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이 운명인가
장성호
손자의 국어책을 뒤적이다보니 나무타령이 나온다. 이것을 보니 어려서 철
모를 때 동무들과 모여 놀다 아무렇게나 부르던 나무타령이 생각난다.
'무슨 나무 심을래? 십리 절반 오리나무, 열의 갑절 스무나무, 대낮에도
밤나무, 깔고 앉아 구기자나무, 거짓 없어 참나무, 칼로 베어 피나무, 입 맞추고 쪽나
무, 방귀뀌어 뽕나무, 너하구 나하구 살구나무, 잘 살려다 죽나무...' 아이들은 시간
가는지도 모르고 놀다가 나중에는 신명 많은 아이가 앞서서 되는 대로 꾸며가며 계속
선창을 하면 죽 따라 불렀다.
건너 마을에는 너 하구 나 하구 살구나무가 있는 집 색시와 잘 살려다 죽나무가 있
는 집 총각이 사립문을 마주하고 어려서부터 살고 있었다. 이들은 점점 자라면서 못
본 체하며 남 몰래 벙어리 사랑을 하다가 나중에는 마주보며 눈웃음 사랑으로 발전했
다. 살구나무 아가씨 물동이를 이고 나가면, 속을 태우며 문틈으로 내다보던 죽나무
총각은 급히 지게를 지고 뒤따르며 지게 목발을 장단 맞춰 두드려 처녀가 자연 뒤돌아
보게 한다
능청스런 총각은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 "어디, 아무것도 없어” “손에
쥐고 있잖아, 펴봐" "봐! 아무것도 없어" 순간 총각은 준비한 예쁜 반지를 아가씨 손
가락에 재빨리 끼워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버린다. 살구나무 아가씨는 마음
속 은근히 좋았다. 결국 이들은 부모님의 승낙 하에 연리지(連理枝) 사랑으로 인연(因
緣)을 맺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이 맺어준 인연으로 생각하고 한마음 되어 사랑하고 검은머리 파뿌
리 되도록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며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살구나무 새댁에게는 아름
다운 살구가 달리게 되었다. 살구 하나 달려 토실토실 살이 오르자, 뜻 밖에 웬 청천
벽력(靑天霹靂)인가, 죽나무 신랑은 예고 없이 혼자서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살구나무 새댁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가지마오 가지를 마오 날 혼자 두고 가
지를 마오' 땅을 치며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호구지책(粗口之策)으로 친정살이
식모살이도 했지만 고생만 더해갔다. 그래서 혼자 여름이면 손발이 짓무르고, 겨울
이면 얼어 터져 피가 나도록 고생하며 칼국수 장사를 열심히 하여 살구 하나를 토실토
실 잘 키웠다. 살구나무 새댁 이제 칼국수집 아줌마가 되어 눈감고도 국수를 잘 썰 수
있는 능란한 솜씨에 '이 국수 잡수신 분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되옵소서… 기도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남을 먼저 위하여 열심히 국수 장사를 하니 살림도 윤택해지고 아들
살구도 잘 컸다.
밀가루, 물과 더불어 양푼 안에서 아주머니의 손끝이 시키는 대로 놀다보면 둥근 반
죽 덩어리가 된다. 이것이 다시 안반 위에 앉아 홍두깨를 두루말고 둥글둥글 놀다보면
맷방석 같은 반죽 판을 거쳐 칼국수로 변한다.
아주머니 손끝을 거쳐 나온 칼국수는 한번 맛 본 사람은 다음 날 다른 친구들과 몰
려와 하루 종일 손님이 이어진다. 손님이 성시(盛市)를 이루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돈에 앞서 손님의 입맛과 건강을 생각하고 친절하게 노력한 결과가 아닐까? '많은 것
을 얻고자 하면 모든 것을 버려라’하는 말이 있듯이 아주머니는 이러한 진리를 잘 알
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행복한 마음으로 운영 한 모양이다. 그리고 국수도 아
주머니와 손님이 원하는 대로 말을 잘 들어 주었기 때문에 한 번 온 사람은 다른 국수
집 다 외면하고 또 오지. 인간도 부모와 선생님이 가르치고 지도하면 아주머니의 칼국
수처럼 만인이 좋아하는 덕망 높은 인격자로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살구어린이 이제 청년을 지나 장년이 되어 아들딸을 두었고, 살구나무 아가씨도 칼
국수 아줌마를 거쳐 어언 종심(從心)후 4년의 할머니가 되어 손자의 재롱 보아가며 아
들 며느리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고생 끝에 영화가 온다더니 그것도 잠시 일 뿐 할머니에게는 만인(萬人)이 싫어하는
풍(風)이 찾아와 반신불수(半身不隨)로 만들어 병원에 눕혔다. 백일 천일 병원에 누
어있으면 무엇하나 편작이라도 고칠 수 없다고 해서 집으로 왔다. 천병 만 약이라더니
쓰라는 약과 하라는 방법은 많기도 하다. 남들이 일러주는 대로 아들 며느리는 간병에
혼신(渾身)을 다했다. 그러나 그것은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정신은 말짱한 할머니의 머릿속에는 별의 별생각이 떠오른다. 옛날 죽나무 총각과
의 사랑, 칼국수 장사 때 고생, 그리고 이런저런 추억 등… ‘그래도 비교적 선행지심
(善行之心)으로 가정과 손님을 위해 장사하고 살아왔는데 마지막 나에게 안겨준 선물
이 아무 희망과 낙이 없는 고통, 이것이란 말인가.' 추녀 끝 낙수처럼 눈물만이 흘러
베개를 적신다.
문을 열어 놓고 내다보니 자신이 마당에서 여름에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사용하던
것이 담 밑에서 바라보고 있다. 옳지 저것이 나의 치료약이라 구나, 결심했다. 잠시
가족이 없는 틈을 타서 있는 을 다하여 뒹굴고 뒹굴어 마루에서 뜰로 떨어져 흉한
상처를 입으며 그곳에 이르렀다 그리고 영원히 잠들었다. 칼국수 장사로 인생의 진리
도 많이 배우고 외아들 가르쳐 손자보고 오래오래 재미나게 살 것 같더니 여기서 '그
만’이란 천명을 받으니, 가는 이도 앞뒤를 재보고 천만번 생각과 고심 끝에 선택한
처사이겠지……….
불쌍하다 가실 무렵 이런저런 생각 하셨겠지. '이웃에서 같이 큰 대추 아가씨, 지금
도 빨간 치마 입고 앞서가는 손자 재롱 보면서 남편과 손잡고 젊은 시절 회상하며 즐
겁게 산책하던데, 나는 무슨 죄로 죽나무 신랑 맞이하여 정들자 이별하고 평생을 혼자
사는 신세가 되었다. 낮이면 칼국수집 주방에, 밤이면 독수공방에, 고생과 걱정만 쌓
아 놓고 그것과 벗 삼아 살았으니 그 한을 어디 가서 풀리. 말년이나 편히 사나 했더
니 이지경이 웬 말인가, 이젠 아무 희망이 없어 나도 편하고 너희도 편하게 하기 위해
선택한 일이로다, 마지막 가는 길에 좋은 것은 못 주고 너희 가슴에 못을 박아 미안하
구나.'하는 애탄(嘆)의 소리가 떠나는 할머니로부터 들려오는 듯하다.
큰 돌만 돌이 아니다. 작은 돌도 돌이다. 코고 작고 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사용
하면 제구실을 다하는 보물이다. 할머니는 고생 속에서도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손님
에게 사랑을 베푸는 마음으로 행복하게 장사를 하며 살았으니 부(富)하면서도 족(足)
한 것을 몰라 불행하게 사는 사람에 비하면, 한 차원 높은 인생의 길을 걸어온 분이
아닌가. 부귀빈천(富貴貧賤)을 떠나 할머니처럼 사랑과 덕망을 기본으로 하는 인간의
삶이 정도(正道)이겠지.
2005년 20집
첫댓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또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결국 인생 각자 사는 것이니, 하고 싶은거 할 수 있을때 여한없이 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글을 이리 잘 쓰는지 매번 놀랍니다.
고생 속에서도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손님
에게 사랑을 베푸는 마음으로 행복하게 장사를 하며 살았으니 부(富)하면서도 족(足)
한 것을 몰라 불행하게 사는 사람에 비하면, 한 차원 높은 인생의 길을 걸어온 분이 아닌가.
한 여자의 일생을 보는 듯 합니다.
각자 사연 없는 삶은 없다는 것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