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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의 한과 혼이 서려 있는 아리랑의 노랫말과 음률.
'아리랑'이란 민요 속에서 발생된 음률과 노랫말은, 천하만민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와 같은 음률과 노랫말처럼 애절하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리랑'의 음률과 노랫말처럼 애절한 것은, 이 두 관계는 부자지간의 관계로서 천하의 그 어떤 것들도 분리시킬 수 없지만, 반면에 피아간에 반목이 생겨 원수지간이 되면 또 천하의 그 어떤 것들도 화목시켜 만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돈독한 관계를 사단이 간교하게 이간질시켜 수천여 년의 세월 동안 원수처럼 버성기고 살았던 미움과 원한에 의한 상처와 서러움과 한이 이처럼 '아리랑'이란 음률과 노랫말 속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그래서 이 음률과 노랫말은 어느 민족 어느 계층의 사람이 들어도 자신도 모르게 온갖 형질의 악감은 잠시 멈추게 되고, 순간 자기 모습이 부모님을 떠난 어린 아이의 심령으로 되돌아가 타관객지의 외로운 고아와 같은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애잔한 심령이 담긴 노랫말과 음률이 동북아 한반도 백의민족에게서 태어나 천하만민은 물론이거니와 우주만물과 산천초목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고 신나게도 하고 초연(超然)하게도 하는지... 이 민족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 받은 것에 대해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물량적인 권위를 앞세워 '아리랑'이란 노랫말과 음률은 한낱 한민족(韓民族)만의 한이 서린 넋두리로 비하해 무시하여도, 그 노랫말과 음률은 단순히 먹고 마시고 입고 거주하는 것의 과부족에 의해 웃고 우는 짐승들의 행태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만은 그 어느 피조물과의 관계보다 더욱 친밀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데서 발생된 한서린 곡해와 반목에 의한 아픔과 상처가 담겨 있습니다.
'아리랑'이란 노랫말과 음률은, 한낱 인간 육신의 목마름이나 배고픔에서 발생되는 노랫말과 음률이 아니라, 사람은 육신의 부귀영화만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만이 참된 행복이 될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천적으로 이 노랫말과 음률이 귀에 익은 사람들 중에는 자기 심령에 자리잡고 있는 이 '아리랑'이란 노랫말과 음률의 근본 실체가 도대체 무엇임을 알고자 하여 세상 식자들을 찾아가 물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의 출처와 뜻과 근본은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갖고 싶어도 도무지 알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것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식자들이 더러 자신들의 유식함을 뽐내기 위해 '아리랑'의 노랫말과 음률을 임의로 추정해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솔로몬 임금처럼 육적인 부강을 갖추어도 때로는 천애고아와 같은 외로움증에 빠져 친부(親父)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사람이라면 한번 쯤 인간의 조상이 누구이며, 만물은 어떻게 존재하였으며, 또 사람은 왜 영생하려는 소원은 간절하여도 반드시 죽게 되느냐 하는 문제에 직면하여 한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에 대한 정답은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모르고 산천초목도 모릅니다. 이런 문제의 정답은 사람의 지식과 지혜와 노력으로는 찾아 깨달을 수 없고, 오직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드러내어 말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명기 32:7) 하신 것처럼, 사람의 조상 곧 뿌리에 관한 일만은 아버지가 전해 주신 말씀으로만 알 수 있을 뿐, 자식 같은 과학기재들에게 물어배우는 것은 점을 치는 행위와 같습니다.
사람은 사람 이하에 속한 것, 곧 물질들만 나름대로 논단할 수 있을 뿐, 부모급에 속한 분들을 추정해 논단하는 짓은 하극상 행위와도 같은 범죄입니다. 운동 선수의 과오는 심판관만이 말할 수 있고, 인간사의 과오(過誤)는 진리를 말씀해 주신 하나님만이 규정해 말씀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리랑'이란 말의 어원과 가치와 생성 또한 피조물에 속한 어느 학자나 선생이나 기인들도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8) 하셨습니다. 반만여 년의 세월 동안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오직 한 가지, 곧 아직도 확연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알았다고 추정하는 모든 거짓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시편 116:11)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존칭해 일컬는 말만큼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합당한 존칭은 없습니다. 이런 지혜 또한 이 민족의 것으로 자부해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지혜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테복음 16:15)고 물으셨을 때에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 16:16)라고 말하자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그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태복음 16:17) 하셨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오직 하나님만이 말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리랑'이란 말뜻은 '하나님이랑' 뜻이며, '아라리'는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하였을 때만 행복하다는 뜻이며, '아리랑 고개'는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하였을 때에만 넘을 수 있는 험준한 고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죄악이 만연한 험악한 인간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적자 사단의 훼방과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은 예수님 스스로의 뜻과 지혜와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 해 주실 때에만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또한 '아리랑 고개'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분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된 견해차이에 의한 시비입니다. 즉 기존에 어떤 인생관을 지닌 사람이 다른 인생관을 지닌 사람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자신의 인생관을 갖고 상대방의 인생관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험준한 '아리랑 고개'입니다. 남녀지간의 '아리랑 고개'로부터 시작해 부자지간과 형제지간과 친인척지간과 이웃지간과 민족지간과 국제지간의 '아리랑 고개'들이 겹겹이 쌓였습니다. 이 모든 '아리랑 고개'는 하나님과 함께 하였을 때에만 무난히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화합과 반목은 우주만물이나 산천초목이나 생물들이나 다른 이웃이 개입해 화합시킬 수도 없고 또 분리시킬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반목과 견해차이에 대해 제3자가 적극 개입해 주도록 바라나, 하나님만은 그 어떤 존재라도 이 일에 개입하면 교만죄로 다스리십니다. 참된 신랑은 자신과 신부 사이에 관련된 애정에 대해서는 그 어떤 외부 세력의 개입도 불허하고 오직 신랑 스스로가 해결하려 합니다. 이게 바로 참된 신랑의 자존감으로서 세상 어떤 남녀 간의 애정보다 순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간의 사랑은 피조물의 그 어떤 힘과 재주와 보화와 권세로도 화합시킬 수도 없고 또 분리시킬 수도 없습니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하고 순수한 사랑은 속된 인간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만드실 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또 하나의 자기 자신, 곧 천하의 그 어떤 것들보다 존귀하고 아름답고 순전하고 거룩하여 세상 어느 피조물도 무례하게 간섭할 때에는 무자비하게 형벌하십니다.
이런 사랑이기 때문에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가서 8:6~7)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정금 같은 신인지간(神人之間)의 순수한 사랑을 사람들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먼저 실행해 선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듯, 하나님 또한 자신의 유일한 독생자인 예수님을 사람들이 저지른 죄악의 속죄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사람들의 죗값으로 십자가 형벌에 죽게 하신 까닭은, 더 이상 피조물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부감을 단장시키지 못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사람들의 인성교육을 담당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정금 같은 신인지간(神人之間)의 사랑은, 거룩하고 순전하신 하나님만이 제대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욥기 4:18) 하심 같이, 하나님은 하늘과 그의 사자(使者)라도 부정(不淨)하게 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신부감을 단장시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이 친히 사람들을 가르치려면, 창세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반역해 괴롭힌 죄악들을 깨끗이 소멸시켜 하나님의 진노를 해소시켜야만 비로소 사람들을 가련한 신부로 취급해 보듬고 가르쳐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들의 반역죄에 대한 진노를 쏟아붓고 저들의 죄악을 씻을 수 있는 대속(代贖)의 인물을 천지 간에 찾아볼 수 없음을 아시고, 마침내 하나님 자기 자신이 대속자(代贖者)가 되시려고 한 것이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었습니다.
홀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고 계신 성령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한 지혜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하나님의 자체이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속 사정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님은 만물과 사람들을 창조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서 태어난 지혜를 아들 삼고, 자신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성령을 교역자 삼아 사람들의 스승이 되게 하셨습니다. 세 분 같지만 그 모두가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기 때문에 미세한 물질이나 생물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로부터 자생되는 조직과 기능들이 집대성하여 덩치를 이루거나 해체되거나 변형 변질되는 모든 일들은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의하지 않고서는 한 가지라도 자행자지할 수가 없습니다. 한글이 한반도에서 태어난 것도 그의 뜻이며, '아리랑'이란 음률과 노랫말도 그의 뜻에서 탄생된 것이며,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도 그로 말마암아 받은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정선 아리랑의 음률은 흙으로 돌아갈 무지한 인간 육신의 심령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오직 지옥 형벌에 떨어질 마귀의 말만 듣고 따라가 영원무궁히 고생하게 될 인간들의 완악한 마음들에 대해 하나님이 아버지로서의 아픔과 서러움에서 우러난 음률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성이 깃든 음률에다 자신들의 허황된 육신의 노랫말을 실어 하나님께 불효불충한 일들로 인해 매맞는 고통을 한낱 팔자소관으로만 취급하고 있으니, 듣는 사람들조차도 사람의 삶이 다 그러한 줄 알고 하나님께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선 아리랑의 음률이 장차 우리 인간들이 당하고 겪어야 할 참담한 고통을 예견한 하나님의 애절한 곡성으로 들리는 분들은, 자신이 두고 온 본향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타관객지에 떠다니는 외로운 고아가 되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솔로몬은 사람이 잔치집 분위기로 사는 것보다 초상집 분위기로 사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전도서 7:2) 하셨고 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도서 7:4)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저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와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열왕기상 4:29~34) 하심 같이, 솔로몬의 지혜는 예수님도 인정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육적인 것으로 부강하여 김정은·시진핑·문재인· 딮세력들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며 온갖 거짓과 살인과 불법불의와 음란방탕한 일들로 쾌락을 누리는 짓을 성공자나 영웅으로 취급해 부러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성공자들을 잡혀 죽기 위해 태어난 무지한 짐승들로만 취급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오직 거룩한 하나님 한분의 말씀만 순종해 따르는 일들로 기뻐하는 순수한 정금 같은 행복자들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사단은 심히 반발하여 지금은 사람들을 많이 끌어다 모아놓고 광란의 잔치 분위기를 만들어 거기에서 또다시 삶의 보람을 찾도록 만듭니다. 그들이 개발해 만든 광란의 잔치 분위기는 온갖 매스컴을 타고 세계 방방곡곡에 방영되고 있으며, 또 그것도 부족해 골목골목마다 각종 유흥업소와 노래방을 만들어 '노새 노새 젊어서 노세'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유황불 세례를 받기 직전의 소돔·고모라 사람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런 소돔·고모라의 광란의 잔치 분위기 상황에서 돌이켜 태고적부터 사람들에게 주신 바 된 하나님의 사랑, 곧 눈물이 아니면 하나님의 응어리진 마음을 돌이킬 수 없는 애절하고도 간곡한 하나님과의 첫 사랑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시대에 불려지고 있는 한서린 아리랑의 음률과 노랫말입니다. 이 노랫말과 음률은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지 사단의 악습에 빠진 인간들의 심령에서는 도저히 발현될 수 없는 노랫말과 음률입니다. 아리랑의 음률과 노랫말을 하나님의 뜻으로 의역(意譯)해 부르십시오. 천하의 선한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태어났으니 아리랑의 음률과 노랫말의 주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건 애절한 눈물의 회개 뿐입니다. '실세자 예수'에 기록된 사람의 참된 도리를 깨닫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노랫말을 '하나님이랑, 하나님이랑 함께 할 때만 기뻐요'라는 영적 뜻으로 의역해 부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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