었으니 이것은 분명히 여후의 획책이고, 양왕 팽월은 고조가 일단 서민으로 촉땅에 유배하기로 처분을 내렸다. 그래서 낙양을 떠나 촉으로 가는 도중 팽월은 장안에서 낙양으로 가는 여후를 만나 울면서 그의 무죄를 호소하고 촉 땅으로 가는 것보다는 고향인 창읍에 가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여후는 “팽 장군의 일은 내가 책임지리다.” 하였으나 낙양으로 와 고조에게 팽월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마침내 죽였던 것이다. 이렇듯 여후 쪽이 고조보다 더 공신 처벌에 가혹했음을 몸서리가 날 정도로 보아왔던 대신들이기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소하와 조참 같은 심복들도 여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10여 년 동안 화합 제일주의의 정치로 백성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던 소하가 고조 만년에 이르러 갑자기 많은 전답을 사들이고 그 대금의 지불을 질질 끄는 추태를 보였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한 고의적인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자신의 평판이 지나치게 좋으면 여후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소하가 죽은 후 재상의 자리를 이은 조참도 정치는 제쳐놓고 술과 음식에 빠진 일이 있었다. 백성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자신도 또한 휴식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으나 사실은 여태후를 안심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태후가 여씨를 왕으로 세우고자 하여 먼저 왕릉에게 물었을 때 왕릉은 여태후의 제의를 일축한 데 반하여 진평과 주발은 여태후의 뜻을 꺾지 못하고 찬동하였다. 이에 대하여 후세의 역사가들은 만약 진평, 주발도 반대하고 기타 대신들도 모두 반대하였더라면 여태후 홀로 그의 뜻을 강행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그렇게 여씨 일족들의 집권 시대는 오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고 안타까워 한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진평과 주발이 여씨 정권을 쓰러뜨린 공로는 그저 여씨를 왕으로 세운 데 대한 죄과를 속죄한 것에 불과하며, 신하된 자의 의리로서는 마땅히 왕릉을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춘추필법의 논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