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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가을, 영주 작가회의(구 민족문학작가회의) 초청으로 영주로 내려갔다.
서울 사람들은 영주를 '선비의 고장'이라고들 한다.
나의 고향은 물론 경북 봉화이다.
그러나 봉화에 세거하시던 나의 조상들은 인근 지역인 영주와 안동에서도 분산하여 사셨기 때문에 나는 영주와 안동을 묶어서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안동, 영주, 봉화는 사실상 하나의 생활권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안동사범에 입학하는 것을 최고로 쳤고, 몸이 아프면
안동병원에 입원했다. 부석사는 이 지역 사람들은 누구나 찾는 최고의 명소이고, 봉화의 청량산은 지역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다.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가 고향인 나는, 어린 시절 영주군 부석면에서도 살았고, 영주 시에서 산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 아버님께서 부석지서 주임을 하셨고, 나는 영주 국민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다.
고향인 봉화군 상운면에서 <예고개>라는 고개 하나를 넘으면 안동이다. 그래서 상운에서는 행정 소속 군인 봉화읍내(내성)보다가는 지리적으로 안동이 더 가깝다. 그래서 우리 마을은 안동권이다.
나의 이런 삶의 역정을 알고 있는 영주사람들이 나를 지역 문학세미나에 초청한 것이다.
<영주 작가> 제 6집이 출간되었고, 그 문예지에 나의 중편소설 <불>이 게재되었기 때문에 출간 기념회에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중편소설 <불>은 기왕에 다른 문예지에 발표한 것이었으나, <영주작가>에 재수록된 것이었다. 지방에서 출간되는 문예지에 원고지 300매의 중편소설을 싣는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인데도 영주 문인들이 모험을 한 것이다.
아침에 장대비가 쏟아져, 예약해놓았던 고속뻐스를 기차로 바꾸었다. 얼마만에 찾아가는 고향인가. 이 회고의 감정을 나는 기차여행이 더욱 잘 달래어줄 것같아 기차 좌석을 알아보니 마침 당일 예약이 되었다.
레스토랑카에 가서 커피와 맥주를 마시면서 비가 내리는 차창을 바라보며 나는 고향을 찾아가는 노객의 여수를 달래었다.
이번 여행에 나는 아내를 동반하였는데, 이번 여행에서 나는 기필코 아내의 친정 쪽 형족들이 세거했던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를 방문해볼 작정이었다. 구체적으로 33년 전에 타계하신 장인어른의 혈족들이 세거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물야면 오록리를 찾아가볼 작정이었다.
장인어른을 봉화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네 살 때, 처조부 되시는 김시락 어른이 서울로 솔거하는 바람에 고향을 떠나셨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자라시고 공부하시고 결혼하시고 사업하시고 자식들을 키우시곤 했다. 자식들을 결혼시키시고 하시다가 1977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이 어른은 맏딸을 나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어른 자신 7 남매 형제였으나, 6.25 통에 다 돌아가시고, 장인 어른 자신과 자신의 여동생 한분만 살아남았다. 지금은 이 처고모 한분만 서울에 생존해 계신다. 이분도 6.25 때 남편을 잃어버리시고 외아들과 함께 일생 과부로 살아오셨다. 지금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다.
장인어른은 자신의 결혼만큼은 고향 안동처녀(장모)와 하시어 고향과의 관계를 끈끈이 이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극히 어렵고 힘든 세월의 연속이라 처조부의 서울 솔거 후,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와 처가와의 관계는 거의 두절된 상태인 것 같았다. 장모는 이 마을을 방문하신 적이 한번도 없었고, 처가의 장녀인 집사람도 말만 무수히 들었지만 오록리를 단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 가슴 속에는 언제부터인가, 장인어른이 태어나셔서 네 살까지 사셨던 이 오록리를 한번 방문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싹터 있었다. 가능하다면 두 아들에게도 이 마을을 한 차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놈들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서 하 세월이니, 기약할 수 없었고, 이번 영주 문인들이 초청하는 기회를 이용해서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를 한 번 방문하고 처가쪽의 족적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나에게 소설원고를 청탁하였고, 이번 초청을 해준 영주작가회의 지부장 박승민 시인에게 나의 오록리 방문을 통보하고 협조를 부탁해 놓은 상태였다. 그분은 기꺼이 안내하겠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다들 무릉도원이다.
나에게도 나의 고향 영주 봉화 안동은 무릉도원이다.
영주는 소백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내성천이 있었서 더욱 그러하고, 봉화는 소백산맥 깊은 곳에 들앉아 있어서 그 산세의 수려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안동은 안동호와 임하호,하회 등으로 그 풍광이 절경이다.
봉화에는 청량산이 있고, 안동에는 하회마을이 있고, 영주에는 무섬(水島)이 있다. 물론 영주에는 절경인 부석사의 봉황산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로는 자연이 빚은 절묘한 풍광은 영주에서는 무섬이 최고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무섬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마침 이번 <영주작가> 6집의 출간 기념회가 바로 무섬에서 개최되었다. 이 사실은 나의 영주행을 결심하는 또다른 계기가 되었다. 집안 어른들에게서, 그리고 처가 사람들에게서 그렇게도 자주 들었던 무섬을 아직까지 가보지 못한 내가 언제나 죄스러울 지경이었다.
영주 사람들은 하회마을 이야기를 하면 그냥 웃는다. 그들의 소리없는 웃음 속에는 <당신 아직 우리 영주의 무섬을 보지 않았지예... 무섬을 한번 보기만 하마 그런 소리는 하지 않을끼구마....>하는 그들의 애향의 마음이 깃들어있다고 한다.
영주 역에 내리니, 박승민 시인이 자신의 차를 대기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향의 순박한 사투리가 조금도 다듬어지지 않아 오히려 투박하기까지한 말투가 너무나 정겨웠다.
"기차가 더 지루할께이시더. 요새는 뻐스가 훨씬 낫습니더. 기차가 지루하시지 않았니껴어? 시간도 한 30분 더 걸리고예..."
내가 고향사람인 것을 알고 청탁해준 박 국장이 고마웠다. 나는 영주 사람도 아니고 봉화사람이 아닌가. 그래도 경북 북부권이라는 큰 태두리에서 그들은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고마웠다.
안동이라는 대도호부 아래 이들 고을들은 하나의 생활문화권을 형성하고 살아왔다.
영주에서 무섬은 남쪽으로 한 승용차로 한 30분 거리에 있었다.
영주 북부에는 소백산맥이 버티고 있다. 그 산맥을 넘어 서울로 터져 있는 재 이름이 죽령이다. 신라시대의 주요 도로였다.
죽령에서 흘러내리는 강이 남원천이고, 부석사가 자리잡고있는 봉황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죽계천이다. 이 두 하천이 만나는 곳이 영주 바로 북부이고 여기에서 영주 서천이 된다. 서천은 무섬까지 흘러내리다가, 봉화에서 흘러내리는 내성천과 합수하여 내성천이 되고, 이 강이 문경까지 흐르다가, 동쪽 안동에서 흘러내리던 낙동강과 합수하여, 남행의 방향을 잡아 흘러내린다.
무섬은 그러니까 내성천 가운데로 돌출된 지역이고, 하회마을는 낙동강 줄기 속으로 돌출된 지역이다.
황혼이 비낀 내성천 변에 그림 처럼 서있는 무섬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반남박씨 집성촌이다.
무섬은 과연 하회 마을에 못지 않은 절경이었다.
이 마을에 타계한 동탁 조지훈 시인의 처가가 있었다. 아름다운 기와집이었다. 동탁은 몰하였지만, 부인은 생존하여 서울에서 사시면서 가끔 무섬을 찾는다고 한다.
나는 가슴에 이는 감격을 느꼈다. 역시 인간에게는 고향이라는 절대적 평화와 회고의 감정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강변에 아름다운 카페가 있어서 그곳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멀리 안동과 예천에서까지 문인들이 오셨다. 카페 주변에는 무수한 승용차들이 정차해 있어서 우리는 어느듯 선진국으로 변한 조국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당도하니 다들 자리에서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이분들의 따뜻한 환영에 크게 놀랐다.
출판기념회는 약 한 시간 반 가량 계속되었다. 나는 제일 먼저 소개되어 인사말을 하였다. 다들 문예지에 실린 자신의 시를 낭송하였다. 서울 문인회에서 한 두번 뵌 적이 있었던 분들도 있어서 조금도 분위기는 어색하지 않았다.
문인들은 나의 집사람의 영주와 안동과의 관계를 듣고서는 환호하였고 환영하였다.
공식적인 기념회가 끝나고 여흥으로 들어갔는데, 키타를 치는 분들도 있었고 흥겨워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18번인 "고향의 노래"를 불렀다.
무섬이 어둠 속에 잠기기 전에 섬을 한번 더 보기 위해 천경배 신부(시인)과 함께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천 신부는 성공회 신부로서 고향을 지키며 환경운동을 하시는 시인이다.
문학과 친교를 마음껏 즐긴 우리들은 이별의 아쉬움을 남긴 채 헤어졌다.
영주 시내에 잡아놓은 호텔로 박 국장이 우리를 인도하였다.
고요와 정일이 한껏 깃든 소백산 하의 고향 영주에서 오래간만에 하룻밤 잠들었다. 아버님이 부석 지서 주임을 하시고, 일원산에 웅거하던 빨치산들과 죽고 죽이는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셨던 영주땅, 그곳에서 이렇게 하룻밤을 지새는 나는 잠이 잘 올 턱이 없었다. 온밤 몸을 뒤채며 깊은 사색으로 시간을 떼웠다.
이튿날 일요일 아침에 한국작가회의 이사를 하시고 있는 권석창 선생이 전화를 했다.
콩나물 국으로 해장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권석창 시인은 만해와 이육사 등 일제점령기와 해방기의 저항시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으신 석학이고 얼려져 있는 시인이다.
박승민 시인도 동석하였다.
고향의 콩나물국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박승민 시인의 차를 타고, 곧바로 옛 처가의 세거지였던 오록으로 향했다.
장마권이었으나 오늘은 햇살이 찬란했다.
영주 봉화 지역이 산악지대라 밝은 햇살 아래 유리처럼 투명한 산공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오록리로 가는 길이 나의 고향인 봉화를 지나가는 길이다.
그래서 봉화읍(내성)을 지나, 봉화의 명소인 <닭실> 마을에서 잠시 차를 내렸다. 닭실 마을은 이 봉화사람들의 자랑인 충재 권벌 선생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안동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봉화에는 충재 권벌이 있고, 영주에는 문성공 안향과 삼봉 정도전이 있다고 한다.
이런 봉화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봉화군청에서는 충재의 세거지였던 닭실 마을을 대대적으로 보수 육성하여 조선시대 선비마을의 전형을 만들어 놓았다.
충재 권벌은, 중종 때 사람으로 봉화 사람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참판까지 올랐으나 기묘사화에 관련되어 파직되어 낙향하여 여기 봉화 닭실마을에서 십년 이상 칩거하였으며, 복직되면서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권력자인 소윤에 반대하고 전왕파인 대윤에 기울어진 충정을 표하다가(을사사화) 제거되어 삭주에 귀양가서 죽은 인물이다. 우직하고 충직한 전형적인 조선의 유신이다.
학문에 있어서 퇴계에 견줄 수는 없으나, 그 사직에 받치는 충절 만큼은 조선 역사 500년에 독보적인 존재이다.
봉화사람들은, 충재의 학문이 퇴계에 이르지 못함을 아쉽게 여겨
"충재는 예조 판서를 했지만, 퇴계는 홍문과 교리(홍문관 정5품)밖에 못했잖여..."
한다. 하기야 대 학자인 퇴계가 벼슬을 탐했을 리 없기는 하다. 그는 대사성 제의를 거절하기도 했고, 그나마 주로 외직으로 돌아 풍기 군수를 하기도 했다.
닭실 마을을 돌아보고, 기대하는 오록리로 차를 몰았다.
소백산맥 산간으로 난 도로가 2차선이었지만 너무나 잘 닦여 있어서 신기할 정도였다. 우리나라가 이정도인가.
내가 프랑스에 유학을 처음갔을 때(1970 년대) 시골길 어느 곳이건 포장이 되어 있는 것에 놀라 정말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신기해 했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차는 쉽게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에 도착했다.
동네의 입구에서 촌노 한분을 만나, 장인 어른의 이름을 대고 그 분이 살던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인 어른께서 네 살 때 아버지 따라 서울로 이향하시었고, 60년 동안 서울에서 사시다가 33년 전에 돌아가겼기 때문이다. 그러니 장인 어른께서 이곳 오록리를 떠난 것은 약 백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나와 집사람은 처조부의 이름을 대어 보기로 했다. 우리는 서울 처가로 전화하여, 장모님에게 처조부의 이름을 물었다. 김 자, 시 자, 락 자, 석자였다. 김시락 노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과연 이 마을에 남아 있을까.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헤아릴 길 없는 세월의 거대한 존재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그것 앞에서는 만사가 무로 돌아가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조선시대 선비마을의 특징인 웅장한 기와집들이 한 4,50 여채 기품있게 들어선 마을이 바로 풍산김씨 집성촌인 오록 마을이었다.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김화영 교수가 바로 여기 오록 마을 출신이다.
우리는 김시락 어른의 이름을 대면서 아시는 분 있느냐고 골목마다 돌아다니면서 물어댔다.
사람들은 누구를 찾아가보라는 등 성의를 보였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추천하였다. 김사건 씨와 김성재씨였다.
김사건 씨의 조부가 김시락이었으나, 동명이인 이었다.
그러나 김사건 씨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동명이인이었던 우리의 조부 김시락 씨를 자신의 조부와 동명이었다는 이유로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달려온 김성재씨는 족보를 들고 왔는데, 그는 김사건 씨의 조부가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조부이신 김시락 씨의 존재를 족보에서 본 적이 있었다고 하여, 족보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몇번이나 족보를 뒤집어업고, 바로 뒤적이고 하여 드디어 처조부 김시락 어른의 함자를 찾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김시락 어른의 형님은 김용락 어른이었고, 시락 어른은 자신의 작은 아버지에게 양자가 되어갔으며, 안동 진성이씨를 처로 맞이하였고, 슬하에 7남매를 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집사람은 이 김시락 조부님의 부인,즉 자신의 할머니가 자신들의 서울 주교둉 집에서 여든 넘어서까지 같이 살았다는 이야기를 가끔하곤 하였다. 바로 그분이 여기 족보상의 진성이씨였다.
그러니까, 이 7남매 중에 나의 장인어른과 생존해 계시는 전술의 처고모 한분만이 살아 계시는 것이다.
나의 장인 어른은 역시 안동 진성이씨(퇴계 집안)의 처자(나의 장모, 생존)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사실이 족보에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이 처자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한국 족보의 관행이다.나는 즉시 처가의 큰처남에게 전화하여 이 사실을 확인하였다.
처가쪽 혈족들의 계보가 소상히 밝혀진 것이다.
우리 나라의 일반적인 풍습으로 보아, 일제시나 해방 후 혼란스런 정국에서 전가족이 서울이나 대도시로 솔가해가서 8,90년의 세월이 흐르는 경우, 사실 본 고향과의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의 처가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내 처가의 족보를 밝혀준 마을의 두 어른들은 우리를 마을 회관으로 인도하였다. 기와집으로 잘 지은 회관은 정말 멋졌다.
이런 소백산맥 첩첩산골에 이런 훌륭한 기와집들로 성동된 마을이 있고, 그 마을 한가운데 이렇게 멋진 시설의 마을회관이 있을 수 있을까, 정말 세상 돌아가는 것을 나는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세상은 너무나 달라지고 있으며, 나를 어떤 알 수 없는 망각의 영역으로 내몰아내고 있었다.
어느틈엔가 할머니 네분이 오셔서, 커피를 끓여내고 수박을 빚어 내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점심상을 차리려고 했다.
나는 귀경길이 바빠, 점심상을 극구 사양하고, 오록리 마을을 떠났다. 회관을 떠나면서 나는 봉화 장터에 가시면 자장면 사 자시라고 한분 한분에게 만원씩을 드렸다. 다들 감사했다.
다들 맹수댁을 만나고 가라고 했다. 맹수 댁이라는 분은, 나의 장모님과 서울에서 만나 알고 지내던 여기 오록 할머니이다.전 가족이 전부 다 사망하고 댁만 살아 있는데, 일요일이라 봉화 성당에 갔다는 것이다. 이분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우리는 갈 길을 재촉했다.
이 할머니 댁도 나의 처가와 마찬가지로 서울로 솔거하여 청계천 4가 나의 처가 근처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침 비행기추락사고가 생겨, 추락한 비행기 기체가 이집에 떨어져 전가족이 몰사하고 이 댁만 살아났다. 그후 이 할머니만 오록리로 귀향하여 혼자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정말 가슴 저미는 인생살이들이다.
미국에 유학중인 아들놈이 서른 세 살인 것을 보니, 집사람과 결혼한 것이 벌써 33년 전인가보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나는 그 사이 직장을 정년하였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궁금하였던 처가 쪽 혈족들의 그간의 이산과 집산의 경위를 본명히 밝혀낸 것이다.
그 풍산 김씨 족보에는 내 처는 올라가 있지 않았다. 그나마 장인어른까지만 올라가 있었다. 그 사이 연락이 두절되어 자손들의 상황이 기재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렴풋한 소문은 퍼져 시락 어른의 손녀가 무슨 박사가 되고 대학교수가 되었다더라 하는 사실을 언급하는 사람이 있었다. 김사건씨였다. 그러면서 집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었다. 집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 사람은 친정아버님이 태어난 마을에 온 탓이었을까 얼굴이 한껏 상기되어 가지고 간 명함을 한장씩 드렸다.
백년 가까운 세월 전에 이 마을을 떠나간 사람의 손녀가 60이 넘은 할머니가 되어 나타났으니, 그분들이나 우리들이나 뭔가 홀린 듯 가슴에 이는 감동과 감격을 가눌 수 없었다.
나는 내 장인 어른에 대한 좋은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그분이 꼭 나의 장인어른이기만 한 이유는 아니다. 나는 내 혼사말이 오갈 때, 집 사람과 나는 전남대학교에서 총각 처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거대 지방 국립대학인 전남대학이지만, 처녀 총각은 몇명되지 않아 서로들 존재를 알고 있었다. 우연히 우리는 우리들의 고향이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부쩍 가까와졌다.
당시만 하더라도 88고속도로가 없어서 광주에서 대구를 가려면 대전에 와서 경부선을 갈아타야만 했다. 내 전공이 불문학으로 대학교수로 취직하기는 그야말로 어려웠다. 마침 전남대학교 사대에 불문학과가 생겨 지도교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아주 어렵게 나는 대학교수가 될 수 있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연세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아내는 시간강사로 고생하다가 지도교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전남대학교에서 교수의 자리를 제의받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나는 대학교수로 턱걸이 했지만 너무나 가난하였다. 가진 것이라고는 물들인 군복 한벌과 이부 자리 한채, 그리고 먼지 낀 책상자뿐이었다. 맏딸을 잘 키워 경기여중고와 연세대까지 시키고 대학교수까지 만든 처가에서는 맏딸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딸이 사귀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청년은 말만 대학교수일 뿐, 8남매의 장남에, 돈 한푼 없는 거지꼴이었다. 서울에는 연고지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정말 봉화 촌놈 뜨내기였던 것이다.
당시 처가는 을지로 4가 주교동에 반듯한 집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로서는 부유층임을 증명하는 증거이던 전화마저 가설되어 있는 서울 중류의 집안이었다.
드센 처가 사람들은 다들 나를 반대하고 나섰다. 장모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처고모는 막무가내였다.
경상도 가풍에서는 고모란 사람의 세력이 이외로 거센 편이다. 고모가 한번 나서서 소리치면 전부 머리 엎드리고 복종하는 도리밖에 없다. 갑영이를 키운 사람이 누군데, 저런 거지같은 녀석에게 내어놓을 것같으냐고 통곡까지 했다. 의사 판검사가 도라꾸로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퍽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세상인심이 그러니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장인 어른만이 소성이가 지금은 볼 것이 없지만, 대학의 현직교수이고 사람이 똑똑하고 성실해 보인다며 주변의 반대를 물리쳤다.
결혼 후, 모교(서울대) 박사과정에 다니던 나는, 광주 전남대학교에서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상경하면 밤 12시 경이었다.
광주 서울간에 뻐스로 근 일곱 여덜시간이 걸리던 시절이었다.
나는 처가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처가집이지만 고히 잠든 집으로 밥 12시가 넘어 찾아들기는 정말 미안했다.
그러나 장인 어른만이, 자네가 내 사위인 이상 밤 12시가 문제인가, 밤 2시든 3시든 서울에 오면 당연히 처가에 와서 자고 먹어야지, 여관이라니...하시면서 잠드신 장모를 깨워 밤참을 지으시게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영주사람, 봉화사람,안동사람의 모습이다. 아니 조선 사람의 참 모습이 이러하다.
경상도풍습으로는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당시 서울사람들의 풍습으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일상의 감각이다.
오늘 오록리를 찾는 나의 발길의 의미와 내 마음의 향방을 아는지 집 사람은 줄곳 상기된 표정이었다.
광주에서 처음으로 집을 장만했을 때, 장인어른께서 내려오셔서 신기하신 듯 몇달을 묵으시면서 집안일을 돌봐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분의 뿌리를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 오늘 찾아서 캐어본 것은 내가 가슴 속에 오래 전에 간직되었던 영상이었다. 그것을 오늘 드디어 실천에 옮겨본 것이다.
오록리를 떠난 우리들은, 부석사에 잠시 들렀다.
의상대사를 호위하기 위해 폭풍우 치는 서해 바다를 따라서 건너온 선묘라는 처녀가 바위로 변한 것이 정전인 무량수전 서편에 있는 거대바위 즉 부석이다.
부석사를 떠나, 부석 읍내로 들어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유년의 추억이 서린 옛 부석지서 유지를 찾았다. 한 7,8년 전에 노모와 장모님을 모시고 왔을 때에는, 구 지서의 유지가 잡초 속에 버려져 있었으나, 오늘 와서 보니, 면소가 들어서 있었고, 보건소 건물도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7,8년 전 방문 때에는 노쳤던, 바로 내 유년시절의 지서건물과 지서장 사택의 건물을 발견하였다. 거대한 면소 건물 옆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일제식 건물이 있어서 무엇이냐고 면소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바로 일제시부터 6.25까지 있었던 지서건물이라는 것이었다. 면사무소 건물이 거창하게 들어선 뒷켠에 옛 일제식 건물을 허물지 않고 보관한 부석 사람들의 배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지서의 추억은 나의 졸작 장편 <바람의 여인>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영주로 돌아오는 길에 순흥에 들러, 소수서원을 둘러보았다. 소수서운은 들를 때만다 시설이 웅장해져갔다.
이번에는 서원 동편에 선비촌이라는 이름의 고풍스런 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자체가 발달하여 관광목적인 듯했다. 다만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영정이 남아 있는 것이나, 여기 풍기군수로 부인한 퇴계가 소수서원으로 개명하고 사액명판을 받아 건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영주 사람들은 퇴계가 소수서원에서 임금님의 사액사원명패를 받아 걸었으며, 너무도 감격하여 지금도 선명하게 바위에다가 <敬>를 썼다. 퇴계의 정신의 고향은 바로 여기 소수서원이라는 믿음을 영주사람들은 가지고 있다.
슨흥의 명물인 순흥 묵밥집에 들러, 어제와 오늘의 감동과 감격을 한잔 영주막걸리로 풀면서 점심을 들었다. 권석창 시인이 영주에서 순흥으로 와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이별의 잔을 기우리면 영주 문학의 발전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나는 삼봉 정도전이 영주 사람이니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작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조선을 정치적으로 건국한 사람이 이성계라면, 문화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국한 사람은 바로 삼봉이다.
다만 강력한 집권세력이던 이방원에게 밀려 비참하게 죽었을 뿐이다. 태종의 후손들이 계속 500년간 집권한 탓으로 삼봉은 복권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다. 영주 사람 삼봉의 위업을 선향하는 작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두분 권석창, 박승민 씨는 나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같았다.
권석창 박승민 두 시인과 헤어진 우리들은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장모님의 친정건물이나 한번 보자면서, 안동으로 기차로 내려와 안동민속촌 언덕바지에 새로이 이건된 <이필구의 집>을 방문하였다. 집 사람은 이집이 바로 자신의 외가라면서 묘하게 웃었다.음식을 팔기에 안동식혜를 시켜 먹었다. 오후 늦게 중앙선 기차를 타고 귀경하였다.
영주 무섬으로 들어가는 다리
영주 문인들과의 첫 만남
무섬의 한 양반 가옥에서
봉화 닭실의 안내판
중종조 예조판서를 지낸 지조의 선비 충재 권벌의 생가
처조부 김시락 어른이 살았던 처가의 원뿌리 영주 오록 마을의 마을회관 앞에서 안내를 맡았던 박승민 시인
오록 마을 입구에 있는 한 서당의 건물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부석사 입구 안양루 앞에서
부석사에서 내려다 본 절 앞 풍경,으른편 건물이 유명한 무량수전이다.
옛 부석 지서의 망루가 있던 구 유지 뒷편 야산의 모습,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이 야산의 정상까지 굴이 뚫여 있었다.
옛 부석지서의 유지에 남아 있는 단 한그루의 나무가 60년 전의 기억을 불러와 주었다. 뒷편 누런 색갈의 건물이 일제시부터의 지서건물이다.
조선조 최초의 사액서원이던 소수서원, 이퇴계가 처음으로 왕으로부터 받아서 걸었다고 한다.
이 퇴계가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전임이던 주세붕의 배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개명하고, 임금을 향한 뜻으로 경 자를 바위게 새겼다.
첫댓글 봉화, 오록, 반가운 지명에 댓글을 씁니다. 같은 기간, 저는 봉화군 해저리 저의 외가를 방문했습니다. 오록은 제 둘째 고모가 살고 계시는 곳이지만 아직 못가 보았습니다. 해저는 '바래미'라 불리우는 곳으로 의성김씨 일가가 사는 집성촌입니다. 7월17일은 바래미 생긴 이래 최대의 뜻깊은 행사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바래미 마을의 독립운동기념비와 바래미 의성김씨 개암공파의 시조인 개암(김우굉)의 한글시비, 입향조인 팔오헌 김성구의 명비, 3개의 비 제막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외증조부인 남호 김뢰식(거액의 군자금 제공)을 비롯 14분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해저'를 소개하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17일 오후 2시경 소생 일행은 닭실마을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자칫 조우할뻔 했습니다. 만났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집안에서도 바래미고모란 분이 있습니다. 자주 듣던 이름이라 반갑습니다. 기회가 되면 같이 오록을 재방문하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고혜령 씨! 먼 곳까지 여행도 다녀오시고..... 이젠 다리가 완쾌되었나 봅니다. 반갑습니다.