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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2서 시작 1,1-5.11ㄴ-12
1 바오로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테살로니카 사람들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2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3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 때문에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나고 저마다 서로에게 베푸는 여러분 모두의 사랑이 더욱더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 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5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11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12 그리하여 우리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따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3,13-2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4)·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17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19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21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22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무엇이 더 중요하냐?”>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산상설교'를 통하여 여덟 가지의 '행복 선언'(마태 5,3-12)을 들은 바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후기에 이르러, 일곱 가지의 '불행 선언'(마태 23,13-36)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세 번째까지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 불행 선언은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 곧 그들의 잘못된 신앙이 사람들이 구원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음에 대한 경고입니다.
두 번째 불행 선언에서는 그들의 그릇된 인도, 곧 그들의 행실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빠뜨리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사실 이미 신자 된 이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이들, 곧 성직자들의 잘못된 행실임을 일깨워줍니다.
세 번째 불행 선언에서는 자신의 신앙과 경건함을 과시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심지어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해 맹세를 남발하고 있는 눈먼 인도자들을 경고하십니다.
결국 이 모두는 그들이 가치관의 혼란에 빠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고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잃어버린 까닭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마태 23,17-18)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19.)
곧 일을 잘 하는 것이냐, 사랑으로 일하는 것이냐?
나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냐?
내 자신이냐, 주님이신 하느님이냐?
하느님이 계신 곳이냐,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이냐?
그러니 먼저 앞세워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맑고 명료한 분별과 그를 따를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라.”
(마태 6,33)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먼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원하는 바를 행하십시오.
충고하더라도 사랑으로 충고하고, 침묵하더라도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마태 23,17)
주님!
저는 참으로 어리석고, 눈 먼 자입니다.
함께 계시는 당신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있으니, 진정 눈 먼 자입니다.
저의 무지를 받아들이기보다 저의 주장을 앞세우니, 진정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나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나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성사가 되게 하는 감사기도>
한번 나눈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제가 환갑 되던 해가 서품 30주년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 지난 삶을 진지하게 성찰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았지만 잘 산 것은 아니었다.’가 성찰의 결과였습니다.
제가 잘못 산 것 가운데 하나가 형제들에 대해 늘 불만이 많았고, 형제들에게 감사하고 형제들에 관해서 감사할 줄 몰랐던 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찰과 반성 후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나 같은 사람과 살아준 형제들과 살아주는 형제들에게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 뿐 아닙니다.
제 주변에서 저를 참아주고 도와주고 사랑해주는 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빈말이 아닙니다.
저는 많이 무심하고 건망증이 심하고 허점이 많고 그런데도 일을 많이 저지릅니다.
며칠 전에는 너무 미안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글을 그분이 보실지 모르지만, 너무 실례가 많았습니다.
우리 협동조합을 통해 의료보험이 없는 불법 체류자를 위한 무료 의료 봉사를 하고자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 의료 현장의 혼란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은 가운데서도 여러 번 전화와 문자를 주셨는데 제가 보지 못한 적도 있고, 시간 날 때 전화를 드려야지 하고는 까먹어 답을 드리지 못했지요.
저 같으면 돕겠다는데도 이렇게 무성의한가 하며 포기하셨을 텐데, 이분은 포기하지 않고 입만 벌리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일을 진척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을 포함하여 제 주변의 많은 분께 감사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를 잘 표하지 못하지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보고서 또 다른 반성을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편지를 씁니다.
“우리는 여러분 때문에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직접 감사를 표하지 않고, 테살로니카 신자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또 그렇게 감사드린다는 편지를 그들에게 씁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하느님께도 감사드리고 신자들에게도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엄마, 저의 엄마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딸, 내 딸이 되어줘서 고마워!"
이 표현도 정말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면 더 멋질 것입니다.
그것도 모녀가 같이 기도하며 이렇게 표현하면 더더욱 멋질 것입니다.
"하느님, 저의 어머니를 어머니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 딸을 제 딸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이 사람을 제 남편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이 사람을 제 아내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와 딸은 서로에게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성사가 됩니다.
저도 자주 이렇게 여러분에 대해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을 저의 성사가 되게 하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자비에 눈떠라>
한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띠를 두르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확성기를 틀어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갑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열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자기만 옳은 양 틀에 갇혀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올바로 믿어서 꼭 구원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이사야는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고 나에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
(이사 29,13-14)
우리가 이런 책망을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 23,16)라고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습니다.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한 것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내신 주님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해야 하고, 그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마태 5,33-37)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을 긍정적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쁘기로 말하면 좋은 것보다 훨씬 더 나쁘기도 합니다.
열심이 지나쳐서 고약한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느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우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짐만 지우게 됩니다.
그릇된 신심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걱정입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마태 23,4).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제한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데 결코 지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자비와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와 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지옥의 공포로 몰아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야단을 맞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야지 절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기쁨에서 배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은 좋으나 진심 어린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 역시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0)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기에 앞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눈떠야 하겠습니다.
온갖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은 돈까지 거룩하게 만드는 곳이다>
금쪽같은 내새끼 186회에서는 엄마의 과도한 절약 습관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나왔습니다.
엄마는 상상을 초월하는 절약이 잘사는 길이란 믿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변기 물을 내리는 것도 금지합니다.
두루마리 화장지를 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물도 공공장소에서 받아와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밖에도 절약의 방법은 너무 엽기적이고 많습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또 엄마와 따로 살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엄마는 이런 아이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받지 못했던 유산을 많이 남겨주려는 것뿐인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집이 가난한 것도 아닙니다.
빚도 없고 자가 아파트도 있습니다.
남편은 1,000만 원은 안 되지만, 그래도 적지 않게 벌어오는 착실한 직장인입니다.
이 엄마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일까요?
엄마 수중에 들어오는 돈을 거룩하게 만들지 못하는 존재라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하늘 나라의 문을 잠그고 자신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무엇이 중요한지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자녀가 중요할까요, 돈이 중요할까요?
아이들도 이런 분위기 안에서 자기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그래서 싸움이 많이 일어납니다.
엄마는 그 싸움이 아이들이나 돈을 적게 버는 남편 탓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엄마는 성전, 곧 무언가를 거룩하게 만드는 성전이 아니고 그냥 무덤과 같습니다.
돈이 들어오면 자신이 허물어져 가는 무덤이 이곳저곳을 땜질하는 데 씁니다.
그러나 성전이나 제단은 그 안에 들어오거나 그 위에 올라오는 것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눈먼 인도자가 되지 않으려면 내 안에 들어오는 돈이나 사람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역사 안에서도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교회로 들어오는 돈을 성당을 크고 아름답게 만드는 데 쓰고, 그런 건축 과정에서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해 돈을 착복하였습니다.
그들 속에 들어오는 신자들이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지위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을 거룩하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들어오는 돈부터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에게 은촛대까지 준 주교님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어떻게 금과 은을 거룩하게 하는지 알았습니다.
바로 자신의 성당 안에 들어온 이를 거룩하게 하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이 거룩해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금도 거룩해지고 사람도 거룩해집니다.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황제에게 가서는 이들이 교회의 재산이라고 말한 성 라우렌시오 부제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과감하게 그렇게 사용하는 돈의 액수가 너무 작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전 성심당을 본받읍시다.
그냥 빵집이지만, 실제로는 성당과 같습니다.
그 안에 들어오는 돈이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돈들은 직원 복지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이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을 거룩하게 하지 못하는 곳은 성전이 아닙니다.
그냥 무덤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범함>
늦게야 철이 들어가는지, 요즘 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을 조금씩 보고 있습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범함을,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의 고귀한 가치를, 아주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깨달음은 작지만 또 다른 삶의 변화를 불러옵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낯선 이웃들도 환대하고 작은 친절을 베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친절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더군요.
우리의 작은 사랑의 몸짓, 작은 복음적 언어들이 스쳐 지나가는 낯선 이웃들에게는 커다란 감동을 선사합니다.
어떤 면에서 삶을 통한 복음선포요, 행동을 통한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환대한다는 것, 참으로 고된 일이지만, 동시에 얼마나 복음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참된 환대는 형식적이거나 상투적인 환영, 말이나 플래카드를 통한 환영을 넘어섭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보다 궁극적인 환대는 보다 보편적인 환대입니다.
그가 누구이든 따져보지 않고, 존재 자체로 존중하고 축복하고 귀한 손님으로 응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아주 강하게 질타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위선과 이중성과 형식주의입니다.
성전이 회개 없는 위안의 장소로 전락할 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 성전을 허무십니다.
예수님께 질타받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성전보다 성전에 장식되어 있는 보물에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사보다 그 제사에 봉헌된 예물을 더 중시했습니다.
성전의 거룩함과 고귀함은 사라지고 배금주의와 형식주의가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젠가 100퍼센트 허물어질 성전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불멸의 성전을 건립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웃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고, 그를 또 다른 살아있는 성전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작은 성전을 건립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고, 그로 인해 그의 내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기 때문입니다.
요즘 성당 하나 건립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부지 마련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건축 기금 마련은 또 얼마나 큰 희생이 따르는지 모릅니다.
성당 하나 짓느라 사제들뿐만 아니라 교우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데로 피폐해집니다.
이런 시절 우리가 눈여겨볼 참신한 시도들이 있습니다.
한 개신교 교회는 성전이 없답니다.
마련된 건축 기금으로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는 대신 불멸의 성전을 지었습니다.
건축 기금은 전액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럼 예배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습니다.
성막을 모시고 40년 세월 광야를 횡단하던 공동체 말입니다.
주일 예배는 주말이 되면 텅텅 비어있는 학교 강당이나 구민회관 같은 장소를 임대해서 드린답니다.
이제 인구 감소에, 쉬는 교우 급증으로 성당이 텅텅 비어갑니다.
더 이상 대대적인 규모의 성전 건립은 지양되어야 마땅합니다.
요즘 대세는 작음입니다.
작은 도서관, 작은 영화관, 작은 학교, 작은 성당!
굳이 성전을 건립하려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소모되는 초대형 성전을 포기하고 아담하고 편안한 작은 성전들을 건립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대신 낯선 이웃들에게 더 많은 친절을 베풀고 극진히 환대할 때, 거리로, 변방으로 나가는 교회가 될 때, 아직 우리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바로 내가’ 그들보다 더 위선자일 수 있습니다.>
1)
옛날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이 얼마나 심했는지, 또 그들이 얼마나 지독한 ‘위선자들’이었는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고 무슨 의미가 있는 일도 아닙니다.
(옛날 일에서 교훈을 얻는 정도의 의미는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위선자인가, 아닌가?”를 반성하는 일입니다.
2)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누군가가 위선자라고 비판하면 화부터 냅니다.
“나는 진실한 사람이다.” 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따라서 ‘위선’이라는 함정에서(‘죄’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먼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부터 인정해야 하는데,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하고 깨닫지 않는다면, 남이 어떻게 해 주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엄하게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가운데에는 그 꾸중을 달게 받아들인 사람도 없고,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한 사람도 없고,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과 반감만 점점 더 크게 키우다가 결국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에도 비슷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인들 가운데에는 내부의 박해를 겪은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내부를, 특히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누군가가 비판을 할 때, 그 비판을 받아들이는 일은 드물고, 거의 항상 “너나 잘해라.”, 또는 “너부터 잘해라.”, 또는 “너도 위선자다.” 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물론 비판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순서이고, 그리고 남의 위선을 비판하는 일을 잘하는 그 사람이(바로 내가) 더 위선자인 경우가 많긴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위선을 비판하고 꾸짖는 일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우리는 ‘모두 함께’ 겸손하게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4)
‘위선자들’과 ‘위선’에 대해서 말하려면, “나도 위선자일 수 있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선 먼저 ‘나의 위선’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부터 해야만 ‘남의 위선’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사도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케파가(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바오로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갈라 2,11-14)
사도단의 대표이며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데도, 열두 사도가 아닌 사람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비판받는 것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아마도 베드로 사도는 바오로 사도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뉘우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먼저 위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위대한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비판한 바오로 사도 자신은 어떤가?”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칠삭둥이 같은 나,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위선’은 항상 ‘교만’과 짝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겸손하게, 진심으로 자기를 낮춘 바오로 사도는 위선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맹세 관습에 대해서 상당히 길게 꾸짖으시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설교에서 ‘맹세의 원칙’과 같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 5,34-37)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들아!">
오늘부터 3일간 복음은 마태복음 13장, 일곱 개의 불행 선언을 다룹니다.
오늘은 그중 셋입니다.
한결같이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로 예수님의 격렬한 꾸짖음의 뒤를 잇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위선적 삶을 혐오하시는지, 위선적 무지의 삶이 얼마나 힘든 영적 불치병인지 깨닫습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의 삶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자기를 모르는 눈먼 위선적 무지의 삶입니다.
이는 비단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반면교사가 되는 보편적 현실임을 깨닫습니다.
앞서 마태복음 5장 산상설교 전반부, “행복하여라”라는 8개의 행복 선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7개의 "불행하여라" 불행 선언입니다.
역시 어제 강론에서 강조했다시피 우리는 “행복한 삶이냐 혹은 불행한 삶이냐?” 선택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옛 현자의 말씀도 좋은 참고가 됩니다.
“내면과 외면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 한몸이니, 겉을 보면 속을 알 수 있고 속을 보면 겉을 이해할 수 있다.”
<다산>
“바탕이 겉모습을 넘어서면 거칠어지고, 겉모습이 바탕을 넘어서면 겉치레가 된다.
겉모습과 바탕이 잘 어울리는 후에야 군자답다.”
<논어>
참으로 안팎이 같은 진실하고 겸손한 삶이 참행복한 삶이겠습니다.
위선적 무지의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는 자기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모르면 알려줘도 모릅니다.
흡사 가면을 쓰고 가아假我를 진아眞我의 참나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같습니다.
가면 없이 안팎이 같은 참나로 사는 사람들이 진정 지혜롭고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어제의 깨달음에 감사했습니다.
제 강론이 길다는 어느 젊은 형제의 개선 권고에 심히 불쾌했지만 참다가 후에 마음을 돌렸습니다.
강론을 쓰는 동안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내가 욕심을 버리고 젊은 형제들 조언에 따르는 것이 사랑이요 해결의 첩경이다 싶었습니다.
공동체의 주인공이자 희망이요 미래인 젊은이들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런 구체적 작은 사랑의 실천이 중요하다 싶어 올리는 강론은 다소 길겠지만 아침에 미사 때 하는 강론은 많이 줄이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해소였습니다.
내가 마음을 바꾸니 애당초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겸손히 진실을 받아들이니 모든 것이 감쪽같이 해소되어 기뻤습니다.
이를 문제화했다면 미풍을 폭풍으로 바꾸는 어리석은 무지의 꼰대의 모습이 됐을 것을 생각하니 아찔했고, 이런 깨달음의 이해와 치유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매일 새벽 강론 쓰는 시간은 기도와 공부, 회개와 깨달음, 치유와 해소의 은총의 시간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로 시작되는 오늘 복음은 세 사례가 제시됩니다.
첫째는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 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 하늘 나라 문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된 이들입니다.
참 위선적 무지의 개탄스런 이들입니다만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둘째 불행 선언의 경우는 개종자 한 사람이 생기면, 자기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들입니다.
앞서와 대동소이합니다.
위선적 무지의 삶을 보고 배우니 그렇게 될 수 뿐이 없겠습니다.
셋째 불행 선언의 경우는 분별의 지혜가 결핍된 눈먼 인도자들입니다.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위선적 무지의 삶입니다.
이런 삶이 익숙해 마비되면 회개의 가능성은 요원해집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하느님 중심의 지혜롭고 겸손한 삶만이 해결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내 안에 있고 답은 하느님 중심의 겸손하고 진실하고 지혜로운 삶에 있음을 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주님을 닮아가는 겸손과 지혜의 사랑공부가 얼마나 절실한 평생공부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는 복음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오늘 독서에서 제시되는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교회를 통해 우리는 참교회, 참사람을 만납니다.
바오로의 인사말도 겸손과 은총이 넘칩니다.
복음의 불행 선언의 대상자들과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바오로 일행과 테살로니카 신도들입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바오로 사도는 축복기도에 이어 이들의 믿음과 사랑의 성장을 자랑스러워하며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바오로가 신자들에게 목표로 제시하는 삶은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 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 우리는 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기를 빕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습니다.
위선적 무지의 부패하고 병든 삶을 치유하는 하느님 중심의 기도와 회개와 감사의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이 참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날마다 바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눈먼 위선적 무지의 병을 치유해 참 행복한 눈밝은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내 안에 있는 선과 악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지킬과 하이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누가 이길까요?
먹이를 많이 주는 쪽이 이깁니다.
33년 사제 생활 중에 난처한 일도 있었고 보람된 일도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단합대회를 갔었습니다.
젊은 혈기와 적당한 취기에 타 대학 학생들과 시비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사의 실수가 명백했고, 사과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사들은 저의 결정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교사들을 보듬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늦은 시간 사제관에 도착하니 빗장이 잠겼습니다.
벨을 누르니 본당신부님이 열어 주시면서 지금 몇 시냐고 물었습니다.
시간을 묻지만 왜 늦게 다니는가에 대한 질책이었습니다.
전후 사정을 말했지만, 문 앞에 세워놓고 말씀하시니 서운했습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생활에 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는 주교님의 이야기를 듣고 생활 습관을 바꾸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3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기분 좋았던 일도 많았습니다.
소공동체 연수가 필리핀에서 있었는데 추천받아서 다녀왔습니다.
처음으로 해외로 나갔습니다.
부족한 저를 추천해 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필리핀에서 복음나누기 7단계, 아모스 프로그램을 배웠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2000년대 복음화를 위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당시 필리핀에 교포 사목으로 가 있던 친척 신부님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인연이 되어서 지금도 미국에 있는 것 같습니다.
도축장에서 일하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큰 싸움으로 벌어질 일이 있었는데 당시 본당신부로 있던 저를 생각해서 참았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도축장은 칼을 사용하는 곳이니, 늘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형제님은 제 말을 귀담아들었고, 큰 싸움을 피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습니다.
한 형제님은 ‘신사부일체(神師父一體)’라고 후배에게 말하였습니다.
후배가 무슨 뜻인가 물었습니다.
형제님은 ‘신부님과 스승과 부모임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없던 후배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돌아보면 부족한 저를 과분하게 믿어주고, 사랑해 주었던 교우들이 많았습니다.
3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위선과 교만을 질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고집불통인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한 권위로 사목하려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말씀으로 시대의 징표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선포하려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지나친 음주와 가무로 본인은 물론 공동체에도 어려움을 초래하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하는데 게임과 놀이로 세상의 것에서 기쁨을 얻으려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사제에게 필요한 사람을 먼저 만나려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죽비’가 되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사제들이 있습니다.
33년을 돌아보면 저 역시도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교우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평생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던 요셉의원의 고 선우경식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과 영성을 알리고 있는 구수환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성당 마당의 눈을 쓸던 바오로 형제님도 생각납니다.
홀로 계신 어르신들에게 도시락을 가져다드린 루시아 자매님도 생각납니다.
교포사목의 시작도 그랬습니다.
교우들이 몇 시간씩 운전하고 와서 공소예절을 했습니다.
기쁨이 넘쳤고, 사제를 모시려고 했습니다.
땀 흘려 벽돌을 날랐고, 물건을 팔았고, 눈물로 성전을 세웠습니다.
사제를 모시고, 첫 미사를 드리던 날은 모두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민 교회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교우들이 신앙의 씨를 뿌렸고, 사제가 함께 하면서 5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받을 수 있고, 예수님께 엄한 질책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선과 악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악에게 먹이를 주고, 악과 함께 지낸다면 우리는 또다시 주님께 엄한 질책을 받을 것입니다.
선에게 먹이를 주고, 선과 함께 지낸다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사랑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진정으로 봐야 할 것은 주님의 사랑>
책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보았습니다.
“남자를 시험해 보고 싶으면 아주아주 잘해주면 됩니다.
그릇이 큰 자는 감사할 줄 알고, 병신 새끼는 가면을 벗기 시작하지요.”
남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 범주에 속합니다.
상대방의 호의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방이 부족해서 자기에게 잘 해주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함부로 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책을 통해 ‘병신 새끼’라고 작가는 욕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과연 그릇이 큰 사람일까요?
당연히 그릇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그릇이 큰 사람과 함께 하길 원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더 많은 만남을 갖게 되고 그래서 감사할 일을 더 많이 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 감사의 인사를 듣는 상대방은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자기 행동에 대한 인정과 보람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릇이 커야 도움도 많이 받고, 또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순간의 만족과 자기 욕심에 집중하면서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릇이 큰 사람이 되어야 이 세상 살기가 훨씬 수월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선언의 대상자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던 이였습니다.
그들의 율법에 대한 열정과 실천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의 대부분은 이들이 하느님과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위선자이고 눈먼 인도자라며 꾸짖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철저히 자기의 모습만을 세상에 보이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을 하는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감사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렇게 행동하니 당연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 선언의 주인공을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진정으로 봐야 할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언제 어디서나 감사할 수 있으며, 그 감사의 표현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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