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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제1독서 : 2열왕 24,17-25
복 음 : 마태 6,24-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 무릎에는 커다란 상처 자국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생긴 상처인데, 넘어졌을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어이가 없습니다.
동창 신부와 자전거를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가 앞서가고 있었는데, 돌부리 위를 휙 지나가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동창 신부처럼 휙 지나가려고 했는데, 순간적으로 겁이 났습니다.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결과는 예측대로 이곳에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걸려 넘어진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겁이 나서
손으로 브레이크 레버를 확 잡았을 때 미끄러진 것입니다.
자전거에 제 몸을 온전히 맡기지 못했습니다.
자전거를 믿지 못해서 작은 돌부리에도 겁을 낸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라는 삶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두려움 속에 살게 됩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함께하시는데도 주님은 보지 않고
작은 돌부리와 같은 장애물만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믿음의 눈으로 주님께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넘어지게 하는 쓸데없는 두려움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걱정하지 마라.”라고 강조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는 단순히 무심함이나 무관심해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모든 근심 걱정에서 해방해 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새들과 들에 핀 나리꽃들을 예를 드시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결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떠올리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은 굳은 믿음을 통해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삶의 방향을 정확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많은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힘든 삶을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걱정하고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힘든 시간의 연속성 안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걱정과 두려움은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때 별것 아님을 깨닫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노력을 통해 조금씩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걱정과 두려움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觀想的 삶
-섬겨라, 보라, 믿어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라틴어 짧은 세 격언을 기억할 것입니다.
1.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내 죽음을 기억하라.
2. 아모르 파티(amor fati) : 내 운명을 사랑하라.
3. 카르페 디엠(carpe diem) : 내 현재를 잡아라.
내 죽음을 기억하면, 내 운명을 사랑하게 되고,
내 현재를 잡고 본질적 깊이의 참 절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에 철저할 때 저절로 깨달아 살게 하는 진리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불행은 하느님을 잊음에서 기인합니다.
최근 썼던 두 편의 짧은 고백입니다.
-“갈 곳이 없다
가고 싶은 곳이 없다
만나 뵐 분이
만나고 싶은 분이 없다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만나는
주님이시다”-2022.6.12
-“외로움도
그리움도
기다림도 없다네
늘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만나는
함께 하는
주님이시기에”-2022.6.16
이런 글은 제 소망所望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한결같이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는 주님과의 관계를 중시한 고백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에 대해 참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섬겨라!”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한결같이 섬기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우리 말이 참 좋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삶의 중심이 둘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재물,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힘든 것은 중심이 둘일 때 마음이 갈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를 택하여 우선순위를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 말씀이 분명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불행의 근원은 하느님이 아닌 세상 우상이, 재물이, 돈이 삶의 중심이 될 때 시작됩니다.
열왕기 하권의 제1독서가 오늘 갑자기 역대기 하권으로 바뀌니
어제의 독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악순환의 반복 같습니다.
조선시대 사화士禍의 모습이 오늘의 정치 현실에서도
양상만 달리하듯 그대로 반복되듯 말입니다.
여호야다 사제의 개혁으로 맑게 갠 날씨 분위기가
오늘은 폭풍우 치는 험한 날씨로 변했습니다.
배은망덕하게도 요아스 임금이 유다 대신들의 꾐에 빠져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깁니다.
주님은 예언자들을 보냈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마침내 요아스 임금은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충언하던 그의 아들 예언자 즈카르야를 죽입니다.
이로 인해 그의 신하들이 모반을 일으켜 요아스 임금을 침상에서 살해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다윗성에 묻기는 하였지만, 임금들의 무덤에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떠난 자업자득의 업보입니다.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망각할 때,
그 중심 자리에 하느님 대신 어김없이 자리 잡는 우상이나 세상 것들을 섬길 때
여지없이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한결같이 섬기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인 일인지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이요,
직무와 권위가 있다면 단 하나 섬김의 직무와 섬김의 권위가 있을 뿐입니다.
새삼 우리 믿는 이들의 본질적 업종은 ‘서비스업’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그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둘째, “보라!”입니다.
경청의 들음도 중요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직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감사도 행복도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에서 발견의 기쁨, 발견의 새로움, 발견의 놀라움입니다.
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발견할 때 저절로 놀랍고 새롭고 좋습니다.
그대로 관상의 삶입니다. 예수님 역시 볼 것을 강조하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 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자연성서 렉시오 디비나 묵상이 정말 깊고 참신 합니다.
인간의 불행은 자연에서 떠난 결과요 이런 관상적 눈의 상실에서 기인합니다.
감사와 감동, 감탄을 잃어버려 많은 영혼들이 병든 세상입니다.
그리하여 눈만 열리면 신비롭고, 놀랍고, 새로운 기적들로 가득한 세상인데
이걸 못 보고 지내는 것입니다.
새처럼, 꽃처럼 자유롭고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예수님이요,
예언자이자 신비가이요, 관상가이자 시인인 예수님입니다.
관상적 차원이 너무나 결핍된 오늘날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셋째, “믿어라!”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철석같이 믿는 것이요 걱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 부재를 드러내는 걱정과 두려움, 불안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천둥 같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기도와 사랑뿐 아니라 믿음 역시 초보자인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평생 믿음을 배워가면서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탓할 것은 우리의 부족한 믿음이요 청할 것은 단 하나 좋은 믿음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십시오.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을 늘 새로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필요한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입니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토니 드 멜로 신부는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을 발견하고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이렇게 오늘 행복을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행복할 것입니다.
행복의 원천인 주님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행복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한국과 미국의 문화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기부와 상속에 있어서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미국의 부자들은 ‘기부’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명예와 부를 얻었지만,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기 때문입니다.
미국 유수의 대학들은 대부분 부자들의 기부에 의해서 설립되었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엄청난 부를 이루었던 록펠러는 50이 넘으면서 회복될 수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가족들과 지인들은 록펠러에게 이왕 죽게 된다면 이웃에게 나누면서 죽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록펠러는 자신의 재산을 이웃에게 나누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록펠러는 나누면서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건강해진 록펠러는 그 뒤로 40년을 더 살았고 97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비단 록펠러뿐만 아니라 미국의 부자들은
학교, 도서관, 공연장, 미술관 등의 설립에 엄청난 기부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기부문화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미국 문화의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부자들도 요즘은 이런 기부문화에 동참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상속에 대해서도 미국은 한국과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잘 키워주고 독립할 수 있도록 해 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들도 부모의 재산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독립하면 스스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재산으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존경과 사랑으로 묶이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본 이민 2세대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재산은 부모님의 것이니 부모님이 알아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는 세상을 살아갈 지혜를 물려주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상속 때문에 형제들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상속 때문에 형제들이 갈등과 불화가 생기는 것도 보았습니다.
부모의 재산은 전적으로 부모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기부를 한다면 그것도 부모의 선택입니다.
그것으로 여행을 다닌다면 그것도 부모의 선택입니다.
다행히도 저의 부모님은 세상의 재물은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형제들이 상속 때문에 머리 아플 일도 없었습니다. 감사드릴 일입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다른 것을 물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신앙’입니다.
부모님께서는 기도로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생전에 많은 대자와 대녀를 두셨습니다.
대부와 대모로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식들에게 신앙을 물려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값진 상속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 모두 건강하게 사시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종하였습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들에게 부모의 신앙이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이유로
신앙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릇은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될 것입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함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릇과 같습니다.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늘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대상이 결국 우리를 다스리고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반복되며 귓가에 맴도는 주님의 말씀은 “걱정하지 마라.”입니다.
이 말씀의 근거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자녀들을 잘 아시고,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곧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분께서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는 당신 자녀들의
어려움과 고통, 눈물과 아픔을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우리에게 몸소 마련해 주시며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하느님 우리 아버지에 대한 굳은 믿음입니다.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소중한 아드님마저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환호송처럼,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유한 자녀들이고,
하느님께서는 ‘임마누엘 주님’으로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입니다.
이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수님을 더욱 닮아 가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이며 주님의 종 다윗에게 전해진 시편의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시편 89[88],29)라는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의 귀한 자녀인 우리를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날마다 무거운 수고와 힘겨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인간은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용도가 사악하여
인류에게 너무나 많은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24절) 하신다.
이 재물은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마력을 발휘하여 인간을 온통 지배한다.
이 마몬은 인간이 섬겨야 할 상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려야 할 종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재물에 압도되어 종이 될까 봐 제자들에게 포기하라고 하셨고,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목숨을 부지하려고 걱정하지 마라.”(25절) 하신다.
우리가 입을 수 있는 해는 재물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재물 때문에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재물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 그 재물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재물을 잘 사용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새와 들에 핀 나리꽃들과 들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30절) 하신다.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도 그렇게 보살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모습으로 만드셨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만드셨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며, 율법을 주셨고, 표현할 수 없이 많은 좋은 것들을 이루어 주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주셨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33절)
우리의 궁극적인 선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다.
어떤 일을 하던 이것을 위해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이르기 위해 싸우고 있으며,
여기에서도 필요한 것이 충족되어야 하므로 곁들여 받게 된다고 하신 것이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우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의 선행이 완전한 행위가 될 때
우리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알맞을 때 얻게 된다.
열심히 선행하자.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34절) 하신 것이다.
주님께 완전히 신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근심 걱정이 참 많았던 젊은 시절, 피가 마르고 살이 마르고
그래서 지금보다 몸무게가 20킬로그램은 덜 나가던 시절,
제 마음속에는 언제나 강력한 희망 사항이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의 평화,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고요함...
나이가 좀 더 많이 들면 괜찮아지겠지, 세월이 좀 더 필요하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그게 나이 먹는다고 자동으로 바뀌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전히 다양한 근심 걱정, 특히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의미 없는 근심 걱정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근심 걱정은 목숨이 일곱 개라는 고양이도 죽게 만든다.”는 영국 속담이 있습니다.
돌아보니 현대인들은 걱정이 필수인 사회에서 참으로 많은 걱정의 파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느긋하기로 유명한 티벳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네.”
갖은 걱정 속에 속전속결로 늙어가고 있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조언도 명심해서 들어야겠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오 복음 6장 27절, 34절)
걱정 때문에 잔뜩 얼굴 찌푸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는 이런 위로의 말씀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걱정의 40%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뿐만아니라 그 걱정거리의 22%는 일어나도 별 볼 일 없는 사소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걱정의 4%는 우리의 영역 밖의 일입니다.
결국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걱정거리는 전체 걱정의 4% 뿐입니다.”
수도자 초년병 시절 저 역시 갖은 걱정거리로 온몸을 칭칭 감은 채 살아갔습니다.
참으로 걱정이 많았습니다.
내가 과연 수도생활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동료 수도자가 혹시라도 나를 힘든 존재로 여기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수도원에서 쫓겨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남겨두고 온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나 걱정,
앞으로 밟아나가야 할 수많은 단계에 대한 걱정...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의 병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게 하루는 선교사 할아버지 신부님께서
한 가지 조언을 주셨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국에 오래 사셨어도 한국 말씀이 많이 서투셨던 신부님께서는 큰 목소리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걱정? 왜 걱정? 아무 걱정 말고 주님께 모두 맡겨!”
갖은 스트레스와 근심 걱정 꺼리를 이고 지고 살아가는 이웃들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위로의 천사로 다가서야겠습니다. 그리고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제발 그 무거운 짐들 좀 내려놓고 살아가십시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즉시 모든 근심 걱정을 하느님께 맡겨드리십시오.
걱정 대신 기도하십시오. 근심 대신 찬양하십시오.
걱정하기보다 일상 안의 소소한 기쁨을 찾고 만끽하십시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