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위하여 / 이기철
너를 이 세상의 것이게 한 사람이 여자다
너의 손가락이 다섯 개임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
너에게 숟가락질과 신발 신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여자다
생애 동안 일만 번은 흰 종이 위에 써야 할
이 세상 오직 하나 뿐인 네 이름을 모음으로 가르친 사람
태어나 최초의 언어로, 어머니라고 네 불렀던 사람이 여자다.
네가 청년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패배한 뒤
술 취해 쓰러지며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기차를 타고 밤 속을 달리며 전화를 걸 사람도 여자다
그를 만나 비로소 너의 육체가 완성에 도달할 사람
그래서 종교와 윤리가
열번 가르치고 열번 반성케 한
성욕과 쾌락을 선물로 준 사람도 여자다
그러나 어느 인생에도 황혼은 있어
네 걸어온 발자국 헤며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 때
이미 윤기 잃은 네 가슴에 더운 손 얹어 줄 사람도 여자다
깨끗한 베옷을 마련할 사람
그 겸허하고 숭고한 이름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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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새삼스레 페미니즘을 들고 나오는 것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할 만큼 여성은 많은 분야에서 남성에 대해 우위에 있거나
적어도 남성을 투쟁의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남루하지도
대립각에 위치해 있지도 않다. 그런 진보의 상황은 과거
우위의 개념으로 사용된 언어인 '사내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남정네들이 부지기수로 양산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경제적 입지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거머쥐지 못하는 남성들이
늘어났고, 육체적 정신적으로도 여성에게 많이 밀리고 있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많이 불만스럽고 온전히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기철 시인은 이 헌사를 통해 전통적 여성의 원형을
페미니스트적인 시각으로 작정하고 그렸는데, 아무튼
앞으로는 여자를 받드는 몸짓과 언어도 과거의 방식으로는
곤란하지 싶다. 지고지순한 순종형의 여자를 기대하기도
어렵거니와 그리 방치해 둬서 될 일도 아니다. 어차피 남성을
추월할 만큼 여성의 지위가 진보를 거듭하리라 예상된다면
차라리 그 상황을 조금 당기는 편이 남성의 입장에서도
속 편한 노릇은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 권순진 시인
[출처] 이기철 시인 3|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