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헌의 「말문」 해설 / 박성현
말문
김지헌
하늘이 말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장맛비에 꽃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진흙을 뚫고 수련이 말문을 열었다
과묵을 늘상 달고 다니던 아이가
아기아빠가 된 것만큼이나
저 수다스러움은 위대하다
살아 있다고 소리치는 거
꽃이 잠깐 한눈판다 한들,
내가 엄마를 찢고 나와 처음 말문을 열었을 때
엄마도 그랬으리라
공원묘지의 봉분들, 말문을 닫은 그 이유라는 거
알고 보면 거기서 거기다
정선 비행기재를 지나는데
한여름 적요 속 터널이 속사포를 쏟아내고 있었다
살기 위해 죽을힘 다하는 폭포수처럼
고요라는 평형수가 터널의 말문을 닫아버린다
언젠가 말이 문을 닫을 때
그때를 위해 문장 하나는 남겨놓아야 한다
한 줄 휘갈겨 쓴 번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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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로 접어들자 흠뻑 젖어 있던 대기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하늘이 장맛비를 쏟아내는 것이다. 시인은 산책을 접고 사방을 바라보았다. 열대성 폭우처럼 빗줄기는 두껍고 넓었으며 단단했다. 저 비를 맞으면 산산이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문득 빗소리와는 다른 수런거림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높고 뚜렷했으며 또한 아득했다. 소리를 따라갔다. 여전히 폭우는 쏟아지고, 폭우에 갇힌 사람들이 우뚝했다.
맹렬한 비의 해무 사이로 꽃들이 입을 여는 것이었다. 시인은 수련이 피어나는 그 놀라운 풍경이 도무지 실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빗줄기가 쏟아지며 지상의 온갖 사물을 삼켜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사물들은 빗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진흙을 뚫고 수련이 피고 있었다. 사방이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수련의 말문은 더 크고 분명했다. 그것은 엄마의 몸을 찢고 나와 “살아 있다고 소리치는”, 아니 “내가 엄마를 찢고 나와 처음 말문을” 여는 실존의 처절한 방식 혹은 과묵하던 아이가 커서 아빠가 된 것만큼이나 놀랍고 치열한 사태다. ‘살아 있음’의 실존이란 수다스러움의 또 다른 표현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나의 실존은 말의 ‘고여-있음’이며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써 말의 ‘쏟아-냄’이기 때문, 진흙을 뚫고 수련이 핀 풍경 하나가 시인에게 ‘말문을 엶’이라는 성스러운 사태로 다가온 것처럼 ‘아기’를 처음 본 엄마의 울음도 분명 그랬을 것.
수련을 둘러싼 사태는 점점 더 확장된다. 평생 해온 말문을 지우고 닫아야 했던 ‘공원묘지의 봉분들’도, 수련의 피어남에 뒤엉킨 그 수런거림을 정확히 대칭한다. 한 줌의 적막에도 무시무시한 굉음이 깃들어 있다는 것, 이를테면 정선 비행기재 터널을 달리는데 터널 속의 긴장을 찢고 달리는 자동차들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살기 위해 죽을힘 다하는 폭포수”처럼, “고요라는 평형수가 터널의 말문을 닫아 버”렸던 것이다.
말문은 그렇게 닫힌다. 아니, 그렇게 활짝 열리는 것이다. 그대를 위해 남겨 놓은 문장처럼, 혹은 “한 줄 휘갈겨 쓴 번개”와도 같은 말문의 무수한 성채(城砦). 말이 문을 닫아도 수련은 반드시 피어나듯 시인은 고요-속-에서도 ‘살아 있음’의 그 명징한 수다스러움을 듣고 있다.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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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 시인. 2009년 〈중앙일보〉로 등단.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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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가 둔간해졌나 시도 해설도 공유하기 힘들다.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