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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12-15
그 무렵 베텔의 사제 12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13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14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1,3-1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14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아모스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양 떼를 몰고 가는 그를 붙잡으시어,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하셨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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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는 예언자의 길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는 남왕국 유다 출신이면서도 하느님의 명에 따라 북왕국의 베텔에 가서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임금과 사제의 권위도 아모스가 전하는 하느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제1독서). 에페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신 하느님을 찬미한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마련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우리는 그 말씀을 믿을 때에 약속의 보증인 성령을 받는다(제2독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파견을 받아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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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 아모스는 북쪽의 예언자였다. 당시 북쪽 임금 예로보암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다. 아모스는 그를 꾸짖는 예언을 전한다. 아마츠야 사제는 아모스에게 유다 땅으로 떠날 것을 권하지만 아모스는 더욱 강하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해 주셨다. 남은 일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사는 일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만을 의지하라는 암시다. 가진 것이 없으면 애절한 마음이 된다. 그런 마음으로 평화를 전하라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한다. 그들에게는 힘이 있다. 주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돌무화과나무를 가꾼 경험과 기술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아모스를 예언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앞으로 그를 통하여 이루어질 하느님의 일에 관한 모든 능력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소유’를 요구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러면 부르심을 받은 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6-17)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언제나 주인이나 스승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잃어버리게 될 때,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단죄, 험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용서하지 않는 마음과 같은 잘못된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만일 하느님의 일 때문에 이웃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꾸 갈등을 겪는다면, ‘누구의 힘’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성체 앞에서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당신 자녀로 부르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알려 줍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말씀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 안에서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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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려고 짐을 싸다 보면 가방이 언제나 작게 느껴집니다.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챙기다 보면, 어느새 빈 공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여행에 무엇을 가지고 갈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놓고 가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여행 가방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따져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여행을 떠나십니다. 여행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이 여정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 여행은 ‘머물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떠나기 위한 여정’입니다. 그래서 가벼워야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머무는 동안 더 가지려고 집중합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채우려고 집착합니다. 짐이 가벼우면 쉽게 떠날 수 있습니다. 나의 울타리, 습관, 행동 방식, 소유와 집착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쌓여 무거워지고 챙겨야 할 것이 많아지면 떠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짐 꾸러미를 가볍게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지금 예수님과 함께 떠나야 합니다. 자신을 묶어 두었던 것으로부터, 자기가 선택하고 결단하였다고 생각한 것들로부터, 그러한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세상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그대로 지니고 간다면, 또 다른 집착에 허덕이며 살게 될 것입니다. 짐을 가볍게 하고 예수님과 함께 떠나는 길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그 중심으로 향하는 여정입니다.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머무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발견합니다. 버리고 떠나 봅시다.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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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왔으며,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살 수 없는 운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파견되어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들의 병을 고칠 수 있을 때마다 그런 능력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행여 제자들이 능력에 대한 자만심에 빠질 수도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지니고 가지 말 것을 명하십니다.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도구로 쓰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는 숙명을 사랑하도록 이끌고 계심을 먼 훗날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베텔에 파견된 아모스 예언자는 자신이 처음부터 예언자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자신을 붙잡으시고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고 명하셨기에, 박해와 반대가 두려웠지만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숙명 같은 삶을 견디고 사랑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병든 노부모를 모시고, 장애를 지닌 자녀를 돌보며, 누군가의 잘못을 짊어져야 할 순간도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숙명이 지금은 무거운 십자가이겠지만, 부활의 희망으로 바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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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당하고 옳은 말인 줄은 잘 알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있습니다. 아마츠야는 아모스가 전하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더욱이 남왕국 유다 출신인 그가 북왕국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리라고 외치고 있으니 결코 달갑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모스도 본인이 자원하여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가서 그런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는 하느님께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 모두가 그 말씀을 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던 청중 가운데서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하고 말하면서 많은 이가 예수님 곁을 떠나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말씀은 듣기조차 거북하고 부담스럽기까지 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에게 사로잡혀 그분의 말씀을 짊어지고 그분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속해 있는 시대와 사회의 양심 역할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언자들은 힘이 없고 억눌린 사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사람, 자신의 의사마저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늘 기구한 삶을 살다가 비운에 이 세상을 떠나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언자들의 이러한 신원과 역할 때문에 그들의 삶은 늘 그렇게 고달팠는지도 모릅니다.
아모스도, 예레미야도,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오늘 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와 아마츠야의 경우처럼, 힘 있고 가진 사람의 눈에는 예언자의 외침이 늘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해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사회의 안녕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기에 그들은 예언자들을 제거하려고 하였고, 사실 지금까지 제거하여 온 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도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시대에 하느님을 대신하여 양심에 호소하는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그 말씀에 따라 우리가 먼저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도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 주님의 말씀을 용감하게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에페소서의 말씀대로,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하느님의 소유로 속량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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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족하면 청하고 없으면 매달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악령을 몰아내는 능력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힘’은 그들과 함께 있었던 셈입니다. 제자들은 그 힘에 이끌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그러니 선교에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다른 것은 준비 못 해도 ‘이 힘’은 지녀야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제도’를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을 갖추고 많은 이가 동참하면 ‘힘’이 생긴 것으로 판단합니다. 세속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은 다릅니다.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누가 어떤 마음으로’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숫자가 많아도 ‘하느님의 힘’이 함께하지 않으면 결국은 시들고 맙니다. 거창하게 출발했지만 소리 없이 문을 닫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교는 ‘마음먹기’가 아닙니다. 주님의 ‘이끄심에 맡기는’ 행위입니다. 사도들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지만 힘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에게 매인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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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합니다. 연인으로, 친구로, 또는 아내나 남편으로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합니다. 주님의 선택은 자유롭습니다. 주님께서는 장점이나 탁월함 때문에 선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그분의 자유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그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들어갈 학교를 선택하고, 우리가 배우고 싶은 교수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를 제자로, 사제로, 수도자로, 교사로, 선교사로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어떤 직분이나 처지에 있든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당부하십니다. 아니, ‘지금 여기’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의 나라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책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한 남성이 상체에 ‘타투’를 했습니다. 자기 친구들이 많이 했고, 또 그 친구들이 자신감 넘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결정했습니다. 이 남성의 어머니께서 우연히 아들의 타투한 것을 보았습니다.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김치 담던 반찬 통으로 아들의 머리를 두들겨 패며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라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사실 이 남성은 부모의 말씀에 늘 순종하며 살았던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할 때마다 긴소매 티셔츠를 입거나 토시를 해서 상체의 타투를 가렸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운전하다가 전방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신호를 기다리는 앞차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잠시 뒤에 앞차의 운전석 문이 열리고 우락부락한 모습의 운전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어머니는 아들에게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빨리 윗도리 벗어!”
숨기고 싶었던 아들의 타투가 이런 상황에서는 드러내고 싶었나 봅니다. 이렇듯 숨기고 싶은 면이 때로는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고 잘못이라고 단정지었던 것이 아닐까요?
섣부르게 단정짓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찾으려 노력하면 어떨까요? 그러나 만약 도저히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라면 과감하게 그만둘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하시지요. 부족함 없이 챙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게 다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에 제자들은 모두 실망했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부족하고 나약하다고 생각해서 예수님 없이 그 모든 것이 가능할까 싶은데, 예수님께서는 가지고 있는 것까지 놔두고 떠나게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만을 모시고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모두 내려놓고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할 것을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평생 제자들과 함께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제 곧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고 이 세상을 떠나 하늘 나라에 자리 잡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 아닌, 오로지 하늘의 가치를 좇는 삶입니다. 사랑만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세상은 중요하지 않다고 할 것을,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명언: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힘써라(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사장님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신데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름 캠프 온 아이들을 위한 식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대형 식자재 마트에 갔습니다. 이것저것 잔뜩 산더미처럼 카트에 싣고 계산대 앞에 서니 근무하시는 자매님께서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묻습니다.
“사장님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신데요?”
그 상황에서 ‘사실 저는 천주교 신부인데요!’ 하기도 거시기 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식당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작은 식당이 아닌 것 같은데...아무튼 더위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하십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야 재미있고 기쁜 마음으로 하는 일이지만, 가족들의 생계가 자신의 어깨에 달려있는 자영업자들,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으실까,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는 마트 직원의 질문 앞에 다시 한번 제 신원, 제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각별히 총애하셔서 이름을 불러주시고, 선택하시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셨는데, 그러한 소명에 기쁘게 응답하고 있는지, 마지막까지 충실하고자 애를 쓰는지 크게 반성이 됩니다.
예언자로 산다는 것, 때로 근사하고 멋있어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폭군이나 압제자의 잔악한 횡포나 그릇된 지도층 인사들의 타락 앞에서도 그저 숨죽이고 지낼 뿐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 한번 보십시오. 주님으로부터 예언의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고관대작들 앞으로 나아갑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며, 그의 파렴치한 치부를 아무런 가감없이 고발합니다. 서슬퍼런 예언의 말씀 앞에 왕들조차 고개를 조아립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평생 한두번입니다. 나머지 대부분의 생애는 핍박과 돌팔매질과 추방과 놀림의 연속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자신에게 예언자의 소명을 주신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도망다니기까지 합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거룩한 주님의 지성소 베텔 땅을 더럽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가서 예언하며 밥 먹고 살아라, 는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의 질책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아모스 7,14-15)
보십시오. 아모스 예언자는 철두철미한 신원의식, 겸손한 신원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단한 예언자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면서도 자신의 근본, 본래 처지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원래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본래 양치는 목자요, 돌무화과 나무를 가꾸는 농부였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결핍 투성이요 천덕꾸러기였던 원래 나의 허물을 벗고 사목자가 되고 책임자가 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변합니다. 자신의 근본을 잊고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어딜 가면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누군가 나를 보필해야 합니다. 슬슬 주님께서 혐오하시는 거짓 목자, 삯꾼으로 전락하는 중입니다.
요즘 저는 일부러 이런저런 힘든 일들을 골라 하고 있습니다. 저도 까마득한 시절에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산업 현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근로자였습니다. 예언자요 사목자로서 초심을 잃지 않는 비결은 나의 근본, 내 결핍 투성이의 보잘것없던 모습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는 천동설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에는 해가 뜨고, 저녁에는 해가 지는 것을 매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와 금성의 모양 변화가 그것이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 운동하기 때문에 별을 바라보았을 때, 별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바뀌어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지구가 천동설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면 연주 시차가 나타날 리가 없기 때문에 천동설로는 연주 시차를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금성을 관측하면 달처럼 다양한 모양의 변화가 나타나는데 천동설에 의하면 금성은 초승달 또는 그믐달 모양으로만 보여야 했기 때문에 금성의 위상 변화 역시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구는 어떻게 움직일까요? 지구는 1시간에 약 1,670km의 속도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회전(자전)하면서, 태양을 둘러싼 대략 9억 6천 만km에 달하는 타원 궤도를 1년 동안 돌고(공전) 있습니다. 지구의 운동으로 생기는 현상 중 대표적인 것은 일주 운동과 계절 변화인데 일주 운동은 지구의 자전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며, 계절의 변화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상태로 공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행성이며, 태양은 우리은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항성이며, 우리은하는 우주의 변방에서 우주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는 우리의 꿈을 확장시켰습니다. 우리는 달을 탐사하였고, 화성까지 탐사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천동설과 지동설로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있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미주 지역에 있는 한인 성당의 중심은 아닙니다. 댈러스 한인 성당은 중남부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성당은 포트워스 한인 성당입니다. 그리고 대략 4시간 거리에 오스틴, 휴스턴, 샌 안토니오 성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10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에 엘파소, 덴버, 콜로라도 성당이 있습니다. 자동차로 가기에는 먼 거리에 피닉스, 라스베이거스 성당이 있습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사제들이 함께 모여서 연대하는 것이 조금 어렵습니다. 중남부 지역 대표 신부님과 휴스턴, 오스틴, 샌 안토니오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꾸르실료 담당 신부를 맡고 있습니다. 레지오, 엠이, 성령기도회도 담당신부님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4시간 거리에 있는 성당이라도 함께 하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청년들을 위한 피정도 함께 하면 좋겠고, 성령기도회도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사명감’을 이야기합니다. 사명감은 목적지와 같습니다. 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비록 힘들어도, 고난이 닥쳐도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내딛습니다. 1시간만 더 걸으면 시원한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참을 수 있습니다. 곧 더위와 갈증을 피할 수 있는 물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 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아모스는 그저 가축을 키우는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가축을 키우는 목자의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빵도, 전대의 돈도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발은 신지만 옷도 두벌은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여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성공, 명예,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박해와 고난이 있었고, 목숨을 바쳤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포기한 것이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포기도, 선택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채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보내지는
나의 길은
보내시는
님의 길이오니
보내지는
나의 채비는
보내시는
님이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당부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곧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예전에 교회 봉사자들 교육을 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봉사, 열심히 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그 말씀을 들으신 분들이 저를 의아한 듯이 쳐다보셨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본뜻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일개 사명감으로 열심히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명감과 의무감으로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그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명감이 출중하다 할지라도 인간은 결국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나중에는 다 지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봉사는 내가 열심히 해서 될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하셔야 그 하느님의 힘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곧 봉사는 내가 내 의지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진정 기뻐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먹을 것 음식이 선물로 들어왔는데 그 선물이 유통기한이 짧아서 어서 나누어 먹을 수밖에 없어서 주변 이웃들과 기쁘게 나누어 먹는 것과 같을 수 있습니다. 곧 내가 너무나도 가진 것이 많아 주체할 수 없어서 어서 빨리 기쁘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하느님의 은총이 흘러넘쳐서 너무나도 기뻐서 그 흘러넘치는 은총을 나눌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봉사라는 것입니다.
제가 사제로 살 수 있는 것 역시도 인간적인 능력과 의지와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을 때 가능하고,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고, 하느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과 더불어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모든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실 것이니 너는 다른 모든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성령과 함께 언제나 기쁘게 살아가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의 성령과 함께 그분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며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세상 속에 아낌없이 전해줄 수 있는 사도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두 명씩 파견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어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통해서 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이 수행한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다는 것은 더러운 영들의 공격이 실제로 있을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이어서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그리고 여분의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직 주님만을 생각하며 그분께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파견할 제자들이 앞으로 맞이하게 될 것에 대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무엇을 위해 파견하셨습니까. 잠시 쉬라는 이유였을까요. 혹 제자들이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파견하였을까요. 아닙니다. 앞으로 자신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파견하신 것입니다. 먼 지역을 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사람은 간단하게 준비해도 될 것을 실상은 필요 없는 것까지 챙기는 경우가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마음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행 보따리도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그분이 이끌어 주시는 대로 앞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그대로 하였기에 마귀를 쫓아내었고 병자들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서 만나는 이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회개를 선포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어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께 나 자신이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의지하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우리가 주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족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부족함이 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족함도 눈에 보이는 부족함도 예수님께서 다 채워 주실 것임을 믿고 오늘 하루 기쁜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아멘!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함승수 신부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본 분들이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일은 '짐을 더 줄이지 못한 것'입니다. 출발하기 전에 짐을 최대한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수 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먼 길을 걷다보면 처음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챙겼던 물건들도 나중엔 너무나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여겨져서 하나씩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끝까지 남겨두는 '진짜 필수품'은 정작 몇 개 안되더라는 것이지요. 여행을 떠나기 전, 어떤 물건이 필요할지 꼼꼼히 따져가며 챙기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입니다.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는데에 도움이 될만한 필수적이고 중요한 것들을 잘 챙겨야 하는데 정작 필요한 물건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가하면 정말 필요할 것 같아 챙겼는데도 여행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쓰지 않고 '짐'만 되는 물건들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음에는 정말 꼭 필요한 것만 잘 챙겨서 짐을 줄이리라'고 다짐하지만, 자꾸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많이 소유해야만 안심하는 어리석은 욕심쟁이인가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분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여정입니다. 즉, 이 세상의 어느 한곳에서 편안히 ‘머물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과감하게 ‘떠나기 위한 여정’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철저하게 가벼워져야만 중간에 지치지 않고 목적지까지 무사히 다다를 수 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몸과 마음의 짐을 비우고 가벼워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이는 진리를 객관적으로 검증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 고대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 가운데에 하느님 나라가 와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천명하시기 위함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고 포용함으로써 화목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이유이자 목표라는 겁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이 자기가 파는 물건이 얼마나 좋은지를 직접 써보고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 지닌 품질 자체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그런 물건을 파는 스스로가 당당하고 떳떳하기 어렵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당당하고 떳떳하려면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그분 뜻을 전하는 데에서 오는 참된 기쁨을 제대로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굳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사람들은 우리 모습을 보며 하느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를,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여정을 떠나는 우리에게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더 가지려고 집착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렇게 우리 덩치가 커지고 무거워지면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일 자체가 힘겨울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하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속의 그 어느 것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나뭇가지를 깎아 만든 물질적 도구로서의 지팡이를 말씀하신게 아닙니다. 여기서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를 가리킵니다. 양치기였던 모세에게 지팡이는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작대기에 불과했지만,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리치자 물이 반으로 갈라졌고, 그 지팡이에 구리뱀을 걸어 들어올리자 그것을 본 뱀독에 중독된 환자들이 살아나기도 했지요. 즉 모세에게 지팡이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자신과 함께 계시며 힘을 주신다는 표징 그 자체였던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팡이를 지니고 가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욕심부리며 집착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알아서 마련해 주신다는 ‘야훼이레’의 믿음을 마음에 지니라는 뜻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살다보면 사랑과 호의로 나를 받아들이고 보살펴주는 ‘은인’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 뜻에 깨어있지 못하면 어느 순간 내가 그에게서 받는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며 이것 저것 자신이 원하는걸 요구하기 시작하지요. 심지어 그 사람보다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이가 나타나면 그 은인을 배반하고 떠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러면 나에게 좋은 마음으로 친절을 베푼 그 사람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다시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주저하게 될 것이고, 나는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배신한 잘못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으로 자리잡아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이로부터 호의와 친절을 받을 때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어 우리를 보살피시는 그분 사랑의 섭리로 믿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 기쁘고 행복한 일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고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의 결과에 연연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자기가 기대하고 바라는대로 결과가 돌아오지 않으면 실망하고 남을 원망하며 그들에게 탓을 돌리려는 편협한 마음에서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상대방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이런 저런 조언을 하게 될 때가 자주 있지요. 그런데 그것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내가 한 지적이나 조언이 그에게 피해를 주거나 콤플렉스를 건드리면 자기 이익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발끈하여 화를 내기도 하고, 역으로 나를 모함하거나 공격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 선한 의도를 왜곡하고 나를 배척하는 그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아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지요.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부정적인 마음을 발의 먼지를 털듯 털어버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사람이 몰라주더라도 하느님만은 내 마음을 알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그와 나를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바라며 꾸준히 기도하면 그분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히 선택하고 부르시어 당신의 뜻과 바람을 우리 마음 안에 심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주님을 굳게 믿고, 그분 섭리가 내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하루 하루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그분께서 우리 삶을 충만한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주실 겁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아 만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마르코6/7-13>7/1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교리를 배울 때 하느님은 아니 계신데 없이 어디나 계십니다. 라고 배우고 믿음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디나 계신 하느님 너무나 보편적이라 볼 수 없고 마날 수 없어 살다가 보면 아니 계신 것 같이 생각되어 배운 것을 잊으면 하느님 떠나게 됩니다. 사실은 아무리 금은보화가 은행이나 부자 집에 널려있어도 내가 찾지 않으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디나 계시지만 내가 찾지 않으면 어디나 계시지 않습니다. 엄연히 성당에 주님 계시다고 하지만 내가 찾지 않으면 아무데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철학 신학울 통해 찾아야 하고 성령의 빛이 길을 빛우여야 만나서 함께 합니다. 진실이나 사랑도 찾지 않으면 만날 수없으며 사랑하는 짝을 만나려면 여기자기 찾아 내가 구하는 짝을 만날 수있습니다. 어떤 때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하려고 하면 당신은 내 스타일이야 하면서 접근하지만 자기하고 일치 하지 않으면 사랑이 불가능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나 현존하는 하느님을 내 스타일로 만나려면 일생 못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찾아 만나려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조금만 생각하면 산소를 호흡하면서 생명이 유지 되듯이 산소 안에 주님 찾고 태양의 빛과 열속에 내가 산다는 것을 알면 하느님 만나는 것입니다. 저는 물 한 목금 마시면서 하는님의 현존을 느낍니다.
생명의 나무가 물가에 심아져야 생명을 유지하듯이 내가 한초도 살려면 주님 겯에 함께 있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 선 미를 따라 살려면 하느님 찾지 않고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 안에 진실 되게 살고 선하게 살고 이름답게 사는 길은 그 모든 것의 근본인 하느님 찾아 만나야 합니다.
저는 즐겁고 기쁘고 행복해 지려고 하느님 현존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친척 없이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이 마지막 죽음앞에 대세받으면서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소리치고 눈물 흐리면 감사하는 모습을 보고 하느님 아버지는 알아야 하고 알려져야 하고 믿음 희망 사랑은 행복의 시작이며 마침입니다.
어제 상담자가 우울증으로 아침 점심 굶다가 하느님 찾아 만나고 마음이 편해저 저녁식를 하고 저에게 감동입니다. 말하며 여기 와서 밥을 쉽게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 하느님 만난 사람 행복해집니다. 십자가 위에서 두 죄도 우도는 주님을 만났지만 죄도는 믿지 않고 자기 편의만 생각하고 우도는 주님 만나서 믿음을 고백함으로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고통 죽음에 직면해도 주님을 찾아 만나면 기쁨과 생명을 얻고 헹복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모두가 생명이 있는 한 주님을 찾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찾아 만나 행복한 하루되기를 바랍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구마와 치유의 권한을 주시며 둘씩 짝지어서 각 마을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여행준비를 물질적으로 아예 하지 말란 거였어요.
아마 이건 예수님도 함께 가시면서 준비 해 주시겠다는 것이었겠지요.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준비도 해 주신다는 걸 믿으라는 말씀이었겠죠.
선교사들을 그냥 고아들처럼 거지들처럼 보내시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선교할 때 하늘나라 선포와 회개하라고 외칠 자신감을 주셨을 테지요.
역시 예수님이 하라는 일을 하면서 결과도 아주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의 하늘나라 선포 회개의 힘으로 오늘도 마귀와 병을 이깁시다.
가톨릭알림 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늘도 회개와 하늘나라 외칩니다.
시너지 효과
김상태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6-7절)과 파견과 관련한 당부의 말씀(8-11절), 그리고 파견의 결과(12-13절)이지요. 우선 파견은 두 명씩 짝을 지어 보내집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혼자 살아가기보다 공동체를 이루어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지요. 원시 시대, 무리에서 떨어진 사람은 사자나 호랑이 같은 육식 동물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 원시적 공포가 우리의 잠재의식 안으로 들어와 발동하는 것인지 인간은 특히나 혼자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생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나 교회 안에서의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할 때 시너지Synergy 효과가 나타나 더욱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하신 당부의 말씀은 복음 선포자의 단순한 삶과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심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살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열두 제자의 파견은 미사가 끝난 후 우리가 다시 나의 가정, 직장, 세상 속으로 파견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크고 작을 뿐이지 살면서 지치고 힘겨운 일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내 삶을 이해해주고 함께해주는 사람이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파견받은 이들의 축복된 삶 - “회개, 찬미, 순종”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오리다.”(시편17,15)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참 좋습니다.
“주변을 챙길줄 아는 사람이 백성을 다스릴 지혜도 얻는다.”<다산>
사랑 실천의 구원은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섭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기뻐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
참 멋진 진리 말씀입니다. 천리향, 만리향 꽃같은 사랑의 행복한 수도공동체라면 성소자는 물론 목마른 영혼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찾아 올 것입니다.
어제와 자고 난 지금의 감동을 나누고 싶습니다. 요셉수도원 설립 37주년 및, 75년 제 생애 최초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참으로 생전 처음 침실에 아담한 50만원짜리 침대를 놓았고 그 느낌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그 소감을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사치스러운 고가의 침대가 아니라 안도했습니다. 돌침대가 아닌 흙침대입니다. 순전히 참 좋은 분의 사랑과 원장수사의 분별의 결단으로 이뤄진 쾌거입니다. 물론 사랑의 성령님께서 개입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저와 두분의 친애하는 도반 70대 노수사들에 대한 수도공동체의 각별한 배려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평생 무소유의 비워가는 단순한 삶을 추구해온 저의 반응은 시큰둥한 편이었습니다만, 겸손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침대 놓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마침 어제 강론 제목에서 강조했다시피 노쇠해가는 삶과 더불어 겸손과 순종 수행을 통한 영적 면역력을 강화하는 노력이 참으로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원장수사에 전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대로 잘 어울리고 멋집니다! 감사합니다! 동네 경노 잔치라도 열린 듯, 신기한 구경거리나 있는 것처럼, 수도형제들 내 일처럼 기뻐하며 싱글벙글 웃으며 흥분된 모습들로 다녀갑니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는 듯 신선한 분위기입니다. 평생 방바닥에 붙어 자다가 높은 침대를 사용하니 내 존재가 격상된듯한 고귀한 느낌도 선물처럼 받았습니다!”
업무차 어제 오전 10시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3시간 37분만에 뉴욕공항에 도착한 원장수사의 답신입니다.
“설치가 잘 되어서 제 일처럼 기뻐요. 저는 지금 막 착륙했어요.”
이어 맨먼저 침대 놓는 아이디어와 성금을 후원한 분으로부터 받은 답신입니다.
“어머나! 벌써 들어왔군요. 너무너무 보기 좋고 깔끔합니다. 오랫동안 궁리 끝에 말했던 것이 일사천리로 성사되어 기쁩니다. 아마 낼은 매트레스가 들어오겠군요. 세분 노수사님들 건강하시기만 빌겠어요!”
또 어제 오후 고백성사차 방문했던 분은 제 면역질환으로 피부에 뚜렷한 흔적을 보고 자기가 잘 아는 한방병원에 예약하고 모시고 가겠다 하니 그 사랑에 감동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일에 전력투구하다 생긴 면역질환이기에 “부끄러워할 상처”가 아닌 “영적전투의 훈장勳章”처럼 자부하니 당당한 느낌도 들고 주님께서 알아서 조처해 주시리라 믿는 마음도 있습니다.
정말 부끄러워할 것은 “죄짓는 일”이지 결코 “피부병의 흔적”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저런 깨달음이 남은 생애 더욱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주님께 파견받은 삶을 어떻게 충실히 살아낼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묵상중 떠오른 세항목입니다.
첫째, “회개하라!”
주님께 파견받은 이들에게 우선적 자질은 회개입니다. 회개은총입니다. 하느님안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복음 선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참된 회개뿐입니다. 파견에 앞서 제자들은 회개와 더불어 그 텅빈 자리에 주님은 더러운 영들의 대한 권능을 가득 넣어 주셨고,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무소유의 홀가분 차림으로 떠나니 이 또한 소유의 삶이 아닌 존재의 삶을 택한 회개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말그대로 이런 회개를 통한 자유는 복음 선포를 위한 자유이겠습니다.
어디에 가든 환대를 고맙게 받아들이되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말고, 제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미련없이 떠나라 합니다. 다만 주어진 선교사명에 최선을 다할뿐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는 그대로 참된 회개의 열매인 믿음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파견의 궁극 목표가 다음 대목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한 회개요, 회개의 선포와 더불어 많은 마귀는 쫓겨나고 많은 병자는 기름부음을 받아 병이 치유되니 영육의 치유와 건강에 회개가 단연코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매사 겪게 되는 힘든 일들을 회개의 계기로, 비움의 계기로, 겸손의 계기로, 즉 자아초월의 계기로 삼을 때 상처나 짐은 영적성장과 성숙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회개해야 삽니다. 죽을 때가지 끊임없는 회개요 회개의 여정에 결코 지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둘째, “순종하라!”
즉각적인, 지체없는 순종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삶은 지상명령의 순종입니다. 순종의 길을 통해 하느님께 갑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다면 자살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끝까지 살아내는 순종일 때 구원입니다. 순종의 사랑, 순종의 믿음, 순종의 인내, 순종의 겸손, 순종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 진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형제들간 상호순종도 물론입니다.
순종이야 말로 영적성숙의 잣대입니다. 공동체의 일치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억지로가 아닌 자발적 사랑의 순종입니다. 단번에 순종은 없습니다. 순종의 여정입니다. 순종의 여정을 살아가면서 날로 깊어 익어가는 순종입니다. 이런저런 크고 작은 순종에 충실할 때 마지막 거룩한 죽음의 순종입니다. 순종할 때 배웁니다. 순종하지 못하면 배우지도 못합니다.
순종의 훈련, 순종의 습관입니다. 봄철 배꼭지는 아무리 당겨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을 열매 익었을 때 잘 떨어지는 배꼭지처럼 사람도 영성이 잘 익어야 이런 자발적 지체없는 순종입니다. 참으로 눈밝은 주님은 정확히 아모스를 주목했고 때가 되었을 때 그를 불렀고 그는 지체없이 순종했음이 다음 그의 고백에서 잘 드러납니다.
“나는 예언자도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던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저는 초등학교 8년동안 교사생활하다가 주님께 붙잡혀 34세 늦깍기로 수도원에 들어왔고 올해로 수도생활 42년째입니다. 다시 산다 해도 이렇게 주님께 붙잡혀 올 것 같고, 또 이렇게 살 수 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셋째, “찬미하라!”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맛으로, 재미로 살아가는 여기 찬미의 수도자들입니다. 찬미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회개의 열매가, 순종의 열매가 찬미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의 찬미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매주간 월요일마다 바치는 찬미입니다. 그리스말 본문에는 3절에서 14절까지가 한 문장입니다. 그야말로 숨을 멈추지 않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내리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찬미에서는 자연히 하느님께서 거의 모든 동사의 주어로 등장합니다. 어느 한 대목도 생략하기가 아깝지만 전반부 만 인용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길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존재를 끊임없이 격상시키는, 날로 주님을 닮아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 우주와 인류의 구원이 망라된 참 웅대하고 아름다운 찬미가입니다. 이런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의 축복 선물은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 늘 함께 하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주님께 파견받은 우리들의 축복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회개의 삶에, 순종의 삶에, 찬미의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참행복의 비결입니다. 이런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선포도 없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축복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온누리에 미치는 찬미의 축복 선물입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85,11-12). 아멘.
김동우 바오로 신부(교구 사무처 차장)
하느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불러주셨음을 기억하는 연중 제15주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 부르심의 목적이 제2독서 에페소서에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거룩하고 흠없게 살아갈 수 있도록 불러주신 하느님께서 맡겨주시는 사명이 복음에서 전해집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마귀를 쫒아내고, 병을 고쳐 주었다.”
회개를 선포하고, 악을 쫓고, 병든 곳을 낫게 할 성령의 힘을 청하며 본기도를 다시 바쳐 드립니다.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진짜 꽃을 피워라.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분당성요한 본당 제1보좌)
우리가 정원에서 흔히 보는 수국은 인간의 기준에서 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개량한 종입니다. 원래의 수국을 살펴보면 가짜 꽃과 진짜 꽃이 있습니다.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한 크고 화려한 꽃이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작은 꽃’이 따로 있습니다. 작은 꽃은 우리 눈에 볼품없어 보이지만, 수국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작고 볼품없는 진짜 꽃에 있습니다(신혜우, 『식물학자의 노트』 참고).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외적인 어떠한 것도 지니지 말고 최소한의 조건으로 길을 나서라고 명령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어떠한 것도 복음의 가치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곧 예수님 말씀의 초점은 복음을 전하러 떠나는 제자들의 외적인 조건이라기보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복음 말고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얼마나 외적인 것에 휘둘리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복음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과 외적인 나의 ‘조건’에 집중할 때가 많습니다. 만약 나 자신이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에 희망을 두고 있다면, 남들보다 말을 잘하지 못해도 남들보다 재주가 없어도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로 충분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마음, 누군가에게는 볼품없고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장면을 몸소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잡한 생각, 불안한 마음을 잠시 내려두고 복음만으로 주님과 함께 기쁨의 한 주 보내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에페 1,12)
제대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김일권 요한 사도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여러분은 성당에 들어가면 무엇을 가장 먼저 보시나요? 제단의 넓은 벽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십자가를 보시나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현존을 나타내는 감실의 빨간 등불이나 아름답고 자비로운 어머니의 모습으로 조각된 성모 마리아상을 보시나요?
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소중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당 중앙에 위치한 ‘제대’(Altaris)입니다. 특히 제대를 가리키는 라틴어 ‘Altaris’는 ‘높다.’라는 뜻을 지녔는데, 그래서인지 제대는 신자석보다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자들의 눈에 잘 보이려는 목적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천국을 향하여 최대한 높이 올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대는 하느님께 경신례를 드리는 특별한 장소이고 성당의 가장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대는 성당에서 가장 중요할까요? 제대는 자기희생을 통해 구원 사업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가시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십자가’라는 제대에서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실 희생 제사를 기념하는 예식을 ‘만찬의 형식’으로 제정하시고, 우리에게 거룩한 식탁에 둘러앉아 그 만찬을 거행하게 하셨습니다. 제대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십니다. 그러므로 제대는 본질적으로 희생 제사가 이루어지는 제사상이자 파스카 만찬이 이루어지는 잔칫상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제대에서 그리스도의 표상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오래전부터 교회의 교부들은 “제대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참조: 제대 봉헌 예식, 3-4항).
또한, 제대는 축성 성유의 도유로 그리스도의 표상이 됩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뜻을 지닌 것처럼, 제대를 봉헌할 때 그리스도의 오상을 상징하는 제대의 정중앙과 각 모서리 등 다섯 곳에는 기름을 부어 성별합니다. 그러므로 “제대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표현은 합당하고 올바릅니다. 부활 감사송도 이것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몸을 바쳐 옛 제사를 완성하셨으며 저희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아버지께 맡기시어 사제요 제대이며 어린양이 되셨나이다(부활 감사송 5).” 신비체인 그리스도께서 ‘참제대’라면 그분의 지체이자 제자인 우리도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영적 제대”(제대 봉헌 예식, 2항)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대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기념하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게 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제대는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중세 최고의 교회학자, 성 보나벤투라(축일 7월 15일)
백형찬 라이문도(전 서울예술대 교수)
보나벤투라(1221~1274)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조반니 디 피단자’였으나 ‘보나벤투라’로 바꾸었습니다. 여기에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조반니가 어렸을 때 큰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안고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달려가 “아이가 살아나기만 하면 꼭 수도원에 보내겠습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 성인은 아이를 안고 기도하고 축복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성인은 너무 기뻐서 “오! 보나벤투라(기쁜 일이여)”라고 외쳤습니다. 그때부터 ‘보나벤투라’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자 어머니는 성인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열일곱 살에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갔습니다. 수련 기간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 세계 최고의 신학대학인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고는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파리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보나벤투라가 신학을 가르칠 때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보나벤투라는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철학, 신학, 과학 등 모든 학문에 대해 토론했고, 서로가 신앙적, 학문적 성장을 자극하고 독려했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에게 성체 찬미가를 작사하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 작품 중에 나은 것을 택하려 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열심히 작사하였고, 드디어 일을 끝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을 먼저 본 보나벤투라는 “토마스의 작품이 제 작품보다 훨씬 훌륭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작품을 찢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겸손했습니다. 후에 보나벤투라는 파격적으로 서른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프란치스코회 총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쓰고 수도회 회칙을 만들었습니다.
보나벤투라를 얘기할 때 꼭 기억할 것이 바로 ‘삼종기도’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삼종기도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성모님께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한 사실을 알려드린 것을 기념해 매일 아침, 낮, 저녁 세 번 드리는 기도입니다. 보나벤투라는 어렸을 때부터 성모님을 극히 공경했습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마다 수도원 부속 성당에서 성모 찬송 미사를 봉헌했고, 성당에서 저녁 종이 울릴 때마다 성모송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삼종기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그림이 있습니다. 멀리 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밀레의 ‘만종(晩鐘)’입니다. 겸손을 뜻하는 영어는 ‘humility’이며, 이 말의 어원은 ‘흙’입니다. 겸손은 흙처럼 되는 것입니다. 보나벤투라는 ‘흙같이 겸손한 성인’이었습니다.
다시 만난 주님
임미옥 마리아(의왕 본당)
제가 암 병동에서 근무한 지 8년째 되던 해 여름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큰아이가 ADHD 진단을 받았고, 제가 일하는 병동에서는 하루 이틀 간격으로 환자들이 돌아가셨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으며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이마에 항상 내 천(川)자를 그리고 다녔습니다.
살기 위해 숨 쉴 구멍을 찾았습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1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성당. 주보 뒷면 에서 ‘의왕 본당 청년회 여름 피정’이라는 안내를 보았습니다. 왠지 하느님의 초대장 같아 바로 신청했습니다. 청년의 나이는 아니었지만(훌쩍 넘었지만), 새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무언가에 미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충분히 미쳤었던, 잊지 못할 1박 2일을 보냈습니다.
주님과 휴가를 함께 보내면서 ‘아, 역시 주님께서는 살아계시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긴 냉담과 현실 속에서 제 아들과 환자들에게 지었던 죄를 눈물로 뱉어내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 주셨음에 감사드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직도 이 사진을 보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주님께로 돌아가 신앙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그리고 꾸준히 유지할 수 있게 큰 힘이 되어준 청년회와 본당 신부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요즘엔 왜 기적이 적게 일어날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는 능력을 받고 파견 받습니다.
병의 치유는 하느님만의 능력이고 거룩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치유의 기적을 좀처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그냥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먼저 하느님을 믿지 않더라도 세상에서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는 예를 살펴보며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한 중년 남성이 자전거를 탄 10대 소년이 차에 깔린 것을 보고는 얼른 달려가 차를 들어 올렸습니다. 소년은 극심한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아저씨, 조금만 더 높이요, 조금만 더 높이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중년 남성은 차를 20센티미터 이상 들어 올렸고 그 소년을 친 운전사가 소년을 빼냈습니다. 그는 “사고 현장을 보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어요. 그 소년에 제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거였죠.”라고 말했습니다. 중년 남성의 이름은 톰 보일이고, 이 일은 2006년 여름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은 뜻밖에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2005년 여름 영국 선더랜드에서 친구와 함께 캠핑하던 23세 카일라 스미스는 차를 나무에 들이박는 사고를 당해 차가 뒤집혔습니다. 신장 165센티미터의 가냘픈 스미스는 자신도 등뼈 두 마디가 부러지고 머리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지만, 자신과 함께 타고 있던 친구를 빼내기 위해 차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무조건 차를 들어 올리지 않으면 친구의 다리는 못 쓰게 되니까요. 그래서 제 팔을 운전석 창문으로 넣어 차 지붕을 밀어 올렸죠.”
스미스는 BBC 등 영국 언론에 나와 자신의 몸무게보다 20배가 더 나가는 무게를 들어 올릴 당시 자신은 차 무게에 관한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출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이런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할 때의 특징은 ‘사랑’은 있는데 더는 줄 것이 없는 상태라는 데 있습니다. 이를 ‘가난’, 혹은 ‘청빈’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이르셨습니다. 억지 가난이 아닌 다 내어주어 더는 가지지 못한 상태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당신 영이 활동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일이지만, 2017년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겠다며 후원금을 모은 뒤 수만 명으로부터 120억 원이 넘는 기부금을 모아 외제차를 사고 요트 파티를 하는 등 호화 생활을 즐기는 데 쓴 일당이 잡힌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들도 받은 돈 일부를 후원하기는 하였습니다. 사진은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알고 그들에게 기부할 사람이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병원에 갈 돈 정도는 줄 수 있으면서 그것은 아끼고 주님께 치유의 기도를 하면 들어주실까요? 하느님은 조롱당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교회에 기적이 없다면 아직은 교회가 신자들이나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이 남아있기 때문일 수 있겠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교황이 교황청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온 유럽 전역에서 걷은 돈들이 수레에 실려 교황청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자랑스럽게 “저것을 보아라. 이제 베드로가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사도 3,6)라고 하던 때는 지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도 “맞습니다. 교황님, 이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라고 하던 때도 지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페루 리마의 성 마르티노 수사는 흑인입니다. 수도회의 재정 사정이 나빠지자 그는 자기를 노예로 팔아 수도회의 재정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줄 때 빵이 무한정 늘어나는 기적도 일으켰습니다. 이런 분들의 시복·시성 조사 때 꼭 하는 게 기적 심사입니다. 성인의 생전에 일으킨 기적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뒤에 거룩함의 표징으로 일어나는 기적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은 곧 죽음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성인이 더는 줄 것이 없이 되었을 때 분명 그 성인을 통해 당신께서 더 내어주십니다. 이러한 표징들이 많아야 초대 교회처럼 다시 뜨거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단호하게
마음을 세우는
새날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덮은
먼지를
우리가
털어 버리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마음대로
되지않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순서대로
되지않는
우리의
일들입니다.
우리의 일들은
우리자신을
발견하는
뜻밖의
시간입니다.
먼지는 먼지를
만들어내고
은총은 은총을
만듭니다.
과거의 낡은
먼지를
내려놓습니다.
먼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먼지를
털어 버려야
새로운 내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워져야 할
행복의
시간입니다.
먼지만 있고
행복이 없다면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듯
기도로 다시
일어서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허점도
우리의 약점도
우리의 잘못도
은총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거룩한 주일
되십시오.
먼지를 알아야
빛을 볼 수 있는
우리들
신앙입니다.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 학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 이때를 놓치면 공부하고 싶어도 못 해. 대학교에 들어가서 실컷 놀고 지금은 열심히 공부할 때다.”
각종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향해 어른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합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좋아진단다.”
어떻습니까? 모두 맞는 말입니까?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다 거짓말 같습니다. 공부는 고등학교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하는 것이었고, 어른이 될수록 책임이 커져서 더 힘든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어른이 하는 말에 문제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어쩌면 세상 안에 거짓이 많아서 거짓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요?
시간이 지나면 잘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보다는 분명히 잘 되는 근거 있는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이 그 희망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이 지금에 더 충실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이라는 거짓된 희망이 아닌, 주님이라는 진짜 희망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명령을 하십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많은 것을 챙겨줘서 기쁜 소식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시니 이해하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제자가 아닙니까? 특히 악이 가득한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는 것이 불안하지 않으셨을까요?
세상의 것에 희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만 희망을 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의 것에 희망을 두고 세상의 것을 채우다 보면 주님의 자리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빈 마음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빈 마음이 있어야 그 자리에 주님께서 사랑으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희망을 두고 있을까요? 주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만이 희망 없는 세상 안에서 진짜 희망을 품고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꿈은 머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손으로 적고 발로 실천하는 것이다(존 고다드).
괴물이 되면 안 됩니다.
기원전 4세기에 활약하던 그리스 조각가 프락시텔레스는 어느 날 두 개의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정교하고 빼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이 중 하나를 감추고,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했습니다.
공개된 작품을 보고 “이곳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그 말대로 고쳤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하나도 흘려버리지 않고 모두 따르면서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조각상은 어떠했을까요? 처음에 만든 작품보다 더 뛰어난 작품이 되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괴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숨겨둔 조각상을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혼자 만든 것인데 이렇습니다. 그리고 이 괴물은 사람들의 말을 모두 듣고 만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모두 달라서, 제가 모든 사람에게 아름답게 칭찬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겠다고 고치다간 이렇게 괴물이 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 때로는 필요하겠지만, 전적으로 따르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괴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말씀만을 온전히 따르면서 자기 고유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도자로서 오랜 초기 양성기간을 마무리한 형제들, 이제 곧 사제품을 받고 본격적인 사목 일선에 투입될 형제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기에, 다양한 어려움이 곳곳에 산재한 십자가 길이기에, 선배로서 이런 저런 충고를 하다 보니 말이 자꾸만 길어지더군요.
“잘 아시는 바처럼 사제품은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여러분은 신입사원도 아니고 수습사원인 셈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궂은일을 하는데 주저하지 말길 바랍니다. 만나게 될 신자들과 청소년들, 함께 일하는 직원들 앞에서 한결같은 겸손의 자세를 유지해 주십시오. ‘내가 신부인데! 내가 원장인데!’하는 말은 절대 금지입니다. 무엇보다도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평생 가난한 사제로 살아주십시오. 소임이동 때는 여행용 가방 두개면 충분합니다. 양손에 가방 두개 달랑 들고 고속버스 타고 이동해주시면 그 자체만으로 사제로서 성공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저처럼 훈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 용 짐을 이런 식으로 꾸리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규범’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말씀 가운데 유독 다음의 말씀이 가슴이 꽂힙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갖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을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코 복음 6장 8~9절)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 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의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당부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사목자들이 좀 더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 신앙의 본질과 핵심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 비본질적이고 지엽적인 것들에 몰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제 개인적 생각인데, 아무래도 우리가 행하는 제반 사목에 대한 지속적인 회개의 결핍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사목자로 서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반성이 요구됩니다. 거듭되는 사목적 회개가 필요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은혜로운 사목적 회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도회 입회 전, 중고등부 교리교사를 할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부족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일종의 천국 체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위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별로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자연스레 교리교사로서의 사명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수도회 입회 후에도 비슷한 체험이 계속되었습니다. 상처 입은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틈만 나면 티격태격했지만, 그 와중에 아이들로부터 혈육 이상의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맛본 이후 사목자로서의 대대적인 회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니 그걸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힘들지만 아이들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돈이며, 좋은 차며, 메이커 옷도 다 필요 없었습니다. 어디 외출 나가도 머릿속은 늘 아이들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의 행복, 아이들의 구원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자연스레 나 자신을 위한 투자는 줄어들었습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청빈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우리가 부차적인 것들, 외적인 것들,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그리도 관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사목적 회개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사목 대상자들, 양떼들로부터 진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들이 나를 너무 사랑하고 존경해서 틈만 나면 나를 찾고, 내 소매를 붙들고 늘어진다면, 그 사랑 체험을 한 이후 어찌 그들에게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닌 말씀의 칼날을 날카롭게 유지 하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왜일까요? 혼자 다니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충실할 수 있을 텐데 둘이 다니면 계속 상대를 신경 써야 하는데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근본이 먼저 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사랑실천에 있음을 보여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본당 신부와 보좌 신부, 본당 신부와 수녀님들, 혹은 수녀님들 간에 화목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그분들이 어떤 복음을 신자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요?
먼저 복음을 전하는 이들 안에서 사랑이 실천되어 화목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 내용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주님이 계심을 믿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것이 ‘가난’입니다. 예수님은 빵과 돈과 여벌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먹고 자고 입을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충분히 있어야 신경을 쓰지 않게 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가질수록 더 신경 쓰게 되어있습니다. 그냥 주님의 섭리에 맡기면 됩니다.
저도 돈이 필요할 때면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돈을 줄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욕심이 생기면 사람의 영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익을 챙길 도구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큰 장애가 됩니다.
만약 어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지나치게 막 대하다고 가정해봅시다. 시어머니는 자신처럼 부잣집에 자기 아들처럼 대단한 사람에게 며느리가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서입니다. 이렇게 돈을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이 공동체에 있다면 그것 때문에 공동체가 갈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오는 사람도 그러한 시선으로 보기에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이가 이런 시어머니와 같이 되면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중국 고대 전국시대 문혜왕(文惠王)을 위하여 당시 최고의 백정인 포정(庖丁)이란 사람이 소를 잡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의 손이 닿는 곳이나 어깨를 기대는 곳이나 발로 밟는 곳이나 무릎으로 누르는 곳은 푸덕푸덕 살과 뼈가 떨어졌습니다. 칼이 지나갈 때마다 설겅설겅 소리가 나는데 모두가 음률에 들어맞았습니다. 그의 동작은 상림(桑林:탕 임금이 만든 춤)의 춤과 같았으며, 그 절도는 경수(經首:요임금이 만든 음악)의 절주(節奏:가락이 반복될 때의 그 규칙적인 음의 흐름)에 들어맞았습니다.
문혜왕이 보고 말하였습니다.
“아아, 훌륭하도다. 재주가 이런 지경에 이를 수가 있을까?”
백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로서 재주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았을 적에는 보이는 것 모두가 소였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는 완전한 소가 보이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은 멈춰 버리고 정신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천연(天然:사람이 힘을 가하지 않은 상태)의 조리를 따라서 큰 틈을 쪼개고 큰 구멍을 따라 칼을 찌릅니다. 소의 본래 구조에 따라 칼을 쓰므로 힘줄이나 질긴 근육에 부닥뜨리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에야 부딪치겠습니까?
훌륭한 백정은 일 년마다 칼을 바꾸는데 살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백정들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19년이 되었으며, 그사이 잡은 소는 수천 마리나 됩니다. 그러나 칼날은 숫돌에 새로 갈아 내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엔 틈이 있는데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넣기 때문에 휑하니 칼날을 움직이는데 언제나 반드시 여유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19년이 지나도 칼날은 새로 숫돌에 갈아 내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뼈와 살이 엉긴 곳을 만날 때마다 저도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조심조심 경계하면서 눈은 그곳을 주목하고 동작을 늦추며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면 뼈와 살이 후드득 떨어져 흙이 땅 위에 쏟아지듯 쌓입니다. 그러면 칼을 들고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기분에 잠깁니다. 그러고는 칼을 닦아 잘 지킵니다.”
문혜왕이 말하였습니다.
“훌륭하도다. 나는 백정의 말을 듣고서 삶을 기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이 이야기는 『장자』의 '양생주(養生主)'편에 나오는데 포정이 소를 잡는다는 뜻으로 ‘포정해우’(庖丁解牛)라 합니다.
장자가 말하는 ‘도’(道)’란 우리가 말하는 ‘진리’와 같습니다. 진리를 터득한 포정은 다른 백정들과는 달리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정신으로 봅니다. 진리를 터득한 사람은 소를 돈으로 보지 않고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분해한다는 뜻입니다. 무아의 경지에서만 소의 본질을 보고 그것을 분해하는 데에서 춤추듯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도 병자가 잘 낫지 않고 악령을 쫓아내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어쩌면 우리 진리의 칼이 무뎌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내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의 관계가 좋은지 살펴야 합니다.
좋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서로 사랑한다면, 그다음은 ‘가난’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가 세상 것을 바라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시선이 소에게 빼앗겨 힘줄을 건드리고 뼈를 건드려 칼날이 무뎌집니다.
우리도 포정이 소를 육신의 눈이 아닌 정신으로 대하되 이치에 따라 조금도 억지가 없이 춤추듯 칼을 놀리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 대해 스스로 욕구를 버리고 대상에 대한 의식이 없이 자연의 섭리를 따라 행동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욕구에 사로잡히면 자연의 이치를 보는 눈을 잃어 성령의 칼날도 무뎌지고 그러면 복음을 전할 힘을 잃습니다. 백정이 무딘 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말씀의 칼날이 무뎌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사랑의 가족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 자신부터 세속의 욕망을 없애 공동체와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무언가 세속적인 것을 바라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마천과 우장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마천은 중국의 사관입니다. 사마천은 ‘기전체(紀傳體)’라는 양식의 기록을 남겼고, 후대의 사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기전체는 인물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사마천의 기록을 통해서 중국 고대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진시황제의 이야기, 황우와 유방의 이야기를 사마천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삼국유사, 고려사는 사마천의 기전체 양식을 따른 우리의 역사서입니다. 사마천이 역사에 남을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사형을 모면하는 대신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포기하는 궁형을 감수했기 때문입니다.
우장춘 박사는 세계적인 육종 학자였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하였고, 일본인 아내와 자녀를 낳아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1950년 대한민국은 가난하였습니다. 농사를 지을 씨앗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모든 씨앗을 일본을 통해서 얻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의 농림부 장관은 우장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한국에 와서 일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195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한민국의 농업발전을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 제주도에서는 감귤을 재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강원도에서는 씨감자를 재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배추를 재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우장춘 박사가 한국의 농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에서의 풍족한 삶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포기’의 또 다른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마천이 명예로운 죽음을 포기하고 궁형이라는 수치스러운 삶을 선택한 것은 후대에 남을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장춘 박사가 일본에서의 풍족한 삶을 포기하고 신생 대한민국에서 고된 삶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 나라에 대한 헌신이라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18년 교구청에서 성소국장으로 5년을 지내고 떠났습니다. 특수사목을 5년 동안 했었기 때문에 본당사목을 원하면 주교님께서는 본당사제로 보내 주셨을 것입니다. 저는 주교님께 본당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청을 받아 주셨고,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로 갈 수 있는지 제안하셨습니다. 저는 주교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2019년 8월 21일 미국으로 왔습니다. 어느덧 2년이 되었습니다. 사마천이나 우장춘 박사처럼 특별한 사명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의 포기를 후회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사명감’을 이야기합니다. 사명감은 목적지와 같습니다. 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비록 힘들어도, 고난이 닥쳐도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내딛습니다. 1시간만 더 걸으면 시원한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참을 수 있습니다. 곧 더위와 갈증을 피할 수 있는 물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아모스는 그저 가축을 키우는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가축을 키우는 목자의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빵도, 전대의 돈도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발은 신지만 옷도 두벌은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여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성공, 명예,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박해와 고난이 있었고, 목숨을 바쳤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포기한 것이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포기도, 선택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대 있음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대 있음에 두렵지 않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희뿌연 척박한 삶을 지탱해줄
돈 명예 지위 온갖 보호막조차
미련 없이 아낌없이 내던지고
오직 주님만 품에 모시고 걸어야 할
파견 받은 이의 고단한 여정에
볼 수 없는 주님께서 짝지어주신
보이는 그대가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 있음에 외롭지 않습니다.
어두운 세상의 거대한 거센 흐름을 거슬러
생명 사랑 정의 평화의 복음을
당당하게 선포해야 하는 힘겨움에
뭇사람 핑계 삼아 주저앉고 싶을 때
묵묵히 굳게 잡은 손 놓지 않으며
한 발 앞서 거친 물결 가르는
든든한 그대가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 있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더불어 사는 소박한 삶을 비웃는
잘난 이들의 비난과 배척에 움츠려들고
착취와 억압 죽음 같은 경쟁으로
배불리는 이들의 더러운 유혹에 솔깃할 때
주님 주신 가난으로 세상 풍요를 이기고
자신을 죽임으로써 벗들을 살림으로써
십자가 신비를 온 삶으로 드러내는
굳건한 그대가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 있음에 내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두려움 없이 외로움 없이 흔들림 없이
주님께서 보내시는 곳 그 어디이든
한 발 한 발 힘차게 내딛듯이
나 있음에 그대 역시
그러할 수 있기를.
그대와 나
삶의 시작과 마침은 다를지라도
그대와 내가 함께 하는 벅찬 여정을 마치고
곱게 짝지어 우리를 파견하신 주님의 품에서
우리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기를.
선교를 떠날 때 필요한 것
키엣 대주교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에 꼭 필요한 것만 지니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멀리가면 갈수록 짐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데 모든 것을 버리고 가라고 하시니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꼭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예수님과의 친밀한 유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생활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동안 스승님을 이해하고, 스승님과 하나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스승님과 하나되는 친밀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먼 길을 떠나는 주님의 제자들이 꼭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친밀함을 지니고 떠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하나되는 친밀함이야말로 성공리에 선교를 마칠 수 있는 원천입니다.
선교를 떠날 때는 주님께 의탁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
돈과 물질은 한 순간의 달콤한 안락과 성공을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성공이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만든 것이라는 착각과 오만, 자만심을 갖게 하여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중요하고, 주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이 나에게 실현되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빈곤은 자신의 부족함과 무력함을 깨닫게하여 주님께 의탁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성공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의지할 때만이 영원하고 변치 않는 성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의탁하는 마음은 선교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버리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믿음만 갖고 떠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선교는 혼자가 아니라 연대감속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두 명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나약한 인간이기에 서로 도와주며 소명을 완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말은 한 명보다는 두 명, 두 명보다는 세명의 일치된 말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치된 여러 사람의 증언을 더 신뢰합니다.
선교는 자비로운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여유롭고 풍족한 사람들이 아닌 가난하고 장애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된 불우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나약한 형제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에 더욱 주님과 같은 자비로운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선교의 소명을 받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세례와 견진 성사를 통하여 당신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선교의 열매를 거두려면 주님과 함께,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형제자매와 연대감을 이루고, 자비로운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이 이웃과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이 모든 사람과 불화가 없는 연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도직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주님께 받은 소명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2. 주님이 말씀하신는 선교를 떠날 때 필요한 것들을 나는 얼마나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3. 이웃에게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 6, 7-13(연중 15 주일)
우리는 모두 각자 사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사명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그것은 신원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원에 대한 각성이 자신의 사명을 충실하게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파견 받은 이”라는 신원에서 주어집니다.
<제1 독서>에서 아모스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파견 받음에서,
<제2 독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아버지로부터 파견 받음에서,
그리고 <복음>에서 열두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음에서 그 사명이 주어집니다.
오늘 <제1독서>는 남 유다의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 와서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자, 사제 아마츠야가 그를 위협하며 쫓아내는 장면입니다. 왕실 사제인 아마츠야가 자신을 반대하는 아모스를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은 자신의 신원과 권한이 침해당하고 위협당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득권을 놓을 수 없어, 일종의 제도권의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처럼, 말씀의 선포는 아프게 찌르기에 때로는 받아들여 지지 못하고, 주변부로 내쳐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역사 속에는 흔히 말하는 말씀의 유배 시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내쳐졌고,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성문 밖에서 매달리어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소아시아의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옥중서한의 서두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시어 그분의 피를 통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고, 이 사명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성령을 파견하셨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과,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제자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 마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아모스를 붙잡으셨듯이,
<제2독서>에서 우리를 창조 이전에 이미 선택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 7).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 파견 받은 자에게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곧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가지지 말며,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마르 6, 8 참조)고 제시하십니다.
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여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성경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너무도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기만 하면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인 이 지팡이, 그것은 곧 “말씀의 지팡이”입니다.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요, 쌍날칼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하느님의 권능인 이 말씀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가?
그래서 말씀의 권능에 위탁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파견 받은 이들이 한 일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마르 6,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 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을 하여야 함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권능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파견 받은 자임을 돌이켜보고, 내가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셔서 배척 받으시던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 6,1-6)
그리고 이어서 스승이신 주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을 쫒아내는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세상의 판단으로는 따르지 못하는 주문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하십니다. 빵도 여행보따리도, 돈도, 신발은 신은 것만 그리고 옷도 껴입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또 다른 조건은 뭐라고 하셔요?
처음에 머물던 집에서 떠날 때까지 계속 머물라.’고 하십니다.
정리해보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 ‘여행에 필요한 어떤 것도 가지고 지니지 말고 떠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이 표현이 맞을지 모르지만 ‘현지조달’이라고 할까요?
머무는 곳에서 주는 음식을 먹고 한 장소에서 머물다가 떠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다시 이르십니다. 푸대접하는 곳도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는 곳마다 복음선포가 환영받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주님께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신 것이 제자들에게 이뤄졌고 스승께서는 결국 동포이며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시고 당신 생명을 바치시며 복음 선포의 산 증인이 되신 것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마르12,10, 1베드2,7, 시편118,22-23)라는 예언 말씀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둘씩 짝지어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유대교의 오래된 관습을 따르신 것이고 또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왜 주님께서는 세상의 판단과는 다르게 ‘여행에 필요한 가방, 빵, 돈도, 여벌의 신발이나 옷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복음선포의 소명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나머지는 인간에게 무시할 수 없는 소유욕과 연결되고 그것이 복음선포 여행에 걸림돌을 주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복음선포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물질 뿐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 뿐 아니라 한 집 머물면서 인간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대접조건에 억매이지 말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궁극적으로 구원은 인간이나 인간에게 속한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전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려 주시려는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북부 이스라엘 베텔에서 활동하는 예언자 아마츠야가 텃세를 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아마츠야에게 문전박대의 말을 듣습니다. 아모스는 그에게 고백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아모 7,14-15)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에 와서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하게된 그 배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라는 당시 이스라엘의 종래의 사고를 뒤바꾸어 놓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보통 드러나지만 아모스의 경우에는 하느님께서는 조용히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용적이고 거짓 예언자는 그 사실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파견의 마무리 말씀을 하십니다.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그들이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제자들 탓이 아니고 주님까지도 거부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곳을 떠나는 상징의 행동은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행동이지만 그것은 구원을 받아들이느냐? 않느냐?는 종말에 그 결과가 드러나는데 것이지요.
스승이신 주님께서는 복음선포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이 복음선포의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세상 끝까지 나가서 복음선포의 선교여행을 하는 것보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서 가정을 중심으로 먼저 복음을 읽고 기도를 통하여 그 가르침이 우리의 내면에 자리잡도록 해야합니다. 사도들의 교회의 가르침 대로 우리는 가정을 통하여 복음선포의 사명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세상으로 다니며 복음선포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 가정에서부터 복음선포를 이행해야 하지요.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 일터, 공동체는 항상 복음선포의 조건이 맞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힘들게 합니다.
우리는 수 없이 바꿀 수 없는 조건들에 둘러 싸여 살고 있습니다.
성격이 맞지 않은 부부의 갈등, 잘 자라다가도 걸림돌이 되는 자녀들, 돌보아 주어야 하는 부모들, 직장에서의 갈등. 어느 것 하나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때로는 그 속에서 자신이 무기력해지는 실망과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난리북새통에서 내 몸도 하나 주체하지 못할 때에 복음선포의 소명은 우리를 버겁게 합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아마츠야의 텃새와 멸시 속에서도 예언직을 수행한 아모스는 우리의 표양이 됩니다. 반대를 받으시고 결국 버림을 받으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주십니다.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들려주는 서간의 말씀이 또한 우리의 발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를 갖고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공동체에서 복음선포의 증인으로 나설 수 있게 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12절)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또한 ‘농민주일’이기도 합니다. 농업이 나라의 주 생활수단이었던 것이 이제는 여러 가지 업으로 바뀌면서 농업의 가치도 줄어들고 점점 이농의 현상도 도시화에 밀려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 농업이 여러 가지 방향으로 연구되고 발전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바람직한 농업에 우리나라의 생존이 걸려 있습니다. 농민들이 제대로 대접받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가 힘이 되고 기도의 주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본주의 이익추구라는 범주에서 농업을 뒷전으로 밀어 넣는다면 이 나라는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농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농민주일을 하나의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농업이 이 나라의 안보와 생존을 지키는 중요한 것임을 우리 스스로 깨닫고 이 땅을 지키는 것과 함께 농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나라 정책이 되도록 우리는 뜻을 모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주일 미사의 말씀은 부르심과 파견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어 파견하십니다. 부르심과 파견은 온전히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누군가를 어떤 이유로, 또 어떤 목적으로 부르시고 파견하시는지는 오직 주님만 아십니다. 부르심을 받아 파견된 이는 진지한 기도와 성찰을 통해 그 이유와 목적을 더듬어 찾아나갈 뿐입니다. 그 과정이 곧 자신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알아나가는 여정이 될 겁니다.
제1독서는 아모스 예언자의 소명을 다룹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아모 7,14-15)
자신을 못마땅해하고 경계하는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의 위협에 아모스 예언자가 꾸밈없이 답합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입니다. 남 유다 출신 목자요 농부인 아모스가 스스로 어떤 의도를 품고 북 왕국까지 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한 게 아니지요, 그는 그저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을 따름입니다. 아모스는 주님의 깊은 뜻을 다 알지 못해도 순명함으로써 소명을 완수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선택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
한 사람의 부르심과 파견은 이미 태초부터 시작된 여정입니다. 세상은 사람을 뽑을 때 배경이나 전문성, 기술이나 신분을 따지지만 주님은 가능성을 보십니다. 그 가능성은 당신께서 태초에 그를 창조하실 때 그에게 심어주신 것입니다.
한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 저마다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정을 거쳐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 순간까지 이 부르심은 차츰 선명해지고, 이윽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완성의 상태를 향해 갑니다. 이 완성은 자기 혼자서 끌어갈 수 없고, 가족과 이웃, 공동체가 함께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함께 파견하십니다. 짝을 지워 주십니다. 때로는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직관과 영감에 의해 끌어주고 협력하며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겁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2-13)
파견된 이는 파견하신 분의 일을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파견을 받은 제자가 어부였건 세리였건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게 됩니다. 그들의 말과 손을 통해 일어나는 기적만이 기적이 아니라, 그들의 변화부터가 기적인 셈입니다. 회개를 선포하고 구마와 치유를 베푸는 일은 예수님의 일이 동시에 예수님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해 주소서."(복음 환호송)
이 말씀이 바로 무지한 우리가 일생동안 바쳐야 할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저마다 고유한 부르심을 받아 파견되었지요. 꼭 수도자와 성직자, 선교사가 아니어도 우리는 가정과 공동체,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이 세상에 파견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당장은 내가 왜 이곳으로, 이들과 이 환경 가운데로 불리우고 파견되었는지 주님의 뜻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모든 게 모호하고 희미한 가운데 인내하며 나아가야 하는 시간이 꽤 길어질 수도 있고요. 때로는 지금의 모습이 잘못된 만남과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처럼 느껴져 후회되고 슬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태초에 우리를 선택하셔서 당신의 꿈과 바람을 우리 존재 안에 심어 주신 주님의 계획을 믿고, 주님의 그런 기대가 차츰차츰 내 존재 안에서 완성되어 가리라고 희망해야 합니다. 당장의 결실과 성취가 없을지라도 우리 모두는 불리우고 파견된 자리에서 미소하나마 주님의 일을 하는 중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각자 파견된 자리에서 주님의 일, 곧 사랑을 이루어가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제자들의 소유와 나의 소유
한영기 바오로 신부님(성 라자로 마을 원장)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주님께로부터 예언자로 부름받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아모 7,14-15).
신약에서도, 사도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름에 순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지팡이 외에는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며, 필요한 것이면 족하고 항상 동행해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제가 보좌신부일 때 뵈었던 신부님을 잊지 못합니다.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마치고 귀국하신 신부님께서는 양손에 가방 두 개만 가지고 새로운 임지로 부임하셨습니다. 평상시에도 늘 사제 복장을 하시고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시며, 혹여나 당신이 선물을 받게 되면 보좌신부인 저와 교우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셨습니다. 신부님과 저의 영명축일이 같은 날이었는데, 한사코 거부하시는 중에도 받게 된 선물을 모두 저에게 주시며,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을 뵐 때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제 사제관을 둘러봅니다.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없는 게 없습니다. 아니, 차고 넘칩니다. 제가 그토록 존경하는 신부님이 귀국하실 때는 양손에 들린 가방 두 개가 전부였는데, 제가 미국에서 귀국할 때는 국제화물 이사를 할 정도였습니다. 이삿짐을 실은 차량이 인천항에서 출발하여 성 라자로 마을로 들어오는데, 제 사제관으로 올라오는 길에 있는 우리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의 가지를 차량이 치고 지나가지 않도록 제가 열심히 수신호를 하며 트럭 기사에게 주의를 주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 엄청난 이사 차량에 열심히 수신호를 보내며 ‘물건 조심히 다루어 주세요.’ 하고 소리치던 저의 모습을 보시던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말씀에 순명한 제1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와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 복음에서의 파견된 제자들과 보좌신부 때 뵈었던 그 존경스러운 신부님을 축복하시던 주님께서, 오늘 복음 속 한 장면처럼 당신 ‘발밑 먼지를 털어 버리시며’(마르 6,11) 저를 떠나시지 않으실까 너무나 부끄럽고 두렵기만 합니다.
기도 중의 기도, 기도의 진수(眞髓), ‘주님의 기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힘겨워하던 제자들과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손수 지어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기도이므로, 모든 기도의 기초요, 으뜸이 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의 기도 관습은 인근 이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길고 장황하고 요란했습니다. 그들이 바치는 기도에는 진심, 진정성,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유다인들의 기도를 보신 예수님께서 기도 중의 기도, 기도의 진수(眞髓), 당신 가르침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주님의 기도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짧은 기도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가르침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너무 자주 바치다보니 습관화되어, 이 기도가 지닌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무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여유를 갖고, 그 맛을 음미하면서,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무엇보다도 지극한 존경심으로 바쳐야 합니다. 또한, 기도의 한 구절 한 구절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바치면 좋겠습니다. 많이도 말고 30분 정도만 시간을 내어, 구절마다 멈추고 머물면서, 기도의 내용과 자신의 삶이 잘 부합하는지 성찰하며, 묵상해보실 것을 권장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이 작고 미천한 제가 거룩한 당신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허락하신 하느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세세대대 길이 찬미 찬양받으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버지, 지난 삶을 돌아보니 부끄럽게도 언제나 제 뜻만을 추구하고, 제 뜻만을 관철시키기 위해 발버둥 쳐 왔습니다. 이제 남은 날들은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의 뜻을 찾고, 아버지의 고귀한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아버지, 오늘 주신 양식은 저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저희에게 주신 것이니, 앞으로는 혼자서만 독식(獨食)하지 않고, 어려운 이웃들과 적극적으로 나누고 공유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용서만이 제가 살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밥 먹듯이 이웃을 용서하겠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예수님 추종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 돈이 최고 가치라는 유혹, 아버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유혹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부탁
이윤정 요안나(비폭력대화 국제 공인 트레이너)
40대 가장인 베드로 씨는 퇴근하여 주차장에 도착하면 집으로 들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매일 밤 어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식사는 하셨어요? 오늘도 밭에 다녀오신 거예요? 애들이요? 큰아이가 오늘 상을 받았대요. 어머니, 그럼 편히 주무세요! 내일 또 전화할게요.” 내용은 늘 비슷하지만, 결혼한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15년 동안 이어진 매일 밤의 통화. 그것이 베드로 씨에게는 하루의 마감이자 감사 의식이었음을 이제야 알아차렸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전히 허전하고, 어머니가 그립거든요. 베드로 씨는 어머니를 떠올리면 아랫목에 묻어두었다가 따끈한 채로 꺼내 주시는 주발에 가득 담긴 밥이 생각납니다. 언제 들어가든, 먹든 안 먹든 상관없이 밥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밥으로 이어지면서, 귀가한 베드로 씨는 괜스레 아내에게 “내 밥 있어?”라고 퉁명스럽게 묻습니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내뱉는 말인데, 아내는 그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집에서 먹겠다는 전화도 없이 와서 왜 밥을 찾아요? 먹고 들어오는지 알고 애들하고 배달음식 먹고 치웠는데! 당신도 시켜 먹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베드로 씨는 “됐어! 안 먹어!” 하며 버럭 화를 냅니다.
최근에 화난 일을 찾아보라는 질문에 이 사례를 말한 베드로 씨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아내에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허전한 마음을 표현하고, 밥이 남더라도 당분간 저녁밥을 준비해 달라는 부탁을 하면 어떻겠냐고요. 이에 베드로 씨는 말했습니다. “그게 가족이에요? 보면 몰라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뭘 그런 걸 다 부탁을 합니까?”
‘가까운 사이라면 말을 안 해도 알아서 해주어야 한다.’라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내 상태나 마음이 어떠한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표현을 해야 상대는 나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부탁하는 것을 치사하게 생각하거나 자존심이 상한다며 안 하는 경우가 많은데, 구체적이고 명료한 부탁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육아에 지친 아내는 베드로 씨의 마음을 헤아릴 겨를이 없을 수 있습니다. 아내와 소통이 필요합니다. 베드로 씨는 어머니를 애도하고 마음에서도 보내드릴 시간이 필요하고, 그 허전함을 메꿀 돌봄을 원하는 것입니다. 돌봄을 충족하는 수단은 저녁밥이고요. 그래서 “내 저녁밥을 준비해 줄 수 있겠냐?”라는 부탁이 필요합니다. 아내에게도 남편의 정서가 중요하고 남편을 돌볼 마음이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하지 않으면 아내의 귀한 마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부탁을 하는 것은, 상대에게 기여할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부탁해보세요. 기쁨으로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당신은 부탁하는 용기 덕에 더욱 행복해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공간
강신성 요한(소소돌방 대표)
저는 사람 만나는 일이 힘이 듭니다. 주식도 모르고 땅도 모르고 드라마도 안 보고 게임도 안 하고 술도 마시지 않고 여행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과 만나 즐겁게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즐거운 모임이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참 재미없게 산다.” 하고 말합니다. 언뜻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사람들 관점이지, 제 관점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참 재미없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눈 뜨는 순간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길가의 나무들이 말을 걸어주는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 같고, 화선지와 여백을 두고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일도 없는 것 같고, 밥알들이 자신의 생명을 전해주는 소리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매달려 사탕을 사달라고 조르는 일은 더더욱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은 정말 심심하게 삽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과는 담을 쌓고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만 대화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타깝게 보입니다.
언젠가 지인이 제게 물었던 말이 생각납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이유가 뭘까?” 그때 저는 “사람들이 괴롭히니까 피해서 간 거겠지.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잖아.”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달마스님이 중국으로 가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은 9년 동안 벽만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스님은 동쪽인 중국으로 가기 전부터 이미 인도에서 유명했었습니다. 그런 스님이 무언가를 더 깨닫기 위해서 9년이나 벽만 바라보며 수행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달마스님은 9년 동안 수행을 한 것이 아니라, 이전의 수행으로 만나게 된 ‘하느님’과 함께 9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실 때 당신을 닮은 온갖 것들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손길이 따스하고 수줍음이 많은 해님,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말이 많은 수다쟁이 달님, 한시도 멈추지 않고 노래하는 바람,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배려 깊은 나무들…. 그들은 하느님을 닮았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같이 있자고, 같이 놀자고.
사람들은 매일 매 순간을 열심히 살지만, 그 삶이 공허한 이유가, 그 안에 하느님의 공간이 없기 때문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쁠까요?
이원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LAB2050 대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질에 대해 연구하던 중,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의 출퇴근 시간이 늘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도로가 깔렸습니다. 지하철도 생기고 광역버스도 늘어나고 광역철도까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용차도 더 많아지고 빨라졌습니다. 모두가 사람들의 이동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더 빨리 편하게 이동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더 여유 있게 지내며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기대를 갖고, 큰돈을 들여 만든 교통시설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나 뚜껑을 열고 보니,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더 멀리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수백억 원, 수조 원을 들여 만든 시설들이, 우리에게 시간 여유를 선사하기는커녕, 시간에 더 쫓기도록 만든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도시로 몰려듭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 모두가 그렇습니다. 미국만 해도, 200년 전에는 대부분 농사를 지었습니다. 인구 백 명 중 네 명만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백 명 중 팔십 명이 도시에 삽니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농업 국가이던 중국은 인구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앞으로 20년 동안 신도시 300개를 건설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도시의 삶은 속도가 빠릅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도시 규모가 두 배로 커지면, 삶의 속도는 2.3배쯤 빨라진다고 합니다. 사업체는 더 빨리 생겨나고 빨리 문을 닫습니다. 기술도 빨리 발전합니다. 심지어 사람이 걷는 속도마저 빨라진다고 합니다.
역동적이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기는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니 당연히 피곤하며, 에너지를 더 많이 사용하고 쓰레기도 그만큼 더 많이 배출합니다. 집값은 오르고 경쟁은 치열해집니다. 그러다 보니 생활 수준 격차는 커집니다. 그럼에도 어려운 이웃을 돌아볼 여유는 점점 사라져갑니다.
우리 삶의 터전인 도시의 속도를 조금만 늦출 수는 없을까요?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는지, 질문하고 사색하며 대화할 여유 정도는 남겨둘 수 없을까요?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을 파견하며 말씀하십니다. ‘지팡이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요. 가끔은 속도를 늦추고 욕심을 내려놓은 채, 물질을 따르느라 사람을 놓친 일은 없는지 묵상하며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5주일>(2021. 7. 11.)(마르 6,7-13)
“...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이 약속은 승천 후에도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이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 전에도 항상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때가 가끔 있었지만, 그런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언제나 항상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도 제자들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함께 가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파견된 제자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에, 결코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수호천사’를 보내 주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은 선교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의 상황에도 해당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탈출 23,20).”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11).”
우리는 수호천사의 존재를 믿고 있고, 수호천사가 언제나 항상 우리를 지켜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또는 수호천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힘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에 세속의 물질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것이고, 예수님의 보호를, 또는 수호천사의 보호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사람은 복음을 선포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당신만 믿고 의지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사람은 ‘복음만’ 가지고 가면 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만 믿으면 됩니다.(이 말은 신앙생활 전반에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여행인데, 이 여행은 예수님과 함께 가는 여행이고, 예수님만 믿으면서 가는 여행입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생활비와 활동비는 필요하지 않은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을 언제나 어디서나 믿어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 6,31-32).”
(이 말씀에서 ‘다른 민족들’이라는 말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생활비와 활동비를 걱정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러 떠나는 제자들이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빈손’으로 가는 것은, ‘능동적인 버림’입니다. 가져갈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예수님의 보호만’ 선택하고, 다른 것은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능동적인 버림’은 곧 ‘능동적인 응답’입니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1).”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일은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그리고 자신들이 원해서 능동적으로 한 일입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전히 복음 선포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모두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그렇게 사는 것은 당연하고 옳은 일이지만, 세속 생활과 신앙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일반 신자들은 ‘빈손’으로 살 수 없다. ‘빈손으로 떠나라.’ 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확대 적용하면 안 된다.” 라고 말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신앙인이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전부 다 수도자가 될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각 개인에게 주어진 ‘부르심’이 다르고, ‘탈렌트’가 다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면 안 된다.”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태 6,24) 모든 신앙인이 지켜야 하는 계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혼자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하느님은 우리 목숨의 주인이십니다. 목숨도 나의 것이 아니니, 재물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 모두는 어쩌면, 세상에 나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까?’ 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신앙을 접하면서부터, ‘어떻게 하면서 살아갈까?’ 하는 삶의 의미와 질도 찾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성 바오로는 한 편의 시와도 같은 찬미기도문을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냅니다. 이 기도문은 예수님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친히 보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의 마음을 꽉 채워줍니다. 이 기도문에서 사도 성 바오로는 우선 우리 인간을 창조하고 먹여 주고 돌봐 주고 계신 아버지 하느님께 찬미를 올려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에페 1,3ㄱ) 이어서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깊이와 혜택을 기억하며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3ㄴ) 하느님께서는 지금은 현세를 살면서 죄악에 물들어 허물이 많아진 우리를 애초에 선택하셔서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4절)
이는 온전히 아버지 하느님의 용서하시고 감싸주시는 무한한 사랑의 덕분입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5절)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찬미를 드리는 이유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이,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감당하기에 벅찬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6절)
우리가 주 예수님에게서 받은 은총은 바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마저 내어주신 구원의 은총이며, 그 은총으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다시 아버지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7절) 이 은총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려고 하실 때 이미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안배하신 구원의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8절ㄱ)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큰 은총을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는 신비를 우리에게 보낸 예수님을 통해 알려주시고 드러내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8ㄴ-9절) 참으로 영광스럽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벅차고 분에 넘친 은총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만 베풀어주실 수 있는 권능의 구원이며, 참으로 우리가 감히 기대하거나 마땅히 받을 수 있기에는 부당하기까지 한 은총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머리로 하여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도록 안배하십니다.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10절) 아버지 하느님께서 모든 권한을 주시고 땅에 있는 우리에게 보내 주신 아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사업에 따라 우리 모두는 각자 주님 사랑 안에 자리 잡게 되었고,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 명단에 포함되게 되었습니다.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11절)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마침내 아버지의 나라에 다다르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12절) 아버지 하느님과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조금 더 깊이 그리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주 예수님의 사랑을 마치 피부로 느끼듯이 생생히 느끼면서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실현하며 한 걸음씩 주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13절) 성령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정성과 열정이 무르익어 마침내 열매를 맺어 주님 앞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거듭 주 예수님을 깊이 알고 체험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함몰하여 삼위일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14절)
이 기도문을 통해 사도 성 바오로가 느끼고 깨달아서 찬미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도 기쁨과 확신에 차서 주님을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지금 어떻게 희생하고 계시는지를 느끼고 체험하는지?
주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넘쳐흐르는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느끼고 깨우치는지?
이 질문에 ‘네’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요, 주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 6,8-9) 라고 이르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만일 주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듯이 확연히 느낀다면,
우리가 만일 주 예수님께서 나를 구하시기 위해 주님 자신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생명을 나누어 주심을 절절히 체험할 수 있다면,
우리가 만일 우리 눈에는 직접 보이지 않지만, 성령께서 나와 함께하시면서 나를 보호하시면서 나를 주님께로 이끌고 계신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신뢰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주님께 맡기고 안빈낙도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내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함께하시며 마침내 구원하고자 하시는 주님을 체험하고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복음의 말씀이 비춰주는 대로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살면서 이러저러한 환경을 바꾸면서 삶의 편의와 질을 향상시키고자 꾀할 수도 있겠지만, 복음 말씀을 이루면서 살겠다는 굳은 신뢰와 의지로 다른 변수들을 잊어버리거나 차제에 두고서라도 우리가 추구하는 복음의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고 예견하십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10절)
비록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전하고 살아가는 양식인 복음의 기쁜 소식을 인정해주거나 들어주지 않고 따라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할 바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예수님의 분부대로 제자들은 파견되어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12-13절) 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삶의 방향과 길을 일러주시는 듯합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당장 선교사가 되어 집과 가족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자리 그 상황에서 예수님의 복음이 비춰주는 길과 방향을 찾읍시다. 묵묵히 그리고 꾸준하고 성실히 복음 말씀을 실현하며 우리 자신을 복음화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우리가 추구하는 하느님 나라를 이루며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로서 나와 함께하는 가족과 일가친척과 동료와 이웃 친지들에게 삶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이끌면서, 주 예수님께서 펼쳐주시는 참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면 좋겠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마르6,8)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목자는 양을 돌보는 사람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목자가 양을 파란 풀밭으로 인도하고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지팡이 뿐이다. 목장의 주인에게 목자는 양을 돌보라는 권한을 받은 자이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이 생겨나면 기어코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와야 한다.
양들은 그 일을 하는 목자를 날마다 보고 있다. 백마리가 모두 목자를 바라보고 의지한다.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어떻게 다루는지 아흔 아홉 마리 양이 관심있게 바라보고 있다.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착한목자인지 찾지도 않고 딴짓하는 삯꾼인지 바라보고 있다. 양들에게 평화는 최고의 축제이다. 그러므로 양들에게 쓰일 목자의 재산목록 1호는 ‘지팡이’이다.
‘지팡이 외에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6,8-9)
언제고 개인에 중요한 관건은 ‘의식주’가 문제이다. 이는 목자에게 부수적인 것이어야 한다. 목장 주인인 주님께서 목자의 부수적인 것을 책임져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자에게 부여된 권한인 ‘지팡이’는 어디론가 내던져 버리고 부수수적인 것이 마음에 재산목록 1호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목자가 되기로 해서 진세(먼지같은 세상)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안주하려 하고 먼지 같은 세상으로 마음을 가득 채웠다. ‘예수를 팔아넘긴 삯꾼이 되어있다.
‘평화의 건설자’ 착한 목자 예수님은 평화의 샘이시다. 평화의 원천인 예수님과 사이가 벌어지면 평화는 서서히 빠져나가게 되어있다. 지팡이가 사라지고, 빵과 여행 보따리가 전대의 돈이 늘어나 자기를 망치고, 파견하신 분에게 누를 끼치게 된다. 그런 모든 것으로부터 목자는 자유로워져야 한다. A초원에서 B초원으로 옮길 때 평화를 깨는 발에 묻은 모든 먼지를 깨끗이 털어버려야 한다. 또 그곳에서 평화의 건설자로 자유인이 되어 힘있게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6,11)
나에게 ‘지팡이’가 재산목록 제1호였다. 주님께서 나를 파란 풀밭에 살게 하셨다.
이웃에 평화를 주는 신앙인이길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먹을 것 입을 것 신을 것까지 돈도 없이 급해서인지 딴 의미도 있겠죠.
예수님의 선교요령에는 자신의 위세를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강합니다.
모든 물욕 버리고 악마와는 대적하며 남에게는 평화를 주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빙자하여 명예 인기 돈벌이 등 참 한심한 걱정입니다.
정치판에도 써먹고 돈 버는데도 써먹고 사기 치는데도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 사람을 조심하라는 예수님 말씀 더욱 확실히 느끼게 되는군요.
선교의 시작과 결론은 평화라는 단어지만 하느님의 안녕 뜻도 강합니다.
한 명이라도 참 신앙으로 하느님 사랑 전할 때 안녕도 조용히 퍼지겠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제자들에게 노자 돈이라도 좀 보태주시지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는 대목에서 조금은 ‘야박’하신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안 주신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 곧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성령을 전해주시면서 그 성령과 더불어 모든 복음 선포의 삶을 이루어갈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본당 부주임으로 발령이 나서 부임하자마자 예산문제 때문에 본당 사목회랑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부주임으로서 청년담당을 맡으면서 일 년 예산을 짜면서 일을 하려고 예산을 짜보니 돈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년도 200만원 예산이 1600만원 되면서 전년대비 8배의 예산이 책정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산 상정 사목회의를 하면서 사목위원님들이 하나 둘씩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하셨습니다. 그분들의 이의들을 하나 둘 듣다보니 저도 당시 30세 초반의 젊은 신부 혈기에 조금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니, 일을 하려면 각 분야별로 당연히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런 기본적인 예산이 상정이 안 된다면 저는 여기에 왜 있습니까? 만약에 이 예산 상정이 안 된다면 저는 다른 데로 가겠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계시던 주임신부님께서 중간에 나서시면서 제 편을 들어주셨고 결국 그 돈을 기어코 받아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참 그 때 제가 경험이 없어서인지 너무 경제적인 잣대로 모든 것을 들이대면서 사목을 하지 않았었나 반성이 됩니다. 그러면서 그 때 그 젊은 혈기로 돈을 안주면 사목을 안 하겠다며 신자들에게 거의 협박조의 말을 내뱉었던 제가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실 사목이라는 것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말 하느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만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땐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오히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사목은 별로 성과를 이루지 못했고, 오히려 가난한 본당에서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이루어갔던 사목은 더욱 더 활성화되고 의미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 때 함께했던 신자분들이 그 때 그 행복했던 기억을 가지고 열심히 사도직을 살아가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이 아닌 성령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이끌어 주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무소유의 가난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무소유의 가난 체험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겸손과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무소유의 가난은 참된 겸손으로 인도합니다.
겸손은 헐벗음, 배고픔, 불안정한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가장 위대한 겸손은 당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게 되면 자기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다른 많은 온갖 것에 호기심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기에 분주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교만이 마음안에 자라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위대합니다. 그들은 미천, 초라, 허무의 밑바닥에까지 내려간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곳 까지 그곳은 너나 할 것 없이 벌거 벗는 곳입니다.
비안네 성인은 “‘아! 겸손! 겸손! 우리가 성인이 못되는 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은 모든 악을 엮은 묵주요, 겸손은 덕을 묶은 묵주입니다. 겸손은 마치 저울대 같아서 사람이 한쪽에서 자기를 낮출수록 다른 쪽에서 더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무소유의 가난은 단순하고 순순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모든 종류의 안락함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집과 종족 마을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외아들에 대한 애착마저 버려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떠났습니다. 이것이 순수한 믿음이요, 꾸밈없는 믿음이다.
참된 무소유의 가난은 물질 자체을 멀리하는 물질적 가난에 가난에 집착하는 자기중심적인 가난이 아니라 다른이들에게 유익하다면 물질을 소유하고 그 물질을 다른함께 나누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질을 주어진 상황에 따라 감사하게 누릴 줄 아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오로의 삶에서 잘 드러납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필리 4,12)
무소윤의 가난을 진정으로 살고 있는 지를 알아 보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 안에 영의 가난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살아도 자신의 비방이나 오해와 모욕을 당할 때 분노 등으로 마음의 평정을 잃고 있다면 물질적인 무소의 가난은 공허함에 불과할 것입니다.
바로 성 프란치스코는 이 영의 가난에 대해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여러 가지의 기도와 일에 열중하면서 자기 몸에 많은 극기와 고행을 행하지만, 자기 육신에 해가 될 것 같은 말 한마디에, 혹은 자기가 빼앗길 것 같은 그 무엇에 걸려 넘어져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정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참조: 루카 14,26), 자기 뺨을 치는(참조: 마태 5,39)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아모 7,12-15)는 하느님의 뜻에 승복할 수밖에 없는 예언자의 사명을 말해줍니다.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하브암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자 솔로몬의 신하였던 예로보암은 이스라엘의 북쪽을 휘어잡고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1열왕 11-12장). 예로보암이 북쪽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추대되면서(기원전 933년) 베텔과 단에 제단을 세우고 하느님이 아니라 금송아지에게 제물을 바치고 분향하면서 섬기라고 강요했습니다(1열왕 12-14). 그러자 아모스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북쪽 이스라엘의 베텔로 가서 이스라엘의 성소들과 예로보암 임금 집안의 파괴를 예언했습니다(7,9). 이뿐 아니라 예로보암은 칼에 맞아 죽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바빌론에 유배를 될 것을 아모스는 예언했습니다(4,3; 5,5.27; 6,7; 7,11). 한때는 베텔(하느님의 집)의 사제였지만 예로보암의 하수인이 된 아마츠야가 아모스를 ‘무엇을 조금 볼 줄 아는 자’(“선견자”)라면서 북쪽에서 예언하지 말고 고향(유다)으로 돌아가라고 쫓아냅니다. 아모스는 남쪽 유다지방(드고아)에서 돌무화과를 가꾸고, 양들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예언자로서의 교육도 받지 못했고, 예언자라는 칭호도 거부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예언자로서의 대우를 제대로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를 붙드시어 북쪽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배를 선포하라고(7,16-17) 보내셨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사실로 드러납니다. 예로보암은 남쪽 유다의 임금 아비야에 의해 죽고(기원전 911년: 2열왕 13,1-23), 약 200년 뒤에 북쪽 이스라엘은 바빌론에 짓밟힙니다(기원전 722년: 2열왕 17장).
복음(마르 6,7-13)은 하느님 나라 선포를 위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고향에서 무시당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본래의 목적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3,14-15) 그래서 복음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가치와 효력을 지니도록(신명 19,15) 하는 것은 물론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둘씩 짝지어 파견하면서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다는 알아듣지 못했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주셨으며(4,10-12), 그들이 선포해야 할 “하느님의 복음”(1,14)에 대하여 여러 차례 설명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갈릴래아 지역에 복음을 선포하라고 파견하시지만, 머지않아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것을 위해(13,10) 미리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교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지팡이나 신발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 것을 권고하십니다. 지팡이와 신발은 야생동물이나 다른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서 여행자에게는 필수 소지품이었습니다(탈출 12,11). 그러나 오직 당신께만 의지하도록 다른 것들을 일체 지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빵과 돈, 여행가방과 지갑조차 가져가지 말라는 것은 유다인들의 관습에 따라서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불린 사람들은 정당한 수고의 대가로서 최소한의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가난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한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한 곳에 머무르라는 것은 제자들을 받아들인 집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인 집이므로(사도 16,15)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공동체를 설립하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환대를 받으려고 이집 저집 옮겨 다닌다면 겪어보지 않았으면서도 인간적인 약점을 왜곡시켜 널리 퍼뜨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고 없는 말을 만들어서 퍼뜨릴 수 있기 때문에 복음 선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자신의 부족함을 신앙으로 감싸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의존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하느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하는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이 선포하는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 증거로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쫓겨났던 상황을 암시합니다.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린다는 것은 친교를 단절한다는 것으로서(이사 52,2)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의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그곳을 떠날 때에 반드시 했던 행동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태도에 대해 심판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는 것은 구원의 힘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예수님처럼 회개를 외치고(1,14-15), 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부어 고쳐주고,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회개한 이들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기름을 부어(이사 1,6; 루카 10,34) 많은 이들을 치유해주었습니다.
제2독서(에페 3,3-14)는 에페소 공동체에서 세례를 주기 전에 바치던 찬미가입니다.
성부께 드리는 찬미로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셔서(4절),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기(5절) 때문에 우리에게 온갖 영적 축복을 내리셨습니다(3절).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사랑과 은총을 넘치도록 베푸셨고(6절; 8절),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구원의 신비를 알려주시면서(9절), 예수님과 함께 다른 민족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도록 미리 정해주셨습니다(11절; 3,6). 다음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구원의 계획이 실현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3절; 4절; 7절; 11절; 13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5절),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6절),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7절) 그리스도 안에서(10절)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끝으로,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나누시는 생생한 사랑인 성령을 말하는데, 이 찬미가의 결정적인 구절로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이며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기 때문에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다고(13절)합니다.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는 세례를 받을 사람들이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도록(4절) 온갖 영적 축복을 주셨으니(3절)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5절), 죄를 용서받도록(7절), 지혜와 통찰력을 갖추도록(8절), 그리고 모든 이가 공동 상속자가 되도록(11절)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감춰졌던 하느님의 구원계획이었는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감사기도입니다. 온갖 영적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었다면 반드시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중요한 의미를 담아놓은 많은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에페소 공동체에 모여든 세례 대상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신자가 되어달라고 축복의 기도를 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임금(예로보암)과 어용 사제(아마츠야)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를 배척하지 말라는 것이며,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던 제자들이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인다면 주님께서 베푸시는 자애와 우리의 진실이 서로 만나고, 우리가 이루는 정의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입을 맞출 것입니다(화답송: 시편 85,9-14).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온갖 영적 축복을 전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불러주셔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하느님을 조금만 안다면, 그리고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조금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당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고,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넘치도록 베풀어주셨음을 조금만 안다면, 복음대로 살려고 애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정당하게 받아야 할 수고의 대가가 있다면 존경도 칭찬도 아니고, 내 사람이 되어 달라고 적극적으로 다가감도 아니고, 단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주는 것과 약점이 있음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느라고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을 신앙의 눈으로 봐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봉사자들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재물이나 명예, 그리고 인기에 의존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해야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아예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봉사하는 이들의 인간적인 약점을 부풀리거나, 한 번의 실수를 상습적인 것으로 확대시키거나, 혹은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단편적인 모습과 행동만 듣고 본 뒤에 그 모습이 마치 그 사람의 전부인양 과장되게 말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참된 구도자(求道者)의 삶, - 찾아라, 사랑하라, 섬겨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브라함아!”(창세22,1)
바로 이 성구는 오늘 종신 서원을 하는 아브라함 수사 상본의 성구입니다. 오늘은 유럽의 수호자 사부 성베네딕도 아빠스 축일이자 우리 성 베네딕도회 남양주 요셉 수도원의 정영훈 아브라함 수사의 종신서원식날이고 제 사제서품 32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정영훈 아브라함 수사님!
종신서원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변함없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완전한 신뢰를 드리며, “예”로 응답드리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봉헌하러가는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길을 나서는 수사님의 지향과 신뢰에 주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기원해드립니다.”
아마 종신서원식을 앞두고 이렇게 축하메시지 많이 받은 수도자도 드물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 수사만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를 부르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의 성소를 새롭게 확인하는 절호의 날이기도 합니다. ‘과연 어떻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나?’,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가 항상, 날마다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이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참 좋은 모범이 바로 오늘 기념하는 성 베네딕도 아빠스입니다.
성 베네딕도 아빠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의 멘토가 되는 전인적, 온전한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베네딕도란 이름 뜻 대로 참으로 복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브라함- 요셉- 베네딕도, 일련의 믿음의 족보를 대하는 느낌입니다. 오늘 복음 선포에 앞선 부속가도 성인의 면모를 감동깊게,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새빛 선물 가져오는 위대하온 지도자를 기념하는 대축일
성총받은 그 영혼이 노래하는 찬미가는 마음 속에 울리네
동쪽 길로 가는 아름다운 성조 용모 감탄 울려 퍼지네
태양같은 생명으로 많은 후손 얻은 그는 아브라함과 같도다
작은 굴에 있는 그를 까마귀의 복사로써 엘리야로 알리네
강물에서 도끼 건진 성 분도를 엘리사 예언자로 알도다
무죄 덕행 요셉같고 장래일도 알아내니 야곱처럼 알도다
그의 생각 지극하여 예수님의 영복소에 우리 인도하소서.”-
‘스승이 없다’, ‘멘토가 없다’ 탄식할 것은 없습니다. 기념, 기억하라고만 있는 성인 축일이 아니라 우리 각자 성인을 보고 배워 살라고 있는 축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주님을, 또 이런 성인을 멘토로 삼아 성령의 인도따라 살면 충분합니다.
지난 7월8일 식당 독서시 들은 베네딕도 규칙서 내용이 새로운 감동이었습니다. 수도원 살림살이를 맡은 재무인 당가의 사람됨됨이에 대한 규정이지만 성인의 인품과 성인이 바라시는 이상적인 수도자상이 환히 드러나는 내용입니다.
“수도원의 당가로 선정될 사람은 공동체에서 지혜롭고, 성품이 완숙하고, 절제있고, 많이 먹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부산떨지 않으며, 욕을 하지 않고, 느리지 않으며, 낭비벽이 없고, 오히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전체 공동체를 위하여 아버지처럼 해야 한다.
그는 모든 일들을 돌볼 것이나 아빠스의 명령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명령받은 바를 지킬 것이며, 형제들을 슬프게 하지 말 것이다. 만일 어떤 형제가 무엇을 부당하게 청하더라도, 무시함으로써 그를 슬프게 하지 말고, 부당하게 청하는 사람에게 겸손되이 이치에 맞게 거절할 것이다.
당가는 ‘잘 관리하는 이는 좋은 자리를 얻는다’하신 사도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여 자기 영혼을 보살필 것이다. 온갖 염려를 다하여 병자들과 어린이들과 손님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줄 것이니,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심판의 날에 헴바치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수도원의 모든 그릇과 전 재산을 제단의 축성된 그릇처럼 여겨 아무것도 소홀히 다루지 말 것이다. 인색하지도 말고 수도원의 재산을 낭비하거나 허비하지고 말 것이며, 모든 것을 절도있게 그리고 아빠스의 명령에 따라 할 것이다.“(성규31,1-12)
주옥같은 내용중 일부만 인용했습니다. 구구절절 명료하고 완벽합니다. 그대로 성인의 전인적 면모를 보는 듯 합니다. 비단 수도원 당가뿐 아니라 참되 구도자의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라 했습니다. 진짜 영적인 사람은 이처럼 일상의 평범한 삶에 지극히 충실한 사람입니다. 뜬 구름 잡는 영성이 아니라, 하늘 높이 뻗을수록 땅속 깊이 뿌리내리는 나무의 이치와 똑같은 영성입니다. 하여 ‘기도하고 일하라’는 성 베네딕도회의 모토입니다. 어떻게 참된 구도자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첫째, “찾아라!”
찾아서 진짜 사람입니다. 찾는 인간, 바로 인간의 정의입니다. 진정 살아있음의 표지가 찾음입니다. 죽은 사람은 찾지 않습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찾고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형성되는 삶의 꼴입니다. 무엇을 찾습니까? 돈을, 명예를, 좋은 사람을, 자리를, 일을, 놀이를, 음식을. 찾습니까? 부귀영화를 찾습니까?
아닙니다. 찾음에 있어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지혜를, 진리를 찾는 것입니다. 궁극의 지혜이신 하느님의 지혜이신,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는 감추어진 보물인 지혜를 찾으라는 간곡한 당부입니다. 참으로 간절히, 한결같이 찾을 때 찾습니다. 발견합니다. 만납니다. 찾지 않으면 절대 찾지도 발견하지도 만나지도 못합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내 말을 받아들이고 내 계명을 네 안에 간직한다면, 지혜에 제 귀를 기울이고 슬기에 네 마음을 모은다면, 네가 예지를 부르고 슬기를 향해 네 마음을 모은다면,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슬기가 나온다. 그분께서는 올곧은 이들에게 주실 도움을 간직하고 계시며, 결백하게 걸어가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
참으로 지혜를,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찾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축복의 선물입니다. 아니 이미 끊임없이 찾는 ‘순수한 마음’ 자체가 축복이자 구원이요 진짜 구도자의 삶입니다.
둘째, “사랑하라!”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평생 사랑의 학교 인생에서 사랑 공부중인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졸업이 없는 평생 사랑을 배워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참으로 사랑을 배워가며 하느님을 닮아가며 참된 구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2독서 콜로새서에서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도 사랑하라는 한 마디 말로 요약됩니다. 구체적 사랑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참으로 참된 구도자가 되어 하느님을, 형제들을 항구히, 한결같이 지칠줄 모르는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할 때, 이처럼 우리의 사랑 나무들에 주렁주렁 달리는 풍성한 사랑 축복의 열매들입니다.
셋째, “섬겨라!”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파스카 신비의 영성뿐이요 파스카 신비의 영성은 바로 섬김의 영성입니다. 수도원은 주님을, 형제들을 섬기는 배움터입니다. 섬김의 겸손, 섬김의 사랑,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등 끝이 없습니다. 섬김의 삶은 영성생활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 친히 평생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최후만찬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장면은 바로 섬김과 겸손의 사랑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섬김의 여정중에 온통 자신을 비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분발케 하는, 또 한없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예수님의 모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 지배하고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히 섬기는 어린이 같은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섬기는 분으로 늘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섬김의 한복판에서 만나는 주님입니다. 우리가 날로 예수님 사랑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은 그대로 비움의 여정이자 섬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찾음과 사랑과 섬김의 여정중에 참된 구도자의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종신서원 예식중 ‘수쉬페’와 영광송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저를 받으소서, 그러면 저는 살겠나이다. 주님은 저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신(新) 준주성범(遵主聖範)
이기우 신부님
⒈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의 길은 우상을 멀리 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조성하시고 인간에게 맡기신 뜻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안의 모든 선, 즉 사랑과 자유, 자비와 평등, 정의와 평화 같은 최고선을 기본으로 인간의 존엄성,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 선택, 연대성과 보조성, 공동합의성 같은 공동선을 구현함으로써 인류가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처음 에덴 동산에서부터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가로막고 방해해 온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힘을 추구하도록 부추겨왔습니다. 하느님의 뜻 대신에 인간의 힘을 내세움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이라도 된 듯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마귀의 전략은 인류 역사상 종종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⒉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사제 아마츠야와 대결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살던 그 시기는 나라 안팎으로 무법천지를 방불케 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직 강대국 앗시리아가 일어서기 전에, 고만고만한 나라들끼리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도토리 키재기 같은 힘을 겨루며 온갖 죄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⒊ 국제적으로 보면, 다마스쿠스 사람들은 타작기로 길앗 사람들을 짓뭉갰으며(아모 1,3), 가자와 에돔 사람들은 전쟁에서 포로로 사로잡은 이들을 모조리 끌고 가서 에돔에게 노예로 팔아 넘겨 버렸습니다(아모 1,6.9). 에돔 사람들은 칼을 들고 제 형제를 뒤쫓으며 무자비한 분노를 품었고(아모 1,11), 암몬 사람들은 저희 영토를 넓히려고 길앗 여자들의 임신한 배를 갈르는 죄도 저질렀습니다(아모 1,13). 모압 사람들은 에돔 임금의 뼈를 불살라 횟가루로 만들어 버렸고(아모 2,1), 동족인 유다 사람들은 주님의 법을 배척하고 우상에게 홀려 버렸습니다(아모 2,4).
⒋ 그런가 하면 국내적으로도 사람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 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 넘겼습니다(아모 2,6). 또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살 길을 막았으며, 아들과 아비가 같은 처녀에게 드나들고 있었고(아모 2,7), 저당 잡은 옷들을 펴서 그 위에 드러누워 즐기고 벌금을 모아 사들인 포도주를 제사를 드려야 할 하느님의 집에서 마셔대고 있었습니다(아모 2,8). 의인을 괴롭히고 뇌물을 받았으며, 공정한 재판을 펴야 할 성문 앞에서 빈곤한 이들을 밀쳐 내기도 했습니다(아모 5,12).
⒌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돌무화과 나무를 재배하며 양떼를 키우던 농부 아모스에게(아모 7,14-15) 예언자가 되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시끄러운 노래를 집어치워라(아모 5, 21-23).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아모 5,14).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4).
⒍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유는 이러한 죄악들이 세상을 더럽히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던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자니 마귀 들려 고생하거나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일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바야흐로 다가왔음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받아들여 믿는 것이 회개였습니다.
⒎ 아모스 예언자 당시에 북 이스라엘 안팎에서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죄악을 저질렀던 이유는 자기를 앞세워 힘을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상을 숭배하는 짓이고 마귀의 지배를 받는 짓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부터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삶으로 솔선수범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부활하는 영원한 삶입니다.
⒏ 하느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은 힘이 아니라 뜻을 추구하는 것이며, 뜻을 추구한다는 것은 진리를 향하여 선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최고선을 바탕으로 공동선에 투신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천지창조 이전에 우리를 택하시어 당신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게 하시고, 진리와 선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으로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에페 1,4)하셨으며, 이 구원은 복음선포를 통하여 실현된다(마르 6,7-13 참조). 오늘의 주제는 복음선포이다. 오늘 우리의 활동들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 계시다. 하느님께서는 목자이면서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인 아모스를 선택하셨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한다. 예언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선포해야 한다. 이래서 예언자들은 거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언제 어디에서나 부정과 불의와 부패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자유로운 예언자의 전형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바로 나자렛의 목수(마르 6,3)인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고(마르 1,14 참조) 세상이 심판받을 때가 되었다(요한 12,31 참조)는 사실을 선포한 충실성과 진실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복음: 마르 6,7-13: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구원계획을 첫 번째로 실행하시는데 아모스의 경우와 같은 모습이다. 그들의 사명 역시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적 사명이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사도들의 파견은 인간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존하라는 것이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8-9절). 즉 이 말은 그 규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한 “열정”이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리라는 무한한 신뢰를 하라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이제는 사람에 대해 신뢰도 해야 한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협조자가 된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10절). 그러나 때로는 거절당할 수도 있다.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복음이 선포되어 실현되고 있는 약속의 새로운 땅에 가까이 갔느냐 못 갔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전교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복음선포와 구원의 활동을 계속한다(12-13절 참조). 이렇게 교회는 세상에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반영시키고 그분의 모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성과는 어느 정도 우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현대의 복음선교 76).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우리의 복음선포가 아모스의 경우나 그리스도의 예언적 선포와 같이 권력이나 힘 앞에 항상 자유로운가?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할 용기를 항상 가지고 있는가?(로마 1,14참조).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가 아니면 우리의 능력을 믿는가? 극단적일 때 발바닥의 먼지를 떨어버릴 각오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계획이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 1,10)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이다’라는 말은, 전에 파괴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다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창조의 근본적 의미가 다시 드러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 구원계획은 우리들의 협력, 특히 교회가 실현하여야 하며, 이를 이루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비록 고달프게 느껴져도 우리가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그 사명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모스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 갈 것이다. 주님께 파견받은 제자들과 같이 힘차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청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마르 6,7)
김솔 신부님
열둘을 부르시고 세상에 보내시는 순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입니다.
더러운 영이 어떤 방법으로 활동하는지, 저의 감각은 감지하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의 목적이 무엇일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들의 목적은 하나,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느님과 일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은, 하느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일이고, 그것이야말로 더러운 영들이 가장 원치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활동은, 더러운 영들을 맞서는 것, 곧, 사람들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회개를 선포하는 것도, 많은 마귀를 쫓아내는 것도,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는 것도, 모두 하느님을 스스로 찾을 수 있게, 하느님께 참여할 수 있게, 일치할 수 있게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직 부활도, 예수님의 신성도 온전히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예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권한이 예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 내가 애써 나를 멋지게 포장하는 것과 상관없이 온다는 것입니다.
어깨에 힘 줄 필요도 없고, 목소리를 깔 필요도, 일부러 위엄 있을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갈 필요가 없는 것. 복음을 전하는 일, 예수님을 전하는 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세상의 온갖 부추김 안에서, 하느님과 다시 하나되는 행복을 전해주는 일, 그 일을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
그 제자들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 모든 권한을 받았고, 그 권한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권한으로 매일 미사 성제를 봉헌합니다.
그 권한에 의해 인호가 새겨진 우리의 존재, 그 권한에 의해 매일 성체를 받아모시는 우리의 여정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행복을 마음껏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왜?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배행기 모세 신부님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그것도 스승님이 가라 해서 가야 하는 이들에게 빵 정도는… 여행 보따리 정도는… 여벌 옷 정도는….
하지만 부르시고 보내시는 분, 예수님은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보내시는 예수님은 떠나는 제자들에게 오직 한 가지, 더러운 영(악령, 사탄)을 제어하는 권한을 주십니다. 그것도 무엇보다 제일 먼저.
이유가 뭘까요? 부르시고 보내시는 분이, 당신에게 주어진 일(하느님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시작하려는 그 시점에 겪으셨던 악마의 유혹사건(마태 4,1~11)이 작용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예수님은 그 사건에서 분명하게 아셨습니다.
끊임없이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까지도 다가오는 악마의 유혹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그 유혹이 얼마나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리는지를…
그 유혹이 얼마나 교묘한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만 빵, 돈, 권력, 하느님까지도 시험의 대상으로 삼게 만드는 그 유혹(수없이 많은 죄악과 연결됨)을 이기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 때에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남과 동시에,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세상에 파견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물론 같은 권한도 받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제자로서의 길을 기쁘게 걸아가려면, 무엇보다 마음이 비워져 있어야 합니다. 빵, 돈, 권력, 하느님까지도 시험의 대상으로 삼게 만드는 그 유혹을 마음 안에서 걷어내야 합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지만, 어떻든 마음을 비우는 그 자리에 성령께서 활동하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야 기쁨으로 온전히 주님께 의지하는 마음도 생기고, 파견된 이들에게 주어진 더러운 영들을 제어하는 권한도 제대로 발휘됩니다.
더러운 영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모두 오늘 복음의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실천함으로써,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많은 이들 안에서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길을 떠날 때 꼭 필요한 것
이승현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신부가 되어 살아가다 보니 인사이동도 해야 하고 각종 연수, 피정, 교육 등 길 떠날 일이 많습니다. 그만큼 챙겨야 할 것도 참 많습니다. 여벌 옷, 세면도구, 휴대전화, 지갑 등 이것저것 넣다 보면 가방이 차고 넘칩니다. 챙기는 게 많으니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생각이 많아집니다. 또한 쓰지도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물건들을 바라보며 ‘뭘 이렇게 많이 챙겨갔을까?’ 늘 후회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지팡이 외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주님 말씀이 단지 물건만 뜻하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길을 떠날 때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 나만의 가치관 등 ‘내 생각 자체를 두고 떠나야 하지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내 생각만 가득 채우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생각과 주님 마음을 담아 길을 떠나야 합니다. 필요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보다는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가 더 중요한 일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생각도 많아지고 불필요한 것들도 참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매일을 살아가며 우리는 주님께 파견을 받습니다. 길을 떠나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야 할 이웃들입니다. 그 여정에서 내 생각을 전하기보다 주님 생각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내 것은 최대한 내려놓고 주님 것을 가득 채워 길을 떠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세례 전 예식들에 대한 가르침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성사론’의 시작 (Nn. 1-7: SCh 25 bis, 156-158)
성조들의 행적이나 잠언의 교훈을 읽으면서 윤리 문제에 대해 여러분께 매일 강론해 왔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여러분이 이런 교훈으로 교육을 받아 우리 성조들의 경지에 들어가 그들의 도를 따르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며, 세례로써 새사람이 될 때 세례 받은 이들에게 맞는 그런 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신비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성사의 의미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세례 전에, 아직 입문 성사의 체험이 없을 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여러분에게 성사의 의미를 알게 해주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오해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성사들이 지니는 빛은 성사들에 대해 미리 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보다 그것을 모르고 받는 사람들에게 더 밝게 빛납니다.
여러분은 귀를 열어 듣고 또 성사들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부어 준 영원한 생명이 지닌 달콤한 향기를 맡으십시오. 여러분의 귀를 열게 하는 예식에서 “에페타” 즉 “열려라.” 하고 말할 때 바로 이것이 뜻한 것입니다. 이 예식을 거행한 것은 성사의 은총을 받으러 나오는 여러분들이 받게 되는 질문의 뜻을 깨닫고 또 그 질문에 대답할 것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도 벙어리를 고쳐 주실 때 이와 같은 신비의 예식을 거행하셨습니다.
이 예식이 끝난 다음 지성소의 문이 열려 여러분은 재생의 성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받은 질문을 상기하고 여러분이 대답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마귀와 그 행실을 끊어 버리고 세속과 그 허례 허식 및 쾌락을 끊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이 한 약속은 죽은 자들의 무덤이 아닌 생명의 책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레위와 사제들과 주교를 보았습니다. 그들의 외모를 생각지 말고 그들의 직분이 부여받은 은총을 생각하십시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여러분은 천사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제들의 입술만 쳐다보면서 인생을 바르게 사는 법을 배우려 한다. 사제들은 전능하신 주님의 천사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속임이 없으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이는 천사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그들의 직분을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들이 전수해 준 것을 생각하고 그들의 직능을 존중하며 또 그 품위를 인식하십시오.
여러분은 마귀와 맞서기 위해 들어가서 그가 있는 앞에서 그를 끊어 버리기로 결심하고 동쪽을 향했습니다. 마귀를 끊어 버리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향하고서 그분을 똑바로 바라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함승수 신부님
1976년 구소련 예례반댐에서 전차 추락사고가 있었습니다. 승객을 태운 전차가 기계고장으로 10m아래 물속으로 곤두박질쳤고 92명의 승객중 30명이 구조되었는데, 그 30명을 구한 것은 구조대가 아니라 그 근처에서 체력훈련중이던 수영선수, 샤바르시 카라페트얀이었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구조대원들은 다양한 구조도구를 챙겨왔지만 가져온 산소통이 모두 비어있다는 이유로 물 속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맨몸이었던 카라페트얀은 거침없이 물 속으로 뛰어들어 온몸이 유리에 찢기는 고통을 참아가며 혼자서 승객들을 구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입은 후유증으로 패혈증을 앓게 되었고 그로 인해 수영선수를 그만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주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은 가진 것을 내어줍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내어주는 것으로 자신이 '충분히'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피해를 입는다고 느끼면 내어주는 일을 멈추게 됩니다. 하지만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내어줍니다. 상대방에 대한 참된 사랑으로 가장 소중한 나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해줄수 있는게 별로 없다며 미안해하지요. 카라페트얀이 그랬습니다. 촉망받는 수영선수로서의 미래를, 자기 건강을 내어주면서까지 사람들을 구했음에도, 중간에 의자를 사람으로 오인하여 끌고 나왔던 일을 떠올리며 그 실수로 인해 한 사람을 더 구해내지 못했음을 미안해했습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복음 선포를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먹을 것도,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긴 보따리도, 돈도, 여벌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소유하고 있는게 많으면 그만큼 신경써야 할 일도 많아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다보면 정작 자신이 해내야할 중요한 사명과 역할에 소홀해지고, 내가 가진 물건들을 관리하는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됩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고, 내가 가진 물건들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나의 주님으로 섬기지 못하고 재물들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재물에 구속된 삶은 금방 불행해지고 피폐해집니다. 재물이 주는 만족감과 거짓 행복은 잠시뿐, 우리는 곧 더 심한 배고픔과 갈증으로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그분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풍성한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과 상황 속에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하느님 안에서 완전하고 확실하며 또 영원한 행복을 찾는 것이 우리에게 더 이롭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것들은 다 두고가라고 하시면서도 '지팡이'만큼은 챙겨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를 상징합니다. 모세가 지니고 다니던 지팡이는 양치기라면 누구나 하나씩은 들고 다니는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그것으로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생수가 솟아났으며, 병든 이들이 그것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이 그 지팡이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모세는 어느 순간 '주'와 '객'을 혼동하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는 지팡이를 집어들고 '바위더러 물을 내라고 명령하라'고 말씀하셨음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대신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두드린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기에 예고하신대로 물이 흘러나왔지만, 모세는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야 할 지팡이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자기도 모르게 지팡이라는 물질에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약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약속된 땅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는 불행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지팡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이 일화를 상기시키십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재물로 남을수도,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재물에 의존하는 마음은 우리를 하느님과 그분의 뜻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그런 상태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참된 행복이 가까이 있어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욕심과 집착에 사로잡혀 재물을 내 삶의 중심에 두는 과오를 범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 한분만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구원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누구와 온몸과 영혼과 마음까지 함께 하기를 택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왜 가난한 예수님을 따릅니까?
아르헨티나 문한림 주교님
당신은 친구들이 많습니까? 진정한 우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억나십니까? 분명히 그 사람과 함께 하며 많은 순간들을 서로 나누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선교 준비]
오늘 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마르코복음 사가가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마음에 두셨던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열두 사도로 이름하셨다. 이것은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 (마르 3, 13-15).라고 기록합니다.
이 구절은 세 단계를 보여줍니다
1. 예수님은 사도들을 부르시고 소집하시는 분입니다.
2. 사도들이 그분과 함께 함으로써 즉, 그분과 삶을 공유하여 그분의 사명, 생각, 감정, 삶의 방식 그리고 그의 운명마저 함께 나누게 하십니다.
3.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을 파견하시어 권능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앞의 두 단계를 포함한 세 번째 단계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두 명씩 보내어 불결한 영을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주셨고 그들에게 온전한 가난 실천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구체적인 지침을 주셨습니다 즉, 빵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 속옷은 두 벌씩 껴입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가난한 예수님과 함께 함!]
예수님은 왜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채 단지 마귀들을 쫓아내는 능력만 주시는 이런 방식의 사명을 요구하셨을까요?
그분의 삶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셨고 물질적 빈곤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셨습니다. 그분의 공생활은 최소한의 생필품만으로 전 지역을 다니시며 지칠 줄 모르는 말씀 선포를 하셨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왕국을 받아들이도록 회개를 권유하셨으며(마르 1, 14-15 참조),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가난 속의 이러한 사명을 사도들은 스승님과 함께 하며 배웠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그들을 보내시어 그것들을 실천에 옮기고 그분 사명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 당신 자체이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는 그분과 함께 자신의 삶을 나누고 일상 속에서 단단한 우정을 쌓는 것은 필수입니다. 바로 그분이 하느님 나라의 생생한 복음이 흘러나오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기 때문입니다.
[청빈으로부터 선교를 수행해야 하는 세 가지 이유]
그런데 가난으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앞서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를 온전히 신뢰한다는 명백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마태 6, 25-34 참조).
다음은, 세상의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나 언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이며 인간의 가난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성인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그리고 바오로 성인은 코린도인들에게 신앙을 인간의 언변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라고 말합니다 (1코린 2,4-5 참조).
끝으로 청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우선적 선택임을 분명히 드러내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 , 1-12 참조).
[사도들은 가난한 예수님의 거울]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또 어떤 가르침을 주셨습니까?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그들의 증언이 유효하도록 두 명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마귀를 쫓아내어 영혼과 육신을 치유하도록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요약하면, 그들은 말씀과 자애의 행동으로 복음의 기쁜 소식을 유능하게 선포했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은 살아있는 성사가 되었습니다. 가난과 권능과 자비를 갖춘 예수님의 살아있는 거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스승이 겪었던 것처럼 거절당할 준비 또한 되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스승이시자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하여 애정과 열정과 신선함으로 가득 찬 당신과의 우정을 “마시라”고 초대하십니다(요한 7,37; 19,34 ; 15.14)
이와 동시에 우리가 기쁨과 권능과 그분께 대한 온전한 신뢰 안에서 온 인류에게 말씀을 선포하라고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마르 16,17-20 참조).
당신이 참으로 기쁜 소식이신, 예수님 선포자가 되시길 응원합니다!!! 아멘.
좋은 것은 알려야 하고 모두 누려야 한다<마르코 6/7-13>7/1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진, 선, 미는 알리고 고유해야 합니다. 사람은 소문을 듣고 찾아가기도 하지만 문을 열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건강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고 먹어야하고 찾아야 하지만 좋은 것을 일려 주는사람 없으면 무엇이 좋은 것이지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 모르게 됩니다.
주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욌다고 하시며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 살기를 원하시어 가까이 멀리 제자들을 퍄견하시어 하느님 나라를 알리기 시작하시였습니다.
오늘날의 인류는 이 기쁜소식을 많은 선교사를 통해 전해듣고 진선미에 접근하고 진선비의 본질이신 주님의 믿음으로 죽음에서 살아나고 하느님 나라의 본질애 접근하고 자유 평화 기쁨의 나라를 살게 하시였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도 좋은지 모르면 받지 못하고 손에 쥐어 주어도 잡지 않아서 누리지 못합니다. 저는 6살부터 원산 해성 유치원에서 수녀님들의 가르치심 알림으로 모태 신앙은 아니지만 하느님의 현존아래 살면서 죄를 짖고 해매어도 자비와 용서를 구히고 잊고 살려면 늘 옆에서 자극하시어 잊음을 벗어나고 올지 주님을 찾고 따르는 삶이 삶의 목표었습니다.
저는 거부한 적은 한번도 없으며 어떻게 하면 진선미의 근언이신 주님 가까이 살것인가?를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살기를 다집하고 또 다집하면서 여가까지 왔습니다.
뒤를 돌아보아도 주님을 따르는데 후해 되는 일은 없고 다만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뿐입니다. 지금것 가야 할길을 가고 주님이 마련한 길을 찾아 달려왔습니다.
이 세상에 누구나 제일 안전하고 평회스럽고 행복한 삶을 갈망하지만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고 조금만 바람 불어도 집이 흔들리고 비가 몰아오면 무너지고 죽음의 고통을 격게 됩니다. 코로나 시대 살악날 길은 자신의 보호능력에 따라 결과가 나타납니다. 면역력이 없으면 병이들고 죽음이오지만 면역력이 있으면 이겨냅니다.
이 세상에 콘로나 균 말고도 넘나 많은 병균으로 시달리고 있으나 그 모든 것을 해처 나가고 살아갑니다. 지금 안하고 못하고 하면 안되고 조심하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말고 친척이나 친구 함께 하는 사람을 피하는 길만이 토로나 방역의 길이라 생각하면 아무것도 행동정지 명령이 최산이 길입니다. 국회도 해산하고 모든 공장은 가동을 멈추고 가기 지가집 에 가쳐 시장도 가지 말고 밭에 농사도 짖지 말고 바다에 고기잡이도 하지 말고 각 가정에서 콤푸터로 재택 근무한다면 알려지는 것 없고 모든 움직임을 정지해야 합니다. 들리는 말에 각 교회는 예배금지 두 사람이상 만남도 급지 하면 알려지는 것 없고 알려지지도 않아 바보가 되고 행동정지로 죽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그 남아 움직이던 모든 것을 정지하면 코로나 군이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어 균을 좇아버려야 합니다. 시장 맏트 지하철 그 많은 왕래를 중지하면 공장도 쉬고 모든 생산품도 정지하고 눈에 보이지 않은 코로나균과 싸우는 것만이 최상의 길이 아닙니다. 예방주사로 코로나 균을 막고 활동 하도록해 놓고 변형 코로나 균의 출현을 들어내며 더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넣지 말고 안전수칙을 잘 지키며 이겨내도록 정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변화 되는 세상에 정지는 죽음입니다. 수칙을 지키며 죽음이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권하려고 나가고 만나고 알려주고 하느님의 나라를 누리고 살도록 이끌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지난 주일 하루 빼고 매일 사람을 만나고 하느님 나라에 사는 길을 말하고 용기와 힘을 주었습니다. “호랑이가 물어가도 정신만 차리며 산다.” 사람은 만나고 모이고 함께 있어야 사는 것이다. 예방 약을 만들고 많은병을 약으로 의사의 손으로 곤치는 것같이 치유에 전념합시다.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복음 선포자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첫째, 복음 선포자는 복음 선포가 인간의 재주가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의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빵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옷도 두 벌 이상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당신 섭리의 협력자로 택하십니다. 모세, 다윗, 마리아, 베드로, 바오로... 복음 선포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뛰어난 재능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한없는 신뢰와 믿음입니다. 복음 선포자는 자신의 “가난”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며,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는 “야훼 이레”에 대한 믿음을 더욱 키우게 됩니다. 이렇게 복음 선포자는 복음을 선포하며 자기 자신도 복음화됩니다. “가난”은 복음 선포의 방해물이 아니라, 복음 선포자가 반드시 지녀야할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친히 당신의 가난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둘째, 복음 선포자는 복음 선포가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매정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불과 2년 동안이었지만, 한국에서 보좌 신부를 할 때, 아무리 공을 들이고 노력을 해도 성당에 나오지 않는 청소년, 청년들이 있는가 하면, 전화 한 통화해준 것, 반갑게 인사해준 것만으로 고맙다고 냉담을 풀고 성당에 나오는 청소년,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 체험들을 하면서, 저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요한 6,44)의 말씀의 의미를 자주 되뇌였습니다.
복음 선포자는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실망하고, 마음을 닫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나쁘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 선포자는 각 사람에게 계획되어 있는 하느님의 “때”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복음 선포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후,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겸손한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복음 선포자는 기대를 넘어서는 성공처럼 보이는 현실 앞에서도 교만하지 않게 되고, 기대를 밑도는 실패처럼 보이는 현실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복음 선포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협력자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마르 6,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자들은
주님께서
바라시는대로
길을 떠난다.
길을 떠나면서
더더욱
깨닫게되는
하늘 나라의
신비로운
여정이다.
사랑은 회개를
동반한다.
회개의 삶이란
소유하지 않고
나누는
하늘나라의
삶이다.
하늘 나라의
살은 빛처럼
감출 수 없다.
우리의 삶이란
신비로운
만남의
연속이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이다.
떠나고
돌아오는
모든 여정이
은총이다.
떠나는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다.
믿음은
소유하지
않는 가난한
여정이다.
가난하기에
깨어있을 수 있고
맡길 수 있다.
가난한 마음이
믿음이다.
우리가 가지고
떠나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믿음이다.
물질은 우리를
얽매이게 하지만
믿음은 우리를
자유롭게한다.
믿음은
구체적인
하늘 나라의
나눔이다.
떠남도
회개도
선포도
나눔이다.
은총은
나눔으로
빛을 발한다.
제자들은
사람들 안에
계시는 주님,
그 빛을
기쁘게
뵙게된다.
믿음은
거룩한
만남의
여정이다.
거룩한 은총의
주일에 기도를
나눈다.
믿음의 향기와
맛은 간절한
마음에 있다.
활짝 피어나는
믿음의 꽃이길
기도드린다.
직장 생활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늘 바쁘게 지냈던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바쁜 것도 문제지만 왜 이렇게 지출되는 돈이 많은지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었습니다. 일에만 빠져 지내는 자신의 모습에 비참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방송을 보면 다들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자신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았지요.
큰 맘 먹고 가족과 함께 주말여행을 떠났습니다. 저렴한 여행 상품을 운 좋게 구할 수 있었던 것도 한몫했지요. 힘들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가족들도 무척 기뻐했지요. 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형제님은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SNS에 즐거웠던 여행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부정적인 글을 남겼습니다.
‘먹고살기 힘들다면서 여행은 왜 가느냐’, ‘여행 다니면서 살기 힘들단 소리 하지 마’, ‘여행은 무슨 나는 주말에도 일한다’ 등과 같은 댓글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여행에서 찍은 사진 속 모습은 분명히 행복하고 즐겁고 부유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노력한 모습은 왜 보지 못할까요? 바로 자신의 견해로만 바라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 부정적인 생각들이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게 만들고 이 때문에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아픔과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늘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방이 내 뜻대로만 행동해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점을 가르쳐주시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늘 함께 전교여행을 하시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직접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면서 사랑해야 할 대상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게 하시지요.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부족한 상태가 되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을 전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명령을 충실히 따른 제자들은 성공적인 전교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귀들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칠 수 있었습니다.(마르 6,13 참조)
제1독서에 나오는 북이스라엘에 파견된 아모스 예언자도 사실은 예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주님의 명령을 받아서 이스라엘에 예언합니다.(아모 7,14-15 참조)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명령은 자신의 능력이나 위치에 따라 사라지는 것이 아닌 반드시 따라야 하는 명령입니다. 그것도 사람들 위에 서서 모든 풍요함을 누리면서 섬김을 받는 모습이 아닌, 부족함 안에서 섬기는 모습으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섬김을 받는 모습이 아닌, 섬기는 모습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에페 1,4) 이 주님의 선택을 존중한다면 우리가 이웃을 향해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이제 길거리에 나가서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대신 겸손한 마음과 섬기는 모습으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들이 그 모습에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요?
미키마우스
떠돌이 목수 아들로 태어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농촌의 조그만 마을에서 자란 소년은 전원 풍경을 백지에 그리며, 가난했어도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 한 뒤 신문 배달을 하던 소년은 ‘신문 만화가’를 꿈꾸며 남몰래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에게 만화는 보석이었으며, 꿈과 자존심 이었는데 소원대로 소년은 자라서 신문사 만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야심작과 자존심을 담당국장이 항상 평가절하 하며 퇴자를 놓았습니다.
“이걸 그림이라고 그리나 차라리 그만 두는 게 어떨까?”
매일 이런 소리를 듣던 그는 결국 퇴직을 당했습니다. 그는 실의에 빠진 채 갈 곳을 몰라 방황하다 다시 고향 농촌으로 내려갔고 교회 지하창고를 빌려 쓰며 일을 했습니다. 지하창고의 어둠이 바로 자신의 모습으로 보였지만 그의 인생의 지하창고가 보물 창고로 변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상처를 받은 그는 창고를 뛰어 다니는 쥐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 보다 예쁘고 친밀감 있게 그린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그림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키마우스’입니다. 그 젊은이의 이름은 월트 디즈니, 오늘날 디즈니랜드의 주인입니다. 디즈니에게는 참혹한 지하 창고가 사실은 보물 창고였으며 가장 암울한 때 창조와 기회의 문이 열렸던 것입니다. 그에게 지하 창고의 생활이 없었다면 미키마우스도, 디즈니랜드도 탄생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처지나 제일 미운친구, 싫은 동료가 혹여 내일의 별이나 보물창고가 아닐까요?
겸손하고 소박한 영혼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마르 6,8-9)
저희 살레시오회가 한국 땅에 진출한 지 벌써 50여년이 됐습니다.
50년을 넘어서면서 아쉽게도 몇몇 선배님들께서는 먼저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한 평생 수도생활을 해오시면서 인간적 나약함이나 부족함이 없지 않으셨겠지만, 다른 무엇에 앞서 수도자로 삶을 잘 마무리 지으셨다는 것 자체로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저희 공동체에서 오랫동안 모시고 있었던 할아버지 수사님의 장례식 때가 생각납니다.
돌아보니 수사님은 젊은이들로만 이뤄진 저희 공동체에 큰 선물이자 기쁨이었습니다.
기나긴 투병생활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지요.
늘 장난스런 얼굴로, 손을 꽉 쥐시며 후배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시던 재미있던 어르신이셨습니다.
수사님을 땅에 묻고 돌아와 수사님께서 머무셨던 방에 들어갔는데, 어찌 그리 황망하던지요.
수사님께서 남기신 소지품을 훑어보면서 다시 한 번 수사님의 가난하고 검소한 삶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겨놓고 떠나신 것은 겨우 낡은 옷가지 몇 벌, 이젠 구식이 된 라디오 하나, 쓰시던 안경, 틀니, 다 합해서 한 상자도 되지 않았습니다.
단 한번도 당신을 위해 물건을 사지 않으셨던 분, 거의 외출이나 외식을 하지 않으시며 공동체에서 머무르시던 분, 단 한번도 공동기도에 빠지지 않으셨던 분, 언제나 먼저 소매를 걷어붙이시고 삽을 드시던 분, 참으로 좋은 모범을 저희 후배들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건강문제로, 또 성소문제로 오락가락할 때였습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아 결국 '떠나기로' 거의 마음의 결정을 짓고 수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수사님께서는 길게도 아니고 딱 한 말씀만 해주시더군요.
"서원한 수도자가 가긴 어딜 가! 그냥 계속 가! 가다보면 길이 생겨!"
단 한마디 말씀, 단순한 말씀, 투박한 한마디 말씀이었지만 선배로서 방황하는 후배에게 건네주신 참으로 값진 말씀이었습니다.
수사님께서 제게 건네주셨던 그 말씀을 이제 저는 후배들에게 다시 건네주고 있습니다.
지난달 저희들은 또 다른 선배 수사님 한분과 작별했는데, 수사님께서는 한국 살레시오회 초창기 회원이셨기에 어쩔 수 없이 평생토록 수도원에서 궂은일만 도맡아 해 오셨던 무척이나 겸손했던 분이셨지요.
형제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베풀면서도, 자신을 위한 식탁에는 멸치 한가지로 족했던 분이셨습니다.
'새까만' 후배들이 줄줄이 버티고 있음에도 언제나 가장 먼저 공동체 경당에 도착하셔서 이것 저것 미사 도구를 챙기시던 분, 자그마한 체구의 수사님께서 덩치가 산 만한 후배들 고민을 자상하게 들어주시고, 일일이 등을 두드려주시던 수사님은 진정 저희 한국 살레시오회의 거목이셨습니다.
그런 수사님 영정 앞에 저희 후배 100여명이 모였지요.
한 목소리로 크게 연도를 드렸습니다.
연도를 드리고 있는데, 수사님 트레이드마크였던 빙긋이 웃으시던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툭툭 등을 두드려주시던 손길도 느껴졌습니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목소리가 제 귓전을 울리더군요.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도 수사님께서는 수도자로서 좋은 모습을 저희 후배들 머릿속에 깊이 각인시켜주고 가시더군요.
떠나시기 오래 전에 장기 및 시신 기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늘 하시던 말씀이 이랬습니다.
"어디든 흔적 남기지 말고 내리(살레시오 캠프장이 있는 서해 바닷가, 수사님의 노고와 진한 애정이 깃든 곳) 앞바다에 뿌려줘!"
장례미사가 끝난 후 장지나 화장터가 아니라 병원으로 떠나시는 수사님을 배웅하던 저희 후배들은 다시 한번 수도자로서 봉헌생활을 갱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한가지 당부말씀을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한평생,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으시고 오로지 수도자로서 삶에 충실하셨던 선배님들, 그분들이 오랜 풍랑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셨던 이유, 한결같이 든든한 바위 같던 이유, 그리고 영예롭게도 수도자 신분을 간직한 채 삶을 잘 마무리한 배경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주님 말씀 따라 한평생 청빈지도를 생명처럼 지켜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외에 비본질적이고 부차적 요소들로부터 끊임없이 이탈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총의 저녁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갔던 수사님들의 영혼, 그리고 먼저 떠나가신 모든 겸손하고 소박한 영혼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기쁘게 당신 나라에 받아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주는 자, 자기를 주는 자
전삼용 요셉 신부님
1976년 구소련 예례반 댐에서 전차 추락사고가 있었습니다. 승객을 태운 전차가 기계고장으로 10m아래 물속으로 곤두박질 쳤고 총 92명 중 30명이 구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30명을 구한 것은 구조대가 아닌 수영 천재로 불리던 한 남자, 샤바르시 카라페트얀이었습니다
샤바르시 카라페트얀은 세계 수영 선수권 첫 출전부터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웠고 그 후 3년간 각종 대회에서 신기록만 11개를 세워 이젠 올림픽 금메달만 목전에 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예레반 댐을 달리며 훈련을 하던 도중 전차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구조대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어 바로 물로 뛰어들었지만 물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손으로 짚으며 전차 안의 사람들을 빼내어 몇 명 정도 구조했을 때 구조대가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조대는 물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조대가 가져온 산소통이 모두 비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자 카라페트얀은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온 몸이 유리에 찢겨가며 30명을 혼자서 구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승객을 구조하며 입은 상처와 탈진 때문에 46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다행히 깨어나긴 했지만 의사는 패혈증이 심해 더 이상 수영은 무리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몸을 회복해 수영에 재도전 해봤지만 이전의 기록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잊혀져갔습니다. 왜냐하면 정부에서 그가 사람들을 구조한 것을 숨겼기 때문입니다. 여론을 의식하여 구조대가 30명을 구조한 것으로 발표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담당했던 검사가 양심선언을 한 까닭에 이 사실이 밝혀졌고 몇 년 후 그는 국민 영웅으로 추대 받게 됩니다.
[출처: ‘구소련의 영웅 샤바르시카라페트얀’, 서프라이즈]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가진 것을 주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줍니다. 카라페트얀은 자신을 줄 준비가 되어있었던 사람이고 구조대원들은 가진 것을 줄 준비가 되어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모두가 사랑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 깊이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 살과 피를 주십니다. 당신 가진 것을 다 주신 것도 모자라 자신을 온전해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도 당신처럼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미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은 가진 것을 주면서 충분히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서는 가진 것이 다 떨어져야합니다.
카라페트얀은 가진 것이 없고 몸만 있었기 때문에 바로 물로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가진 것만을 주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이나 꼭 필요한 무언가에 피해가 온다면 곧 내어주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는데도 사랑이 있다면 자신을 내어주게 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생명을 내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건강을 먼저 생각한다면 자신을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제자들이 가진 것은 오로지 악령을 쫓아낼 수 있는 성령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바로 내어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가난해야합니다. 사랑의 더 깊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부자가 당신을 따르려고 할 때 가진 것을 먼저 다 팔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돈만 나누어주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정도라면 당신 제자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제이면서도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줄 수 있는 만큼만 주며 먼저 ‘건강’을 챙깁니다. 건강이 나빠질 것 같으면 무리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단계에까지는 가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피해입지 않는 사랑은 아직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지금 제주도에는 예멘 난민 500여명이 난민 심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럽 많은 나라들은 난민들을 받아들여 사회문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난민들이 저지르는 범죄가 적지 않은 실정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우리나라 국민 중 많은 이들은 난민을 받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국민안전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세는 줄 수 있는 것은 주겠지만 우리 자신은 주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가진 것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하지만 내 자신을 내어줄 수 없으면 참다운 사랑은 아닙니다.
과연 유럽사회가 난민 때문에 더 병들어갈까요, 아니면 인종차별적 이기주의나 물질만능주의 때문에 더 병들어갈까요? 상처 하나도 받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려면 자신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전재용 선장은 베트남 난민 96명을 구해주고 큰 원양어선의 선장에서 통통배를 타며 멍게를 걷어 올리는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내가 손해 보아야 참 사랑입니다.
1997년 콜롬비아 시골마을 산토나의 파블로라는 한 젊은이가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런데 그는 반군에게 잡혀 인질이 됩니다. 반군은 이 군인들의 목숨 값으로 정부에 자신들의 포로들을 석방하라고 합니다.
군 복무하다 그렇게 된 것이니 아들을 살려달라는 아버지의 청원에도 정부는 반군과의 타협은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파블로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거리로 나가 200만 명의 서명을 받아냅니다. 하지만 역시 나라에서는 원칙을 바꿀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그렇게 10년이 흐르고 모두 아들을 포기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연히 반군이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에 아들이 생존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만 포로가 되어 고생하게 할 수 없다며 자신도 쇠사슬로 손을 묶고 산토나에서 보고타까지 1,200km가 되는 길을 46일 동안 걷습니다. 이 이야기가 매스컴을 타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 행진에 동참했고 보고타 입성 때는 수많은 인파가 그를 맞아주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후에도 아들의 석방을 외치며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를 비롯해 프랑스, 스페인, 독일까지 행군을 계속했고, 바티칸에 이르러 베네딕도 16세 교황을 만나 위로를 받습니다.
이렇게 국제 여론이 뒤끓고 교황청까지도 가세하자 콜롬비아 정부도 파블로의 석방을 두고 반군과 협상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기나긴 협상 끝에 2010년 파블로는 아버지 곁으로 올 수 있게 되었고 그가 직접 아버지 팔에 감겨있는 쇠사슬을 풀어주었습니다.
줄 것이 하나도 없을 때 비로소 참으로 줄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가진 것을 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을 주어야 참 사랑입니다. 자신 안에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자신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을 때 하느님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머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방탄소년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7명으로 구성된 우리나라 가수입니다. 이 가수가 미국의 가요 순위에서 1위를 했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많은 팬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어로 노래를 하는데도 외국인들이 노래를 이해하고 있으며, 기꺼이 따라부른다고 합니다. 어째서 한국의 가수가 미국의 가요 순위에서 1위를 했고, 국가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이 좋아할까요? 방탄소년단의 무엇이 사람들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게 하고,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까요? 방탄소년단을 취재한 사람은 그들의 성공 비결을 몇 가지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소통’입니다. 방탄소년단은 노래로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노래를 시작하게 된 시작부터, 소소한 일상의 삶은 함께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해가는 방탄소년단에게서 자신들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우상이 아닌, 자신들과 같은 친구라는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발적인 팬클럽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전략’입니다. 방탄소년단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노래를 먼저 인터넷 공간에 알렸습니다. 팬들은 그들의 노래를 이웃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방탄소년단의 노래는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에게 전해졌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야기는 6억 명에게 전해졌을 때, 방탄소년단의 이야기는 12억 명에게 전해졌다고 합니다. 인터넷의 공간에서는 방탄소년단의 힘이 트럼프 대통령보다 강하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선한 영향력’입니다. 방탄소년단은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는 행사에 함께 하였습니다. 헌혈을 통해서 아픈 사람들과 함께하자고 했을 때, 팬들은 기꺼이 헌혈에 동참하였습니다. 물이 부족한 사람들을 도와주자고 했을 때, 팬들은 모금해서 전달하였습니다. 헌혈도, 모금도 모두 방탄소년단의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여학생은 방탄소년단을 통해서 팔레스타인의 여학생을 도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두 민족은 오랜 세월 서로 싸웠지만, 방탄소년단을 통해서 학생들은 서로에게 평화의 손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넷째는 ‘음악성’입니다. 방탄소년단은 모든 노래를 스스로 작사, 작곡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노랫말은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고,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들의 음악은 감미로우면서도 강력하였고, 신선하였습니다. 소통, 전략, 선한 영향력이 있어도 결국 가수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음악성’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방탄소년단이 그들만의 음악을 계속 추구한다면, 비틀스와 같은 음악인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생각났습니다. 방탄소년단은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통’을 강조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을 신학적으로 ‘육화’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소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전략’을 말하였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계명을 알려 주셨습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권위와 율법이라는 전략을 폐기하셨습니다. 희생과 나눔이라는 전략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영향력’을 말씀하셨습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까지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까지 내주라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그대로 남겠지만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선행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임을 알려주었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자비와 용서가 승리한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고, 우리를 위해서 죽었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은 새로운 권위가 있었고, 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습니다. 참된 행복에 대한 말씀은 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소경, 중풍 병자, 나병 환자, 귀머거리, 앉은뱅이를 치유해 주셨고,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든 표징은 하느님께 대한 굳센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언제나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강력한 표징은 ‘십자가’였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걸림돌이었던 십자가는 구원을 향한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돈도, 명예고, 권력도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방탄소년단이 보여 주었던 것들입니다. 그것은 이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오늘 성직자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오늘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장재봉 신부님
오늘 복음말씀은 요한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이 말씀이 제자들의 기억에 생생했던 말씀이라 싶고 마음 깊이 새겨진 내용이라 짐작하게 됩니다. 루카 사도는 그날 제자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말씀대로’ 실행한 후에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라며 주님 앞에서 자랑스런 보고를 드린 사실을 알려주는데요.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의 신바람 나는 보고를 기대하실 것을 깨닫게 됩니다.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의 해결만 청하고 있는 우리의 누추한 기도가 죄송해집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옛날, 아모스 예언자가 지적했던 끔찍한 죄악들이 만연해 있습니다. 아모스의 살벌한 경고를 들어야했던 당대의 끔찍한 부패지수가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불공정 거래로 인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나 힘 있는 자들에 의해서 자행되는 억압과 갈취도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합니다. 나아가 1% 부자들의 무절제한 사치와 가난한 자들의 궁핍한 삶의 모습까지도 정말로 똑같이 ‘닮은 꼴’인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 옛날에 주님의 성심을 괴롭혔던 일들이 이렇게 고스란하다니,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요?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세상을 쫓아 “교만을 부리고 목을 빼고 걸어 다니면서 호리는 눈짓을 하고 살랑살랑 걸으며 발찌를 잘랑거리며”(이사 3,16) 지내지 않을까 싶어 정말 두렵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신 주님의 당부는 한 점 한 획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날과 똑같이 우리 모두가 아모스 예언자처럼 세상을 일깨우기 원하십니다. 그날 당신의 제자들을 가르쳐 파견하시던 그 심정으로 오늘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죄에 엉킨 세상의 죄악을 폭로하고 그분의 정의와 사랑을 알려 세상을 구하도록 촉구하십니다. 당신의 제자인 우리가 당신의 명령을 가정과 일터에서 똑바로 감당하며 살아주기를 당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막중한 사명의 무게를 느끼고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또 원하십니다.
이리 살피니 오늘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를 향하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실까 싶습니다. 결코 편치 않으실 것이라 싶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당신의 일을 묵묵히 행하라”는 당부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부탁을 귓등으로 흘리고 살아가는 우리이니 말입니다.
문득 쉴 틈 없이 분주하신 주님의 일정이 떠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단 한 번도 ‘너무 바빠서 지친다’라거나 ‘너무 일이 많아서 못 견디겠다’라거나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것을 알아 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기억났습니다.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늘 예수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제 삶의 면면에 얼굴이 화끈했습니다. 물론 사제의 빽빽한 일정은 주님의 일인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하지만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이 그날 소화해 내야 할 일거리에 묶여 있기 일쑤입니다. 과연 주님께서 저에게 원하는 것이 매일 착오 없이 일을 처리하는 것은 아닐 텐데도 말입니다. 때문에 묻게 됩니다. 여러분의 하루는 어떠신가요?
예수님을 위한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늘 ‘할 일의 목록’이 가득하다면 몸도 마음도 지쳐서 기쁨을 잃고 지내게 될 것입니다. 기쁘게 시작한 예수님의 일을 결국 불평과 불만으로 끝내게 될 것입니다. ‘잘하고 싶다’는 원의가 지나쳐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되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까지 벌어질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답답한 상황은 발생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상황은 스스로 만든 ‘기준’에서 빚어진 조바심일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와 같지 않은 상대에게 불만하고 성에 차지 않아 불평하는 일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평화와의 거리가 멀어지게 합니다. 결국 교회의 일에서 주님은 없고 그분의 일을 하면서도 그분과 동떨어져 지내는 결과가 벌어지고 맙니다.
모두 주님을 내 안에 모시지 않은 결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행위를 평가하거나 우리의 충실도를 평점하는 분이 아니며 오직 당신 안에서 기쁘고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은 소치입니다. 스스로의 목표와 자신의 기준이라는 율법주의를 숭배하는 모습입니다. 섬뜩한 신앙의 오류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복종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의 뜻에 순명하여 더불어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요한 17,13)이 당신의 뜻임을 분명히 일러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세상에서 모자라고 상대에 비해서 덜떨어지더라도 그저 주님 안에서 기뻐하기를 가장 바라신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무엇을 더 잘하기 위해서 경쟁하며 노심초사하는 것, 누구보다 앞서려고 애쓰며 힘들어하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실천한다면서 기쁘고 평화롭지 못한 것을 예사롭게 넘길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마치 내가 무엇인가를 해 드려야만 되는 종속관계로 추락시킨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핵심적 성품인 ‘거룩’한 삶으로 도약할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전교의 ‘주의사항’을 들려주십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분 닮은 거룩한 삶은, 재어 놓은 빵과 쌓아둔 옷가지 등의 세상 능력으로는 결코 얻을 수가 없다고 알려주십니다. 우리에게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넘어선 사랑의 권능이 주어졌습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고치고 세상에 생명을 선물하는 힘이 부어졌습니다.
이 주간, 자칫 세상 것들로 허술해질 수 있는 영혼의 끈을 그분께로 단단히 동여매야겠습니다. 하늘 사도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선물해주신 권능을 잃지 않아야겠습니다.
당신의 주의사항을 잘 지킬 때 우리는 모두 평화의 사도로 돋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을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 3,15-17)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
안병욱 신부님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줄임말로,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서 유행하는 단어입니다. 원래 ‘소확행’이라는 말은 『랑겔한스섬의 오후』라는 책에 처음 소개 되면서 알려졌습니다. 예를 들면,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말린 속옷이 서랍 안에 잔뜩 쌓인 것 을 볼 때,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을 때, 방금 구운 빵을 찢어서 먹을 때 등 아주 작고 소소한 것이지만 항상 가까이에서 쉽고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것들을 통해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야속해 보이는 말씀을 하십니다. 힘 들고 어려운 파견에서 든든히 준비를 해도 모자랄 텐데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돈도 가져가 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고 강조하십니다. 먹을 것이 많고 소유하고 있는 것이 많으면 당연히 거기에 신경을 쓰게 되어 자신의 본래 사명과 역할 에 소홀해질 뿐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의지도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것들에만 가치를 두는 삶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돈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의 삶은 불행해지고 황폐해집니다. 신문 지상이나 보도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처럼 돈이 관계의 중심에 있게 되면 그 돈 때문에 부모를 버리고 형제와 다투고 왕래도 없는 비참하고 불행한 관계가 되어버리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의지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둘 때 우리의 삶은 풍성해 지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늘 행복하기를 바라고 행복을 찾아나서는 우리입니다. 어디에 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까? 우리는 행복에 대해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 만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기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 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가까이에서 확실하게 실현할 수 있는 행복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 하고 부족하더라도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일 것입니다.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
강형섭 신부님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무엇을 하는 것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가?
천수답 논에 비가 오지 않아 벼가 말라 들어가면 농부의 마음은 애간장이 탄다. 드디어 한줄기 소낙비가 내린다. 도랑에 물이 콸콸 넘치면서 마른논에 물이 들어간다. 농부의 이 기쁨…이런 기쁨에 버금가는 것이 바로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다.
식탁에 차려진 온갖 푸성귀와 열매들은 천수답처럼 하느님께서 허락하여 주신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입에 넣어주시는 온갖 열매들과 음식들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입으로 하느님 사랑을 받아먹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은 음식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 장소가 됩니다. 건강한 흙에서 나온 열매들을 먹음으로써 나는 하느님 사랑을 나의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아, 행복하다.”
녹두전, 계란, 블루베리, 자두, 녹미, 수수, EM, 주방용 세제, 천연 탈취제, 액체물비누 등등… 이러한 유기농산물을 유통하기 위해 주교회의에서(1994년)는 각 본당에 우리농나눔터(매장)를 만들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현재 교구는 35개의 유기농나눔터가 있습니다.
농민은 퇴비로 땅을 살리고 건강한 먹거리를 가꾸고, 그 농산물을 먹는 도시 소비자는 유기농산물을 이용하며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동참합니다. 이처럼 유기농산물을 먹음으로써 몸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또한 하느님 사랑을 몸으로 드러냅니다.
오늘 농민 주일을 통해 각 본당 우리농나눔터에서 유기농산물 10% 할인행사를 실시합니다. 아메리카노 한 잔과 케익 한 조각을 자연스럽게 사드시듯이, 우리농 유기농산물도 이처럼 생활 속에서 기쁨으로 구매되어지면 좋겠습니다.
내 자식 입에 밥 들어갈 때 행복합니다.
바로 가족이 함께하는 우리의 식탁을 유기농산물로 채우며, 하느님이 주신 이 축복된 시간들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길을 떠날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
최규하 신부님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최후 만 찬 때에 몸소 허리를 굽혀 그들의 더러운 발을 다정스레 씻 어주십니다. 이 부분을 묘사하며 요한 복음은,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 13,1)고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런 사랑 가득한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입 니다. 복음을 선포하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 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 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라고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 신 제자들이 이제 막 떠나려고 하는 이 길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예수님은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양 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라며 세상에 파견되는 당신 제자들에 대한 깊은 염려를 드러내기도 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 게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 까요? 그렇게 염려스럽다면, 오히려 그들이 길을 떠나기 전 에 이것저것 꼼꼼하게 짐을 챙겨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조카가 있는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친구가 문밖 을 나설 때면, 형수님과 형님은 유모차부터 해서 기저귀와 여벌 옷, 이유식과 간식 등 온갖 짐을 바리바리 챙기곤 하 더군요. 하지만 커다란 가방에 빈틈없이 들어찬 이 무거운 짐을 조카에게 내며 “이건 네 짐이니까 네가 들어!”라고
이야기하진 않습니다. 꼼꼼하게 짐을 챙겨 들고 다니는 것 은 형님과 형수님의 몫이고, 어린 조카는 그저 사랑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해맑게 발걸음을 옮길 뿐입니다. 문밖을 나서는 자녀에게 부모님이 ‘식량도 여벌 옷도 가 져가지 말라’고 이야기한다면, 이는 매정함의 발로가 아니 라 오히려 지극한 사랑의 돌봄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얘 야,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네가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고 마 련해줄 테니 걱정 말렴!”하고 안심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누구보다 사랑했던 제자들을 파견하는 길입니다.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한데, 마치 유배 보내듯 빈털터리로 내쫓을 리가 없 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 하심은, “필요한 것은 아버지께서 함께하시며 다 마련하실 터이니, 너희는 그저 그 분을 믿고 복음 선포에 전념하여라”라는 말이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갖가지 현실적인 염려 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겠지만, 온갖 걱정에 파묻혀 불 안해하며 하느님을 잊고 지낼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아버 지 하느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담대하게 발걸음을 내디딜 것인지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너희는 무엇 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 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 12,29.31)고 말하신 예수님의 마 음에 머무르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전하기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지난 한 주간도 즐겁게 잘 지내셨나요?
날씨에 대해서 지난 주에 했던 말이 후회됩니다.
이제 대구에서는 본격적으로 대프리카를 느끼게 하는 무더위가 시작되나 봅니다.
그래고 이번 여름은 더위가 더 극성을 부릴 것이라니까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ㅠㅠ
형제 자매님
더위에 건강조심하시고 주님 사랑을 듬뿍 느끼는 행복한 주일이 되시길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 독서들은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파견되는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 방식으로 전해야 한다고 깨우쳐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구약의 예언자를,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리고 제2독서에서는 오늘의 우리들을 언급합니다.
제1독서에 구약시대에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임무를 띤 예언자의 활동을 전해줍니다.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예로보암 2세의 통치시기로, 왕국은 부강하였으나 부유층이 빈곤층을 착취하였고, 경건한 신앙심은 사라지고 화려한 종교 예식이 성행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아모스를 파견하셨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람답게 왕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러자 당시 제사장이었던 아마츠야는 아모스의 등장으로 자신의 자리가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그를 추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자신은 세속적인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이 무식한 농부에 불과했는데 하느님께 사로잡혀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베텔의 사제들은 베텔 성소를 하느님의 성전이 아니라 임금의 성전으로 바꿔놓았습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에게 아부하면서 임금이 듣기 원하는 말을 해주면서 경제적인 부를 누리고 안정된 생활을 영위했던 것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임금까지도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고 그 뜻에 따라 백성들을 다스려야함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무엇보다 정의를 강조했습니다.
형제 자매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장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의 전교 활동을 통해 당신의 구원 활동을 계속 수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더러운 영은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대사제의 기도)인 요한복음 17장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신 것은 당신의 제자들 곧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더러운 영의 활동을 방관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전교여행을 다닐 때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동안 먹고 입고 자는 등등의 경제적인 것은 온전히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드리고 복음 선포에만 몰두하라는 당부입니다.
그리고 어느 고장에 가든지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한 집에 머물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집 저집 골고루 머물러야 동네 사람들의 경제적인 손해도 덜 끼치고 그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시기와 질투도 막을 수 있을 것인데 왜 그렇게 말씀하실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나중에 그들이 떠나더라도 그 가족들을 중심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이 머물렀던 그 집에 사랑의 화롯불을 피워놓고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떠나도 그 가족들이 사랑의 불꽃을 계속 살려나가면서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사실 복음은 말보다는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모습을 통해서 더 확실하게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혼자가 아니라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처음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를 돌아본다면 누군가의 뛰어난 설명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에 신앙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정의보다 사랑을 강조하셨고 사랑의 하느님 아버지를 알려주셨고 전하게 하셨습니다.
형제 자매님,
제2독서에서 바오로사도는 그리스도 신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엄청난 은총을 열거한 다음,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세우셨던 구원 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났다고 가르쳐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세상에 파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페소 교회의 신자들에게 하셨던 이 말씀은 오늘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천지창조 이전에 선택을 받았고 예수님의 수난공로로 죄의 용서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은총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복음입니다.
이렇게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복음을 전할 의무를 지니게 됩니다.
모든 사람 나아가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큰 은총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드리며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할 복음을 먼저 가족들 사이에서 실천합시다.
그러면 우리 가정이 이웃들에게 복음을 증언하는 사랑의 화롯불이 되어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환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형제 자매님의 가정에는 그 화롯불이 타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 화롯불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 사랑을 실천합시다.
분명히 온 가족이 더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
김양수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 앞에 있는 한 존재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회칙<찬미 받으소서!>를 내시며 그 서두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공동의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지난 3월,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는 GMO완전표시제 시행을 촉구한다는 국민 청원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20만 명의 청원이 채워졌고 지난 5월 8일 정부의 답변이 나왔습니다.
청원 답변을 요악하면
1. 현재 1차 가공품 기름, 전분, 당의 원로로 GMO가 쓰이고 있다.
2. 많이 수입하고 있는 품목 대두의 자급률 즉, 우리나라에서 농사지어 생산되는 대두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3. 소비자의 알 권리도 중요하지만 완전 표시제가 시행될 경우 그에 따른 물가인상, 소비계층 간의 위화감, 통상마찰 우려가 있으므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우리나라에 적용 가능한 수준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답변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GMO 완전표시제는 보류되었습니다.
정부의 답변을 모두 믿는다고 하더라도 1차 가공품들을 통해 생산되어지는 2차 가공품들은 어쩌라는 것입니까?
GMO 원료를 사용하는 식품기업들에 비상이 걸렸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물가가 인상되고 소비 계층의 위화감이 생겨난다는 것이 스스로 GMO 식품의 유해성을 인정한 것이 아닌지요.
통상 마찰을 우려해서 국민들을 위험한 먹거리로 내몰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 농업을 살려 자급률을 높이고 그러한 양질의 것을 소비가 어려운 계층도 누릴 수 있도록 복지를 늘리는 것, 그것이 정부가 할 일입니다.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회칙 <어머니요 스승> 144항에서 “사람이 노동으로 유지되고 가꾸어지는 농업은 ‘숭고한 일’이며 세상의 드넓은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농업은 ‘모든 생명’과 연관되어 있기에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농업의 문제는 바로 생명의 문제입니다.”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처럼 농업은 인간 노동의 근간을 이루며, 농민은 생명을 지향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구현하는 존귀한 노동자인 것입니다.
교회는 생명 농업의 가치를 추구하며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農’ 운동은 현세대 농민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세대와 都農공동체 모두를 살리기 위한 운동이며, ‘우리 農’운동을 통해 건강한 우리의 식량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보시니 좋았고 온갖 것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시어 번성하게 사신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農’에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돈 안 되는 헛일
권오준 B.루치아노 신부님
무더운 여름 땅을 일구며 사는 한 농부가, 도시화의 세련됨이 가득한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어쩌다가 듣는 질문이 있단다.
“그게 돈이 됩니까? 참 힘들게 돈 버시네요.” 라고. 깨끗한 시골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산지 이제 5년 남짓 된 농부가 전해준 이야기이다.
몇 수를 내다봐야 하는 바둑판에서 인공지능이 승자가 되고, 드론이 하늘위로 붕붕 날아다니며 다양한 각도로 촬영을 하여 실시간으로 전해주고, 운전자 없는 승용차가 자율주행을 하며 도로를 달리는 세상에, 흙을 만지며 사는 것을 바라보는 도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뒤쳐지고 원시적인 것으로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종일 자기 몸을 움직이며 노동을 하더라도 순응할 수밖에 없는 자연이 정해준 날씨에 결과를 맡기며 살아야하니, 참으로 시스템적이고,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수시로 결과를 바꾸며 사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늘 재화가 중심이니 모든 삶의 주제와 요지는 당연히 돈이 되느냐 마느냐로 판가름 날것이다.
내가 만일 하느님이라면(가장 하느님답지 않은 모습으로) 그런 사람들의 꿈속에라도 나타나서는 ‘그딴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너 같은 녀석은 절대 모를 훌륭한 가치가 있지만, 나는 절대 안 알려 줄 것이다.’ 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도 반전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 농부의 대답이다.
“돈이요? 엄청나게 벌죠.”
물론, 그 농부가 생각하는 것과 질문을 한 도시인과는 그 기준의 차이가 크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기대치와 만족도에 따라 내용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임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답변이다. 발전이라는 이름하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기도 그것을 쫓아 살지 않으면 낙오되고, 도태되어 간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에게, 농부의 삶이 참으로 원시적이고 낙후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풍요로움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늘 높은 목표를 잡고 앞만 보며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농부의 그 답변은 또 다르게 들린다. “허리 펴서 하늘 한번 보고 숨 한번 크게 쉬고 일 합시다.” 라고. 그렇게 해서 크게 쉬는 숨에는 하느님의 숨결이 듬뿍 담겨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오늘따라 더욱 강해지는 건 왜일까?
누가 참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인가? -성소聖召에 충실한 사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방금 화답송 후렴을 흥겹게 노래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보이소서. 또한 우리에게 구원을 주소서.” 저에겐 ‘우리 각자 제자리에서 잘 살게 해 달라.’는 청원으로 들립니다. 얼마전 읽은 글귀도 잊지 못합니다.
“완벽한 건강은 없다, 과도한 절망이 문제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가 환자가 될 사람이다. 아프면 수긍하고 고쳐나가고 개선해 나가고 그렇게 대응하는 것이 맞는 방향이다.”
참 공감이 가는 말마디입니다. ‘건강’대신 ‘삶’을, ‘일’을 넣어, ‘완벽한 삶은 없다. 과도한 절망이 문제다.’, ‘완벽한 일은 없다. 과도한 절망이 문제다.’로 바꿔 말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배밭 재봉지 싸는 자매들 역시 완벽하게 배봉지를 싼 것 같았는데 빼놓은 배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과도한 절망없이 각자 하느님 불러주신 제자리에서 제사명에 충실하면 충분합니다. ‘누가 참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입니까? 성소聖召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수도원에는 여러 마리의 개와 고양이도 함께 삽니다. 외관상 걱정없이 건강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집집승과는 다릅니다. 고양이와 개들은 ‘생각없이’, ‘의식없이’, ‘영혼없이’, ‘의미없이’ ‘자각自覺없이’ 그냥 잘도 살아갑니다. 어쩌면 사람도 육적 욕망만 채우면서 이렇게 본능대로 살아갈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듭니다.
정말 사람이라면 이렇게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생각하면서 의식하면서 의미있는 삶, 영적 삶을 추구할 것입니다. 한 번뿐이 없는 삶, 하느님 불러 주신 각자 삶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참나’를 살아가는 이들이 참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지위도 자리도 재산도 재능도 지식도 보지 않습니다. 각자 불러주신 제자리에서 충실히 책임을 다하는 모습만 보시고, 이런 이들을 신뢰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강우일 주교의 담화문도 구구절절 공감이 갔습니다.
강주교는 “농민들은 이 땅에서 생명을 심고 지키는 사도들”이며, “이 생명의 수호자들에게 우리는 기도와 힘을 보태야 하며,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세상 안에 생명을 심는 농민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복이 충만하기를 기원한다.”라며 담화문을 끝맺습니다.
농부를 지칭해 ‘생명의 사도들’, ‘생명의 수호자들’이라는 표현이 참 신선했습니다. 세상 어느 직업의 사람들에게 이런 칭호를 붙여줍니까? 예수님의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는 고백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농부로 살다가 하느님께 불림받은 제1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의 모습은 얼마나 위풍당당한지요.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 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제자리에서 받은 사명을 충실히 실천하며 ‘참나’를 사는 이들이 실로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참나’를 잊고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시간 탕진하며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며 사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마침 이번 주일 가톨릭평화신문 12면을 가득 채운 우리 분도수도자들의 대선배 사제서품 60주년을 맞이한 왜관수도원의 초대 오도 하스 아빠스(87)에 대한 인터뷰 기사중 특히 다음 대목이 감동적이었습니다.
“1971년 2월 초대 아빠스 사임 즉시 후임인 한국인 아빠스가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한국을 떠났다. 일본 성 요한 수도원에서 10년간 있었고, 1981년부터 필리핀 민다나오섬 남쪽에 디고스 수도원을 설립해 20여젼 생활했다. 2004년 한국에 와서 1년간 살다가 로마 성 바오로 수도원에 파견되어 고해사제로 생활하다 이후 1년간 대만 수녀원에서 1년 지도신부로 지내다, 2009년 내 첫사랑인 왜관수도원에 돌아와 살고 있다.”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그때 그자리에서 충실히 사명을 다한 아빠스의 파란만장의 ‘순종의 여정’, ‘믿음의 여정’이 참 아름답습니다. 누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입니까? 바로 아모스 예언자같은, 오도 하스 아빠스같은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그자리에서 충실히 사명을 다하며 ‘참나’를 사는 분들입니다. 이런 각자의 성소에 충실한 분들의 특징이 오늘 말씀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 늘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가 바로 우선 순위를 말합니다. 하느님과의 일치의 관상에서 흘러나오는 활동이 바른 순서입니다. 파견 선교에 앞서 하느님과의 일치가 우선입니다. 아니 우리 분도수도자들에겐 ‘전례’가 ‘선교’가 되기도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찬미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기쁨은 없습니다. 주님을 끊임없이 찬미하는 것이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의 참행복이요 첫째 의무입니다. 감사의 찬미를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요 기쁨과 평화의 선물입니다.
오늘 제2독서의 찬미가 참 아름답고 장엄합니다. 무한한 영적의미의 보물창고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은혜로운 신원이 잘 드러납니다. 주어는 온통 하느님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이 넘치도록 풍부합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 1장 3절에서 14절까지는 그리스어로 한문장입니다. 그야말로 숨을 멈추지 않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진 은총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매주 월요일 저녁 성무일도때 마다 에페소서(1,3-10) 찬미가를 노래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 찬미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축복의 사랑입니다. 찬미의 은총이 날로 성소에 충실하게 합니다.
둘째, 자발적 가난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찬미의 관상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웃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안에 내적으로 정주하되 끊임없이 떠나 예수님을 따르는 성소자들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를, 부수적이 아닌 본질적 삶을 사는 이들에게 자발적 가난은 필수입니다.
불러주신 하느님께서 내외적으로 보이지 않는 보물로 가득 채워 주셨기에 이런 자발적 가난입니다. 역설적으로 살아있는 참보물 하느님을 모셨기에 진정 내적 부요의 행복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행복선언 1항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6,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역시 제자들을 당신의 능력으로 가득 채워 주신 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최소한도의 소유물입니다. 참으로 가벼운 옷차림에 홀가분한 마음이 부럽습니다.
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가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온전한 이탈의 무욕의 자유로운 삶을 통해 하느님의 도구로서 사명을 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일에, 불러 주신 성소에 충실한 자들이 굶어 죽는 일은 없습니다.
어디에 머물든지 제자들은 의식주에 초연하며 민폐를 끼치지 말라 하십니다. 또 받아들이지 않으면 집착하지 말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처럼 지체없이 훌훌 떠나라 하십니다. 참으로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내적으로 참 자유로운 사도들의 삶이자 우리의 소망이자 꿈이기도 합니다.
셋째, 복음 선포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합니다. 복음선포는 회개선포로 이어집니다. 떠남의 목적이 드러납니다. 하늘나라의 선포요 회개의 선포입니다. 회개가 우선입니다. 하여 이 거룩한 미사도 군더더기 없이 참회를 통해 죄의 용서부터 받고 시작합니다.
회개할 때 겸손입니다. 회개와 겸손은 한셋트입니다. 회개없이는 겸손도 은총도 없습니다. 회개의 메타노이아가 있어 친교의 코이노니아가 있고 디아코니아의 봉사가 있습니다. 우선순위의 첫째에 자리하고 있는 회개입니다.
회개의 선포와 더불어 제자들은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줍니다. 바로 회개의 열매가 이런 치유은총입니다. 회개의 선포에 앞서 선포자의 회개가 먼저입니다. 하여 성소자들에게 필히 요구되는 바 끊임없는 회개와 기도입니다. 이래야 주님을 닮아 각자 파견받은 삶의 제자리에서 ‘선포자’와 ‘치유자’로 살 수 있습니다.
누가 과연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입니까? 주님은 오늘 연중 제15주일 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각자 하느님 불러 주신 성소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불러 주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받은 사명을 충실히 실천하며 ‘참나’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구체적으로 1.늘 감사의 찬미를 드리는 사람들, 3.자발적 가난을 택한 사람들, 3.복음선포에 충실한 사람들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자작 좌우명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첫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1년생 작은 나무가
이제는 30년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
그대 있음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대 있음에 두렵지 않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희뿌연 척박한 삶을 지탱해줄
돈 명예 지위 온갖 보호막조차
미련 없이 아낌없이 내던지고
오직 주님만 품에 모시고 걸어야 할
파견 받은 이의 고단한 여정에
볼 수 없는 주님께서 짝지어주신
보이는 그대가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 있음에 외롭지 않습니다.
어두운 세상의 거대한 거센 흐름을 거슬러
생명 사랑 정의 평화의 복음을
당당하게 선포해야 하는 힘겨움에
뭇사람 핑계 삼아 주저앉고 싶을 때
묵묵히 굳게 잡은 손 놓지 않으며
한 발 앞서 거친 물결 가르는
든든한 그대가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 있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더불어 사는 소박한 삶을 비웃는
잘난 이들의 비난과 배척에 움츠려들고
착취와 억압 죽음 같은 경쟁으로
배불리는 이들의 더러운 유혹에 솔깃할 때
주님 주신 가난으로 세상 풍요를 이기고
자신을 죽임으로써 벗들을 살림으로써
십자가 신비를 온 삶으로 드러내는
굳건한 그대가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 있음에 내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두려움 없이 외로움 없이 흔들림 없이
주님께서 보내시는 곳 그 어디이든
한 발 한 발 힘차게 내딛듯이
나 있음에 그대 역시
그러할 수 있기를.
그대와 나
삶의 시작과 마침은 다를지라도
그대와 내가 함께 하는 벅찬 여정을 마치고
곱게 짝지어 우리를 파견하신 주님의 품에서
우리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기를.
하느님의 구원계획 실현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두 가지 기본적 사상을 전해주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가지시고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에페 1,4)하셨다는 것과, 이 구원계획은 제자들의 복음선포를 통하여 실현된다는 것이다(마르 6,7-13 참조). 오늘의 중심 주제는 복음선포이다. 오늘 우리의 활동들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 계시다.
제1독서: 아모 7,12-15: 나의 백성에게 가서 말을 전하여라.
제1독서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목자이면서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인 아모스를 선택하신 것을 전혀 뜻밖의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택하실 때 하신 것같이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다. 아모스는 자신의 예언적 소명이 절대적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한다고 한다. 왕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말하는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만일에 왕의 마음에 드는 말만 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배반할 수 있다. 예언자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하느님을 선포해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거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언제 어디에서나 부정과 불의와 부패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자유로운 예언사상의 전형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바로 나자렛의 목수(마르 6,3)인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고(마르 1,14참조) 세상이 심판 받을 때가 되었다(요한 12,31 참조)는 사실을 선포한 충실성과 진실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복음: 마르 6,7-13: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구원계획을 첫 번째로 실행하시는데 아모스의 경우와 같은 모습이다. 그들의 사명 역시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적 사명이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사도들의 파견은 인간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존하라는 것이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8-9절). 즉 이 말은 그 규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한 “열정”이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리라는 무한한 신뢰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이제는 사람에 대한 신뢰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협조자가 된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10절). 그러나 때로는 거절당할 수도 있다.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복음이 선포되어 실현되고 있는 약속의 새로운 땅에 가까이 갔느냐 못 갔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전교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복음선포와 구원의 활동을 계속한다(12-13절 참조). 이렇게 교회는 세상에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반영시키고 그분의 모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성과는 어느 정도 우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현대의 복음선교 76).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우리의 복음선포가 아모스의 경우나 그리스도의 예언적 선포와 같이 권력이나 힘 앞에 항상 자유로운가?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할 용기를 항상 가지고 있는가?(로마 1,14참조).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가 아니면 우리의 능력을 믿는가? 극단적인 경우에 발바닥의 먼지를 떨어버릴 각오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다.
제2독서: 에페 1,3-14: 하느님의 구원계획-그리스도 안에 완성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계획이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10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이다, anakefalaiósasthai, recapitolare’라는 말은 전에 파괴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다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지배권을 다시 인식시키고자 하는 창조의 근본적 의미가 다시 드러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 구원계획은 우리들의 협력, 특히 교회가 실현하여야 하는 것이며, 이를 이루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비록 고달프게 느껴져도 우리가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그 사명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모스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 갈 것이다. 주님께 파견 받은 제자들과 같이 힘차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청하자.
평소에 해 보지 않았던 일에 도전해 봅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저는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시골에서는 농사만 짓고 살겠지.. 할 일이 많지 않고, 경제적으로 힘들 거야..’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섬에 들어와서,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일년 반 정도 살아보니 섬에도 할 게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농사 종류도 다양하고, 동물도 키울 수 있고, 바다에 나가 바지락도 캡니다.
또 산에는 장뇌삼이나 다른 작물들을 키우고, 면에서 하는 일이나 다른 부업들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이나 마을 주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시골에서도 욕심 부리지 않고 일하면 먹고 살만 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막연한 선입견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도 언젠가 또 깨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가 기회가 된다면 해외에 나가 현지인 선교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요.
지금 생각으로는 ‘무척 힘들겠다..’ 는 생각이 막연하게 있습니다.
‘먹는 것도 맞지 않고, 낯선 문화 때문에 힘들 거야..
지금 시골에 있는 것보다 봉사하는 사람들이 더 없어서 고생할거야..
지금은 신자들이 반찬이라도 가져다 주는데, 그곳에는 신부를 챙겨 주는 사람도 없을 거야..’하는 막연한 생각들인데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을 보면 ‘그래도 그럭저럭 살만하지 않을까..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거 같습니다.
제자들은 파견 받아 떠날 때에 빵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가져가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또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어땠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가다가 배고프면 어쩌지.. 추우면 어떻게 하나.. 어느 정도 대비를 하고 떠나야 하는 거 아닌가.. 괜찮을까...’
그렇게 막연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떠났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막상 파견 받아 떠난 그들은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어디를 가야 하는지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 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마르 6,12-13)
아마도 파견 받아 활동하는 그곳에서 먹을 것을 얻기도 하고, 잠자리를 제공받기도 했던 거 같습니다.
많이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없어도 채워주시는구나.. 사람을 보내주시고, 일을 이루어주시는구나..’
하는 체험과 함께 ‘할만하다. 살만하다.’는 생각을 했을 거 같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런 체험을 만들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평일 미사 나가는 걸 감당할 수 있을까.. 말씀대로 살아볼 수 있을까...
지금 이 봉사를 하게 된다면 너무 빡빡한 일정이라 고단할 텐데..
내가 가진 이걸 봉헌하면 경제적으로 힘들어지지 않을까...’
하고 한 발짝도 더 나아가기를 주저하기보다,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평소에 해 보지 않던 일에 도전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을 이루어주시고 채워주시고 살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느님을 더 분명히 느끼게 될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박원순씨의 책에서 본 글)
영어 단어 ‘Donation’을 ‘기부’라고 해석하면 재미가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 말로 ‘돈 내시오.’ 하면 발음도 뜻도 얼추 맞아떨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내면 고수가 아닙니다.
영어 발음은 나라마다 조금씩 틀리지요.
‘Donation’을 영국식으로 하면 ‘돈 내시옹’이지만,
미국에서는 ‘더 내시옹’,
호주에서는 ‘다 내시옹’으로 변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 6, 7-13(연중 15 주일)
우리는 모두 각자 사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사명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그것은 신원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원에 대한 각성이 자신의 사명을 충실하게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파견 받은 이”라는 신원에서 주어집니다. <제1 독서>에서 아모스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파견 받음에서, <제2 독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아버지로부터 파견 받음에서, 그리고 <복음>에서 열두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음에서 그 사명이 주어집니다.
오늘 <제1 독서>는 남 유다의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 와서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자, 사제 아마츠야가 그를 위협하며 쫓아내는 장면입니다. 왕실 사제인 아마츠야가 자신을 반대하는 아모스를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은 자신의 신원과 권한이 침해당하고 위협당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득권을 놓을 수 없어, 일종의 제도권의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처럼, 말씀의 선포는 아프게 찌르기에 때로는 받아들여 지지 못하고, 주변부로 내쳐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역사 속에는 흔히 말하는 말씀의 유배 시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내쳐졌고,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성문 밖에서 매달리어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오늘 <제2 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소아시아의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옥중서한의 서두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시어 그분의 피를 통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고, 이 사명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성령을 파견하셨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과,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제자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 마치 <제1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아모스를 붙잡으셨듯이, <제2 독서>에서 우리를 창조 이전에 이미 선택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 7).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파견 받은 자에게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곧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가지지 말며,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마르 6, 8 참조)고 제시하십니다. 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여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성경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너무도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기만 하면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인 이 지팡이, 그것은 곧 “말씀의 지팡이”입니다.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요, 쌍날칼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하느님의 권능인 이 말씀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가?
그래서 말씀의 권능에 위탁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파견 받은 이들이 한 일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6, 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 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을 하여야 함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권능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파견 받은 자임을 돌이켜보고, 내가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어디서 능력을 받는가? <마르코 6, 7-1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믿음을 증거하는 그리스도 신자의 삶은 하느님으로부터 모두가 능력을 받고 복음 전파를 위해 파견됩니다. 우리는 모두 언제 어디서 능력을 받습니까? 어떤 능력을 받고 복음 전파에 파견되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스스로 잠깐 머물러 생각하고 다음 글을 보십시오. 세례 성사 때 능력을 받았습니다.
< > < > < > 또한 견진 성사 때 받았습니다. < > 미사 때마다 받고 파견식에 참석합니다. < > < > < > 그 외 각자의 신분에 따라 혼배성사와 신품성사, 병자성사. 모두 권한을 받고,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능력을 갖춘 이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받았는지 모르고 살면 올바른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해답은 글의 끝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스스로 몇 점이나 받았는지 비교해보십시오.
받은 사람은 받은 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선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파견되고 만나는 사람과 평화를 누리고 억지로 전해주지 말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즉, 파견자에게 봉사와 섬기는 자세,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나누어 주는 자세, 친교는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같이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끝으로 파견자는 참고 견디고 어떤 사람에게든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는 말은 아무런 사심 없이, 무엇을 기대하는 마음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냉정하고 매몰차게 버리고 떠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파견자는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으로 주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너보다 조금 더 안다고, 인정받고 산다고 만나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냉정하지 않은 온화하고, 부드럽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사도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 번째 해답; 그리스도의 <왕직> <사제직> <예언직>
두 번째 해답; 성령의 칠은과 그리스도처럼 진리를 증거하는 삶입니다.
세 번째 해답;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과 <일치>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
머물든 떠나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이 프란치스코와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는 복음이라는 것을 프란치스칸들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저도 오랫동안 프란치스코가 이 복음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복음 말씀대로 복음을 선포하는 순례자와 나그네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사실 때문에 오늘 복음을 순례자와 나그네 영성의 관점에서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뜯어보면 정주 영성의 측면도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어느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파견 받아 가는 삶도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요, 한 곳에 정주하는 삶도 주님이 원하시는 삶인데 관건은 정주하든 떠나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종종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좋을 대로 그리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무작정 떠나고 싶고 어떤 때는 꼼짝도 하기 싫으며, 어떤 사람은 좀체 떠나려 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여행을 즐겨합니다.
그러니 한 곳에 머물건 떠나건 그것은 자기 상황이나 취향대로 사는 것이지 주님의 성소를 사는 것도 영성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정주영성의 깊은 뜻은 머무는 곳만 정해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모두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인이시고 그래서 주인이신 하느님이 정해주시는 대로 모든 일을 하겠다는 겁니다.
이는 우리 인간이 무엇이든 자기 좋을 대로 하려 하고, 심지어 하느님의 일마저 자기 좋을 대로 하고자 하는 그릇된 자유본성에 대한 극복이요 위대한 자기포기인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이 안정희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떠나기를 원하시는데도 안정을 깨고 싶지 않아 안정에 안주합니다.
정주를 해야 하는데 안주를 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칸의 순례자와 나그네 영성도 마찬가지로 이 안주 본능에 대한 극복이요 위대한 자기포기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칸 영성의 궁극적 목적이 자기 극복과 포기는 아니지요.
나를 위해서는 이 세상에 안주치 않고 하느님께 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거요,
이웃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파견을 받아 하느님을 전하는 거지요,
오늘 파견을 받는 주님의 제자들처럼 하느님을 모르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기에 가는 것도 두 가지입니다.
나의 천국행을 위해서는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고, 이웃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복음을 들고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 다 가는 것이기에 아무 것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따르라 주님 말씀하시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지니지 말고 복음만 들고 떠나라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전에 얘기했듯이 인도적인 사업을 하기 위해서라면 돈을 가져가야 하고 그래야 환영을 받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만 가져가면 되고 나머지는 다 하느님께만 온전히 의지하면 됩니다.
돈을 가져가면 돈에 의지하려 하기에 오히려 복음 선포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만 가져가서 복음을 전하고, 아무 것 없이 가서 오직 주님의 힘으로만 복음을 전하라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입니다.
"너희 발 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놓아주어야 할
순간 순간 일어나는
우리의 모든 감정입니다.
감정도 닦아주어야
밝아질 수 있습니다.
먼지 조차
소유할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발밑의 시간도
감사하며
나누는 것입니다.
헛된 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발밑의 먼지같은
감정도 주님께
봉헌합니다.
우리가 일으킨
먼지이기에 우리가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
나가야 할 모든
시간입니다.
생명은 먼지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먹거리를 위해
애쓰는 농민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정직한 농민들의
농작물이 제대로
대접받는 사회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믿고 먹을 수 있는
건강한 먹거리가
제대로 유통되어
농민들이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땀방울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먼지야 주님을
찬미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