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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 21,9ㄴ-14
천사가 나에게
9 말하였습니다.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10 이어서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3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45-51
그때에
45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진정한 만남은 변화를 가져온다>
오늘 복음은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증언을 듣고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말하며, 필립보의 증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핀잔을 주었지만, 그는 “와서 보시오.”(요한 1,46) 라고 확신에 찬 초대를 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나타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신적인 전지함에 압도당한 나타나엘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48) 하고 당혹하여 말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요한 1,48)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타나엘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모든 의혹과 편견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믿음과 감격이 솟구쳤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대체 이 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만남의 신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보았다’는 것은 단순히 필립보가 부르기도 전에 너를 보고 ‘알았다’는 예지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인 측면, 곧 ‘사랑’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바라봄’입니다.
사랑하면 자꾸 바라보게 되는 거죠.
눈을 뗄 수가 없게 되는 거죠.
바로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고 계신 거죠.
예수님의 이 ‘사랑스런 바라봄’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우리에게도 모든 의혹과 편견이 사라질 것입니다.
곧 우리를 관상하고 계시는 그분을 관상하게 되면, 믿음과 감격이 샘솟을 것입니다.
‘관상’, 그것은 곧 사랑의 바라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 나타나엘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자신을 온전히 아시는 구원자요 주님임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은 자신의 메시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께 대한 믿음은 마침내 신앙고백으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요한 1,49)
이렇게 해서 ‘대전환’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만남의 신비’가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빈정거리던 그에게 ‘대역전’이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를 전복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만남의 신비’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말합니다.
“두 개성의 만남은 두 화합물질의 만남과 같다.
반응이 이루어지면 둘은 변한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만남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신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통하여 당신 ‘사랑’을 퍼부으십니다.
그 사랑으로 하여 우리를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고, 고백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들 사이의 만남 안’에서도 ‘예수님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담아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요한 1,48)
주님!
저를 주목하여 바라보고 계신 당신 눈동자 안에서 진정한 제 자신을 보게 하소서.
제 눈이 맑아져 거짓 없는 진실을 보게 하소서.
제 마음에 거짓이 없게 하시고, 마음 안에서 하늘이 열리고 진리를 보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만남의 거룩한 신비를 담아내게 하시고, 당신이 퍼부은 사랑을 퍼 올리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보시는 것을 보는 관상의 눈, 관상의 표현>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나타나엘은 예수님에 대해 편견적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것만 놓고 보면 나타나엘이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편견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어지는 얘기를 보면 꽉 막힌 사람이나 완전히 닫힌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필립보의 제의랄까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주님께 갔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타나엘은 꽉 막히거나 닫힌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 신비에 열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도 여느 이스라엘 사람처럼 나자렛에서 메시아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고 믿기도 하였지만, 자기의 인간적인 생각에 하느님 신비의 문까지 닫는 사람은 아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칭찬을 그가 받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믿음의 눈이 있는 사람이요 열려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사건이나 역사를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를 하나 들면, 이스라엘은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 간 것을 야곱의 편애와 이에 대한 형제들의 시기 질투가 만든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역사로 보는 것입니다.
아무튼 나타나엘은 이런 믿음의 눈을 가졌기에 필립보가 찾아가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자기를 주님께서 먼저 보셨다고 했을 때, 똥고집 부리지 않고 즉시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믿는 사람에게는 관상의 교환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고 계심을 믿는 이도 보는 것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는 사람의 입에서는 시편 139편의 찬미가 절로 나옵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시나이다.”
이렇게 나타나엘처럼 주님께서 알고 계심을 알고, 보고 계심을 관상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위선자라고 나무라신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는 다르겠지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고 자선하고 단식하지 않고, 숨은 일도 다 보시는 주님의 눈앞에서 뭐든지 다 하겠지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주님의 눈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내 어려운 사정을 다 아시는 주님의 아심에 사랑을 또한 느끼겠지요.
그래서 엇길로 가지 않고, 그래서 행복의 길로 가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서 나를 보고 계심을 나도 보고', '알고 계심을 나도 아는' 또 다른 나타나엘들이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보았다>
‘百聞(백문)이 不如一見(불여일견)’이라 합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래서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다시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거듭 말했습니다.
결국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권고에 따라 발길을 옮겼고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필립보의 거듭된 권고는 우리에게 주님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인내를 가지고 전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먼저 나타나엘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모든 것을 꿰뚫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나의 모습을 이웃이 보게 될 때 주님을 더욱더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 한 논쟁을 피하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내 변화된 모습을 와서 보시오!'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말에서 우리는 고정관념, 선입견이 얼마나 큰 장애를 가져오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은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열린 마음으로 상황과 사람,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을 해 주셨는데,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다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조 야곱이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층계를 보았는데, 그 위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내용입니다(창세 28,12-13).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은 층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이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끊임없는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냥 스쳐보는 것과 살펴보는 것, 꿰뚫어 보는 것은 의미가 달라집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타나엘을 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람이나 사건,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인 성숙을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풀꽃>이라는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것도 좋지만 신앙인은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고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라삐 전통에서 메시아를 갈망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메시아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나타나엘의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나타나엘처럼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나만의 고요한 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은 진실해지고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으며 마침내 그 삶을 주님께서 인정해 줄 것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거짓이 없는 참된 신앙인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믿음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1)
오늘 복음 이야기는 겉으로만 보면 나타나엘이, 즉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로만 보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저자의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나타나엘 자신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고백을 그의 말로 바꿔서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나는 보잘것없는 시골 나자렛에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내 마음속을 깊이 꿰뚫어보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메시아이신 분이라고 믿게 되었고, 그분의 제자가 된 지금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 하느님’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오르내린다는 말 때문에 이 말씀을 창세기에 있는 ‘야곱의 꿈 이야기’에 연결하는 경우가 많은데(창세 28,12), ‘이사야 예언자가 본 환시’에 연결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이사 6,1-4)
하느님 주위를 날아다니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사랍들’, 즉 ‘세라핌 천사들’의 주 임무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 천사들은 바로 그 ‘사랍들’, 즉 ‘세라핌 천사들’이고,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린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주위를 날아다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천사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면서 찬양한다는 뜻,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보게 될 것이다.”는 “너희는 믿게 될 것이다.”인데, 복음서 저자가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은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바로 그 신앙고백으로 시작하는 책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요한 1,1)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고 찬미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콜로 1,15-17)
또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히브 1,1-3)
‘예수님은 하느님의(하느님 본질의) 모상이신 분’이라는 말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으로 풀어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 교회의 신앙입니다.
혹시라도 “그것을 왜 그렇게 강조하는가? 그냥 예수님을 메시아로, 또 주님으로 믿으면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의문을 품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우리 구원에 직결되는 신앙이기 때문이고, 우리 교회의 모든 교리의 출발점이고 핵심이고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3)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는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과 율법을 공부하던 관습에서 온 표현인데, 말씀의 뜻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갈망하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 너의 심정과 믿음과 희망을 내가 잘 알고 있다.”입니다.
이 말씀은 그의 마음속을, 또 그의 믿음과 희망을, 또 그의 심정과 생활을 모두 꿰뚫어 보셨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과 만남의 축복 - '참나의 발견'>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시편 145,17)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해야 할 일에만 매몰되면 해서는 안되는 일까지 하게 될 수 있다.”
<다산>
“사람으로서 하지 않는 바가 있은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맹자>
매사 완벽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빈자리를 남겨 놓으라는, 자주 삶의 현장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여유와 자유를 지니라는 충고이겠습니다.
이래야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중요한 일을 놓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열두 사도들 중 하나인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신약성서에는 사도들의 명단에만 언급되어 있을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교회는 오늘 요한복음에서 필립보에 의해 예수님께 인도된 나타나엘을 바르톨로메오와 동일시 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무려 인도까지 갔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선교하였고, 거기서 마법사로 고발당한후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박힌 채 참수형으로 잔혹하게 순교했다 전해집니다.
성인의 상징물은 칼과 벗겨진 살가죽이며, 유다 타대오와 더불어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수호성인이자 제본업자, 도살업자, 치즈상인, 가죽상인, 미장공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에 의해 예수님께 인도되는 나타나엘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아직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나타나엘에게 필립보는 강력히 권합니다.
자주 성소자들을 위해 인용되는 유명한 말마디, “와서 보시오.”입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 와서 실제 보라는 것입니다.
보고 배우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두 분의 만남이 극적입니다.
만남 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이요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보다 더 큰 찬사도 없습니다.
주님과 만날 때 참나의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참사람, 나타나엘의 진면목을 꿰뚫어 본 예수님입니다.
평생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며 참사람의 나를 살고자 노력했을 나타나엘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선물’이란 이름 뜻대로 거짓이 없는 참사람 나타나엘은 우리 믿는 이들 모두가 추구하고 선망하는 인간상입니다.
감격한 나타나엘이 묻습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아마도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공부에, 특히 사람들이 갈망하는 메시아에 관한 공부에 전념했을 것이고, 주님께서 이를 보셨음이 분명합니다.
곧장 이어지는 감동한 나타나엘의 화답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참 아름다운 참사람과 참사람의 만남입니다.
나타나엘의 내공을 짐작하게 합니다.
결코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그동안 간절히 부단히 찾았기에 주님을 만난 나타나엘입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새삼 확인시켜준 나타나엘을 격려하며 더 큰 축복도 예고합니다.
나타나엘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볼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심에 따라, 하늘이 열리고 야곱의 꿈이 예고한 하느님과의 통교가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항구한 현실이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말 그대로 우리의 하늘문이, 하늘길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새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아무도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진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한 교회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그리스도의 신부라 불리는 교회입니다.
이 도시의 성벽의 기초를 위한 열두개의 돌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합니다.
바로 이 열두 사도들 중의 하나가 성 바로톨로메오 사도입니다.
열두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모든 것을 가르친 것이 교회공동체의 기초를 이뤘음을 깨닫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현존하는, 우리의 영원한 비전이자 희망인 새 예루살렘 천상교회의 축복을 미리 맛보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활력넘치는 지상천국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고,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시편 145,18)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본 것을 살아내는 것>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명심보감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물 속 깊이 있는 고기와 하늘 높이 떠 나는 기러기는 쏘고 낚을 수 있거니와 오직 사람의 마음은 바로 지척 간에 있음에도 이 지척 간에 있는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
범을 그리되 모양은 그릴 수 있으나 뼈는 그리기 어렵고, 사람은 알되 얼굴은 알지만 마음은 알지 못한다.
바다는 마르면 마침내 그 바닥을 볼 수 있으나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한다."
(<명심보감> 성심편)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말도 있습니다.
착하게 살고 싶지만 행동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로마 7장)
이렇듯이 우리는 남의 마음을 알기도 어렵고, 나의 마음 또한 쉽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재능과 능력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바둑은 몇 번 두면, 상대방의 실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력에 맞게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하수는 바둑판 위에 실력에 맞는 정도의 돌을 먼저 놓습니다.
이것을 접바둑이라고 합니다.
골프도 평균 타수가 있습니다.
하수는 자신의 실력에 맞는 타수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핸디’라고 합니다.
저의 바둑 수준은 아마추어 7급의 수준입니다.
저의 골프 핸디는 100 정도의 수준입니다.
인품과 영성도 몇 번 만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인품과 영성은 능력과 재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품과 영성은 오랜 정진과 성찰을 통해 드러납니다.
마치 샘이 깊은 물은 쉽게 마르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는 거센 바람이 불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만과 위선에 빠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계명을 안다고 하지만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삶으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과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은 비록 율법을 모를지라도 인품과 영성이 깊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물고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코이라는 잉어입니다.
이 잉어의 치어를 작은 어항에 넣어 기르면 5-8센티미터 정도로 자라고, 좀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 두면 25센티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코이를 넓은 강물에 방류하면 놀랍게도 90-120센티미터까지 성장한다고 합니다.
‘로고스(Logos)와 ‘ 뮈토스(Mythos)’를 생각합니다.
로고스라는 어항에 갇히면 사람의 이성과 지성은 그 ‘틀’에서만 갇히게 됩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인과관계를 따지고, 물질과 자본이라는 도구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학혁명은 로고스의 세상입니다.
뮈토스라는 바다로 나가면 이성과 지성은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직관과 깨달음의 세상입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세상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세상입니다.
물질과 자본이 아니라 에너지와 파동의 세상입니다.
소유의 세상이 아니라 존재의 세상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고스와 뮈토스를 뛰어넘은 큰 바다였습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지불했습니다.
삶 속에서 자신이 본 것을 실천했습니다.
목숨을 바치면서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사도는 단순히 예수님을 본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아닙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길을 죽기까지 충실하게 따라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 사찰, 사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가치를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 것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지금 가진 것들을 포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밭에 묻혀 있는 진주(하느님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팔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안에 머무는 삶>
첫 복사를 서는 아이를 보면 너무 예쁘고 귀엽습니다.
그러나 긴장해서 초조해하는 아이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합니다.
어떤 아이는 첫 복사를 서기 전에 자기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 복사하기 싫어.”
복사서는 두려움에서 피하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긴장하는 새 복사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틀려도 안 틀린 척하는 것이 복사야.”
그렇게 해야 사제도, 또 신자들도 분심에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연습을 계속하면 실제로 대범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불안해하면서 포기하는 곳이 아닙니다.
대범하게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곳이고 또 그런 삶을 살아야 할 세상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거센 파도와 같은 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두려워도 무섭지 않은 척, 틀려도 틀리지 않은 척,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이런 식으로 행동하다 보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거뜬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에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 머무는 삶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 삶을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주님 안에 머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바르톨로메오 사도입니다.
성경에는 ‘나타나엘’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여쭙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조금 뚱딴지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무화과나무’는 메시아적 평화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이미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충실하게 살아온 참으로 거짓 없는 사람임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알아주는 예수님 안에서 그는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자기 신앙을 고백합니다.
자기를 가치를 알아주는 예수님을 통해 더 올바른 길, 바로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안해하고 걱정하면서 포기하는 삶이 아닌, 우리를 믿어주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르톨로메오와 같은 하늘 나라에서의 큰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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